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미술관 - 그림에 삶을 묻다
김건우 지음 / 어바웃어북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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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우의 『인생미술관(어바웃어북), 2022』은 서양미술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화가들 스물 두명의 삶을 그들이 남긴 작품으로 따라가 보고 대화의 장을 마련한다. 저자는 작품 위주로 그림을 즐길 때 “파편화된 지식”으로 방향을 잃을 가능성이 있는데 비해, 화가의 삶을 중심축으로 두고 그림과 만날 때 총체적인 시각에서 작품을 바라볼 수 있다고 전한다. 달과 6펜스 사이에서 고뇌했던 화가의 실패와 성공에 온전히 다가갈 때 관객 또는 감상자는 “일방적인 감상의 차원을 넘어 그림과 대화할 수 있게 된다.”(p.6)고 저자는 말한다. 『인생미술관』의 특별함은 죽음을 알리는 글, ‘부고’로부터 삶을 회상해나간다는데 있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이미 거두어졌다는 사실 앞에서 삶과 예술을 복기하는 일은 기념이자 애도인 동시에 독자의 시간으로 시선을 돌리게끔 만든다.

『인생미술관』을 구성하는 네 개의 챕터는 “삶을 짓누르는 중력에 맞서”, “내 캔버스의 뮤즈는 ‘나’”, “어둠이 빛을 정의한다”, “달의 뒷모습”이다. 고흐부터 루벤스까지 스물 두 명의 화가는 네 개의 챕터에 나누어 배치되었는데 읽기 전에 독자가 먼저 연결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Gallery of Life 01", <삶의 여백을 채우는 법, 저항하며 앞으로 나아간다!>라는 각각 스물 두 개의 페이지가 인생 전시실로 입장하는 느낌을 준다. 화가의 생몰년을 확인하고 Obituary(사망기사)로 일대기 요약본을 본 후 삶과 작품을 잇는 일련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애석해하거나 감탄하거나 결국 예술의 바다에 빠지게 된다. 두 번째 챕터를 보고 나면 ‘자화상’이 이전과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미술사에서 자화상을 최초로 그린 화가 뒤러를 “자화상 개념도 없던 시기에 자화상을 그린 문제적 열세 살”이라는 위트 있는 소제목으로 소개한다. 그는 ‘브랜드’라는 개념도 최초로 미술에 도입한 화가로 자기 작품에 서명을 남겼다 한다. 시대를 앞서간 천재의 면모는 화공이길 거부하고 예술가의 아우라를 뽐낸다.

모나리자가 다빈치의 또 다른 자화상이라는 영국 컴퓨터 그래픽 전문가 슈바르츠의 실험은 놀라움을 자아낸다. 모나리자가 다빈치? 모나리자라는 이름의 의미를 추적하기도 하나 방대한 분량을 남긴 천재의 노트에 정작 자신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으니 미스테리로 남을 수밖에. “웃음으로 저항하고, 웃음으로 세상을 바꾸다”의 오노레 도미에는 새로운 발견이었다. “미술사가 도미에를 평범한 삽화가가 아닌 완성된 화가로 인정하는 것은 현실을 날카롭게 투영해내는 특유의 시선 때문이다.”(p.246) 웃음, 유머, 소시민의 삶을 연결하는 화가의 긍정이 웅변적이다. 한스 홀바인이 포함되어 있어서 기뻤다. 도스토옙스키의 <백치>에서 미시킨 공작과 로고진이 함께 보던 ”무덤 속의 예수“가 하단에만 있지만 양면을 할애해서 담겼다. 철학하는 화가로 불린 푸생도 깊이 각인된다. “푸생은 그림을 ‘본다’는 기존의 감상법에서 한발 더 나아가 문학이나 논문처럼 ‘읽어야 한다’는 지론을 펼쳤다.”(p.365) 미술사를 통틀어 어떤 화가보다도 사색적이었다는 푸생의 그림은 낯익지만 화가에 대해서는 정작 잘 모르고 있었다. 그림도 읽어야 한다는 말에 읽기 강박자인 필자는 귀가 솔깃해진다. 마지막에는 작품 찾아보기와 인명 찾아보기까지 있어 곁에 두고 볼 때마다 도움 받을 수 있겠다.

