1987년에 나온 <위대한 작곡가들의 삶> 제 3 판을 내는 저자의 심경과 집필 의도를 서문에서 엿볼 수 있다. 내 마음에 쏙 드는 내용이 있었다.


“지금까지 이 책의 강조점은 제목 <위대한 작곡가들의 삶>의 ‘위대한‘에 찍혀 있었다. 위대한 작곡가들은 어떤 식으로든 음악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은 사람들이며, 인류 전체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서양인들의 의식을 변화시킨 인물들이다(음악이 ‘인류의 공용어‘라며 떠들어대는 정치가들을 절대로 믿지 말라. 사실이 아니다).
또 위대한 작곡가들 대부분은 생전에 그 위대함을 인정받은 이들이다. 물론 후멜이나 슈포어, 마이어베어처럼 그렇지 못한 예도 있다. 말러는 심지어 사후 두 세대가 지나고 나서야 음악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이들은 거의 모두 음악을 시작할 때부터 천재성을 인정받았고, 그 재능을 펼쳐 음악가로 성공했다. 이러한 과정은 다윈의 이론을 닮은 구석이 있다. 적자생존은 위대한 작곡가들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문구일지 모르겠다.” (서문 9-10)

“나는 위대한 작곡가들의 인간적인 측면을 살펴 그들이 어떻게 느끼고 생각했는지 독자들이 상상할 수 있도록 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접근법은 이 책의 초판이 나왔을 때나 지금이나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음악학자들은 사람보다 음악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음악 작품은 음악 자체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으며, 유일하게 타당한 설명은 음악의 구조적, 화성적 분석밖에 없다고 한다. 그 외의 것들은 실용성이 없는, 그저 감상적인 공연 프로그램용 정보라는 주장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음악을 작곡가라는 사람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음악이란 그의 정신이 작동한 결과이고, 그의 정신과 그가 살던 시대에 대한 반응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장 파울Jean Paul 같은 작가들에 대한 집착, ‘다비드 동맹Davidsbund’이라는 이름의 가상의 조직, 자신의 광기에 대한 두려움을 알지 못하고 어떻게 로베르트 슈만의 음악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렘브란트와 세잔, 피카소의 그림을 보면서 그들의 눈으로 세상과 그밖의 존재들을 경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베토벤과 브람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들으면서 그들의 귀와 정신으로 세상을 경험한다. 음악을 들으면서 우리는 작곡가들의 강렬한 ‘정신’과 접촉하게 되므로, 우리는 그들의 정신과 공명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공명의 정도가 클수록, 작곡가의 작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프랑스의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가 제자들이 작품 하나를 익힐 때 작곡가의 편지, 저서, 다른 사람이 쓴 그들의 일대기, 그밖에 배울 수 있는 모든 지식을 섭렵하도록 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학생들은 자신이 다루는 작품을 작곡가의 생애 전반과 관련지어 생각해야만 했다. 나 역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위대한 작곡가들의 일대기적 측면을 중요하게 부각시켰다. 20세기의 12음 기법과 음렬음악처럼 꼭 필요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분석과 전문용어를 최소화했다. 형태와 분석을 다루면 신비감을 조성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전문가들이 다른 전문가를 위한 책을 쓸 때 필요한 재료들이 아닐까? 일반 독자를 위한 책으로 보이는데도 어려운 악보들을 사례로 소개한 것을 보면 헛웃음이 나온다. 일부는 오케스트라 총보를 피아노 편곡한 사례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중에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조차 손사래를 칠만큼 어려운 곡들도 있다.” (서문 13-14)

“이 책을 몬테베르디로 시작하는 이유는 그전에 위대한 작곡가가 없어서가 아니다. 몬테베르디의 음악이 오늘날 연주되고있는 레퍼토리 중 가장 오래된 음악이어서이다. 초판은 바흐로 시작했다. 초판을 쓰던 1960년대 후반만 해도 몬테베르디의 작품을 연주하거나 녹음하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0년이 지나니 몬테베르디의 작품들이 서양의 모든 오페라극장에서 연주될 정도로 재조명을 받았다. 그러니 모를 일이다. 제4판이 나올 때는 팔레스트리나, 라소, 조스캥, 뒤페, 마쇼 같은 작곡가들이 세상에 알러져 그들의 이야기를 한두 장 더 쓰게 될지.” (서문 16)

“음악을 주제로 한 책에서는 언제나 철자 문제가 불거진다. 이 책의 정서법과 용어는 미국식 용례를 따랐다. 미국의 일부작가들은 내 문체가 ˝지나치게 미국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럼 내가 메소포타미아인인 줄 알았던가? 예컨대, 영국에서는12음계를 ‘twelve-note‘라고 쓰지만, 미국에서는 ‘twelve-tone‘으로 표기한다. 그 이유는 쇤베르크를 다룬 장에서 설명할 것이다. 미국식 용례의 경우, 베를리오즈의 이탈리아의 해럴드〉는 영어식인 ‘Harold in Italy‘로, 〈환상 교향곡>은 프랑스어식인 ‘Symphonie fantastique‘로 비일관적으로 표기한다. 나는 여태껏 전자를 프랑스어식으로 ‘Harold en Italie‘라고 쓴 것을 본 적이 없으며, 후자를 영어식으로 ‘Fantastic Symphony‘ 라고 부르는 것을 들어본 적도 없다. 설령 있다고 해도 극소수일 것이다. 그냥 다들 ‘Fantastique‘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이다. ˝아바도가 어젯밤 ‘Fantastique‘를 지휘했다는군.˝ (서문 17)


저자는 제4판을 준비하고 있지 않았을까. 저자가 2003년 죽음을 맞기 전에 다시 한 번 더 위대한 결실을 이루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서문을 읽고나서 그 자리에서 책을 구입하기로 결심하였었다. 약 일 년 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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