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모니쿠스
데이비드 매슨 외 지음, 김성균 옮김, 마스터칼리 삽화 / 우물이있는집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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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메피스토펠레스, 밀턴의 사탄, 루터의 ‘악마’, 마귀

그리고 솔로몬의 72악마


루터, 밀턴, 괴테, 이 세 이름이 나란히 놓이면 무척 신기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들 세 위인의 이름들이 연계되면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는 흥미로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왜냐면 세 위인은 저마다 악의 원리를 나름대로 표현했고,

그렇게 표현된 악의 세 가지 원리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세 위인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루터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저주받은 중대한 존재를 확신해

마지않은 굉장히 성실한 신심이다. 루터의 확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악을 산출하는 악한 존재는

실제로 현존한다. 둘째, 그런 존재는 인류의 공적이다.

셋째, 그런 존재의 특별한 목적은 루터의 생시에 루터의

운동을 저지하고, 이왕이면, "루터의 영혼에서 신의 은총을

박탈하는" 것이다.


세 위인은 두 가지 특징을 공유한다. 첫째, 그들은 악을

산출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저주받은 존재의 현존을 보도한

기독교 경전의 구절들을 근거로 삼았다. 둘째, 그들은 기독교

경전에 기록된 그런 존재를 묘사한 구절들을 다소라도

차용했다.


밀턴의 시심은 사탄을 서사시의 주인공으로 만들었고,

괴테의 시심은 메피스토펠레스를 극시의 등장인물로 

만들었다.


밀턴은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고결한 상상력을

발휘한다. 그는 서사시의 도처에서 사탄을 사물처럼 보이도록

표현하는 자신의 독창적 개념을 상기시키는 듯이 보인다.

밀턴은 자신의 서사시 전체에서 천사들은 단순한 사물들로나

현상들로 보이도록 묘사하는 개념뿐 아니라 그들을 육체적

행위자들로 보이도록 묘사하는 개념마저 똑같이 일관되게

고수한다.


밀턴이 상상한 사탄의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그 역사의

시초이다. 사탄이 대천사였을 때에 그 역사는 시작된다.

밀턴이 상상하기로, 우리의 세계가 창조되기 전부터

우리 인간들과 완전히 다른 숭고한 존재들의 무리가 이미

존재했다. 그들은 영혼들이었다.


이제부터 다짐하건대.

우리는 앞으로 결단코 선행하지 않겠으며,

우리를 내치신

그분의 숭고한 의지를 거역하는 존재로서

우리는 오직 영원한 악행만 즐기겠노라.


괴테의 메피스토펠레스는 6,000년간 나름대로 고투하고

흥망성쇠를 겪으며 변천하다가 새로운 직업을 얻은 사탄이다.

이 사탄은 6,000년 전의 사탄보다 더 왜소하고 더 변변찮고

더 비열하지만 백만 배나 더 교활하고 더 영악하다.


메피스토펠레스, 그가 대천사로서 지녔던 모든 것은,

마치 뜨겁고 황량한 사막을 여행한 듯이, 오래전에 증발해

버렸다. 그는 이제 메마르고 쪼그라들어 뒤틀린 냉소하는

악마이다.


탈옥하지 않으려는 마르가레테 때문에 괴로워하는 

파우스트에게 메피스토펠레스가 던지는 다음과 같은 

한마디보다 악마의 심성을 더 확실하게 예시할 수 있는 말이

과연 있을까?

"어서 오게! 어서! 자네가 그내와 함께 있겠다면 나만 가겠네."

이런 맥락에서 밀턴의 사탄과 괴테의 메피스토펠레스는 다음과

같이 비교될 수 있다. 사탄은 거대한 인물화이고, 메피스토펠레스는

세밀한 초상화이다. 사탄은 자신의 미래생활을 구상하는 타락

천사이고, 메피스토펠레스는 근대의 악마이다.


밀턴의 사탄과 괴테의 메피스토펠레스는 문예의 성과들이다.

그런 반면에 루터의 악마는 실제로 현존한다고- 어떤 관점에서는,

확실히 엄존한다고도- 그에게 인식되었다. 이렇듯 악마의 현존을

확신하는 루터의 강력한 신심은 그의 성격을 대변하는 특징이다.


