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방범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0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읽기 시작한지 얼마 채 되지 않았을 무렵 나는 다소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두꺼운 책이, 추리소설이란 이유로 가졌던, 의외로 빨리 읽혀질 것이란 예상이 틀렸기 때문이다. 두깨로 치면 물론 적잖이 시간이 걸리는 분량 임에도, 추리소설이니깐.. 하고 생각했던 편협한 사고의 충돌. 아뿔싸.. 책을 읽으면서 밝혀지지 않은 사실에 대한 추리를 하는 것은 그 서막에 불과했고, 그들의 심리를 추적하고 인간을 탐구하는대에 끊임없이 파고들어 질문을 던져야만 했다. 그들에게 묻는 질문은 곧 나에게 돌아왔다. 일련의 사건들, 혹은 나아가봤자 그 심리까지만 다다를 줄 알았던 내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가고, 대체 무엇이 인간이고, 무엇이 진실인가 하는 질문들이 그 형태를 조금씩 바꿔가며 엄습해왔다. 물론 이야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책은 드라마의 끝장면 같은, 극적인 요소들이 만개해 있으니깐. 나는 다만, 이 책이 말하는 것을 최대한 놓치지 않기 위해선, 서둘러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도쿄의 어느 공원의 쓰레기통에서 한 여자의 팔이 발견됨으로써 사건이 시작된다. 그 최초의 발견자는 우연히 공원을 산책하던 신이치와 히사미다. 더욱이 신이치는 그 전에 있었던 다른 일가족살해사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였던 것. 공원에서 여성의 팔이 발견되고, 뒤이어 마리코라는 여자의 핸드백이 발견된다. 그렇게 시작된 사건의 조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렵, 그 살인사건들의 범인으로 보이는 이들이 피해자의 주변인들과 매스컴에 접근해오기 시작한다. 마리코의 외할아버지인 요시오는 범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에게 조롱을 당하게 되고, 경찰이 그것을 추적하는 과정속에 피해자는 속속 더 밝혀지기 시작한다. 

일단, 이야기의 묘미는 역시 그 구성에 있다. 각각 두꺼운 책 3권 분량은, 그 일련의 사건들이 얼마나 방대한 이야기를 갖고 있을지 짐작케해준다. 우선은, 사건에 관련된 인물들을 최대한으로 담으려는 듯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생활을 만들어가고,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사건과의 개연성이 생성된다. 서로 떨어져있던 인물들, 즉 그들 개인의 사건들이, 점점 그 거리를 좁혀 한가지 이야기, 여성연쇄살인사건을 중심으로 모여드는 과정이 무척이나 섬세하고 흥미로운 것이다 굴러가는 눈덩이처럼 차곡차곡 꼼꼼하게, 낱개로 흩어진 실들이 결국 촘촘하게 짜여지듯이 사건의 진실로 향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작가가 열어놓은 길을 통해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과 더불어, 범인을 찾아 모든 사건이 종결된것 같은 이후에도 그 이면에 숨어있는 또 다른 진실을 찾는 과정에서 흥미를 잃지 않고 어떤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며 이야기에 몰입하게끔 하는 힘을 쥐어준다. 특히 그 과정이 마치 드라마와 같이 보여진다. 극적인 순간에 우리는 장소와 인물을 다르게 바라본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에둘러가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한 시간대를 두고 다양한 인물이 보여주는 다양한 시각들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얼마나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봐야지 비로소 진실 혹은 사실이라고 부를만한 것에 가까워 질 수 있는지 알려준다.   

 

 

구원도, 파괴도 본능에서 시작한다. 

범죄라는 측면으로 볼때, 인간의 본성에 관한 것을 논외로 둘 순 없다. 하지만 이 모방범에선 조금 독특하게 표현되기도 하는 데, 그 예가 바로 히로미나 피스에게 희생되는 인물들의 선택의 순간에서 발현되는 본능에 관한 것이다. 물론 그것은 단순히 사건이 진행되는 순간의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 일지도 모르고, 범죄자들이나 인간의 어두운 본성과는 논외의 본성이 될지도 모른다. 즉 위기에 대한 본능과 파괴에 대한 본능은 다른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피해자들이,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또한 그들이 그런 본능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신이치와 다른 피해자들의 공통점, 그것은 그들이 인간의 본능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갖고있는 생존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은 끊임없이 발현된다. 하지만 그것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이성적인 행동은 그저 순응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본능을 무시한 결과는 처참했다. 목숨과 바꿔야만 했다. 신이치의 경우도 물론 그 본능을 직접적으로 간과했다고는 할 수 없다. 들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부분이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 그것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국 신이치나 그녀들이나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결과적으로 본능을 간과한 것이 그들을 본능의 피해자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을 막아버린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보면 신이치의 부모,동생을 살해한 살해범의 역할또한 정립할 수 있게된다. 그들은 본능을 사용한 것이다. 메구미는 그것을 '피해'라고 이야기 했지만 그것은 어쩌면 틀리다. 본능은 곧 흉기가 되었고, 메구미의 아버지와 히로미, 피스는 그것을 이용한 가해자가 되는 것이고, 신이치와 그녀들은 그 본능이란 흉기의 피해자가 된 것이다.

  

 

절체절명의 진실을 둘러싼 사람들 

어쨌든 우리는, 인간에 대한 정의에 앞서 히로미와 피스를 추적하는 것에서 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추적하며 따라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정말 인간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히로미는 누나의 죽음을 통해 자신이 하나의 대체품으로 여겨졌다고 생각했다. 그의 엄마는 히로미가, 그 이전에 낳았던 딸 히로미의 자리를 쫓아낸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어린시절의 히로미를 학대했다.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히로미는 이전에 죽은 자신의 누나의 환영을 보게 된다. 하지만 진실은 다른곳에 있었다. 누나 히로미는 사실은 엄마에 의해 살해됬고, 그 두려움이 살아있는 히로미를 괴롭히게끔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히로미는 그 진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고, 자신이 마치 동명의 누나를 죽인것처럼 여겨졌다고 생각했다. 피스는 어떠한가. 자신의 어머니는 하나이지만, 아버지에 관해선 혼란스러웠다. 결국 친자감정에서 피스의 어머니가 사귀었던 다른 유부남의 아들이 아님이 밝혀졌지만, 그것을 피스가 알았을 것이란 확증은 없다. 하지만 알았던 아니던 그것은 중요한게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그것은 피스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을 것이니깐 말이다. 

으레 이런 히로미와 피스의 상태는 정체성의 혼란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작가는 여기에 다른 관점을 대입시킨것이라 생각된다. 바로 자신들의 존재가 진정한 '창조'인 것인가 하는 질문 말이다. 히로미는 먼저 죽은 동명의 누나 히로미를 대신한다고, 아니 그녀의 자리를 박차고 태어났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는 끝까지 누나를 앞서지 못했다. 그러니 히로미가 생각하기에 그 자신은 누나의 모방품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히로미는 자신의 그런 혼란을 갖지 않으면서도 항상 히로미를 앞서는 피스를 무의식중에 모방하고, 따랐는지도 모른다. 피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군가의 모방은 아닐지라도, 자신의 누구에 의해 창조되었는지에 대한 혼란은, 자신은 분명 누군가를, 혹은 그 무엇을 정확히 창조해내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부추겼을지 모른다. 결국 한 인간은, 그 이전세대, 그러니깐 자신을 탄생시킨 유전자부터 시작하는, 이미 탄생과 동시에 창조이면서 모방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렇게 범죄자의 유년과 그 근본을 분석하는 순간, 우리는 결국 우리의 역할을 다시한번 정의할 수 밖에 없다. 바로 '당사자'가 아닌 것을 체감하는 것이다. 범죄자의 유년기를 따지고 들어가면서, 범죄자를 만든것은 그 자신이 아니라 바로 이 사회이자 부모들 이란 것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냉정하고 논리적이라고 여겨질수도 있는 이런 사고야 말로 바로 우리가 제3자 인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다.

그리고 그 당사자와 당사자가 아닌 인물들로 인해서, '진실'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고 추구하느냐가 달라진다. 모든 진실을 알고있는 것은 그 범죄 당사자, 즉 히로미와 피스다. 그리고, 피해의 범위가 정해지는 순간, 그 진실을 정말로 궁금해하는 피해자들이 있다. 그것은 피해가 복구되는 것과 무관한, 분노로 점철된 궁금증인 것이다. 대체 왜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는지, 자신들을 책망함과 동시에 범죄자에게서 찾아가는 비극의 원인 말이다. 나아가 그런 진실을 정말 알아야만 하는 인물들은, 그 진실을 긍정하는 자와 부정하는 자로 나뉜다. 그리고 그 진실을 찾아내야만 하는 역할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바로 저널리스트와 경찰이다. 그들은 본연의 직업이 그런 의무를 갖는것과 동시에 한 인간이 갖는 호기심과 정의감이 있다. 물론 그것들은, 이들이 실제로 업무를 볼때와 아닐때를 구분해서 찾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대중들과, 이 책을 읽는 독자와 같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진실을 궁금해하는 많은 사람들..   

  

 

인정하자, 타인의 한계를

목숨을 잃은 희생자 만큼이나 희생된 사람들. 남겨졌다는 사실이 곧 그 희생인 사람들. 피의자의 신분이었던 오빠를 통해.. 아니, 마지막까지 아미가와의 덫에 걸려서 결국 무너저야만 했던 안타까운 유미코.. 가장 극적인 비극의 중심에 있던 가련한 그 남매를 제외시켜놓으면, 요시오와 신이치가 남는다. 그들은 같은 처지에 놓인 인물들이었다. 비록 사건의 유형은 다를지라도, 모든것을 잃어버린 인물들. 많은 이들이 결국은 그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을지언정, 결국 서로를 위로할 수 있었던건 다름아닌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한가지 예외를 남겨주었다면, 같은 처지가 아니더라도, 그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타인 이라면 초월할 수 있다는 것. 바로 신이치의 곁에 남게될 히사미의 존재이다.
 