미술관련서를 읽고 사고 모으고자하는 욕구가 누르면 튀어 오르고를 내내 반복해왔다. 가서 머물고 싶은 공간이라면 책이 있는 도서관을 제외하면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이다. 혼자가고 남편과 가고 유모차 밀고 가고 아이 손 끌고 갔고, 지금은 과제 덕분에 시간은 부족하고 할수 없이 전시실을 경보로 스쳤다. 숭례문학당의 예술교육리더과정 수업을 듣고 있는데 예교리가 ‘지금’을 통과하는 나에게는 비타민이고 에너지고 엔돌핀이다. 예술 향유자로서의 삶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확인은 설렘을 주고도 남는다. 『인생미술관』은 그런 때에 읽었기에 더 정성껏 감정이입하며 머무르게 된 면도 있다. 읽을 때는 좋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지금의 감동이 옅어질까 약간은 두렵다. 그 또한 죽음을 향해 가는 삶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니 그러면 또 다시 펴고 읽어보자. 누구든 『인생미술관』을 방문해 자신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을 찾아내게 될 것이다.



<신간서평단/출판사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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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원이 되고 싶어
박상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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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여러 얼굴을 가진다. 애틋하고 소중한 동시에 외면하고 싶은 칩들이 산재해 박혀있을지도 모른다. 균형추는 좌우로 미끄러지곤 한다. 지나온 모든 순간을 가장 적절하고 올바른 방식으로 포옹한 후 떠나보내거나 결연히 마주 손잡는 선택지 앞에 선다면, 하고 소설은 묻는다. 박상영의 『1차원이 되고싶어 (문학동네),2021』 는 2019년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으로 젊은 작가상 대상을, 2021년 『대도시의 사랑법』으로 신동엽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다. “1차원이 되고 싶어”라는 제목은 간절함이 묻어난다. 화자는 외치고 있을까, 읊조리고 있을까. 무엇이 되었건 진심이 전해지고 덧붙히자면 자주 보던 “~하는 방법” 투의 제목이 아닌것도 마음에 든다. 의미를 생각하니 “단순하게 살자, 쫌!”, “나 좀 냅둬!”등 이미지가 이어지는데 그들이 사는 차원과 도달하고 싶은 차원을 탐색하는 여정에 지금 오른다.

소설은 인스타그램 다이렉트 메시지 “과거로부터 온 편지”와 그 앞에 직면하는 주인공을 그린다. 과거와 현재는 교차하는 두 개의 축으로 독자는 시공간을 넘나들게 된다. 월드컵 열기가 뜨거웠던 때, 특목고 입시학원을 다니던 중학교 2학년 소년은 더 나은 삶을 향해 앞만 보고 달리라는 가언 명령과 환영받지 못할 사적인 감정 사이에서 아슬하게 견디고 있다. 자신 안에 자라는 애정은 감정에서 감각으로 욕구를 넓혀간다. “당시 나에게 가족이라는 것은 나를 속박하는 굴레에 불과했으며, 내가 가진 모든 욕망은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했다. 지금의 이 삶을 벗어나고 싶다.”(p.41) 라는 문제 해소책으로도 사용된다. 가족은 마음을 열고 합심하는 주체가 되지 못한다. 만족스럽지 않은 조건들이 일생일대 중요한 시기인 십대 인물들을 촘촘히 애워싸고 있다. “막 서른이 된 아빠는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방종하게 살아왔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으며 철들······기는커녕 또다른 의존의 대상을 찾게 되었다. 바로, 엄마였다.”(p.177)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봐도 그곳에서 또다른 어른아이들을 만날 뿐이다. 또한 과잉인줄 알아채지 못하는 편중된 가치를 ‘기준’ 삼고 강요하기에 폭력은 어느 관계에나 내제한다. “아빠는 없고, 엄마가 다단계 해서 먹고살고, 그것도 모자라 전교에서 제일 유명한 호모 새끼였어. 우리 학교 애들은 다 알아.”(p.202)

