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아이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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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뉘엘 카레르의 『겨울아이(열린책들/전미연 옮김)』는 1995년 프랑스 3대 문학상 중 하나인‘페미나 상’을 수상해 주목받았으며(p.190,역자해설) 클로드 밀러 감독의 동명 영화로도 제작되어 칸 영화제에서 수상했는데 읽는 내내 감각을 일깨우는 작품이기에 원작이 영상과 음악을 덧입어 어떻게 재해석되었을지 궁금함을 더한다. 카레르를 향한 ‘자연주의적 엄격함과 예민한 촉수를 지닌 이야기꾼’(마가진 리테레르)이라는 찬사에 걸맞게 언론은 『겨울아이』를 ‘걸작’, ‘완벽한 성공작’, ‘언어의 기적’으로 평했는데 책을 펼쳐 이를 확인하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을 필요로하지 않는다.

니꼴라는 2주 동안 진행되는 스키캠프에 참여하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전세 버스를 탈 수 없었다. 학기 중에도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지 못하고 집에 와서 식사 후 돌아갔던 것처럼 캠프 대비 학부모 준비 모임에서도 아버지는 니꼴라를 위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친구들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니꼴라에게 불안요소였는데 깜빡 잊고 차 트렁크에서 여행가방을 꺼내지 못한 일, 실수로 잠결에 소변을 볼 가능성까지 더해 잔뜩 긴장하게 된다. 여기에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이 ‘종잡을 수 없이 아이들 위에 군림하는’(p.18), 예측하기 어려운 행동으로 아이들을 혼란케하는 오드칸이라는 점도 편치 않은 일이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려 했던 캠프였다. 마음대로 중단하기 어려운 2주의 일정이 부모님은 물론 니꼴라도 염려스러웠다. 산장에는 캠프 교사인 파트릭과 마리 앙주가 있고 여선생님도 계셨다. 처음 만났을 때 파트릭은 경직된 니꼴라에게 소원을 이루어주는 브라질 팔찌를 준다. 무슨 소원을 빌어야 할까, 니꼴라는 급하고 꼭 필요한 것부터 포괄적이고 유리한 소원까지 무게를 달아본다. 준비물 없이 캠프 훈련에 참여하기는 어렵다. 외과 의료기구 외판원이라 주로 도로 위에서 시간을 보내는 아버지는 연락이 닿지 않고 어머니 또한 시원한 답변을 주지 못한다.

트렁크의 의료용 견본을 아무도 만지지 못하게 했던 아버지는 공원에서 사라졌던 아이와 관련된 두려운 이야기를 했었다. 잠들지 못하는 니꼴라는 생각의 꼬리를 물다 무심한 상상을 보탠다. 연약하고 소심한, 동시에 동화 속 장면에 가슴 떨며 눈물 흘리는 민감한 소년 니꼴라에게 상상은 현실과 맞닿아 있다. 그 경계를 넘어 눈밭으로 나간 니콜라가 얻은 병은 파트릭과 소통할 기회를 선사하고 니꼴라에게는 뜻밖의 선물처럼 만족스런 시간이 흐른다. 헌병들이 오고 실종 사건의 종말이 알려지고 파트릭이 그를 자신의 집으로 돌려보내기까지.

소심하면서도 위축된, 동시에 민감하게 갈망하는 니꼴라에게 지금껐 허용되었던 환경은 의견이 존중되거나 편안히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안전지대는 아니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조차 아버지가 말하는 방식은 불편했고 “니콜라야, 세상에는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단다.”(p.35)라는 주의는 밤에 잠드는 것을 두렵게 했다. 초점잃은 시선과 떨리는 손을 한 채 더듬더듬 방을 나서던 아버지의 기억, 갑자기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에서 이사를 하던 날 터지던 울음, 뭔가를 숨기고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기에 함께 울 수조차 없었던 그날의 어머니(p.149)까지 소년은 보이지 않는 벽을 어렴풋이 의식한다. 동화 읽기는 이런 압박을 해소하는 니꼴라만의 방법이었다.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에 담긴 잔혹동화들, 가장 좋아했던 피노키오와 인어공주, 특히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목소리마저 잃었던 인어공주와 자신을 동일시했으며, 마지막 간절함을 담아 피노키오의 물빛 요정에게 현실에서는 이루지 못한 소원을 청했다.