미야베는 모든 피해자들을 다 다루지 않았다. 어쨌든 그것이 더 는 불필요하다고 느꼈기 떄문일 것이다. 궤변이겠지만, 어쩌면 그것은 작가가 우리에게 이야기 해주는, '전달자'를 통해 바라볼수 있는 지점의 한계를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우리 모두는 직접적으로 사실을 맞닥뜨리지 않는 이상 해석하거나, 혹은 해석하는 이들의 해석을 바라보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모방이 모방을 인정하지 않을 때

피스 즉, 아미가와를 끝내 무너뜨리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그를 모방범이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그를 쓰러뜨린 것은 그가 저지른 일련의 범죄에 대한 근거를 추궁하는 것이 아닌, 그가 연출한 연극을 모방품이라고 평가절하 하는 것이다. 히로미만큼 깊은 언급되진 않았지만, 저널리스트인 시게코가 그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밝혀진 바로 따지면, 그또한 혼란스러운 유년기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아버지에게도 자신을 인정받지 못했을 아미가와는, 그 자신이 곧 온전하게 누군가에 의해 창조된 존재라고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모방을 증오하고, 자신이 진정한 창조자가 되기를 원했던 것일까? 보통의 성장과정에서 아기들은 많은 것들을 따라한다. 얼마전에 뽀로로에 한식을 넣자는 의견만을 살펴봐도 우리는 그 모방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아미가와는 그 모방이란 것을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여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아미가와의 범행은 온전한 창조에 대한 열망이 파괴본능과 증오와 뒤섞여 만들어낸 결과물 일까? 

유년시절이 성인을 대변해주진 않는다. 행동의 근원중 하나로 여길 뿐이다. 어떤 뒤틀린 유년이라도, 그 후에 어떤 성장을 거치느냐에 따라서 좌우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모두 추적할 수 없고, 그 과정의 모든 감정도 알 수 없다. 다만 추측할 뿐이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 따라서 우리는 유년의 근거를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그의 행동을 이해하고 용인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한번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었다. 진정한 창조는 가능한가. 우리자체가 이미 유전자의 모방으로 시작된 창조물인데. 어쩌면 중요한것은 애써 우리가 창조의 근거를 만들려고 바둥대는 것이 아니라, 창조란 것이 이미 모방으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함께 인정하는 것 아닐까.  

대학시절 과 동기였던 형과 잠깐 나눴던 이야기가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다. 그 이야기는, 우리가 무엇을 만들거나 생각하는 것들이 이미, 어디선가 봤던 소설, 영화, 노래, 타인의 이야기가 뒤섞여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내가 스스로 창조해낸 것인지 혼란스럽다는 것이 었다. 그리고 경험이란 것도 개인에게는 특별해 보이지만, 수많은 인류를 통틀어보면, 구분지을 수 있는 사례가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우리는 으레 모방을 비난한다. 어쩌면 그것은 많은 창작자들이 자신의 '모방품이자 창작품'을 지키려는 의도에서 시작된것인지 모른다. 아니면 자신이 무의식중에 모방한 수많은 것들을 기억하지 않거나, 인정하지 않거나 말이다. 어설프게 베끼는 것은 훔쳐오는 것이 되고, 대놓고 베껴오는 것은 그것으로 하나의 또다른 작품이 된다고도 한다. 자신이 무엇을 모방했는지는 스스로도 모를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창작과 모방을 구분하는 잣대는 무엇일까. 그 기준이라함은, 모방했음에도 그 대상보다 뛰어나거나, 혹은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것들과 그저 모방에 머무르는 것인지 하는 것일까? 아니면 모방하는 것을 인지하며 만드는 것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의 차이일까? 어쨌든, 그 기준은 매우 모호하나, 한가지 확실한것은, 인간은 이미 태어나는 순간 창작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유전은 말할것도 없고, 숱하게 쏟아지는 정보를 인식하고, 그것을 개개인의 성향으로 바꾸는 것, 그것이 창작이라면 창작인 것이다. 아니, 그렇게 차용하는것에 머무는 것이 아닌, 녹아들어가게 하는 것이 창조이고 창작일 것이다. 그러니깐, 아미가와의 실수는, 모방 자체에 있지 않다. 그 모방을 인정하지 않는 데에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하나의 완벽한 창조물, 창작물로써 인정받고 싶은 것

왜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모방'으로 인정하지 못했을까. 아마도 유년시절에, '무조건적인 자기 존재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었기때문 아닐까. 평범한 가정에서 경험할 수 있는, 어떤 이유때문이 아닌 그저 존재함으로써 자신을 인정받는 과정을 겪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을 존재를 '그대로' 부모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었던 히로미와 아미가와 의 유년시절을 다시한번 생각하며, 진정한 창조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해본다. 그들은 으레 받을 수 있는, 그 존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간단하게 말하면, 그들은 '사랑하는 내 자식' 이라고 불릴만한 사랑을 받지 못했던 것.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인정받는 것을 알게되었을때 겪을 수 있는 좌절은 삶에서도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것은 곧,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 순간 가차없이 누군가의 관심에서 밀려나갈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유년시절에 그렇게 인정받지 못했던 그들의 뒤틀린 심성이 극단적인 형태의 '존재의 인정'으로 치닫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빛을 발해야 한다는 생각과 동시에, 그 빛을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인정'받는 것이 곧 존재를 '입증'하는 한 방편.. 혹은 가장 큰 방법이니깐 말이다. 종종, 자신이 행하는 것 자체로 만족을 하는 사람들을 발견한다. 나는 그들이 존경스럽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렇게 말로써 할수있는 자기 표현이 정말, 자신을 다 들여다본 것일까 하는 의구심을 갖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어떤 생물체와 아무 접촉도 하지 않는게 아니라면, 우리는 항상 인정받는, 인정받으려는 인생을 살고있다. 작건 크건간에. 누군가와, 무언가와 관계를 맺는 것, 그래서 소통하는 것, 그것자체로도 이미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가 인지하는 진실과 사실, 그 간극

누가 더 타인을 설득할 수 있느냐로 인해 '진실을 말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자'와 '아닌 자'로 나뉜다. 근거는 중요하지만 우리는 그 근거또한 진실이 아닐수도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진실은 고되다. 우리는 진정 진실을 찾는가. 근거를 하나하나 추적해나가서 결과를 도출하는가, 아니면 결과를 갖고 근거를 찾아가는가. 확신할 수 없다. 이미 믿는 상태서 그에 맞는 근거를 찾아가는 것 아닌가.  

누군가를 거치지 않고 진실을 찾아가는 것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우리는 어떤 현상과 직접대면해 본적이 없다. 그렇다면 이미 우리가 찾은 진실, 아니 사실또한 어딘가에서 완충되고 여가된 것 아니겠는가. 뉴스, 신문, 잡지등의 매체는 돈을 요구조건으로 우리대신 그 일을 해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를 인식하는 하나의 이론과 마찬가지로, 견해가 들어갈 수 밖에 없다.

드러난 사실을 토대로 진실을 추측하는 것은, 항상 '그때까지의..' 라는 수식이 붙는다. 진실을 원하는 주인공과 독자는 닮았다. 하지만 그 거리는 매우 불균질하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르포를 쓰는 기자와 같다. 잘 정리하고 보기 좋아야 하고 적당히 걸러야 한다. 


하지만 그 어느것도 쉽지 않다. 어쩌면 알고있는지도 모른다. 사실을 뒤집어 그 이면에 감춰진 진실을 무시하는 것은 우리가 믿고 살아왔던 사실을 모두 뒤엎어버려 자신에게 쏟아붓는 일이라는 것. 그래서 그것은 앞을 향해 달리는 우리의 다리를 붙잡고 전복시킬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것.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낸 세계가 전복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진실을 두려워 하는 것 아닐까. 우리도 어쩌면 처음에는 진실을 찾으려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결과는 대부분 참담했고, 과정은 고되고, 누군가가 대신해줌으로써 그 기능이 퇴화되고, 그것을 판단하고, 찾아가는 과정을 그만둔건지도 모르겠다. 


사실   

과 

진실 

은 어쩌면, 닮은 모습을 하면서도 같지 않다. 진실은 사실 너머 막연할만큼 먼 곳에 머무르는 지도 모른다. 

 


진실을 정의할 수 있는 진실이 있는가 

어쩌면 진실이란 것이 과연 있기는 한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진실이란 이미 산소와 만나는 그 순간부터 산화하기 시작하는 금속과 닮아있는 건 아닐까. 우리가 애써 감춰둔 진실을 발견하는 순간 그것은 녹이 슬고 변형되버리는 것 아닐까. 그래서 온전한 '진실'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닐까 하는 의구심.   

주위의 눈이란그런것이다. 진실이 자신에게 직접 닥쳐와 도망칠 수 없는 상황에 놓이지 않는 한, 인간은 그것과 직면할 수 없다. 자신에게 가장 편하고 안락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설득력을 지닌 해석을 '진실'로 채택하는 것뿐이다. (377) 

한번 양보해서 진실이 있다고 치자면, 진실은 찾는 것이 맞는가? 진실은 이미 누가 발견하든 그 발견자들에 의해 변형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보는 것은 온전한 진실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발견하는 것도, 발견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믿는대로 만들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진실' 이다. 진실의 정의가 그렇지 않더라도, 결국 인간에게 사전적인 '진실'은 이상에 불과한 것 아닌가? 마치 객관에 다가가려고 애쓰지만 결국은 근거있고, 인정받는 주관을 찾는것과 같이 말이다.  

그러니 난 '객관'이든 '진실'이든 어쩌면 어불성설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에게 그럴만큼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할 인내가 없을 뿐더러 대부분 그럴 동기나 필요또한 없기 때문이다. 진실을 모르는것 자체로는 비극이 되지 않는다. 물론 무관심과 게으름으로 비롯되어 거짓을 추구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손실이다. 그런 진실에 대한 무관심보다 더한 비극은, 어느선에서 탐구가 중단된 진실을 그 진실의 최종지라고 믿고, 또 퍼뜨리는 일이다. 
 

진실을 파고들다 보면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만큼 우리의 목을 조르고 산소를 빼앗아간다. 끝도 없이 바다 밑 심연으로 빠져들다 결국은 그 압력에 못견뎌 올라올 수 밖에 없는 것 이다. 그것은 각각의 한계치를 갖는다. 모두가 그 한계치까지 빠져들지도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진짜 진실에 목말라 있다. 어쩌면 한번도 그것을 본적 없으니깐. 항상 어느정도에서 멈춰야만 하니깐. 그래서 그 한계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니까.. 문제는 그 한계에서 마주친 진실이 대부분은 부정적 이라는 것 아닐까. 그럴 때 우리는 처음의 먹었던 마음, 우리가 그것을 들춰내기 전, 먼지가 우리 눈을 가리기 전에 그 마음을 다시 찾아야만 한다. 그 진심이 가장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어쩌면.. 그것이 진실과는 동떨어졌을 지라도, 우리는 그것으로 행복할 수 있다면 좋은 것은 아닐까..

