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프티 피플 (리마스터판) - 2017년 제50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정세랑 지음 / 창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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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세상에서 사람은 곧잘 무한히 맞물리며 작동하는 톱니바퀴에 비유한다. 시스템에 갇힌 채 익명이 익숙한 사람들은 어디나 있다. 때로 패턴화한 몰개성은 피로를 낮출 뿐 아니라 예의와 동류로 인식되기도 한다. 등장인물이 오십 명 쯤 된다면 한두 가지 주조색으로 수렴하거나 채도를 낮춰 완만한 풍경을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피프티 피플』의 인물들은 소외되는 법 없이 자기 자리에서 균형점을 향한다. 해피 엔딩 일색이 아니라 각자의 최선을 경주한다는 의미로 빛을 낸다. 그들은 표지 사진처럼 적당한 열을 받아 분자운동이 활발해진 3차원 공간 안의 컬러볼을 연상케 한다. 격차 없이 고르게 주목 받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창비, 2021, 488쪽)』이 2016년 세상에 나온 이후 개정판으로 찾아왔다. 정세랑은 2010년 「드림, 드림, 드림」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2013년 『이만큼 가까이』로 창비장편소설상을 받았고 2017년 『피프티 피플』로 “강력한 가독성과 흡인력으로 이 사회의 연대 의지를 되살리는 작품”이라는 평을 들으며 한국일보문학상 수상했다. 작가는 소설집과 산문집 외에 드라마로도 방영되었던 『보건교사 안은영』, 3대에 걸친 여성서사로 주목받은 『시선으로부터』등 다양한 작품에서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든다.

『피프티 피플』은 오십 여명의 이름이 목차를 구성한다. 첫 번째 이름 송수정부터 차곡차곡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책 전체가 충실한 등장인물 소개다. 읽는 일이 그들의 삶에 노크를 한 후 차례로 방문하고 떠나오는 일의 반복인 셈이다. 어떤 방문은 돌아서기가 망설여지고 더 머물러야 할 것 같다. 그의 손을 잡아주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내 속내도 털어 놓을까 하고 불시에 살피기 때문이다. 작은 힌트를 주고 싶은 이름이 있고 현명함을 배우겠다고 잊을세라 메모하게 만드는 이도 있다. 영화에서나 가능할법한 사건 사고가 일반인에게 벌어져도 하소연할 수가 없다. 불가능하리라는 상식은 삶의 곳곳에서 파괴된다. 그저 싱크대 안쪽에 꽂혀있던 빵 칼이 사용될 줄 누가 알았겠나, 내 털실 인형같은 며느리가 구멍에 빠질 줄 누가 알았겠나, 폴 댄스 영상이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될지, 화물차가 빗길에 미끄러져 넘어오고 비가 강력한 트리거로 변하게 될지, 안하무인 광 상사를 군대에서 만날지를 누가 알았겠느냐 말이다. 이러이러한 삶을 예측하고 기대했을지라도 실시간 수정하게 되니까 계획이고, 살아가야 하니까 인생이다.

작가는 적절한 비유로, 꼼꼼한 묘사로 뭉뚱그려져 있어 답답하고 괴로운 감정을 독자에게 설명한다. 작가의 언어가 회피하고 있던 내면의 덩어리를 조명할 때 부드러워지기도 작은 덩어리로 갈라지기도 한다, 제법 다루기 수월한 크기로 줄어들자 명명해 볼 기회가 된다. 등장인물의 상황을 빌어 현실에 대어 보는 게 소설 읽기의 미덕이기에 거듭 활용해 본다. “특수한 촬영기기가 나와서 윤나의 복잡한 안쪽을 찍어볼 수 있다면, 환의는 그 기계를 다룰 수 있도록 잘 배울 것이다.”(p.69) 나 역시 기계치라는 약점에 결연히 맞설 테고 이에 더해 마음 번역기나 무의식 해석기기 따위도 나오기를 바래본다. 미진함이라고는 남기지 않는 완벽 소통을 꿈꾸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피프티 피플』은 감정과 이성을 고루 긴장시킨다. 깔끔하게 정리된 인물관계도를 속으로 탐내며 정작 엄두는 못낸다.