소설은 현실을 애둘러 표현하지도 미화하지도 않는다. 나와 윤도, 태리의 관계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돌아보면 그때가 좋았다고 하기에는 통증의 잔재가 많고 상처 받은 만큼, 때론 그 이상으로 상처주기도 한다. 죄의식은 그 시간을 벗어나 현재의 나에게 상처를 입힌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내딛는 걸음은 회복의 첫 걸음이라 생각된다. 작가는 “그 시절을 뛰어넘기 위해, 현재형의 공포를 과거의 한 시절로 남겨놓기 위해, 주먹을 쥐고 눈을 부릅떠야만 했다.”(p.408)고 쓴다. 음악, 영화, 만화, 미니홈피 등 시대적 장치들을 보는 즐거움과 곤혹스런 와중에도 위트있는 대사들은 가독성을 높인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은 쉽게 감정이입하고 작품과 독자의 간격을 좁혀준다. 2019년 젊은 작가상 수상 인터뷰에서 박상영은 작가로서의 퀴어 예술가, 이런 설정들이 모이는 지점이라서, 요즘은 그 이후를 고민하게 되는 것 같다면서 두번째 소설집에는 백 퍼센트 퀴어 소설만 들어갈 거 같고 그 이후는 아직 잘 모르겠다고 밝혔다. 아마도 “그 이후”라 언급한 작품이 “1차원이 되고 싶어”인 듯하다. 다양한 서사나 미스테리, 추리물에 대한 호감도 언급했는데 그런 요소도 조화롭게 녹아있다.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처럼 간추릴 수는 없는 소설로 살아냈으므로 다행이다에 가깝다. 섬세하게 들여다본 솔직한 성장기가 읽는 이들의 마음에 닿고 위로하는 점은 소설의 강점인 듯하다. 감정을 묘사하는 문장들은 사랑이나 우정의 정의로 모아두고 싶을만큼 아름답기도 했다. 그럼에도 작품에 보내진 수많은 찬사 곁에 모호하네, 라고 덧붙힌다. 이또한 독자의 솔직한 감상이므로. 누군가는 차원이동 진입장벽을 어떤 강도로건 느낄 수 있겠고 누군가에게는 자동문같은 환대로 다가올 것이다.

나는 마치 미라처럼, 혹은 소금 기둥처럼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 채 말라붙어가는 기분이었는데, 아이들은 저마다의 속도에 맞게 커가고 있었다. 나만 빼고 모두가 자신의 속도로 뻗어나가고 있었다.(p.200)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모조리 쏟아내 죄책감을 떨쳐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나는 언제나 침묵해버리는 사람이니까. 모든 것을 덮어버리고, 상처를 썩혀버리는 종류의 사람이니까. 그것이 내 삶을 좀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내 유일한 삶의 방식을 바꿀 수는 없었다.(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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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에서 쓴 수기 창비세계문학 10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근식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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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주의) 도스또옙스끼의 『지하에서 쓴 수기,1864(김근식 옮김/창비/2012)』는 민감한 영혼의 내적 독백이자 항변을 기록한 소설로 이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이르기까지 앞으로 발표될 작품들의 서곡에 견줄 수 있다.(“지하로부터의 수기” 이후 그의모든 작품은 합리주의에 대한 공박에 다름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p.197 로쟈의 러시아문학강의) 내면의 분열과 자유의지, 자기부인, 광기어린 추적, 조건없는 사랑과 용서, 구원의 가능성 등 여러 주제가 호흡을 고른다. 책을 쓸 당시 도스또옙스끼의 첫 번째 아내는 결핵으로 죽어가고 있었고 때문에 “고통과 열정은 모순적이면서도 이 작품을 지탱하고 있는 힘의 원천”이었다. 그는 현실과 창작이라는 이중 영역에서 고통의 한 가운데를 통과해 “서양문학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광인들의 형상들 중에서도 가장 관념적이면서 의미심장한 주인공”(이병훈, 광기 전복된 영혼의 세계 2016)인 지하생활자를 탄생시킨다. 이후 지하생활자는 극단을 달리며 치열하게 고민하는 인물들의 전조가 된다. 이 짧은 소설이 “도스또옙스끼적인 것의 결집체”라는 나보코프의 평가는 작가의 후기작으로 갈수록 재현, 변형, 확대 발전하며 풍성해지는 흔적을 만날 때마다 기억나게 될 것이다.