루터의 마귀는, 대체로 루터가 부단히 애써 저항해야 했던 

간섭요소 -그의 내면에서 고조되는 정신적 공포심, 끓어오르는

격렬한 역심, 미약해지는 결심들, 그런 심정들에 휩싸인 그의

실수와 우유부단함과 질투, 그리고 그의 외부에서 그를 파멸

시키려고 울부짖는 세계 전체- 를 기독교 경전의 방식으로

의인화한 것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나는 악마가 모든 치명적 질환들과 중병들을 사람들에게

보냈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헌신적인 표정으로 경건하게 행동하면 악마조차

감미롭게 만들 수 있지.


고대세계의 역사에서 인간을 속박한 노예사슬을 끊으려던

시도는 두 번 결행되었다. 소크라테스가 최초로 결행했고

예수가 두 번째로 결행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투옥되었고,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렸다. 그들의 시대에 존재한 자유를

향한 증오심은 그토록 지독했다.


개인성의 영혼은 개인의 만족을 추구하고, 보편성의 영혼은

모든 역사를 단일하고 지고한 이념이나 목적의 계시과정으로

전망하면서 만족한다.



<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를 통해서 도서를 

'협찬' 받았습니다.


@sunestbooks

@chae_seong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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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의 철학 - 흔들리는 삶을 위한 16가지 인생의 자세
샤를 페팽 지음, 이주영 옮김 / 다산초당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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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삶을 위한 16가지 인생의 자세


살면서 겪게 되는 시련을 어떠한 태도로 받아들이냐에

따라 인생의 모습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시련이 만들어내는

효과도 다양하다. 시련은 포기하지 않는 의지를 만들기도

하고, 마음 편히 포기하게 도와주기도 한다. 하나의 길을

끝까지 갈 힘을 주거나 변화를 통해 도약하게 만들기도 한다.


실패의 경험은 우리의 삶,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 앞으로

마주할 성공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만일 우리가 본질 안에 갇혀 있지 않다면 그것은 실패

덕분이다. 시련을 통해서 새로운 발견을 하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장 폴 사르트르>


성공은 기분 좋은 일이지만 실패보다 가르침을 제대로 주지

못할 때가 많다. 실패를 경험해야 만만치 않은 현실의 벽

앞에서 무엇을 할지 스스로 질문하고, 문제를 모든 각도에서

살펴보기 때문이다. 한 단계 도약할 발판을 찾는 셈이다.


놀라움과 깨달음을 주는 것, 이론으로 한정 지을 수 없는 것이

실패다. 실패 그 자체가 삶을 정의하는 것이 아닐까?


"실수는 인간적이지만 이를 반복하는 것은 악하다."

실수를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이를 통해 무언가를 배우지

못하고 같은 결과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별하는 지혜도

넘어져 봐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생긴 지혜는

자연스럽게 성공으로 이어진다.


지혜의 반대말은 현실 거부다. 무언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이번에는 내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놓친다.


스토아학파의 지혜에 귀 기울이면 "현실이 불공평"하다며

투덜거리는 태도를 버릴 수 있다. 아우렐리우스는 장애물을

맞닥뜨리며 수없이 낙함했지만 그럼에도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운명은 공정하지도, 부당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목표 지향적인 의지는 오히려 장애물이다.


인간 정신이 가진 상상의 힘을 믿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서

중심 개념은 '계획'이다. 존재 한다는 것은 영원히 고정된

진리가 아니다. 미래를 향해 계속 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장벽에

부딪혀도 계획을 바꿔가면서 이정표를 세울 수 있다.


자신을 냉정하게 돌아보려면 좌절을 제대로 맞봐야 한다.

그래야 겸손을 배우고 자신을 날카로운 관점에서 평가해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


겸손은 가장 확실한 지혜의 증거다.

<찰스 캘럽 콜턴>


세상의 진리에 비해 자신이 가진 지식은 지극히 적기에,

겸허히 배우겠다는 자세로 가장 낮은 곳에 두는 태도다.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진정한 정치란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라고 했다. 새 시대를 열지 못하는 정치는 단순한

행정 업무에 불과하다.


루소는 인간의 특징으로 '완벽해질 가능성'을 꼽는다.

인간은 본능의 지배에서 자유롭기에 실수를 고쳐가면서

끝없이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결단은 과학이 아니라 예술의 영역"

이라고 주장했다. 결단은 분석적인 이성보다 직관에 

속한다는 의미다. 그렇다고 비합리적이는 의미는 아니다.


"행동을 시작하는 것이 실천의 비밀이다."

자신의 직관을 따르며 결단을 내리는 힘도, 대범하게

도전할 힘도 결국 행동력에서 나온다.


결정적 순간에 대범하게 행동하고 싶다면 반드시

경계해야 할 요소가 있다. 바로 지나친 완벽주의다.