표지 사진은 달콤함으로 무장한 불량사탕 같기도 반전 맛을 숨긴 소금사탕 같기도 하다. 친절하고 동시에 잔혹한 세상이라는 공간에서 컬러 뒤에 숨은 진정한 맛은 무엇일지 가늠한다. 통통볼처럼 튀어 오르기도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기도 한 사람들이 ‘지금’을 통과하고 있다. 작가가 그려내는 우리 시대의 얼굴은 정성스럽다. 그들이 처한 고통을 다 아는 척 하지 않고 다만 이름 불러주고 성실하게 기록해내는 시선이 지지를, 때론 응원을 담는다. 읽다보면 가장 마음이 가는 인물이 누구일지 궁금해진다. “아무도 한나가 사서인 걸 모르지만 한나는 사서로 살 것이다.”(p.265) 책만 있으면 잘 지내는, 비밀리에는 언제나 사서인 한나의 모습이 마음에 남는다. 양혜련처럼 동화같은 해피엔딩도 있다. 어떤 문장에서는 밑줄을 세게 긋는다. 별도 붙여 놓는다. 위트 넘치는 문장이 웃음을 주지만 철렁함도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누구에게나 할당된 무대, 허락된 지면이 있다. 이를 구상하고 채우고 꾸미는 일은 각자의 몫이다. 등장인물이 오십 명인지 오십 일 명인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마도 그 끝에 등장시킬 독자 자신의 이름일 것이다. 촘촘하게 이름 불러주는 이 소설은 당신의 이름도 불러줄 것이다. 『피프티 피플』은 더 좋은 오늘을 위해 바라고 노력하도록, 다정하게 살피도록 힘을 싣는다.


책속에서>

개개인은 착각을 하지요.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사람의 능력이란 고만고만하기 때문에 돌이 멀리 나가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사실은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시대란 게, 세대란 게 있기 때문입니다. 소 선생은 시작선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내 세대와 우리의 중간 세대가 던지고 던져서 그 돌이 떨어진 지점에서 다시 주워 던지고 있는 겁니다.(p.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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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청 - 잃어버린 도시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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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함은 간절한 심정을 부추기고 막막함은 한 걸음을 내딛게 만든다. 잃어버릴 수 없는 마음은 그 자체가 눈이 되어 잃어버린 도시를 향한 움직임에 부지런하다. 비록 호흡을 잃은 채 도달할지라도 중단할 수 없는 여정이 있다. 백 년 전을 담아낸 책 속에서 여정은 분명하고 21세기 현재에서도 진행중이며 타협과 설득, 합리적이고 매끄러운 어떤 이론으로도 방향을 틀 수도, 그 길을 대체할 수도 없다. 위화의 『원청』(문현선 옮김, 푸른숲, 2022, 588쪽, 文城, 2021)은 부제인 “잃어버린 도시”를 찾아가는 주인공의 행적을 중심으로 한 전기소설이다. 기이한 이야기를 전한다는 사전적 의미의 전기소설은 작가 위화의 오랜 꿈이었고 8년 만에 발표한 『원청』에서 결실을 맺는다. 위화는 중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모옌, 옌레커와 함께 중국 3대 현대작가다. 그는 1983년 첫 단편 발표 이후 1993년 두 번째 장편 <인생>으로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이후 <허삼관 매혈기>, <형제>, <제 7일> 등 5편의 장편과 산문집을 냈으며 여러 문학상을 수상했다. 장강명은 추천사에서 이토록 쉽고도 심오한, 웃기면서 동시에 슬픈 작품을 쓴 위화를 마법사에 비유한다. “위화적인 순간”에 함께 하자는 초청에, 8년 만에 펼쳐지는 차갑고도 먹먹한 행로에 오를 시간이다.