소설은 총 2부로 1부 <지하>에서는 화자인 지하생활자가 자신을 소개하면서 자기 견해를 밝힌다. 타자에게 보여지는 부분과 자신만이 알 수 있는 면을 교차하면서 옷감을 짜듯 자기 정체성을 풀어낸다. 선언적인 단문과 부연을 덧잇는 만연체를 왕래할 때 어떤 지점에서는 일정분량의 재독을 반복하게 된다. 자신은 “못된 인물”이라고 첫 문장을 떼었지만 이어 “나는 못된 인물은 고사하고,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고 힘을 뺀다. “사납거나 착해지거나, 비열하거나 고상해지지도 못했고, 영웅이나 벌레가 되지도 못했다.”(p.12)며 범위를 넓힌다. 화자는 신경이 둔한 사람이 부딪히는 “불가능의 벽”, 다른 말로 “돌벽”이면서 “자연법칙, 자연법칙의 결론, 수학”(p.23)을 철옹성이라고 부른다. “돌벽이란, 2×2=4다! 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평화의 담론처럼 들릴 것”(p.24)이라고 재차 부연한다. 자연법칙은 “수정궁”이자 “이상향”(p.45)에 닿고 19세기에 과학이 해낸 인간해부는 “욕구와 변덕의 공식들”(p.47)을 차단하는 가림막이라 진단한다.

그는 말한다. “인간의 욕구가 공식에 의해 조정되는 거라면 누가 그런 욕구를 충족하려 하겠는가?”, “자신의 소망과 의지와 욕구가 없는 인간이 피아노 건반이지, 진정 인간이란 말인가?”(p.48) 결국 “나의 개인적 견해지만, 오직 행복 하나만 사랑하며 산다는 것은 흉물스럽기까지 하다. 좋든 나쁘든 간혹 무언가를 박살 낸다는 것 역시 기분 좋은 일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고통의 편에 서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행복의 편에 서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편을 드는 것은······나의 변덕스러움이다. 필요하다면 나는 마음 놓고 변덕을 부리고 싶다.”(p.60) 의식은 자신에게 채찍질할 때가 가끔 있고 그것이 삶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키기에 무념의 상태에 빠져 있는 것보다 낫다는 지하생활자는 2×2=4의 세계를 "죽음의 시작“(p.58)이라 명명하며 그 자리를 2×2=5라는 ”그에 못지않게 멋진 것“(p.59)으로 치환코자 한다. 화자는 자유의지 논쟁 끝에 1부 마지막을 수기의 효용에 할애한다.

소설의 2부는 <젖은 눈에 얽힌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20년 전 겪었던 두 사건을 회상한다. 동창들과의 모욕적이었던 일화와 우연히 만나게 된 리자 이야기다. 2부의 제사 네끄라소프의 장시 인용은 리자 일화를 요약한 것과 흡사하다. “이 얼굴에는 무언가 아량이 넓고 선해 보이는 것이 있으면서도, 기이하리만치 진지해 보이는 것이 있었다. 분명히 그런 점 때문에 이 아가씨는 손님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p.143) 리자는 2년 후 나올 “죄와 벌”의 소냐를 예표하는 것 같다. 센나야 광장과 병으로 스러져 가는 여인들 삶을 들어 지하생활자는 리자를 각성케 한다. 후에 리자는 지하생활자에게 수모를 당했음을 알아채지만 그를 포옹하고 눈물을 흘림으로 화자도 참회의 울음과 용서를 빌고 싶다는 변화를 감지케된다. 종잡을 수 없이 이어지던 자문자답은 종말에 이르러 결국 “그러니까 나는 여러분보다 훨씬 더 ‘생생하게’ 살아 바깥으로 나온 셈이다.”(p.212)라고 고함으로 목소리를 쫓던 독자에게 이 일이 인간 보편의 문제임을 알린다. 나아가 자신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스스로에게 시선을 돌리게 만든다. 지상인지 지하인지, 태양 아래인지 비밀의 숲속인지 명칭은 여러 가지로 붙일 수 있겠다. 독자는 내가 이상해 보여? 당신도 만만치 않아, 결코 덜하지 않지, 라는 지하생활자의 음성을 듣게 될 텐데 이미 ‘나’에서 1인칭 복수 ‘우리’로 호칭은 달라져있다.

