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같은 시대에 만년필이라고 하면 다들 의아해한다. 디지털 시대에 미니멀 라이프 추구하는 세상에 핸드폰에 메모해두면 되었지 무슨 기록이냐고 의아해하며 관심이 없는 사람이 많다.
기원전 3500∼3000년 어느 시기에, 익명의 수메르 천재들이 뇌 바깥에 정보를 저장하고 처리하는 시스템을 발명했다. 대량의 수학 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한 맞춤 시스템이었다. 덕분에 수메르인들은 인간의 뇌에서 비롯되는 사회질서의 제약에서 벗어나 도시, 왕국, 제국의 출현에 이르는 길을 열었다. 수메르인이 발명한 데이터 처리 시스템은 ‘쓰기’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인간은 자신의 뇌 이외에 외부에 저장장치를 활용함으로써 뇌의 용량을 키웠다. 기록함으로써 인간은 뇌를 두배로 사용 할 수 있게 되었다. 디지털로 기록하는 것도 좋지만 사각사각하는 만년필로 종이에 글을 써 내려가는 소리를 듣고 진한 잉크가 펜을 통해 노트 위해 진하게 각인되는 모습을 보면 뇌에도 그 문장들이 동시에 각인이 되는 거 같고 마음은 평온을 되찾으며 평소 자기가 쓰는 글씨보다 더 거룩한 글씨로 다가오는 것이다.
내가 만년필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한 5년 전이었을 것이다. 업무적으로도 힘든 시기를 막 지나온 상황인지라 마음에도 여유가 있었기에 이것저것 인터넷을 보며 뭐 특별한 것이 없나 하면서 그렇게 우연히 만년필을 알기 시작했다. 물론 그 전에도 우연히 인터넷 서핑 결과로 독일제 저가 만년필을 구입하여 조금씩 쓰는 맛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커피 한잔을 앞에 두고 “사각사각” “서걱서걱” 때론 스케이트 타듯 만년필 하얀 종이 위에 미끄러지듯 잉크를 머금은 글씨가 완성되는 그 느낌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마치 그건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키 큰 나무들이 가지런히 정렬해 있는 오솔길을 트렌치코트 깃을 세우며 그 정취를 여유롭게 느끼며 걷는 것과 같을 것이다. 손에 큰 힘을 주지 않아도 부드럽게 빠른 필체가 가능한 만년필은 모든 작가에게 없어서는 안 될 기본 도구가 아닐까?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를 쓴 무라카미 하루키도 만년필을 좋아하며 그 글을 썼을 것이다.
만년필 뚜껑을 열 때 별빛처럼 반짝이는 펜촉은 나에게 순수한 힘을 불어넣어준다. 펜촉에서 실올 풀리듯 새어 나오는 잉크가 담당한 활자가 되면 고적한 마음에 램프가 켜진다. 19세기에 출간된 렘브란트 예술을 다룬 책을 읽다가 솟구치는 감흥을 단 몇 줄만이라도 만년필로 적고 싶어 졌다. 만년필은 어두컴컴한 암실에서 흑백사진이 인화되듯 느림의 미학을 보여주는 벗이며, 심연 속에서 명암을 풀어내는 예술의 연금술사가 아닐까? 만년필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어느 독일 사람의 사유 도구가 되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랑과 우정의 가교가 되었을 것이다. 「 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 」 민병일
저자는 시인이자 어느 출판사 편집일 하다 예술에 대한 동경에 이끌려 독일 유학을 갔다. 낯설고 외로운 독일에서 유일한 낙은 벼룩시장을 찾아 고릿적 물건을 구경하고 모으는 것이었다. 맥주잔, 촛대, 할머니의 몽당 연필, 그리고 몽블랑 만년필에 이르기까지 사물에 깃든 영에 대한 단상은 그의 삶과 온전하게 일 체 한 것 같다.
만년필에 관한 책을 골라서 읽은 원인도 있다. 그렇게 명품 만년필 한 자루를 몇 차례 고민한 끝에 들여 버렸다. 그렇게 구입해 놓고도 너무 아까워서 쉽게 사용하지 못하고 시간만 지나고 있었다. 아득히 젊었던 어느 시절에 그 만년필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그냥 선망의 대상으로만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흘러 내 손에 들어온 순간 ‘ 간절히 소망하면 이루어진다 ’라는 말을 떠올렸다. 일반 볼펜을 가지고 글을 쓸 때는 글씨가 제대로 써지지 않아 악필이라 자학하고 있었고, 글씨를 쓰는 행위를 고통으로 여기고 있었던 나의 과거는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다.
사실 물건이란 사용하지 않고 보관만 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가의 장식품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실생활에 내가 사용하면서 최대의 만족을 얻어야 한다. 삶을 단순화시키는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고자 하니 꼭 필요한 것은 질 좋은 것으로 구입하고 꼭 필요하지 않은 물품은 들이지 않고 물건 가짓수도 웬만하면 늘리지 않고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은 기부하거나 버리자 삶이 홀가분해지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최상의 만년필 네 자루를 나의 만년필 애장품으로 종결하고 더 이상의 펜은 들이지 않고 이것만 관리를 잘하자 라는 결심을 굳혔다.