소설 『원청』은 <원청>과 <또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전자는 주인공 린샹푸의 관점에서, 후자인 <또 하나의 이야기>는 린샹푸를 끝없는 길로 이끈 샤오메이의 관점에서 서술된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던 린샹푸는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열아홉에 어머니를 잃고 집사인 톈다와 그의 동생들과 지낸다. 아름다운 류펑메이와의 혼사도 놓쳤던 스물넷에 린샹푸는 젊은 오누이 샤오메이와 아창을 만난다. 양쯔강을 건넌 뒤에도 한참을 더 가야 나오는 강남 물의 고장 원청에서 왔다는 그들은 글자가 날아가듯 빠르게 말한다. 샤오메이는 아창이 데리러 올때까지 집에 머물던 중 린샹푸의 아내가 되지만 어느 날 사라져버린다. 다시 돌아온 그녀는 딸을 낳고 아이가 한 달이 되자 또다시 종적을 감춘다. “당신이 또 말도 없이 떠나면 내가 찾으러 갈 거예요. 아이를 안고 세상 끝까지 가서라도 당신을 찾을 거예요.”(p.81)라는 말대로 고향을 떠난다. 하지만 원청이 어디인지 누구도 알려주지 못해 아창의 이야기를 회상하며 시진으로 향한다. 원청과 가장 가까운 시진에서 언제까지고 샤오메이를 기다리겠다고 마음먹는다.

린샹푸는 모든 게 인연이고 운명이라고 결론지으면서도(p.67) 자신이 맺은 관계에 정성을 다한다. 5년 동안 친구였던 당나귀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진에 거하며 함께하게 된 천융량과 그의 가족, 구이민까지 그는 받은 호의에 우정으로 답한다. 그러면서도 시진에서 보내는 10년간 샤오메이 찾기, 또는 샤오메이 기다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믿지 못할 자연의 광란과 토비들의 잔악한 행동은 개인의 문제에만 집중하는 일을 허락하지 않는다. 13년이 지나자 린샹푸는 원청도 샤오메이와 아창이라는 이름도 가짜일거라고 여기며 고향을 생각한다. 그는 토비에게 납치된 시진의 회장 구이민 구조에 자원한다. 소설 후반 3분의 1분량은 샤오메이의 변이 나온다. 그녀는 왜 그랬을까? “샤오메이는 넓은 완무당에서 길러진 활발한 천성을 시진 선가에 들어온 뒤 푸른색 꽃무늬 새 옷에 응축해 가슴 깊이 묻었다.”(p.414) 그 후 샤오메이가 가슴 깊이 묻어야 할 것은 꽃무늬 옷 뿐이 아닌 린샹푸, 그리고 100여 집의 젖을 먹고 자란 딸 린바이자로 귀결된다. 린샹푸가 시진 천융량의 집에서 나오던 눈 내리던 밤, 원청은 이미 사라지고 있었을까.

소설의 배경은 1900년대 초반 신해혁명기다. 군인세력이 난립했던 군벌시대에 지방에서 출몰하던 도적떼, 토착 비적인 토비가 민중을 참혹하게 옥죄던 시기다. 역사라는 거대 수레바퀴에 속수무책으로 치이고 쓸려가는 평범한 인간은 비참한 현실 앞에 두려워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무자비한 바큇살 앞에서 굳어버리는 대신 두려움에 맞선다. 살아남아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내고자 결단하고 기꺼이 적진으로 향하나 때론 믿을 수 없이 허망하고 느닷없는 종말에 이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원청』은 꺼져가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는 의례이기도 하다. 소설은 작가의 의도일지 아닐지 궁금해하며 등장인물들의 남은 삶을 추측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린샹푸와 샤오메이의 딸 린바이자의 행적은 끊긴 채 이어지지 못했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미완의 느낌을 원했노라고 전한다.

『원청』을 향하는 린샹푸의 여정은 내내 『성』을 향하는 토지측량사 K의 시간을 상기시켰다. 도달해야만 하는 이상향이 거창하거나 원대하지 않더라도 한 사람의 평생을 담보하는 일은 곧잘 발견된다. 그 상징은 눈 앞의 『성』이 그랬듯 모습을 바꾸거나 속이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평생 매진한 가치가 알고 보니 내가 추구하던 대상에서 빗나가 있을 수도 있다. 이 틀어짐을 마지막 날들을 목전에 둔 때에야 알아차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보상받거나 하소연할 수 없는 게 동일한 인간 조건일테다. 린샹푸는 자신들은 알 수 없을 한 순간 마침내 아내 곁에 머문다. 마지막 페이지에 완독일과 시간을 쓰며 한 문장을 적었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인가!”라고. 지금 덧붙이고 싶은 문장은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라는 한 시인의 글이다. 독자는 가련하고 연약하기에 더 강하고 아름답다는 ‘그럼에도’의 역설, 역설의 미학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책 속에서>