성공하는 삶이란 질문하는 삶이다. 철학은 바로 질문하는

법을 알려준다.


알고 있는가? 나 자신은 항상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존재다.


기쁨은 항상 현실과 싸운다. 반면에 슬픔은 비현실과

끝없이 싸운다. 비현실과 싸우는 것이 불행이다.


<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를 통해서 도서를 

'협찬' 받았습니다.


@dasanbooks

@chae_seong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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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뇌르, 산책자 - 철학자들을 매혹한 길과 풍경
브루스 보 지음, 황재준.우석영 옮김 / 산현글방(산현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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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들을 매혹한 길과 풍경


'철학자의 길'이라 불리는 곳은 많다. 과거 프러시아의 

쾨니히스베르크에는 더 유명한 철학자의 길이 있었다.

임마누엘 칸트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5시 정각에 산책하기

시작해서 주부들이 그를 보고 세계를 맞추었다는 일화로

유명한 길이다.


나는 "생각하기"가 철학적 추론뿐만 아니라 감각 지각, 기억,

그리고 상상까지 포함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나는 이러한 정신적인 현상들을 연구하는 데 걷기를 활용해,

우리의 정신적 삶과 신체적 실존 사이의 관계 또한 이른바

"정신-신체 문제"를 살펴보려 한다.


나의 감각이 나의 지성보다 더 신뢰할 만한 현실의 안내자

이므로,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결론보다 걷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결론을 더 확신할 수 있다. 이 주장에

대해 데카르트는 내가 걷는다고 '생각'하는 것만 확실할

뿐 내가 걷는다고 꿈꾸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내 몸이

실제로 걷는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고 반박했다.


가상디에 따르면, 걷기가 신체의 비자발적인 감각 지각과

관련되는 한, 걷기는 데카르트처럼 방에 앉아 사색하는 것보다

자연의 진리를 찾는 데 더 믿을 만한 방법이다.


같은 길을 다시 걸으며 우리는 자연에 새겨진 경험(생각, 욕망,

상상)을 떠올리고, 과거의 흔적을 되살리고, 그곳에 살았던 

옛 사람들과 우리를 다시 연결하는 방식으로 그 장소에 얽혀

있는 옛 이야기를 되살린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정신은 모든 다른 역사적 시대와 지층이

동시에 존재하는 도시-"한번 존재한 것은 어느 것도 사라지지

않는 존재물"-와 유사하다. 정신적 삶에서 한번 형성된 것은

소멸하지 않으며, 모든것은 어떻게든 보존되고 적절한 상황을

만나면 다시 한번 자기 존재를 드러낸다.


살아 있는 현재에서 반짝이는 과거의 빛은 이미 과거와 현재,

죽음과 삶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있었고, 죽은 이들이 나라는

매개체를 통해 말할 수 있게 해주었다.


[실존주의적] 정신분석학의 원칙은, 인간은 집합체가 아니라

총체서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가장 사소하고 피상적인

행동에서도 자신을 총체적으로 표현한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취향, 독특한 버릇, 행동은 결국 전부 '드러나게' 된다.


보들레드처럼 사르트르는 "삶이라는 완고하고 무정형적인

우연성"에 반기를 들었다. <구토>의 거의 대부분은 우연성과

자연, 즉 계획이나 설계의 결과가 아니라 우발적으로 우연히

존재하는 것에 대한 사르트르의 혐오에 대한 사색이다.


질문을 던져본다. 나는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많은

철학자들에게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은 "자유의지"의

특징이다. 다르게 행동할 수 없었다면 그 사람은 그렇게

행동하거나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자유가 없었다는 것이고,

그 행동은 필요에 의해 좌우되었을 뿐이다.


보브아르에게 하이킹은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수단

이었다. 보부아르는 시골길 걷기를 즐겨했는데, 그녀에게

그것은 영혼의 탄산수이자 치료제였다. 보브아르는 처음에는

보행 시간을 5~6시간 정도로 제한했지만, 나중에는 

9~10시간을 걷기도 했고 때로 40km 이상을 걷기도 했다.


세계적 경험적 종합에서 핵심은 요소는 경험을 하나의

전체로 통일하는 초월적 상상력이라는 힘이다. 

초월적 상상력은(한 인간의) 감수성과 지식을 하나의 통일된

주체성으로 통합니다.


산책자는 낭만주의자들처럼 숲과 산비탈에서 고독을 추구하는

대신, 차이를 식별할 수 없는 수많은 도시 군중 속에 숨은,

관찰되지 않는 관찰자로서 고독을 찾는다.