   

 

우리가 두려워하는 본성

우리는 진심이라고 말을 하면서 과연 진심을 이야기 하는 것일까? 하다못해 진심으로 사과하며 자신의 사과도 마음편하기 위해서 일 것이라고 고백해도 또 그 뒤로는 그런 얘기까지 함으로써 오히려 자신에게 면죄부를 줬다고 안도하는 것 아닐까? 
작가는, 인물들의 독백이나 행동, 혹은 생각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인간의 진심, 본심을 되돌아본다. 가령 우리는, 어떤 자신의 과오에 대해서 자책하고 책망하지만, 사실 그 고백은 그것을 타인에게 부정받고, 위로받고 싶은 마음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서평을 쓰는 동안에도 그것을 발견한다. '나는 글을 참 못써요'라고 으레 하는 고백은 진정 그것을 인정함과 동시에 그것을 위로받고, 부정받고 싶은 욕망을 내포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보통은 그런 욕망을 발설하지 않는다.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야 말로 자신을 초라하게 하니깐..)

이런 일련의 과정은, 동정의 과정과도 닮아있다. 이 책에서 계속해서 등장했던 피해자들, 혹은 우리가 흔히 볼수 있는 '인간극장'과 같은 다큐멘터리에서 등장하는, 우리보다 조금 더 힘들거나, 특별하게 사는 사람들을 보며 갖는 우리의 연민, 동정 혹은 분노 또한 우리가 타인이기에 가질 수 있는 감정이며, 우리가 그들과 같은 상황에 처해있지 않다는 데서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지하던 인지하지 않던간에 과오를 범한다.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동정이 고결한 감정인 마냥 착각하거나 간섭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모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자신에게 이로울 지 모른다. 본성을 알게되고 자신에게 질문 던지는 것은 결국 더한 괴로움을 가져다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떤 순수의 목적에서 시작된 생각, 관심, 동정도 그 끝에는 결국 자신의 이로움을 위한 욕망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좀더 높은 고지에 올라간 사고는 그만큼 추락의 충격도 큰 것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다행이, 작가는 거기에 어떤 선을 그어준다. 이, 자신의 생각을 다시 파고들어가서 기어이 이기심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며 괴로워하는 신이치에게 요시오 할아버지는 어떤 구원과 같은 존재였다.

"저 저, 또 저러지.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사실은 이랬다, 그런 말은 이제 그만둬. 네가 그때 생각한 게 네 진심이야." (3-278) 

"너무 자기 자신을 분석하는 건 좋지 않아. 그런 행동은 절대로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아." (중략) "저 쓰레기통은 가득 차 있지? 하지만 철망으로 되어서 아래쪽에든것 까지 잘 보여. 안 보이는 게 보기 더 좋은데 말이지. 눈에 보인다고 해서 한번 버린 것을 꺼내서 사용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옛날에는 제 역할을 했다 해도 일단 쓰레기가 되어버리면 그걸로 끝이야. 굳이 끄집어낼 필요는 없지.(3-186) 

자신을 벼랑끝까지 내몰아서 그 '진심'이란 것을 파헤치는 것이 결국 어떤 것인지.. 연륜으로 이미 알고있는 요시오 할아버지의 말은 묵직했다. 그 시간만큼이나 자신을 돌아본 자만이 해줄 수 있는 조언이란 생각이 들었다.  
   

 

'진실' 너머 '진심' 으로

진심은 항상 그 생각의 끝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미 그 자체로 무결점인 진심을 우리는 의심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그 누구도 가르쳐 줄 수 없다. 오로지 자신이 판단하고, 자신이 책임질 뿐이다. 그것이 어떤 행동을 낳을지 까지도.

나아가, 진심은 홀로 빛을 낼 수 없다. 진정 그것을 온전하게 찾아내줄 수 있는 사람에게 발견되어야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하지 않는가. 자신의 진심을, 인간의 본성을, 진실을 찾는것만큼 중요한것은 타인의 진심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믿는것이다. 그 기준이 올바로 세워질때 우리가 누군가를 지탱해 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각각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온전히 발견하지 못한 히로미와 가즈아키, 유미코를 통해 그리고 반대로 그것을 온전히 찾아낼 수 있었던 그것을 믿을 수 있었던 시게코와 쇼지, 요시오와 신이치, 히사미를 통해 보여지지 않았는가.

진심과 진실은 어느형태도 띄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찾아내고 어떻게 믿어주느냐에 따라서 그 형태를 달리하는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니까, 진심이 진심을 찾아내고 믿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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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천왕기 세트 - 전6권
이우혁 지음 / 엘릭시르 / 2011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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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모르고 갖고있던 판타지에 대한 편견을 잠식시켜준 놀라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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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유토피아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2
박해천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아파트가 궁금했을 뿐이었다. 그저 부의 축적수단으로만 인식되어왔고, 언제부턴가 내가 사는 공간이자 많은 이들이 지금껏 살아왔던 공간이었고,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이 살아가게 될 아파트란 공간에 대해, 그간 품고있던 자그마한 호기심을 풀어줄 책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발견들이 쏟아졌다. 사려는 물건보다 더 값진 덤을 왕창 얻어온 기분이다. 물론 그간 인문학을 자주 접하지 않아서 한쪽으로 쏠림현상된 뇌에 쉽지만은 않았다. 그럼에도 다행이 맨 콘크리트에 헤딩하기는 아니더라. 콘크리트에게 영혼을 불어넣고 그의 이야기를 듣는동안, 그간 작은 틈 하나 없이 견고한 것 같았던 아파트가(실은 내가 아는 아파트들은 별로 그렇지는 않지만)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오래된 나무는 가끔은 말을 건네줄 것 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허나 아무리 귀 기울여도 아무말도 해주지 않는다. 그때 문득 귀를 닫고 눈을 감고 조용히 바람의 소리를 피부 끝으로 느낀다면, 어쩌면 해와 달과 별과 바람에 대해 조금 더 깊은 혜안을 가질 수 있지않을까? 난 그래본 적이 없다. 나무의 나이를 보는 법도 제대로 모르면서 이런 얘기를 하는것은 어불성설일지도 모르겠다. 이 맥락에서도 엉뚱하게, 콘크리트에게도 귀를 기울이고 모든 감각을 동원한다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당연히 이 책을 읽고서 문득 드는 생각이었다. 실제로, 콘크리트로 구성된 아파트란 존재에 생명을 심어넣어 그(아파트)가 하는 이야기를 전해주는 역할은 작가가 대신 해주었으니, 독자는 그저 읽어내려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작가는 '시선'으로 시작해서, '아파트'에게, '강남 1세대'에게, '꽃무늬'에게 숨을 불어 넣는다. 작가가 숨을 불어넣은 그순간, 그것들은 각각 고유한 정체성을 갖고, 활동하고,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결국 따지고보면 어쩔 수 없이) 작가가 쓴 글임에도, 나는 그것들을 개별적 존재로서 인식하며, 귀 기울였다. 쉽지 않았지만 좋은 만남이었다.

이 책은 픽션과 팩트 두가지 파트로 나뉘어져 있다. 여느때의 독서처럼, 처음부터 읽는다면 앞서 언급한, 무생물에 숨을 불어넣은 픽션 부분을 먼저 읽게 된다. 그리고 책의 서문에서 앞서 말한 픽션에 관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여태껏 묵언의 자리에 놓여 있던 행위자들에게 비판의 법정에 선 용의자가 아니라 자기 옹호의 모노드라마를 연기하는 배우의 역할을 맡김으로써, 아파트가 지닌 매혹적인 힘의 핵심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들이 1인칭 혹은 2인칭의 주어로 아파트와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빚어진 자신의 삶과 욕망에 대해 직접 말해준다면 그 발언의 내용들이 근접조우를 위한 우회로로 기능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결국 나는 각종 참고 문헌과 문학 작품을 동원해 '가짜 자서전' 혹은 '허구의 회고담'이라는 형식으로 글을 쓰기로 결정했다." (8)
 

아파트는, 작가를 편집자, 혹은 대변인으로 내세운다. 까놓고보니 아파트는 실로 할 말이 참 많은 개체였다. 우리는 지금껏 그것을 부의 증축과 투기의 대상으로만 바라왔으니깐 아파트도 할말은 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파트는 그것들을 포함해서 그 이상으로 털어놓을 담론거리들이 많았다. 팩션이자, 둘째 파트에 관해서는 아래와 같이 소개했다.


2부의 글은 역사적인 중요성을 지닌 아파트, 즉 마포아파트, 한강맨션, 강남의 아파트 단지 등을 서술의 대상으로 삼아, 신문, 잡지, 문헌 등 각종 자료들을 수집하고 분류하고 정리하는 방식으로 쓰였다." (7)


자랑으로 늘어놓을 얘기는 아니지만, 내게 있어 부족한 독서량중에서도 인문분야가 차지하는 비중은 꽤나 빈곤했다. 그래서 이 책이 손에 쥐어졌을 때 그 어느때보다도 두려움이 앞섰다. 그럼에도, 그 익숙치 않은 두려움은, 필연적인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초반엔 더디었지만 조금 익숙해지자, '못읽을 것도 없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얘기는, 내가 완벽한 이해를 했다는 것이 아닌, 내 나름대로의 이해를 하며 읽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그러니깐 아예 '내가 지금 한국어를 읽는 것일까' 란 의구심이 들정도는 아니었다는 것.  

초입부는 '시선'으로 시작한다. 아파트라면 차라리 나을텐데, '시선'이라니.. 그래서 조금 더 힘들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항공촬영으로 바라본 (지금은 볼 수 없는) 방파제를 연상케하는 기묘한 모습의 마포아파트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시선으로 시작해서 꽃무늬로 마무리 지어지는 모습은 흡사, 사람을 살펴보듯 찬찬히 먼 외부에서부터 깊은 내부로 들어가는 모양새처럼 느껴진다. '시선'부분을 읽으며, 어렴풋이 알게됐다. '한국의 아파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선, 근현대사를 어렴풋하게나마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아니 정확히는.. 근현대사를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을. 한국전쟁의 아픔과 고난이 아직은 모든이의 가슴에 크게 남아있었을 시절, 살아남은 이들은 좀더 잘 살기 위해서 고군분투 하고 그 중심에 당연히 군인이 존재하던 시절, 아파트는, 군부세력과 필연적으로 연관될 수 밖에 없던 것이다. (공병대대장이 마포아파트의 진두지휘를 했을 정도니 말이다.) 
 