린샹푸는 천융량을 떠올렸다. 천융량이 여기 있었다면 틀림없이 일어나서 자신이 가겠다고 나섰을 터였다. 그러자 린샹푸는 천융량이 여기 있었으면 그를 보내는 대신 자신이 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린샹푸는 고개를 들고 자신을 바라보던 눈동자들이 슬그머니 돌아가는 걸 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제가 가겠습니다.”(p.322)

아창과 샤오메이는 서로를 보고 있었지만 사실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아창의 눈에는 당혹감만 가득하고 샤오메이의 눈에는 눈물밖에 없었다. 당황한 눈은 맞은편의 눈물을 보지 못했고 눈물 속 눈은 맞은편의 당혹감을 볼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우물과 강물처럼 처지가 달랐다. 한 사람은 우물에 대해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강물에 대해 생각했다.(p.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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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는 그림 - 숨겨진 명화부터 동시대 작품까지 나만의 시선으로 감상하는 법
BGA 백그라운드아트웍스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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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리하고 유용한 구독서비스는 온 오프라인에서 일상이 되었다. 구독물도 잡지나 영상은 물론 꽃다발 등 실물까지 다양하며 범위는 실시간 확대되고 있다. 매일 늦은 밤 같은 시간에 한 점의 그림과 글이 도착한다면 어떨까? BGA 백그라운드아트웍스의 『내가 읽는 그림(위즈덤하우스,2023),304쪽 분량』은 온라인 상 축적된 그림-감상에세이 중 121편을 엄선해 책으로 묶었다. BGA 백그라운드아트웍스는 국내 최초 데일리 미술 구독 콘텐츠이자 어플리케이션 플랫폼으로 명화부터 동시대 작품까지 편중 없이 소개한다. 책은 자신만의 시선으로 자유롭게 작품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는 취지와 잘 맞는 그림+글 페어링을 꼽았다고 하니 선별에 선별을 더한 셈이다. 독자는 양질의 문화를 애호하고 향유하는 ‘지름길’에 편하게 들어선듯하다.

『내가 읽는 그림』은 시인부터 문화평론가, 화가 등 스물네 명의 필자가 자신의 갤러리를 구상하고 선보이는 형식을 취한다. 간단한 필자소개와 작품 선별 기준 및 주제 제시, 부연 설명과 선정한 작품 소개, QR코드를 첨부해 언제 어디서나 실시간 접속 및 감상까지 가능케 한다. 본격적으로 장별 5~6개 작품과 에세이가 등장한다. 오른편에 작품, 왼편에 글이 실리는데 그림은 때로 양면을 펼쳐 활용하기도 한다. 눈에 익은 그림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생소한 작품들, 특히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이 비중을 차지한다. 동일한 화가가 다른 필자의 다른 주제로 소환될 경우 조금 더 눈여겨보게 된다.

“하늘을 나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본질적인 새의 모습이지만, 그가 스스로를 확인하고 돌아볼 수 있는 것은 오직 땅으로 내려온 이후입니다.(중략) 우리는 어째서 착륙 이후에만, 침잠 이후에만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을까요.”(p.66) 전병구의 <무제>에 보탠 정희영의 글을 보며, 또 한성우의 <무제>에 대한 허호정의 글을 보며, 계속 이어지는 글의 연속 앞에서 페이지는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나는 70여일 전부터 “즐거운 예감”에서 100일 예술 에세이 쓰기에 참여하고 있다. 3분 응시하고 15분 글쓰기의 형식이다. 초고는 15분 안에 쓰지만 퇴고 시간은 추가된다. 필진들의 글을 보며 이렇게 쓰기 위해 들어가는 시간을 가늠하게 된다. 가령 15분이더라도 필자의 나이 더하기 15분, 생의 궤적 더하기 15분이 맞겠지만. 결과물은 다르고 세상에 하나뿐인 감상이 기록으로 새겨지는 듯하다.