"세속에서의 지위와 인정"은 키르케고르가 원하지 않던 

것들이었다. 그의 공적 페르소나는 위장이었다. 모든 이들에게

알려졌고, 축복의 날들이면 언제가 거리에서 보였던 산책자의

면모는 그의 익명성, 진정한 자기의 자아를 숨기는 그의 방식

이었다.


홀로, 두 발로 여행할 때보다 내가 더 많이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때보다 더 많이 존재하고, 살고, 만일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나 자신이었던 적은 없다.


루소 만큼이나 니체에게도 행복의 비결은 자연이 주는

자극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걷기가 그들의 사색에 준 

자율이었다. 고독한 보행자는 자족적이고, 자신이 선택한

속도로 자신이 좋아하는 곳으로 갈 수 있고, 자유롭게 시를

쓰고 상상하고 지각할 수 있다. 즉, 그는 자유롭게 '몽상'에

참여할 수 있다.


"우리의 대도시에 부족한 것은 조용하고 광활한, 성찰을 위한

장소"라고, "잠시 물러남, 명상의 장엄함을 위한 장소"라고

니체는 썼다.


니체에게 자기 극복은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인간"이

만물의 "영원회귀"를 의지할 수 있는 초인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를 통해서 도서를 

'협찬' 받았습니다.


@wisdom.shel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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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풀리는 사람은 어떻게 일하는가
나가마쓰 시게히사 지음, 신희원 옮김 / 시그니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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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거부 스승이 알려준 일과 인생에 대한 해답


세상에 떠도는 '꿈 신화'에서 당신을 해방하는 것.

이 책을 쓴 목적은 단지 이것뿐이다.


지금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모르겠단 거지? 그러면 지금부터

뭐든 될 수 있다는 말 아닌가! 축하하네!

사실 말일세, 꿈이 없어도 쉽게 성공할 수 있다네.

아니, 없는 편이 오히려 더 크게 성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물론 먼 미래의 꿈이라든지 비전을 가지느 것도 즐거운 

일이야, 하지만 그것보다는 일에서 중요한 건 '지금, 여기,

눈앞'일세. 인간의 뇌는 하나밖에 집중할 수 없게 되어

있기도 하고 말이야.


인간이 근원적으로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것, 그건 바로

의미일세. '왜 그것을 하는가?' 인간은 이 질문에 대해 모두

무의식적으로 의미를 추구하고 있어.


모티베이션의 정체, 그건 바로 '왜'라는 녀셕일세.

그것만 보이면 사람은 꿈이 있든지 없든지 알아서 앞을

향해 나아갈 것이고, 지금 눈앞에 있는 일에 의미가 보이면

바로 의욕이 생겨나지.


사람에게 마음을 쓰고 내 앞에 있는 사람을 기쁘게 만드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라네.


자신을 희생해서까지 일해서는 안 돼. 그렇게 극단적으로

일하면 절대로 계속할 수 없으니까 말일세.


다른 사람의 행복과 자기 행복은 앞면과 뒷면이야.

어느 쪽이 중요하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둘 다 중요하다네.

그러니 자기 자신을 희생해서는 안 된다고.


"사람에게는 여러 즐거움이 있겠지만, 그중에서 제일 큰 것은

자신의 성장이야." 하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 

일뿐만 아니라 취미나 공부, 어떤 분야에서든 즐거운 변화다.


중요한 것은 어느 회사에 들어갈지가 아니라 자네 스스로

왜 일하는지, 어떻게 일할지라네.


3개월 동안은 그 직장에서 자신이 낼 수 있는 모든 힘을

써서 일하는 거지. 그렇게 할 수 있으면 그 후의 일하는 

인생은 좋은 쪽으로 크게 방향이 바뀐다네.

'3개월의 법칙'을 알려주고 진짜로 3개월이 지나서 그만둔

사람은 거의 없어.


싫은 사람은 일단 변하지 않아. 바꾸려고 하면 반발해서

큰일이 생기지. 반대로 상대방에 맟줘서 좋아하려고 

노력하면 더 큰 일로 번진다네. 그런 사람에게 사랑받아봤자

계속 자신을 억누르며 살아가야 하는 지옥이 이어질 뿐이야.

'전력으로 도망쳐라'라고 말하고 있다네.


솔직하고 유연성이 있는 사람은 한계를 모르고 성장한다네.

일이란 '자기 주변 사람을 얼마나 활용할 수 있는가?'에

따라서 달라지는 법이거든.