 

1 마포아파트 철거 모습  2 Y자 형태의 마포아파트 모습  3 마포아파트의 야경(1970)
(출처 : 네이버캐스트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512)

 
위에 말했듯, 아파트란 존재가 시대적으로 군부독제시대에서부터 담겨있으니, 대체 왜, 어떻게 아파트가 여기까지 와야만 했는지 이야기하려면 당연히 근현대사를 이야기 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실로 상상 이상 이었다. 게다가 아파트에 고백과, 강남 1세대의 고백을 듣고 있노라면, 아파트란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이기때문에, 우리가 으레 아는 역사와 떼놓을 수 없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그렇게 아파트란 개체, 아파트란 공간은 역사속으로 들어온다. 아파트는 공간이 아니라 곧 그 격변의 시대에 말없이 우뚝 서있던 하나의 실체였고, 사건이었다. '한국'에서 아파트를 어떻게, 누가 만들기 시작했으며, 어떻게 변화시켰고,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또 그래서 그 아파트에 어떻게 영향받고 혹은 지배되어 왔는지 차례차례 풀어지기 시작했다. 말미엔 꽃무늬까지 대동하며 아파트와 동시다발적인 생활상의 변화와 사고의 변화, 시대의 변화까지 관통하게 된다. 한국 근현대사를 통해서 아파트를 바라보는 과정은 곧, 아파트를 통해서 한국 근현대사를 살펴보게 됨과 다르지 않았다.

조금 덧붙이자면 픽션부분은, 시선의 모험 -> 아파트의 자서전 -> 어느 강남 1세대의 회고담 -> 꽃무늬 이야기 로 구성된다. 얼핏 짐작할 수 있듯이, 숲에서부터 나무로, 잎으로 향하는 여정이다. (단, 그 과정에서 다루는 이야기의 연대기의 순서가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진 않는다.)  

[시선의 모험]에서는, 국가기록원에 있는, 마포아파트의 버드뷰 사진으로 시작한다. 한국의 아파트로 시작하는 것이 아닌, 그런 건축물의 근원에 대해, '시선'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주체를 통해 접근한다. 한국이 아닌 해외에서부터 시작된, '공간을 사이에 둔게 아닌 벽을 사이에 둔' 건물에 관한 이야기와 시선들은, 한국 최초의 아파트가 갖는 온갖 이야기와 시선으로 넘어온다.    

[아파트의 자서전]에서는 이제 바깥에서 머물던 시선이 아파트 내부로 들어오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주체는 전보다 조금 더 구체적이다. 아파트 스스로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내부와 거기에 들어앉아 사는 인간의 관계, 그리고 그 무생물과 생물의 밀고당기는 과정을 말한다. 그리고 아파트가 자신을 변론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이 책을 읽게된, 혹은 읽어야만 하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근거와 관련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그들은 내가 지닌 공간의 논리가 거주자들의 신체와 정신이 맺고 있는 관계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다. (중략) 그러니까 그들은 나를 둘러싼 상품화의 논리를 제도적으로 교정한다면, '나쁜' 아파트의 자리를 '착한' 아파트가 대신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여기에 그들이 패배를 반복하는 이유가 있다. 그들은 근본적인 잘못이 나와 이해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들의 탐욕에게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정말 그럴까? 오히려 나는 그들의 그런 오인 덕분에, 놀라울 정도로 참신한 권력의 원천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67) 

물론 이런 아파트의 주장은, 아파트를 바라보는 모든 독자를 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파트를 향한 보편적인 시선에 관한 항변이기도 하니, 이 책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함과 동시에 앞으로 풀어나갈 이야기들을 암시하는데는 아주 적절한 언급이었다고 생각된다. 

[어느 강남 1세대의 회고담]은 그 제목 그대로, 명민한 강남의 아파트 부자가 해줄듯한 이야기다. 사실 부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은 접하기 쉽지만, 이런, 당당하고 논리적인 부에 대한 변론은 찾기 힘든것이 사실이다. 그런면에서 보면, 이것이 우리가 너무 당연히 간과해버리는 '부를 가진 자들'의 입장인지, 혹은 저자의 시각인지 완벽히 파악할 수 없을지라도, 질투와 시기, 열등감이 앞선 논리로는 파악하기 힘든 부분들을 잘 풀어내고 있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발견으로 여길 수 있었다. 

[꽃무늬 이야기]는 그 주체의 선정이 가장 흥미로웠다. 밥통의 외관을 장식한 꽃무늬 이야기는 그 시대 디자인의 필연성, 그리고 발전성을 이야기하는것을 시작으로 아파트를 비롯한 사회적 기호와 생활 전반, 문화의 흐름에 관한 것들을 탐구한다. 


아파트란 개체는 놀랍도록, 그리고 상상 이상으로 한국사의 중심에서 시대와 사람, 그것을 둘러싼 모든것들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들 픽션또한 많은 문학작품과 사료들이 그 근거이고, 또 인용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문학작품으로 이야기한다면, 분명 그것들은 이야기 속의 공간을 언급한 것일진데, 여기서는 그게 역으로 공간속의 이야기로 탈바꿈한다. 그만큼, 정착해서 산다는 것은 곧 공간을 다루는 일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었을지도 모른다.


역사는 종종 사건의 인과관계로만 설명된다. 하지만 역사에 대한 흥미는 결국 그 역사적 사건을 일으킨 사람으로 향한다. 결국 한 사건을 파헤치더라 하더라도 그것은 곧 그 일련의 사건들과 관계맺은 사람으로 향하니깐 말이다. 그러니 근현대사를 둘러봤단 이야기또한 당연히 '사람 포함' 이다. 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나란히 흥미가 가고 또 언급되는 부분은, 아파트에 살고있거나 혹은 아파트에 살지 못하더라도 그 주거변화를 더불어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개인의 이야기들이다. 아파트가 생기고, 변화하는 과정만큼 사람또한 아파트를 힐난하다, 곁눈질하다, 들어가 살게되고, 적응하게되는 과정. 지금이야 별일도 아닐지 모르지만, 예전만해도 하나의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던 아파트란 공간에 적응하는 인물들의 적응과 변화의 모습은, 특별난 역사적 사건에 뒤지지않게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그때 그시절'을 아파트를 통해 들여다본 느낌이랄까.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보다 더 흥미로웠던 것은, 이렇게까지 연관성이 있을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군부독재 시절과의 인연, 정치와 체제, (의심할 여지 없이 경제와 관련된) 아파트의 존재였고, 나아가 사는 풍경을 바꾸는 것과 동시에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각광받기 시작하는, 즉 '어떻게 잘 적응해서 살아볼까' 하는 생각이 '어떻게 잘 사서 잘 팔아볼까'로 바뀌는 과정이었다.

처음에 인식했던, 부의 수단으로만 여겨지는 아파트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음은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왠지, 부의 수단으로 변모해온 아파트의 역할이 안타깝다. 픽션파트에서 '강남 1세대' 부분을 보면, 정말로 그 주체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아파트가 시작한 자기변호에서 이어진 강남 1시대의 고백은, 여태껏 그런 위치에 설 수 없었던 내가 그들을 좀더 들여다 볼 수 있는 동시에 그만큼, 그들과 나 모두가 나름의 이유로 안쓰러워졌다. 그리고 픽션 부분을 통틀어 전반적으로, 1인칭 시점을 따라가다 놓친건지, 혹은 드러내지 않은건지.. 나의 능력으로는 완벽히 읽어낼 수 없었던 작가의 시선은, 제발 '강남 1세대'의 고백은 아니길 바란다..(그냥 개인적인 바람이다) 어쨌든 다행이, 그런 일련의 감정들도 '꽃무늬'로 마무리되는 픽션을 통해 그 시절 부엌에서 나름의 제역할을 했을 전기밥솥과 보온통의 무늬를 통해 '정말' 아파트를 둘러싼 여러 가전제품과 가구, 소품의 변천사와 그와 어울어진 사람의 적응과 변화를 바라보며 우울감을 약간은 떨칠 수 있었다. 

 
픽션부분이 끝나고 등장하는 팩트부분은 앞의 부분에서 다루지 못한 사실에 대해 좀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좀 더 객관에 가까운 시선으로 이야기 한다. 잘 정리된 것들을 굳이 여기서 더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두번째 파트인 팩트부분의 초입부를 읽으면서는, 왜 팩트가 앞부분으로 나오질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었다. 나로서는, 당연히 팩트부분이 더 읽기 쉽기 때문이다. 보충하자면, 팩트를 간단히 읽고서 픽션을 읽는다면, 그 픽션을 이해하기가 좀 더 쉽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인 것이다. 흥미로 보자면 픽션보다는 조금 더 지난한 부분이 있지만 그정도면 충분히 감내할 수 있겠다 생각했다. 팩트를 먼저 읽었다면 픽션에서 주체가 되는 것들의 이야기를 좀 더 이해하기 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그래서 혹, 인문학에 익숙치 않은, 아니면 아파트의 역사와 그것과 관련된 한국사에 그간 완전 관심없던, 몰랐던 독자라면 팩트부터 읽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다. 혹 그러다 지루함이 느껴진다면, 어느선에서 그만두고 픽션을 읽으면 될 일이다. 물론 당연히 작가와 편집자의 오랜시간동안의 많은 수고를 거쳐나온 그 순서는 치밀한 계산이 있었을 것임이 두말할 것 없겠지만.. 둘째파트부터 읽는다고 해서, 결론부터 읽어내려가는 방식은 아니니, 슬쩍 통독을 조금 해보고 자신에게 맞겠다 싶은 부분부터 읽어보는 것도 나름의 방법이겠다.
 

얼마나 어려운 인문학책이, 얼마나 많은지는 잘 모른다. 다만 이 책으로만 보자면, 이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그리 어려운 책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하지만, 내 개인적인 '이해의 수준'에서 하는 얘기다.) 실은 지금 생각해보면 아파트란것이 한국을 구성하는 여러 모습과 얽혀있고, 복잡한 그 모습 그 자체라서, 기억나지 않는 부분도 있을뿐더러, 이야기의 중심을 제대로 읽지 못했던 부분도 분명 많을 것이다. 그래도 아예 콘크리트에 머리찧는 느낌까지는 아니니, 인문학에 두려움이 있다해도 한번은 읽어볼만 하겠다. 하기사 이것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 인문학서적이 아닌 역사, 사회학 서적일 가능성이 충분히 농후하니깐 말이다.