이 책의 장점으로 제본을 비롯한 세심한 만듦새를 빼놓을 수 없다. 완전히 펼쳐져 그림 감상의 최적화를 꾀한다거나 새로운 장이 시작되는 페이지는 전시실 입구처럼 색지를 사용해 환기하는 점은 읽는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다채로운 그림을 모아둔 화집으로서의 역할도 한다. 새로운 동시대 화가를 발견하는 기쁨도 누릴 수 있다. 에세이는 어떤가. 최고 아닌가. 그런데 여기에 조심스러움도 추가된다. 이정도 통찰에 못 미치면 감상이 어려운건가 라는 심리적 장벽을 드리울 수도 있겠다. 글이 빼어나다보니 시선이 그림으로 회귀하기 어렵고 글에 고정된 채 독자는 반응한다. 사유의 계단으로 걸어 내려갈 때 숙면보다는 정답 없는 미로공원 입구에 우뚝 서게 된다. ‘존재’하기 위한 디폴트 값으로써 사유는 좋은 것이니까 바람직한 일면이지만 내 마음은 이미 불면이다. 그럼에도 이토록 근사한 시선, 이토록 명징한 직면, 이토록 첨예한 확장과 의미부여에 감탄한다. 좋은 그림도 글도 넘쳐나는 시대에 고르고 추린 한 권의 책은 독자의 시간을 아껴줄 듯하다.



(서평단-출판사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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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비결 - 좋은 문장 단단한 글을 쓰는 열 가지 비법
정희모 지음 / 들녘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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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모의 『문장의 비결(들녘, 2023, 324쪽)』은 잘 쓰고 싶지만 나름의 노력에도 여전히 동일한 갈증에 시달리는 독자라면 반가울 책이다. “이 책이 나의 문장을 구원하리라”며 하나씩 수집한 글쓰기 책이 상당히 쌓였음에도 명저의 명언에 졸필은 오랫동안 아랑곳 않는다, 그렇다고 누가 글쓰기를 포기하겠나. 서문에서 저자는 대상 독자를 언급한다. “특히 좋은 문장을 쓰고 싶지만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필자, 또 문장을 쓰고도 잘못 쓰지는 않았는지 두려워하는 필자”(p.5)라면 더 이상 망설일 게 없다. 두려움과 불안감 사이, 의심과 좌절 사이에서 세쪽이 한 문장인 만연체와 의식의 흐름 기법을 선망하는 필자는 가장 적합한 교정서를 발견한 셈이다. 현재 연세대 국문과 교수인 저자는 글쓰기에 관한 학술적, 대중적 저술 작업을 해왔으며 모교인 대학의 국문학과에 글쓰기 강의를 개설했다. 2005년 공저한 『글쓰기의 전략』은 선구적인 글쓰기 책으로 평가받으며 이후 유사한 책들이 뒤따르게 된다. 주요 저서로 『글쓰기 교육과 협력학습』 『글쓰기 교육의 이론적 탐색』 『창의적 생각의 발견, 글쓰기』등이 있다.