사실 하고 싶은 일보다 '다른 사람이 '이걸 하면 잘될 거야'

하고 말해주는 일이 오히려 성공할 확률은 높아. 자기 자신을

제일 모르는 존재는 바로 나 자신이니까.


꿈이나 목표는 이루고 나면 끝나. 하지만 목적, 다시 말해

'왜'를 추구하는 데는 끝이 없지. 목적은 다음에 해야 할 일에

집중할 수 있게끔 만든다네.


꿈을 갖든, 점점 길이 열리는 쪽을 택하든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어느 쪽이든 의미를 두고

한발 한발 전진하다 보면 어느새 목표와 목적이 당신 앞에서

서로 이어지고 연결되는 날은 반드시 온다.



<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를 통해서 도서를 

'협찬' 받았습니다.


@mpsbooks_official

@chae_seong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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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주의자 선언 - 공적 슬픔과 타인의 발견
최태현 지음 / 디플롯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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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 슬픔과 타인의 발견


답도 없고 가능성만 있는, 그 가능성마저 충만한 것이

아니라 헐겁고 듬성듬성 존재할 뿐인 각자도생과 절망의

시대에 타인을 생각하는 사치를 시도해봅니다. 사치라는

표현은 진심입니다. 타인을 생각하는 존재가 가장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타심을 '나의 행복과 다른 사람의 행복이 겹치는

영역을 알아채고 신경 쓰는 마음'으로 정의 하고자 합니다.


이타심은 두 가지로 구성됩니다. 우선 둘이 공존 할 수 있는

영역을 인식하는 감수성입니다. 둘째는 그 겹치는 영역을

넓혀가는 노력입니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타인의 고통, 수전 손택>


상대와 나의 위상을 가늠하는 감정들의 반대편에는 어찌

보면 더 무서운 감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바로 상태의

존재에 신경을 쓰지 않는 무심함입니다. 그의 존재가 나에게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의키지 않는 것입니다. 이기심에는

타인과 나, 두 가지 선택지가 있기에 어째든 타인이 존재합니다.

무심함에는 처음부터 타인이 없습니다.


알베르트 카뮈에 의해 유명해진 말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단지 정상적(으로 보)이기 위해 엄청한 에너지를 쏟고 있음을

사람들은 모른다." 마음의 아픔에 대해 한번 인지하고 나면

사람들이 달리 보이고 비로소 그들의 행동이 이해되기 시작

합니다. 하지만 그 아픔을 포착했다고 하여 옆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이해란 타인의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일지 몰랐다.


거리에는 공간의 거리와 시간의 거리가 있습니다.

공간의 거리가 어느 한 순간에 인식되는 너와 나의 거리라면,

시간의 거리는 두 순간 사이의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격렬한

가까워짐에서 공간과 시간은 압축됩니다.


친구가 뭔지 알아? 너를 정말 잘 알지만, 그럼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지.


지루함이나 실망을 극복할 수 있는 세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 자신에게 찾을 수 있고, 다른 하나는 그와 나의

바깥에서 찾을 수 있고, 마지막 하나는 시간의 거리 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의란 그가 나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맞출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어빙고프먼이 인간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연극에 비유했듯이

매일의 만남과 소통은 사회적 공연입니다.


희생하지 마세요. 조직을 위해 희생할 필요 없어요. 자기가

지치면 결국 남에게도 해를 끼쳐요. 자기가 지치지 않을

만큼 희생하세요. 여러분이 먼저 행복해야 해요.


마음의 평화를 깨야 할 만큼 대단한 일은 없다.

<파울로 코엘료>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기심과 이타심의 갯벌을 마주하는

첫 번째 집단은 가족일 것입니다. 그곳에서 이기심과 

이타심의 경계는 모호한 정도가 아니라 미로나 다름없습니다.


자연은 무심하면서도 그 무심함을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는

타자입니다.


불완전한 것들이 사랑스러워지는 삶에는 인간미가 있다.

불완전한 것들은 아름답다. 완전함은 지향으로서 살아갈

힘을 주지만, 불완전함은 삶 그 자체다.


어느 쪽에 가까이 있는지가 중요한 만큼이나 어느쪽을

지향하고 있는지도 중요합니다. 전자는 현재이지만,

후자는 미래를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든 타인의 삶과 죽음 앞에서의

진정한 위로는, 패배를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니라 

잘 싸웠다고 말해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질문을 바꾸는 일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 중의

하나입니다.



@dplot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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