 
한권의 책을 통해, 내가 지금 앉아있는 높이만큼이나 켜켜이 쌓인 온갖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이루어진 '아파트'란 공간, 그리고 그것과 함께 존재했던 '시대'와 '사람'을 보았다. 지금 내가 앉아있는 이 콘크리트 구조물이 얼마나 많은 역사와 이야기를 담고 있었는지, 책 한권으로 (내 딱딱한 뇌조차도) 어렴풋하게나마 알아볼 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그 가치를 지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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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의 아이들 - 부모를 한국으로 떠나보낸 조선족 아이들 이야기 문학동네 청소년 8
박영희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요근래 북한과 조선족에 관한 영화와 책들을, 다른때보다 비교적 많이 접하게 됐다. 그 시작은 장률 감독의 두만강 이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로 짐작된다. 처음 그 두만강을 보았을 때의 주요화두는 탈북자를 비롯한 사람이었지만, 만주의 아이들을 읽으니 그 영화가 보여준 이야기의 범주가 넓어진다. 극중 주인공의 집은 엄마가 한국으로 돈벌러 나갔던 상황이었던 것.. 그때는 그런 설정에 대해 크게 인식하지 못했었지만.. 결국은 <만주의 아이들>을 통해 본 책뿐만 아니라 이전에 봤던 영화를 되새기며.. 하나의 작품에서 보지 못한 것들을 다른 작품을 통해 들여다보게 되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흔히, 재일동포, 재중동포 출신의 감독, 작가들의 작품들을 볼때면 모국에 대한 정체성이 입방아에 오르곤 한다. 정작 그것이 주제가 아닐지라도 한번쯤은 언급되며, 대체 무슨 답을 원하는지도 모를 질문들이 앞선다. 한때 축구선수 정대세의 상황을 보며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봤던 사람들도 더러는 있을 것이다. 자국에 대한 정체성의 문제는 정작 본질적인 문제보다는 그 시선자체의 모호함이 더 문제 된다고 생각한다. 으레 그런 고민은 어른들에게만 주어진 것처럼 생각되지만, 오히려 그 혼란은 어른이 되기까지의 아이들에게 더 크다. 그럼에도, <만주의 아이들>에서 취재한 아이들은, 국가의 정체성을 뒤로하고 가족이란 의미의 정체성을 찾는데도 너무나 벅찬 아이들이었다.(나는, 국가적 정체성을 고민하는 이들이 그럴 '여유'가 있기 때문이라라고 말하고 싶은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 너무나 당연해야 할 울타리를 벗어나 있는, 내쫓겨져 있는 조선족 아이들.. 늑대로 상징되는 유/무형의 수많은 위기에 노출된 아이들.. 그들을 보호해야할 부모들은, 자신들의 진짜 역할을 망각하고 있었다.  

이 책은 작가가 3년 전 김좌진 장군의 딸 산조의 족적을 따라가던 중 한 하숙집에서 한 달 가까이 지내는 동안 한국에 돈 벌러 나간 아버지를 둔 미혜의 이야기를 듣게된 것을 계기로 시작됐다고 한다. 그 후로 작가는 만주를 찾을 때마다 그런 남겨진 아이들만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결국 2010년 4월 16일 한국을 떠나, 중국 요녕성 심양으로 부터 시작해서 길림성 집안/통화/유하/매하구/용정/왕청 그리고 흑룡강성 하얼빈/해림/목단강을 거치며 아이들을 취재 했다고 한다. 작가 자신의 말대로, 그는 취재를 할 수록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독자들 또한 아주 할 이야기 많아질 것이다. 

기본적인 구조는 작가가 조선족 거주지역을 이동하면서 만나는 아이들을 인터뷰 하는 과정이라 주된 이야기들은 아이들의 이야기들이지만, 그 과정에서 학교의 선생님이나 조부모, 친인척, 혹은 한국에서 돌아온 부모 등의 인터뷰 또한 실려있다. 그들의 이야기들을 빌려 현재 4가구 중 1가구 정도가 이혼하는 조선족 사회의 현실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려고 노력한다. 

조선족 사회가 이렇게 된것을 살펴보면, 중국이 실용주의 노선을 표방하기 부터라고 한다. 덩샤오핑은 앞으로 살 길을 인민들스스로 꾀하라는 지침이었던 '각자도생'슬로건을 내걸었다. 그것은 소수민족이었던 조선족에게는 무척 힘든 현실이었다. 하지만 서울올림픽이 개최될 무렵에 조선족들의 '각자도생'에 물꼬가 터졌다. 그간 미국에 예속되어, 못사는 나라라고 일컬어졌던 남한의 눈부신 발전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92년 한중수교가 맺어짐에 따라서 '각자도생'의 문은 완전히 활짝 열린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그 '각자도생'이라는 것이, 총체적인 가족이 아닌, 구성원 각자에게, 심지어 아이들에게 까지도 '각자도생'의 길을 열어놨다는 것이다.

 

온기를 잃은 아이들

어른들에게, 그 각자도생의 길이란 다름아닌 한국에 나가서 돈을 벌어 오는 것이었다. 2년이었던 비자가 한중수교후에 5년까지 연장되면서 표면적으로는 그 길은 마치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로 보였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길은 곧 행복을 벗어나는 지름길 이었다. 멀리가지 않아도, 집안의 서기관과 인터뷰 하는 부분에서 그 폐단이 드러난다. 황무지를 개척하며 억척같이 살던 조선인, 굳건한 의지와 휘몰아치는 교육열로 타 소수민족에게 그 귀감이 되기도 했던 조선인들은 그 잘못된 각자도생의 길을 걸으면서 점차 쇠퇴하고 있었다. 집안의 학교들은 15년동안 24개의 학교가 문을 닫고, 전체 학생 70퍼센트의 학부모들이 한국으로 돈을 벌러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중 거의 절반은 이혼한 상태라고 한다. 

"생일날만이라도 엄마가 곁에 있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철마다 이 생각을 함다. 엄마가 끓여 준 미역국이 간절하게 그립단 말임다. (45)     

누구나 부모를 필요로 하지만, 어릴 때는 유독 더 그렇지 않은가. 그다지 즐겁지 않은 공부를 시작하며, 실제로 여러가지 의무를 하나하나 배워가는 시기. 경험이 부족하니 많은 것들이 두렵고, 유혹은 도처에 넘처나는데 그것을 이성적으로 구분할 재간이 없는 나이. 그.래.서 더욱 더 보호가 필요한 나이.. 누구도 부모란 존재를 대신 해줄 수 없는 시기. 유년기에는 그저 본능적으로, 좀 더 자라난 청소년기에는 혼란까지 받아들여줄 수 있는 부모가 필요한 시기.. 

 

엄마 곱니 아빠 곱니 누가 누가 더 곱니   

엄마 없던 하루 세 끼 비빔밥만 먹었구요  

아빠없던 날 밤새도록 도깨비 꿈만 꾸었대요 

엄마야 아빠야 우리 우리 함께 살자 

해도 있고 달도 있는 푸른 하늘집처럼 

(246) 


한국 바람이 불면서 3개월 동안이나 동북3성 노래방에서 1위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던 노래, <엄마 곱니 아빠 곱니>  
부모 기다리는 아이들이 제 입으로 말하지는 못하면서도, 몰래 눈물 흠치며 불렀을 노래... 그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엄마와 아빠와 함께 살길 바라는 아이들의 순박한 바람은.. 왜 이리도 힘든 이상이 되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무너지는 아이들  

"한 학생이 고백한 건데, 성적이 떨어지니까 부모와의 정마저 떨어지더랍니다. 기실학생들의 심정이 이러할진대 어찌 부모님 요구대로 사회에 나가 훌륭한 일꾼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거야말로 부모 생각 다르고 자녀 생각 다른 이율배반이 아닐까요. 두 대의 기차가 평행선을 향해 치닫고 있단 말입니다."  (중략) "앞으로 10년 뒤 우리 학생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가족에 대해 뭘 좀 알아야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는 거 아닌가요?" (82)  

우리가 수학공식과 과학원리를 배우기 전에, 체득하는 것은 사랑이다. 비록 어렸을적에 그 단어의 의미를 깨닫지는 못하더라도, 머리가 인지하기전에 마음이 먼저 인지하는 것.. 관심과 사랑. 그것들이 부재한 채로, 정말 필요할 때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하는 공부의 의미는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먼저 배웠어야 할, 인간에게 필요한 가장 큰 것을 배우지 못하고,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배워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위태로웠다. 공부에는 돈이 필요하지만, 돈 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더 좋은 학원, 더 좋은 과외를 해주면 우수한 학생이 될것이라는 부모들의 기대와 실제로 공부하는 학생의 괴리감은 이토록 큰 것이다. 생업에 바빠 자주 얼굴을 맞대고 얘기할 시간이 없는 것과 아예 함께 있어주지 못하는 것은 꽤 다른 일이 아니지 싶다.

"엄마는 있지만 진짜 엄마는 없슴다. (중략) " 나는 엄마처럼 아이 살 겁네다. 엄마가 따박따박 부쳐 오는 송금도 졸업만 하면 그만 받을 생각임다. 통화 한 번 없이 돈만 부치는 엄마, 진짜 엄마는 그렇지 않잖습네까. 진짜 우리 엄마라면 내가 아팠을 때, 내가 죽자고 했을 때 왜서 그런 맘을 품었더냐고 진심되게 물어봐 줘야 하는거 아입네까?" (중략) 영주는 이제 가족과 상관없이 자신만의 비상구를 찾으려 애쓰는 것 같았다. (119)

아이들은 같이 죽자는 얘기겠느가... 힘들어도, 아무리 힘들어도 같이 살아가보잔 것이다. 아이들이 바라는 것은 돈이 아니란 것을 부모들이 더 잘 아는 것 아닐까? 돈으로 공부하는 것은 가족의 사랑이 밑바탕이 되었을때 그나마 가능한 것이다. 혹 가족의 사랑이 있을지라도 자신에게 맞지 않는 공부가 힘들때도 있는 법인데.. 엄마처럼 살지 않을것이란 아이의 말이 얼마나 서글픈가. 부모들이, 자식들을 키우는 데에 가장 중하다고 생각해서, 혹은 어쩔수 없다고 생각해서 버는 돈, 그것을 아이가 고등학교 졸업하면 더이상 받지 않겠다는 말을 보며.. 우리는 그 아이에게 세상물정 모르는 아이라고 손가락질 할 수 있는 걸까?.. 이것은 아이들에게 돈이 얼마나만큼의 가치를 지니는지 단도직입적으로 잘 보여주는 예 였다. 물론 돈이 없는 아이들, 돈이 없어서 다른이들만큼 과외받지 못하고 문제집 살 돈 부족한 아이들도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불행하다고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그 아이들에게, 부모와 좋은 과외 둘 중에 선택하라고 하면 무슨 대답을 할지, 물어보지 않아도, 모두가 알지 않는가. 돈이 없이 공부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지만, 부모없이 공부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불행한 일인 것이다. 당사자인 아이들은 정확히 알고 있다. 다만, 어른들이 망각 할 뿐이다.  