『문장의 비결』은 총 열 개장에서 좋은 문장, 단단한 글을 쓰는 방법을 짚어나간다. 저자는 좋은 글이란 “형식과 내용 면에서 균형감이 있고, 표현의 디테일이 살아 있는 글”이라고 말한다.(p.21) 균형감이 전체 구조의 안정감이라면 디테일은 문장, 문장 연결, 비유와 상징 등 세부사항 전체를 의미한다. 간결한 문장이 더 정확하다는 말은 첫 장부터 거듭 등장한다. 짧은 문장의 중요성은 2장의 화두다. 스티븐 킹의 부사 퇴치 주장은 더 이상 강조할 수 없을 정도다. 글을 압축하는 과정은 정민 교수의 예화로 이해를 돕는다. 수정할수록 여운은 남고 생각은 깊어짐을 확인할 수 있다. 3장은 생각의 논리와 글의 논리는 일치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사유의식’ 그대로 글을 쓰지 말 것, 생각나는 대로 쓰지 말 것, 문장 흐름을 하나씩 따지면서 차근차근 쓸 것(p.92). 새겨야 할 부분이다. 이어 한국어 기본 문형을 살피고 다양한 복합절 사례를 통해 어떻게 정리하고 수정할 수 있을지 설명한다. 6장 명사형, 동사형 문장에서는 서술어를 잘 살려 쓰는게 좋은 문장을 쓰는 첩경이라고 전한다. 명사형 문장을 서술형으로 바꾸는 연습은 해볼수록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서술어 중심, 동사형 문장의 중요성은 많은 글쓰기 저서들이 강조했지만 익숙함에 빠진 글은 자동 발사되듯 앞서 나간다. 명사절 남발과 잦은 수동태 출몰, 치렁치렁 꾸미며 묘사에 묘사, 설명에 설명을 덧붙이는 글도 고치지 못했다. 『문장의 비결』은 문장 안에서 절과 절이, 낱말과 낱말이 서로 발을 걸어 쓰러뜨리는 형국에 지쳐갈 즈음, 고집스러울 만큼 한결같은 문장들을 다 불태워버리고 싶다고 생각할 때 읽었다. 책은 길게 설명하지 않지만 중요한 부분을 반드시 강조한다. “비결”인 이유다. 글을 쓸 때 지켜야 할 최소한의 법칙이며 이는 선택 사항이 아닌 필수다. 예시 문장에서 장단점을 발견하고 수정하는 과정은 좋은 문장이 저절로 써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각 장 마무리에 핵심 체크와 실전 체크를 실어 배운 내용을 확인하고 체화하도록 돕는다. 책에서 사용하는 용어와 설명, 어법적 해설까지 어렵지 않다는 장점도 빠뜨릴 수 없다. 이제 원칙을 기준 삼아 쓰고 있는 초고를 다듬어 보려 한다. 확신을 가지고 좋은 문장을 쓰고 싶은 모두에게 권하고 싶다. 누구보다 스스로에게 해주고 싶은 말,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다. 단 번에 나아질 수 없을지라도 나아가는 일을 멈추지는 않게 될 것이다.

책 속에서>

이처럼 좋은 글은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내가 지금 문장을 읽고 있다는 생각을 잊어버리게 해준다. 문장을 읽으면서 이미지가 떠오르고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흘러갈 때 우리는 글 속에 담긴 참된 의미를 느끼게 된다. 오랜 숙련을 거친 작가들은 문장을 문장으로 쓰지 않고 이야기로, 삶으로, 생활로 쓴다. 좋은 문장은 이게 문장이란 것을 잊어버릴 때 써진다.(p.142)


<출판사 도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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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과 즐겁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법 - 의심을 생산하는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철학적 대화 실험
리 매킨타이어 지음, 노윤기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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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과 즐겁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법(노윤기 옮김, 위즈덤하우스, 2022, 456쪽)』은 철학자 리 메킨타이어의 신념이 이끄는 열정 가득한 저서다. 자못 긴 제목은 초지능, 초연결, 초융합으로 상징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고개를 갸웃할 주제다. 대화형 인공지능이 현란한 기술을 선보이며 일상이 혁명 같은 날들을 겪고 있는 21세기에 느긋해보이는 제목부터 조치가 필요해 보인다. 왜 제목부터 불편할까? 무시 못 할 걸림돌들이 자꾸 발끝에 채이기 때문이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진지하게 믿고 있어요, 라고 지인이 말을 건넨다면 속으로 답할 것이다. “아니 왜? 설마.” 그 후 대화의 주제를 바꿀 것이다. 그러니 그와 즐거운 대화라, 어렵고, 생산적인 대화라, 역시 어렵다. 어려운 일에 전심으로 기꺼이 몰두하는 것, 내가 가진 물질과 시간을 투자하고 에너지를 끝없이 쏟는다면 어떨까. 상상만으로도 지치는 그 어려운 걸 저자는 해낸다. 책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과 즐겁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방법론이기도 하지만 동참하자고 설득하는 초대에 더 가깝다.