캐릭터의 성격특징이 과해 보였지만 후반에 이르러 그의 논리를 온전히 수용하고 동의하게 하는 역량은 역시 작가의 천재성을 다시금 확인시킨다. 구조적으로 2부 구성이 주장과 근거 또는 변론과 사례 제시처럼 안정감 있다는 점도 몰입을 높인다. 마지막 두 페이지는 압권! 도스또옙스끼는 겨울이 시작될 때 계절병처럼 꺼내는 작가다. 올해도 죄와 벌 한 번 읽어야 할 텐데(“형제들”은 엄두불가) 하는 생각이 도돌이표처럼 떠오르면 겨울이 왔다는 신호다. “지하에서 쓴 수기”는 첫 번째 독서였다. 만개한 개나리와 벚꽃 틈바구니에서 땅을 파고 들어가는 듯한 수기를 읽는 경험은 절구 공이(그렇다, 그 절구 공이가 맞다) 두 개가 부딪히는 듯 부자연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읽는 그 때가 바로 최적기”라는 새로운 좌우명을 쓰며 (그럴 일이 거의 없겠으나 상상으로라도)손가락 어는 추운 겨울 젖은 눈에 얽힌 이야기를 다시 읽어보리라 기약한다. 읽어보시라, 왜 이제야 읽었나 하는 묘한 쾌감이 있을 것이다.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했느냐 하면, 여러분이 감히 천착해볼 엄두도 못 냈던 것을, 또는 반쯤 천착해보았던 것을, 그리고 비겁함을 분별력이라 하며 여러분이 자신을 기만하면서 자위해왔던 것을, 끝까지 파헤쳐서 그 속을 뒤집어보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여러분보다 훨씬 더 ‘생생하게’ 살아 바깥으로 나온 셈이다. 자, 유심히 살펴보길 바란다! 사실 우리는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이 어디에 살아 있는지, 그것이 무엇이며 또 뭐라고 불리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책 없이 우리만 따로 내버려 둔다면 우리는 즉시 혼동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될 것이다.(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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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투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니콜라이 고골 지음, 이항재 옮김, 노에미 비야무사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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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고골의 『외투(노에미 비야무사 그림, 문학동네, 2011, 1841)』는 만년9급 문관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의 이야기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그리고 그 이후를 들려준다. 이름짓기 곤란해 아버지의 이름을 따랐던 주인공이 이름 없이 생을 마치고 관리 유령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기까지의 굴곡사이기도 하다. 매번 다른 출판사의 책으로 만나오다 세 번째 읽게 된 “외투”를 이번에는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문학동네 세계명작” 시리즈로 펼치자 스페인 일러스트레이터 노에미 비야무사의 삽화가 주는 또 다른 감흥은 무척 새롭다. 고골의 데뷔작인 우크라이나 창작 설화집 『디칸카 근교 마을의 야화』를 발표 후 10년 정도가 고골 창작의 전성기이고 이때 쓴 작품들이 고골 문학을 대표하게 된다.(p.110 로쟈의 러시아문학 강의) “외투”는 “이후 대부분의 러시아 단편소설의 모태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러시아 작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우리 모두는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는 도스토옙스키의 말은 이를 잘 드러낸다.

만년 9급 문관인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국에서 존재감이라고는 없지만 조금도 변함없이 서류정서 하는 일을 한다. 그가 젊은 관리들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는 데는 그 한결같음도 일조한다. 농담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심하거나 일을 방해할 때에야 “날 내버려둬요. 왜 날 모욕하는 거요?”라고 항변하지만 그 안에서 “나는 당신의 형제요.”(p.14)라는 목소리를 발견하는 사람은 새로 들어온 젊은이 한 명뿐이다.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에게 정서하는 일은 다른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애착의 대상이다. 의외로 일에 대한 집중이 흐트러지는 사건은 페테르부르크의 강력한 적인 북쪽의 한파로 일어나게 된다.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의 외투는 ‘실내복’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작가는 이 실내복 같은 외투가 재봉사 페트로비치 로부터 수선 불가라는 선고를 받고 새 외투로 대치되기까지의 역경 극복 과정을 정교하게 묘사한다. 목표달성의 기쁨도 잠시, 꿈꾸던 외투, 어쩌면 생의 비전을 누려볼 틈도 없이 외투뿐 아니라 생명까지 허무하게 빼앗기는 전개가 거칠고 차디찬 한파만큼이나 속도감 있게 강타한다.