자신들이, 힘든 삶에서 그때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돈을 벌어서가 아니라, 그만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란 것을.

 

"친구가 자신의 머리채를 쥐어뜯으면서 뭐란 줄 아세요? 한국은 지구촌에서 당장 사라져야 할 국가라고 했습니다." (264) 

이 아이가, 이 말을 내뱉기까지 얼마만큼의 고통을 받아왔을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어른이길 강요받는 아이들  

"저는 4년짼데예, 전화로만 담화를 해서리 인차 엄마 목소리만 들어도 척 알 수 있슴다. 우리 엄마가 지금 아픈지 아이 아픈지. "(106)

작고 여린 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아이들은 이미 정신적으로 어른에 가까워 있었다. 자신을 길러준 부모들의, 한 인간의 고통을 느끼는 것은 언젠가는 스스로 체득 할 일이다. 하지만 이 아이들의 시기는 아닐 것이다. 아이들은 고생과 고통의 의미마저 채 배우지 않은, 혹은 그냥 어렴풋하게 알아가야 할 나이인데, 벌써 너무나 많은 것들을 알아버리는 것.. 이것은 조기교육이 아니라, 시기상조한 교육이다.  

"아빠가 등을 돌리고 앉아 술을 마시는데 너무 가여워 보였어요. 중국에서 술 마실 땐 그러지 않았단 말예요. 고기 안주에 ,얼마나 당당하셨는데요." (209) 

생각이 깊은, 혹은 말을 똘똘하게 하고 배려심이 깊은 아이들을 보면, 어른들은 으레 '애어른', '애늙은이' 라는 말을 쓴다. 소싯적에 가끔 그런말을 들을 땐, 그게 마냥 칭찬인줄 알았고, 그래서 부끄러웠다. 하지만 언젠가, 그것은 칭찬뿐만아니라 안타까움을 수반한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어른이 되어서 해야 할 고민들은, 어른이 되어도 차고 넘친다. 헌데, 아이들에게까지.. 삶의 고단함을 미리 가르쳐 줄 필요가 있느냔 말이다. 돈을 벌어 올 능력이 없는 시기에 돈 걱정을 하는 아이들이 이젠 그리 대견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조금 안타까울 따름이다. 우리가 비로소 우리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을때, 그래야만 할때, 수많은 의무, 책임들과 싸워나가야 할 시간들은 반드시 온다. 하지만 그때 좀더 온전히 버티기 위해선, 혹은 그렇게 자신에게 강요하는 것들을 향해 적어도 억울하다고 말하지 않으려면.. 권리가 필요할 때 누릴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부모들의 고단함을 아는 것.. 그래도 대견하다. 기특하다. 이 아이들.. 그런데 꼭 그렇게 일찍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 걸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 일찍 배우게 되는 것이.. 온전한 가족안에서가 아닌.. 떨어진 가족에게서 느껴야 함은.. 달콤한 솜사탕을 들고있어야 할 아이들에게, 무거운 돌 덩이를 쥐어 주는 것과 뭐가 다르겠는가.  

"그리고 이건 저의 간절한 소망인데요, 두 분 모두 병나지 않았으면 좋겠고, 너무 아껴 쓰지만 말고 먹고 싶은 것 먹고 유희도 부려 가며 사셨으면 좋겠어요." (중략) "한국에도 지금 비가 올까요? 오늘처럼 비가 내리면 엄마 아빠가 더욱 보고 싶은 게 사실이에요. 수업도 엉망이 돼 버리고요." 과연 국단의 저 눈 속에는 어떤 강이 흐르고 있는 것일까? 그럴 수만 있다면 그 안으로 한번 들어가 보고 싶었다. 세상에 저런 울보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부모님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95)  

하지만, 그렇게 부모들을 생각한다고 해도, 그 아이들이 또 완벽한 어른인 것은 아니다. 그 흔한말로, 아이들은 아이들이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부모들이 얼마나 고단한지, 머리가 안다해도 가슴으로는 그들의 사랑을 원하는 것이다. 생의 아름다움 보다, 고단함을 먼저 배우는 것은, 앞서나가는 것이 아닌 부작용인 것이다. 힘들면 힘들다고 투정부릴 시기에, 그 대상이 부재한 아이들.. 그리고 그렇게 속으로 삭히는 것을 어른이라고 배워나갈 수 밖에 없는 아이들.. 그 삭힌 것들이.. 곧 마음에서 병을 만들것임이.. 그리고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음이.. 너무나 잘 증명되고 있었다.  

"어른들은 아무리 힘들고 슬픈 일이 생기더라도 그걸 가슴으로 삭일 이성을 갖고 있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철딱서니 없이 마구 떠들고 지지배배거리고..... 그런 아이들의 입이 닫히면서 가슴까지 꽉 막혀 버렸으니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럽겠습니까.(59)  
 

 

권리와 책임 사이, 그 경계가 허물어진 

"살다보면 누구라도 한두 번씩 실수를 한단 말임다. 하지만도 용서라는 말이 어데 하늘에서 뚝 떨어졌답네까. 나그네한테 지은 죄는 나중에 차차 용서받을 수 있짐나 자식한테 지은 죄는 절대 기렇지 않단 말임다."(167)   

부모들 중에 한명이 한국에 돈벌러 나간 것으로 인해 생기는 가장 큰 문제는, 아이들을 벼랑끝으로 내모는 가장 큰 비극은 부모의 이혼이었다. 그리고 그 비율은 이미 지금도 매우 클 뿐더러, 한국으로 나가는 부모들의 비율과 비례해서 꾸준히 높아질 것이다.  

"인간의 성을 도덕적 잣대로 재는 건 옳지 않다고 봐요. 다만 그 선택이 자신의 핏줄에게 해를 끼치거나 상처를 안겨 준다면 지탄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139)

대분의 사람은 어쨌건 자신의 이익이 가장 우선이다. 결혼도, 이혼도, 결국 자신을 가장 먼저 위한 일이지, 상대방을 위한 일인 경우는 거의 없다. 혼인과 이혼 그 자체에도 책임이 있지만, 진짜 '책임'이 짊어지는 것은 아이가 생기는 일일 것이다. 한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이, 그만큼의 책임을 수반한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있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그 일이 벌어질때의 반응은 또 사람마다 달라서, 누군가는 그 책임을 자신의 생에서 자신보다 높은 가치를 매기고, 누군가는 자신의 생에서 그 가치를 자신보다 낮게 매긴다. 어디에 기준을 두느냐에 따라서 어떤 이들은 거룩하게 보이거나 안타깝게 보이고, 어떤 이들은 지독한 이기주의로 보이거나, 현실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한국 남자가 미칠 듯이 좋아서 산 건 아닐끼다. 당장 벌어 먹고 살 일이 막막하이까네 등짝 기댈 곳이 급하지 않았겠나." (128)

살면서 배워가는 것중에 하나는, 자식 가진 부모들도 결국은 '사람'이란 것이다. 아이들을 위해서 하나 덜먹고, 하나 덜입고 하는 부모들도, 가끔은 그 부모라는 책임을 벗어나 한 남자, 한 여자란 것을 인정해 줘야 하는 것.. 그들도 한 개인이고, 인격체이기 때문에 감정이 먼저 앞설수도 있다는 것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부모란 이름은 그들을 또 다잡게 만든다. 부모가 된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요구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부모란 책임 아래서 벗어나는 것 또한 아니다. 사람은 아이나 어른이나 외로운 존재니, 부모들이라 한들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라고 체념하기에 아이들은 너무 어린 것이다. 자식들을 위해서 돈벌러 갔다가, 외롭다는, 힘들다는 이유로... 이혼하고 재혼하는 것은, 타자에게는 '살다보니깐, 외롭다보니깐'이란 말로 다소 이해될 수 있을지 모를지언정, 그 부모 아래의 자식들에겐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부모들의 고생과 외로움은 이해받을 수 있을지언정, 그로인한 선택까지 모두 이해받을 순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면에서 본다면, 어떻게 해서든 부모가 함께 한국에 나가 있는것은.. 차라리 더 현명한 일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은 그것대로 큰 문제를 안고 있지만, 누군가는 아이를 맡고, 누군가는 돈을 벌다가 아예 서로 영영 안보게 되는 것과 비교하자면 말이다.

 
 

이미, 그 시간을 거쳐간 어른들의 후회  

"아시다시피 저도 아들을 이곳에 둔 채 10년 넘게 한국에 나가 있었잖아요. 그때만 해도 뭐 알았나요. 목표한 걸 달성한 뒤 나중에 더 잘해 주면 되는 줄 알았지." (중략) " 가족이란 것이 10년 치를 하루아침에 보상받는 퇴직금이 아니잖습니까. 그날그날 건네고 받아 가는 용돈 같다고나 할까요.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 이런 글귀가 있더군요. 세상을 가장 잘못 산 사람은 소소한 추억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이라고. 제가 요즘 그걸 뼈저리게 느끼며 산답니다." 정 씨는 성공과 자식은 별개인 것 같다며 그것을 이제야 깨달은 자신을 탓했다. "내가 낳은 자식일지라도 저절로 두 사람의 사이가 좋아질 순 없다고 봐요,. 설령 모자지간이라도 아래서 위로 돌탑을 쌓아가듯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 필요할 테고요. 제가 실패한 것도 바로 그 점인 것 같아요." (240)  

10년넘게 한국에서 돈을 벌어와서 집단하숙집을 차린 한 조선족의 인터뷰 이다. 빚만 지고 돌아오는 경우나, 빚 때문에 못돌아오는 경우도 있는 반면 이렇게 가게를 차리거나 아파트를 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잘된 것처럼 보여지는 경우에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못했다. 부모 자식간의 시간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는 것이다. 기초를 잘못다진 공사에 후에 그것을 보강하고, 다잡으려면 그 배만큼의 노력이 드는데, 하물며 사람이라고 예외겠는가. 부모들이 부재한 아이들은 바람앞에 놓여진 등불같은 존재다. 자신들이 가장 필요한 시기에, 가장 멀리 있다면.. 그것이 과연 진실로 아이를 위한 일이 될 것인지는 고심하고 또 고심해봐야 할 문제이다. 체온의 따뜻함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잘 자라나주길 바라는 것은, 돈없이도 잘 자라나 주길 바라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기대 아닐까?