제사로 인용한 레온 페스팅거와 마크 트웨인의 글이 앞으로 직면할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그가 속았다는 사실을 납득시키는 것보다 그를 속이는 일이 더 쉽다.”(마크 트웨인)는 명징한 한 문장을 저자는 각오처럼 걸고 시작한다. 리 매킨타이어는 철학과 과학사 센터 연구원과 윤리학 강사를 지냈던 철학 박사로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하버드대학교와 보스턴 연방준비은행 등에서 자문 및 연구부서 부편집장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뉴욕타임즈> 등에 기고하는 한 편 저서로는 『포스트트루스』. 『과학적 태도: 과학 부정론과 사기와 유사 과학으로부터 과학을 수호하기』 등이 있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사실과 현실마저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탈진실‘의 시대이며 ’현실 부정‘은 ’과학 부정‘이라는 근원으로 연결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15년간 연구실에서 과학부정론을 연구했던 저자는 2018년 “평평한 지구 국제 학회”에 참가한다. 최악 가운데서도 최악이자 과학 부정론의 가장 기본적인 사례에 도전함으로 대화의 물꼬를 틀고 유의미한 변화를 일으킬 첫걸음을 내딛는다.

2장 “과학 부정론이란 무엇인가?”에서는 과학 부정론의 다섯 가지 구성요소인 체리피킹, 음모론, 가짜 전문가에 의존, 비논리적 논증, 과학이 완벽해야 한다는 주장을 차례로 설명한다. 이는 “결과적으로 그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과학에 맞서 싸우는’ 전투 계획이 된다. 과학을 부정하는 일은 오류가 아니라 거짓이다. 허위 정보가 의도적으로 생성되기 때문이다.”(p.107) 다섯 가지 수사는 의도적인 전략이다. 또한 그들의 신념, 즉, “그들이 믿는 것은 그들 자신의 반영”(p.126)이며 그들이 경험한 결핍은 정보가 아닌 “신뢰의 결핍”이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3장에서는 실증적 문헌, 연구 논문들을 검토하고 적용해 본다. 특히 슈미트와 베슈의 실험으로부터 “잘못된 정보에 대해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는 것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악의 일”(p.147)이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연구실 밖으로 나온 저자의 도전은 계속된다. 지구상에서 가장 낮고 평평한 나라 몰디브에서 기후변화 위협의 현주소를 확인한다. “그들은 어떤 과학도 가르칠 수 없는 것들을 이미 체득한 것 같았다. 그것은 신념이 아니라 관심의 문제였다.”(p.206)며 슬픈 한계를 직시한다. 석탄 광부들과 환경문제를 이야기하고, GMO(유전자변형생물체)를 불신하는 동료들과 문답을 이어간다. 때론 민감하고 의견이 나뉘는 주제이지만 대화로 서로를 설득하지 않는다. 대화를 가능하게 한 유일한 요소는 신뢰와 상호존중임을 확인한다. 정치적 입장과 과학부정론의 연결 고리도 계속 등장한다. 과학 부정론의 최신 사례인 코로나 19 팬데믹 에서는 음모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확인한 후 대응 방법을 정리한다.

저자는 가능한 경우의 수를 살펴 과학 부정론을 바로잡고자 동분서주한다. 그의 설득은 집요하고 간절하고 확신에 차 있다. 과학 부정론자들을 외면하고 어리석은 자들로 치부하는 일은 솔깃한 유혹임을 안다. 그럼에도 “우리는 특히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다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p.343)고 자신의 메시지를 다시 한 번 언급한다. 방법은 거의 유일하다. 신뢰와 관계 구축, 공감과 존중의 자세로 대화하기다. 살려내야 할 지구, 살아남아야 할 모두. 어느 한 편이 아닌 모두의 생존을 끝없이 주장하는 목소리가 배어 있는 책이다. 다만 재차 반복되는 부분을 조금 더 요약 전달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분명 저자의 간절함이 브레이크 따위는 치워버렸다고 이해된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했으리라. 생생하고 치열한 저자의 여정에 동참하며 변화를 위한 나비의 날갯짓을 확인하고 싶은 독자들께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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