러시아 문학에서 “작은 인간”이라고 불리는 인물들은 푸슈킨의 작품에서 출현하기 시작해 고골의 작품으로 이어져 “하나의 문학적 전형”이 되고 이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까지 등장한다고 이현우는 설명한다.(위 인용책 p.120) 작은 인간인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의 치열한 고군분투는 외투 가격 팔십 루블 중 사십 루블을 구하기 위한 일련의 행동에서, 경찰서장을 거쳐 ‘고관’을 찾아가 “적절한 질책”이라는 심한 대우를 감당한 후 “페테르부르크 기후의 친절한 도움”(p.58)이 더해지고 말 때까지 크레센도로 진행된다. 비루한 현실에서 약간은 과장되고 희화화된 인물들은 때론 역설적으로 독자를 실소케 한다. 고위층의 허위의식도 스스로를 속인 끝에 죄책감을 부르고 지독한 무덤 냄새를 내뿜는 관리 유령을 맞닥뜨리는 결과를 낳는다.

소설은 자족하던 주인공이 맺는 관계를 부각시킨다. 국(局) 내,외부 에서 자의반 타의반 이어지는 소통은 인간 사회의 축소판 같다. 짧은 문장은 상당한 이미지와 상징을 내포하기에 단어 이면에 펼쳐지는 장면이 ‘광장’(p.46)만큼 끝간데없다. 고골이 그리는 인물들은 시공간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현재적이며 생기가 넘친다.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물론 지위가 사람을 다르게 만들어버렸던 ‘고관’의 묘사는 심리학자처럼 내면을 정밀 조각하는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을 연상시킨다. 원래부터 없던 것 같은 인생이 가능하고, 어쩌면 비일비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의 부정할 수 없는 확인과 환상적 결말은 소설을 잊지 못하게 만드는 요소다.

흥미로운 전개와 가독성 높은 문장은 읽는 즐거움을 배가시키는데 옮긴이의 말은 이와 별개로 호기심을 유발한다. “각기 나름의 목소리와 표정을 지닌 듯한 고골 특유의 단어와 문장이 묘하게 뒤섞여 아름다운 교향곡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고골의 텍스트는 눈으로 읽을 때보다 소리 내어 읽을 때 더 맛이 난다.”(p.77)는 말에 무심히 ‘굳이 낭독을?’ 해온 필자로서도 진심으로 한번쯤 도전하고 싶어진다. 대표적으로 참고 참던 아카키 아카키예비치가 “날 내버려둬요. 왜 날 모욕하는 거요?”(p.14)하던 목소리는 사실 책을 다 읽도록 환청처럼 귓가에 맴돈다. 이제 “외투”에 결코 뒤지지 않는 “코”를 비롯해 고골의 단편들을 다시 읽을 것이고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는 “검찰관”과 “죽은혼”은 올해는 넘기지 않길 바랄 뿐이다. 짧지만 강렬하고 여운은 긴, 아무리 다시 읽어도 매력이 줄지 않는 작품이기에 거듭 권하게 된다. 200여년이 다 되어가는 소설이 그렇다면 지금 당신에게 외투는, 페테르부르크는? 하고 묻는다. 여러 겹으로 의미를 덧입힐 수 있고 상상의 여지를 열어두기에 “외투”읽기는 보물캐기와 같을 것이다.

그 대신에 그는 앞으로 생길 외투를 늘 마음속에 그리며 정신적인 양식을 섭취했다. 이때부터 그는 존재 자체가 어쩐지 더 완전해진 것 같았고, 마치 결혼이라도 한 것 같았고, 어떤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것 같았고, 혼자가 아니라 마음에 드는 어떤 인생의 반려가 그와 함께 인생길을 가기로 동의한 것 같았다. 이 인생의 반려는 다름 아닌, 두툼하게 솜을 두고 닳지 않는 튼튼한 안감을 댄 바로 그 외투였다.(p.33)