비록 돈을 벌어 다시 아이들의 곁으로 돌아온다한들, 너무 늦어버리면 되돌리기 힘들다는 것을.. 가정이 온전함에도 불구하고 그 공백을 메우지 못하는 부모의 고백은, 모든것이 잘 된것 같음에도, 결국 아니란 것을 절실히 보여준다. 자식이 잘되라고 돈을 벌어다 주는 일이 정말 자식을 위한 것인지... 그들은 더 깊은, 더 현명한 고민을 했었어야만 했던 것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며 바로 딱 떠오른 한 장면, 처음에 언급했던 장률감독의 <두만강>이란 영화를 다시한번 이야기 하고 싶다. 벙어리인, 주인공 창호의 누이인 순희가, 그들이 도와주었던 탈북자에게 강간 당한 후, 한국에 돈벌러 나간 엄마와 통화하는 장면이다. 집에 혼자만 남아있던 순희는 엄마의 전화를 받지만 아무말도 하지 못한다. 전화 너머에서 아무말이 없자, 엄마는 순희임을 알아차리고, 잘 지내는지, 밥은 잘 먹는지 물어본다. 그때의 그 순희의 표정을 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털어놓고, 울고싶은 순희가 아무말도 할 수 없는, 모든 설움을 속으로 꾹꾹 눌러 삼키고 있는 그 얼굴을 보며, 가슴속에 얼어붙었던 얼음이 쩍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가장.. 어쩌면 생에서 가장.. 엄마가 필요한 시기. 그 시기에 아이와 어른의 구분은 없었다. 그렇게 부모란 존재는 모두에게 필요함에도, 아이들은, 조금은 이해하거나 감당할 수 있는 어른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책을 읽는 내내, 이 아이들의 부모들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바라 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 책의 목적도,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돈 벌러 나간 부모를 비난함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한국으로 돈 벌러 나갈때의 그 심정, 부모가 아닌 내가, 다 헤아릴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리고 감히 그렇게 말해서도 안될지 싶다. 쉽게 내린 결정도 아니었을 뿐더러, 내 자식이 좀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하기를, 좀더 좋은 옷 입기를, 좀더 따스한 곳에서 좋은 음식 먹기를.. 바라는 마음,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래서 더 안타까운 것이다. 자신들이 살자고 나간것이 아닐진데, 아이들 더 좋게 키워보자고 나간 것일진데, 결과는 그와 굉장이 상이하단 말이다.  

그리고 나도 그 생각에 어느정도는 동의한다. 자식을 더 잘 키우기 위해 돈을 벌어야만 하는 것. 어쩌면 그 부모들만큼 그것을 여실이 느낀 이들이 또 어디있을까. 다만, 한가지 이야기 하고픈 것은,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한국에서 어렵게 돈 벌어 '고생'하는 것은 비극이지만, 그로인해 아이들이 받는 '고통'은 더 큰 비극이란 것이다.

"이 모든 게 윗물인 어른들 탓입네다. 한국 바람, 간다 바람이 먼저고 자녀를 돌보는 일은 안중에도 없단 말입네다. 한국에 나가 일하는 어른들이 고생이라면, 이곳에 남은 자녀들은 고통이지요." (27)

한국에 돈을 벌러가는 것은 어려운 일임에도 한국으로 향할 수 밖에 없던 것은, 거기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에서 돈벌어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희망이 약해 보였을 것이다. 희망이 작다는 것은, 언뜻 가능성의 이야기로만 보이지만, 다시 곱씹어보면 그만큼 더 큰 노력을 해야만 한다는 뜻도 된다. 부모들이 고생을 무릅쓰고 한국에 가서 일 하는 것을 감내할 정도로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낀다면, 더 굳게, 더 강하게 마음먹고 그 자리에서 있어주기를 감히 바란다. 중국에서 돈 벌어 키우는 것이 훨씬 더 어렵고 힘든 일, 그러니깐, 자식을 위해 한국에 나가 돈 벌 고생을 마다않는 부모라면, 그 마음으로, 그 사랑으로 중국에서 더 억척같이 살아내길... 다시한번 감히 바래본다. 

그래서 그들이, 한국도, 중국도 아닌..... 가족이라는, 세상서 가장 튼튼하고 아늑한 집 안에서 재회하길..

 

 

내가 감히 바라는 것..

교원들이 탄 버스에 막 오를 때였다. 천여 명의 학생을 어둠 속에 남겨 둔 채 도망치듯 어른들만 집으로 향하는 것 같아 선뜻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150) 

그저 책을 덮을 수 밖에 없는 스스로가 멋적었다. 아이들을 뒤로하고 다시 한국에 돌아와야만 했던, 작가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어쩌면 그들을 도와줘야 하는걸까, 그런 기관을 찾아봐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도 해보다가 이내 관둔다. 그들이 동정이 필요한걸까? 재정적인 지원이 필요한걸까? 그건 아닐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동정과 지원이 필요한 사람들은, 자신들 스스로가 살아갈 것들을 마련하지 못하고, 도움을 요청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한푼의 돈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좀 더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는 당위성과 근거를 찾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책을 다 읽고 맨처음 한 생각, 작가가 서문에서도 밝힌 것들이 바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바람이 있다면 이 책이 한국에 머물고 있는 조선족 부모와 만주에 남은 아이들을 잇는 끈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고통 못지않게 한국의 노동자로 살아가는 부모의 고통 또한 클 것이다. 나 역시도 처음엔 한국에서 일하는 조선족을 보며 노동의 대상으로만 여겼을 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었는데 그들과 벗이 되고부터는 깨달은 바가 많았다. 대구의 한 식당에서 일하는 이옥순 씨의 말처럼 중국에서 먹고살만 했다면 굳이 한국을 찾을 이유가 있었을까? 하여 나는 이 책을 통해 만주에 남은 학생들에게 부모님의 복잡한 사정과 말 못할 상황도 조금은 헤아려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이 책을 가장 우선적으로, 한국에서 일하는 조선족들이 봐야한다는,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다보니 서문에 있는 작가의 말을 못읽고 지나쳤는데, 책을 읽고 다시 앞부터 돌아보다 작가의 말을 읽고나니, 작가의 마음과 독자의 마음이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한국서 일하는 조선족들에게 이 책을 보게됨으로써 혹 모두 마음을 다시 고쳐잡는다 해도 현실이란 그리 녹록치 못할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일방적으로 누군가에게 역할을 강요할 것이 아닌, 부모들과 아이들 모두를 동등하게 이어주길 바란다. 물론 어른들의 역할이 새삼 더 클 것임은 언급할 필요도 없겠지만, 역할과 현실은 또 차이가 있으니깐. 서로가 서로를 조금씩 더 이해하다보면 언젠가 다시 함께하는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수반되어야 할 일이 어쩌면, 이곳에 있는 조선족들이 이 책을 읽는것으로 시작되야 할 것이다. 

작가는 만주에 남은 아이들에게, 부모들의 마음을 조금 더 헤아려주길 간청한다. 물론 작가의 의도는, 부모들은 아이들을 이해하여, 아이들을 위해 좀 더 나은 선택을 다시 생각하고, 아이들도 부모들의 말못할 사정을 조금 짐작해주길 바란다.. 는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 발현되기 위해서.. 내가 조금 더 원대하게 생각하는 것은, 만주에 아이들을 두고 현재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조선족 부모들을 다시 취재하여 책을 발간하고, 그것을 만주의 아이들이 읽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인 것이다.  

그들이, 서로의 이야기를 대변하는 책을 만나면, 다시 함께 할 그날을 조금 더 앞당길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혹은, 그 날을 앞당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기다림의 과정이 조금은 덜 버겁지 않을까....

 

 

뜨고 지지 않는, 그저 한결같은 '가족' 이라는 품.. 

"가족이 그렇단 말임다. 상호 의지하는 집체란 말임다. 얼마전 사상품성 시간에 귀맛이당겨 새겨 둔 거이 있는데, 가족을 뚫고 들어온 쪼맨 틈이 인차 나중에 더 큰 괴멸을 불러온다고 했단 말임다." (44)  

가족의 의미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건 어쩌면 어른들이 아니라 아이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이들은, 가족을 와해하는 것은 큰 틈으로 시작하는게 아니라, 작은 틈이 점점 더 벌어져서 생기는 일임을, 이미 알고있던 것이었다. 몸소 체득한 경험을 통해서 말이다.. 어른들이, 완전한 가족의 요건을 다시 생각하며, 때를 놓치면 영영 돌이킬 수 없는, 아이들의 성장에 필요한 소중한 사랑은, 돈으로도 살 수 없단 것을 깨닫는다면.. 아이들은, 더 나은 가정을 하루빨리 완성하기 위해 부모들도 말못할 상황속에서 분투하고 있다는 것을 조금 만 더 이해한다면..

'가족'은 우리가 흔히 쓰면서도 그 뜻을 항상 헷갈리는, 혹은 잘 모르는 단어와 닮은 구석이 있다. 누구나 안다고 자부하지만, 의외로 아무나 제대로 알지는 못하는 단어. 혹은 안다고 해도, 제대로 익혀두지 않으면 가끔은 맞춤법을 헷갈리게 하는 단어들 말이다. '가족'이란 단어의 뜻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찾아 본다. 사전에서 찾아본 가족이란 단어에는 왠지 찬바람이 불어왔다. 어렵진 않았다. 그리고 최소한의 의미만을 규정했다. 최소한이자, 기본적인 의미의 가족안에 있지 못한 아이들... 조선족 아이들에게는 이상에 지나지 않을 그 뜻. 부모들이 그 '가족'의 진정한 뜻을 모른다고 폄하하고 싶지만은 않다. 다만, 그들은.. 그들이 안도하고 있는, 혹은 건성으로 지나친 가족의 의미를 다시한번 좀 더 헤아려서 그 뜻을 진정으로 실현하기 위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다시한번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 혹 그 의지만 굳건하더라도, 그것만으로도, 꽁꽁 얼어붙은 관계가 영영 돌이킬 수 없기까지의 시간을 조금 유예시킬 수 있지 않을까.