어떤 사람들은 한 자루의 펜만 있으면 되었지 여러 자루의 만년필을 구입할까 의문을 가진다. 막상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보니 이 세상에 잉크가 빨강, 파랑, 검은색만 있는 게 아니고 세상을 거쳐한 유명한 예술가의 이름을 자청한 황홀한 잉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온갖 다양한 색깔의 잉크를 알게 된 순간 ‘한 만년필에 한 잉크’를 주입하기 위해서 잉크색에 맞는 만년필을 계속 구입하게 될 것이다.
사실 만년필이 내 삶에 가져온 긍정적인 변화는 엄청난 것이었다. 우연히 만난 만년필에 빠지면서 뭔가 쓰는 것 자체를 싫어했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 글쓰기를 즐기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개인 스케줄 노트에 하루하루 나의 소소한 일정을 만년필로 써가며 색연필로 중요한 부분을 칠하고 마스킹 테이프로 꾸미기 시작하면서 좋은 색연필, 좋은 테이프까지 사용하기 시작했다. 개인 스케줄에 대한 기록은 나의 목표를 기록하고 하루 일상에 대한 간략한 일기도 쓰거나 독서노트 쓰는 것까지 발전했다. 독서노트를 쓰려면 책을 읽어야 하고 또 쓰기 위해서라도 책을 읽어야 했고 그렇게 모아진 독서후기는 개인 블로그에 올리면서 블로그 방문자수도 증가했다. 후기를 쓰면서 와인을 마시며 독서를 하고 만년필로 글을 쓰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상과 일치되는 상상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의 내부에 쌓인 독서기록들은 나의 많은 스토리의 소재가 되었다. 10개월간 참여했던 영어교육에서는 스토리의 소재로 사용하며 어떻게 즐기고 있는지를 글로 쓰거나 영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꼈다. 독서후기를 덕분인지 운 좋게 교육체험수기에서도 상을 받게 되었고 후배들을 위한 교육체험 강의할 때에도 만년필 이야기는 빠뜨리지 않았다. 그렇다! 만년필은 나의 인생템이다. 그것으로 연결된 끊임없는 상상력은 생방송으로 진행하는 영어방송에도 출연하게 하였다.
인간관계에도 궁합이 존재하듯, 사물끼리도 영혼이 존재한다. 아무리 비싼 고급 노트라 할지라도 내가 소유한 만년필과 궁합이 맞지 않으면 필 감도 좋지 않고 잉크 흐름도 좋지 않고 심지어 쓰고 난 뒷면에 비침 현상까지 발생한다. 만년필과 궁합이 맞는 노트를 찾아 이것저것 사용해보며 최상의 잉크까지 섭렵하게 되는 것이다. 수많은 모험과 긴 여정을 끝내고 이젠 내가 소유한 만년필과 맞는 노트에 정착하여 더 이상 방황하지 않아도 된다.
만년필의 잉크를 주입하고 쓰기 시작할 때의 마음은 마치 거룩한 문장의 기록들을 위한 의식을 거행하듯 엄숙하다. 잉크를 세척하고 말리며 내가 이 지구의 원자가 되어 사라지는 날에도 이 만년필은 지구의 종말 끝까지 지구 내에 존재하게 될 것임을 생각해볼 때 약간 두렵기도 하다. 아무리 써도 사라지지 않는 이 신기한 물건의 가치를 생각해볼 때 가만히 모셔두는 것보다는 아무리 써도 닿지 않는 만년필은 영원히 내가 쓸 수 있는 한 최대한 사용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다.
이젠 주변 사람들에게 그 효용성을 설파하고 다닌다. 별 관심 없는 사람도 있지만 , 사용하면서 엄청난 만족감을 느끼며 잘 쓰고 있다는 사람도 있다. 또 그 사람이 다른 지인에게 만년필 사용의 효용성을 전파하면서 만년필 애호가들이 많아지는 걸 보는 것도 큰 만족감이다. 좋은 것은 나눠야 두배가 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여행을 할 때도 만년필과 수첩은 필수이다. 아날로그 노마디스트인 나는 가끔 방문했던 여행지에 대한 그림을 스케치한다. 한두 시간 외출할 때에도 마치 전쟁에 나오는 병사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를 챙기는 자세로 핸드백엔 화장품도 만년필 네 자루가 든 고급스러운 필통과 만년필 여분의 잉크를 꼭 챙긴다. 하지만 만년필로 비행기 안에서 그림을 그리려는 목표를 단 한 번도 이룬 적이 없다.
비행기 안에서 긴긴 지루한 시간 동안에 여행지에 대한 기대와 상상력 등을 만년필로 스케치하고 글도 써넣은 작품을 완성하는 것도 나의 오래된 로망이다. 외국의 관광지를 세밀하게 만년필로 그리고 옆에 글까지 가미한다면 최고의 여행 에세이가 될 것이지만 기대와는 달리 실상 비행기를 타고 자리에 착석하면 머릿속을 짓누르는 피곤함으로 잠 속으로 빠져들기 십상이었다. 여행 가는 기내에서 여행지에 대한 행복한 상상을 하며 와인을 마시며 여행지를 스케치하고 글을 쓰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나의 에세이가 출간될 날을 희망하며 오늘도 난 내 만년필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