아카키 아카키예비치가 없는 페테르부르크는 마치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변함이 없었다. 어느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어느 누구이 애정도 받지 못하고 어느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한 존재, 심지어 흔한 파리 한 마리도 놓치지 않고 핀에 꽂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자연관찰자의 주의조차 끌지 못한 존재가 사라지고 자취를 감춘 것이다. 동료 관리들의 조소를 묵묵히 견뎌낸 그 존재는 어떤 특별한 일도 없이 무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런 존재에게도, 비록 생이 끝나기 직전이었지만, 외투의 모습을 한 명랑한 손님이 갑자기 나타나 짧은 순간이나마 가련한 인생에 생기를 불어넣어주었다. 그러고 나서 황제나 세계의 지배자에게도 닥치기 마련인 불행이 잔인하게 그를 덮쳤다.(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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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네 마리 늑대 - 생태계를 복원한 자연의 마법사들
캐서린 바르 지음, 제니 데스몬드 그림, 김미선 옮김 / 상수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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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 바르의 『열네 마리 늑대Fourteen Wolves: A Rewilding Story(제니 데스몬드 그림/상수리) 2022』는 “생태계를 복원한 자연의 마법사들”이라는 부제의 실화 그림책이다. 포식자인 늑대와 생태계 복원의 주인공이라는 명칭은 일면 부합하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생태학을 공부하고 그린피스와 자연사박물관에서 활동해온 작가는 생태 파괴와 회복의 현장을 정확히 전달함으로 독자에게 이해는 물론 감동까지 선사한다. 조금 큰 판형의 표지 배경은 초록색 나무가 울창한 숲이다. 정 중앙에 자리한 늑대는 크기와 눈빛으로 압도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리저리 혼란하게 찍힌 발자국은 앞 면지를 채우는데 뒤 면지에서는 다시 살아난 숲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국립공원이 된 옐로스톤 공원은 수천 가지 다양한 야생동물의 보금자리로 생명력을 자랑했지만 “늑대가 사라진 후” 황무지처럼 변했던 곳이다. 인간이 여러 이유를 대며 늑대에게 총구를 겨눈 이후 연쇄 반응으로 일어나는 인과관계는 모두 “늑대가 사라지자”로 시작된다. 책은 늑대가 사라지면서 황량해지기 시작한 옐로스톤 국립공원에 늑대를 다시 들여와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생태계 복원 프로젝트 중 하나로 꼽히게 된 드라마틱한 현장을 담는다. 1부 “고향으로 돌아오다”는 황폐한 곳에 이주시킨 늑대가 무리를 짓고 정착하고 본성에 충실할 수 있었을 때, 즉 더 이상 인간이 개입하거나 방해하지 않았을 때 변화를 위한 준비가 끝난다. 2부는 “새로운 옐로스톤”으로 생태복원 현장이 순차적이면서도 동시 발생하는 마법처럼 아름답게 그려진다. “늑대가 다시 돌아오자, 공원 안 모든 동물들과 생명체의 삶도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공원의 풍경도 놀랄 정도로 달라졌어요.”(p.27) 3부에서는 “자연이 돌아가는 원리”를 책을 90도로 돌렸을 때 위아래 한 화면으로 일목요연하게 전한다.

간결한 입말체 문장은 복잡해 보일 수 있는 생태계 복원 과정을 어린이도 쉽게 이해하도록 해준다. 익숙지 않은 동식물은 활자 크기에 변화를 주며 이름과 설명을 실어 도감을 보는 것처럼 살피고 찾아보게 만든다. 사실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수채화는 국립공원 곳곳을 상상하고 간접 경험케 해준다. 열네 마리 늑대를 기록한 페이지에서도 독자는 한참을 머물게 될 것이다. 친화력 좋은 늑대들은 자기가축화하여 지구상에서 가장 성공한 종 가운데 하나가 되어 인간의 반려동물로 살아가고 있지만 “얼마 남지 않은 야생 늑대 개체군은 슬프게도 끊임없이 멸종의 위협에 노출되고 있다.”(p.80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브라이언 헤어)고 한다. 이 위협은 그들에게만 한정된 위협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또한 특별한 늑대 “브레닌”도 오랜만에 그리워한다. “철학자와 늑대”에서 활자로 생명을 얻은 마크 롤랜즈의 멋진 친구 브레닌 말이다. 『열네 마리 늑대』는 후루룩 넘겨볼 그림책은 아니다. 등장하는 모든 생명들에 오래 눈 맞춤 하고 귀 기울여야 할 것 같은, 그렇기에 소장 목록에 올려야 할 작품이다.


(출판사 도서제공/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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