결국 부모들이 돌아가야 할 곳은, 아이들과 만나야만 할 곳은, 한국도 아니고 중국도 아니고, 더욱이 만주도 아니다. 그냥 '가족' 이란 품이 아닐까. 

"그날은 왠지 모르게 엄마가 몹시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는 어제도 없었고 오늘도 없었다." (221)  

 

아이들은 엄마라는 별이, 아빠라는 별이 더 높은 곳에서 빛나길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 자리를 지켜주길 바란다. 

더 높은 곳에서 빛나기 위해 그들을 등지지 않고, 그저 눈이 닿는 곳에서, 한결같이 있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이 서로에게 큰 고생을 수반하는 일일지언정, 고통만큼은 아닐테니깐.

그러니까, 그들이, 뜨고 지지 않고, 아이들의 곁을 변함없이 지켜주는 별이 되기를.. 

혹, 어제도 없고, 오늘에도 없을지언정, 내일은 있어주길, 빛나주길. 너무 늦기전에..  

"어머니는 해도 달도 아닌, 변함없는 별이란 말임다."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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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지현 2013-11-22 0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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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마이 로마이 1 테르마이 로마이 1
야마자키 마리 지음, 김완 옮김 / 애니북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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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상의 전환을 통한 목욕의 참 의미 곱씹어보기!!

고대 로마, 테르마이(목욕탕) 설계자인 루시우시는 자신의 설계안이 더이상 인정받지 못해, 좌절한다. 그 와중에 시장서 우연히 만난 그의 친구 마르쿠스와 함께 기분전환겸 갔던 목욕탕에서 정체모를 통로로 빨려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가 다시 수면위로 나왔을때 마주한 것은 현대 일본의 목욕탕. 광활한 시공간을 넘어 마주한 낯선 풍경에 루시우시는 적잖이 당황하지만, 이내 진보한 목욕문화와 시설을 배워나가기에 바쁜데..

살아가는데에는 일상적인데, 쉽게 다뤄진 적 없는 이야기. 일단은 목욕에 대한 소재부터 기발하다고 할 수밖에 없겠다.

이것을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에 작가는 루시우스 처럼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작가가 준비한, 철저한 사료분석을 통한 고증은 고대 로마의 현실감있는 묘사와 목욕탕 타임슬립이라는 황당한 설정과 함께 버무려져 유쾌한 충돌을 자아낸다.

 재밌는 점은, 목욕에 관해 풀어가는 이야기인 탓에 상반신 누드는 기본적으로 등장하는 단골메뉴인데, 그것이 이 만화의 그림체와 아주 잘 매치된다는 점이다. 간결한 뎃생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한컷 한컷은, 깔끔한 디지털의 느낌과는 또 다른, 디테일에 대한 묘한 감흥을 일으킨다. 무엇보다 장면장면에서의 풍부한 표정묘사, 나아가서는 현대 일본의 목욕문화를 체험하면서 느끼는 황홀감의 젖은 표정은 그 주인공의 감정이 온전히 전달되는 느낌이랄까.
 

한번도 목욕이란 것을 깊게 생각한적도, 고대의 목욕문화에 대해 쥐뿔만한 관심도 없었던 이들에게 황당하고 유쾌한 경험을 선사해주는 이 <테르마이 로마이>에 대해 간단하게 나눠서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디테일!

 

 "바~~로 이 맛, 아입니까!?" 

 섬세한 표정연기가 일품인 루시우스 표정 3종셋트. 물론 '부분발췌'일 뿐이다. 나머지는 책을 보며 즐겨야 할테니.  

 (모든 이미지의 저작권은 저작권자 및 출판사에 있습니다.)

 

작가는 14살때 홀로떠난 여행에서 만난 이탈리아 도예가의 초청으로 17살때 이탈리아에 건너가 피렌체 예술학교에서 11년간 유화를 배웠다고 한다. 이런 이력에서 미루어보면 신기하지 않은것이, 이탈리아 생활을 그린 에세이로 데뷔했다는 사실이다. 오랜 타국생활에서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는 목욕은 매우 안락한 휴식처가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이태리 장인정신이 뭍어나는 디테일함은 비단 표정에만, 사람에만 국한된것이 아니라는 점. 잘보면.... 

    (모든 이미지의 저작권은 저작권자 및 출판사에 있습니다.)

  

고대 로마와 현대 일본의 목욕문화와 환경에 대해서 자세히 그려내고, 타임슬립이라는 장치로 인해 소홀할 수 있는 상황설정이 단단한데다, 극화체의 그림들이니, 타임슬립을 제외한 모든것은 극도의 리얼리티를 표방한다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목욕탕을 배우자!

 

한 에피소드가 끝날 때에 나오는 한장의 목욕이야기와 사진들은, 만화에서는 이야기 전개상 다 담을 수 없는 고대 로마와 일본의 목욕 문화에 대해 이야기 한다. 거기에는 정말로 고대 로마의 목욕 문화에 대한 자료도 있고, 작가가 여행을 하며 봐온 목욕문화에 대한 이야기, 자신이 바라보는 목욕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얼마나 테르마이(목욕탕)을 사랑하는지 짐작케 해주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실려있다. 이것들을 읽어보고 있노라면 새삼 목욕이라는 것을 가지고도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리고 작가가 이 목욕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또한.

 
 

목욕의 의미를 다시 찾자!

  

  (모든 이미지의 저작권은 저작권자 및 출판사에 있습니다.)


 목욕은 기본적으로 청결을 유지하며, 심신을 안정시키며 켜켜이 쌓여있던 피로를 풀어주는 행위이다. 시대가 변하고 청결과 위생이 점차 보급되면서, 이 목욕이란 개념은 어느정도 보편적인 행위가 되었는데, 그중에 일본의 온천문화는 다른나라의 목욕문화보다 조금 더 특별하긴 특별한 것 같다. 작가가 밝혔듯이 고대로마와의 공통점인 화산지대의 영향을 받기도 했을진데, 어쨌든 발달한 온천에 몸을 담그는 행위는 청결 그 자체를 위한것보단 심신에 쌓인 피로들을 풀어주는 역할이 더욱 큰 듯 하다. 새삼 흐르는 물에 때를 씻어내는 것과,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행위는 차별성이 보였다. 일본만큼의 온천이 발달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찜질방이란 것이 급속히 퍼진것을 보면, 문명화된 사회가 될수록 그 피로를 풀어주는 일은 은연중에 중요한 화두가 되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든다. (물론 여가의 한 방면이 크기도 하지만 말이다.)


특히나, 마지막 에피소드인, 황제의 명을 받아 전장에서 지친 병사들의 피로를 풀어줄 목욕탕을 만드는 부분은, 사람이 극도의 긴장으로 인해 피로할수록 그것을 풀어줄 목욕탕이 절실히 필요함을 보여준다. 이러니 그간 별 시덥잖게 생각했던 목욕에 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볼 수 밖에.
 

 

서사의 간결함!?

  

(모든 이미지의 저작권은 저작권자 및 출판사에 있습니다.) 

<테르마이 로마이>의 이야기구조 간단명료하다. 문제에 봉착한 고대 로마의 루시우스가 우연찮게 현대 일본의 목욕탕으로 타임슬립하게되고, 거기서 자신의 시대에서는 보지못했던 여러 발명과 문화를 맞닥뜨리게되고, 그것을 배워서 다시 로마로 돌아가 그것을 적용하는 것이다. 복잡하게 헤맬필요없는 간단한 이야기 구조는 극적인 구성으로 재미를 주기 보다는, 좀더 손쉽게, 그동안 크게 관심갖지 않았던 목욕문화에 대해 집중하게끔 해준다. 의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비교적 단순한 이 이야기구조로 인해서 사람들은 어떤 긴장감 보다는 천천히 고대로마의 목욕문화를 살피고, 현대 일본의 온천문화를 돌아보며, 그것들이 시대를 역행하며 전이됐을 때, 어떤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지 상상해보게 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지만 일단 이 1권으로만 봤을때는 이전에 다른 만화에서 볼수 있는, 빠른전개로 인한 긴장감과 극적인 맛이 조금 부족하단 것은 다소 아쉬운 부분이긴 하다.

 

  

2권을 기대하며! 

 그간 알지 못했던 로마의 목욕문화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타임슬립을 하면서도 논리적인 설명이 누락되지 않게 각각의 상황에서의 치밀한 상황설정, 표정에서 극을 달리는 디테일한 묘사, 철저한 자료분석으로 인해 하나하나 배워가면서 보는 여러 신선한 장점들에 비해,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다소 반복적인 방법을 사용한 에피소드의 진행은 왠지 아쉽긴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문득, 이 만화에서도 그것을 찾아야만 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책장을 넘기다가 지치는 책이 있다면, 한장한장 음미하다 지치는 책도 있는 법이다.(여기서 이 지친다는 의미는 긍정, 부정의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싶다) 멜로영화에서 액션영화같은 극적인 컷편집을 요구할 수는 없는 바이니깐.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그간 관심갖지 않았던 목욕에 관한 이야기들은 꽤 흥미로웠다. 또한 한 시대에서도 다양하게 존재하는 목욕문화들을 고루 다룬다는 점과 발달된 목욕문화를 접할때마다 나오는 루시아스의 다양한 반응들은 소소한 재미를 끊임없이 느끼게 해주는 동시에 단조로움을 희석시켜 준다. 무엇보다, 간간이 등장했던 루시아스의 가정의 위기(!)가 드디어 본격적으로 수면위로 들어나고, 또한 타임슬립으로 역행한 문화의 발달이 어떤 일들을 벌일지 2권에서는 본격적으로 이야기될 듯 하니, 다음 권이 더욱 기대되는 바이다.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글 때, 우리의 모든 감각이 느긋해지 듯.. 그렇게 이 만화를 음미해보자.

그러면, 둘러볼 것들이 많다는 사실을 새삼 다시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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