일상으로부터 격리된 스키 캠프는 니꼴라가 새로운 삶에 대한 가능성을 엿본 곳이자 인간의 참혹함은 얼마나 세상을 망가뜨리는가를 짐작케 했던 이중의 공간이다. “니꼴라는 손목에 묶여 있는, 파트릭이 준 팔찌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라서 부모님이 더 이상 간섭하지 않게 될 때 말총 머리를 길러야지 하고 다짐한다.”(p.64) 캠프 교사 파트릭은 그에게 롤모델이자 좋은 어른으로써 니꼴라의 아버지와 대조를 보인다. 파트릭은 지금껏 니꼴라가 경험하지 못했던 전혀 다른 신호를 보낸다. 소원 성취의 소망을 담은 팔찌, 아랍의 왕세자들같은 특별한 기분, 몸과 마음을 이완하는 시간에 느꼈던 충만함까지 그가 보여주는 세계는 밝고 건강하다. 그래서 심적 벼랑 끝에 내몰릴 니꼴라에게 다행이며 희망이기도 하다.

니콜라는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소년다운 상상을 발휘해 위로받는 자신을 그려보며 “포근했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포근했다. 이 순간이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지속됐으면(p.51)”하고 파트릭과 차에서 음악을 들으면서는 “커서 파트릭처럼 되었으면 하고, 이렇게 능숙하게 운전하면서 편안한 여유를 갖는 사람, 그리고 몸의 움직임을 이처럼 마음가는 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하고······.”(p.59) 생각했다. 또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고 스키캠프는 계속되고 열은 떨어지지 않기를(p.107) 바랐다. 마지막으로, 집으로 올라가는 승강기 안에서 아이같던 소망은 더 이상 즐거운 희망으로 변하지 못하고 비통한 울림만을 남긴다.

『겨울아이』는 어린이들의 겨울 스키 캠프라는 설레임 가득한 분위기와 냉혹한 범죄를 나란히 놓는다. 잊지 못할 추억과 우정보다는 오드칸을 중심으로 한 힘의 논리와 그로인한 서열을 미화 없이 그려보인다. 작가는 니꼴라의 기억과 상상을 오가며 공원에서 일어났던 장기매매 사건, 장난하다 일어났던 총기사고, 의료사고로 간단한 수술 끝에 완전한 어둠 속에서 의식이 깨어났던 아이, 실종 소년 르네의 결말까지 니꼴라의 아버지가 들려주었던 혹은 개입되었던 에피소드들을 기록한다. 후에 니꼴라를 포함해서 위의 아이들과 그 가족이 “꿈에서 깨어나 마주한 현실”(p.138)은 냉혹하다. 또한 마지막 순간 르네가 자신이 살았던 삶을 꿈으로 무력한 죽음만을 삶으로 치환하는데 이런 자리바꿈은 작품 곳곳에서 아픈 자국을 안긴다. ‘왜’, ‘어떻게’, ‘앞으로’ 같은 단어들을 차마 내뱉지 못하게 만드는, 헤쳐진 상처 그대로를 내보이는 듯한 일관된 서술은 엄격하고 냉정하다.

그리고 작가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소년, 니꼴라는 어떡하나요? 라고 묻게 만든다. 스스로 선택한 적 없이 주어진 조건들은 누구의 잘못인가, 소년은 또는 제2, 제3의 니꼴라들은 이 중 어떤 부분을 감당하고 책임져야 하는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물을 때 롤러 나이프로 파이를 자르듯 선명하기는 너무도 어렵다. 눈물 흘리는 그러나 자신의 손을 빼는 파트릭과 마리 앙주의 기도는 니꼴라에게 무엇으로 닿을까 가슴이 답답해질 때 작가는 짧은 시간변조를 통해 마치 오 헨리의 「20년 후」처럼 20년 후의 오드칸과 니꼴라를 잠시 비춘다. “(중략)니꼴라는 곧 문이 열릴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문이 열리면서 그의 인생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이 삶에서는, 그에게 용서란 있을 수 없음을.”(p.186) 그의 인생’이라는 말이 그나마 희망적이다. 마지막 온점 이후, 다시 앞 장으로 페이지를 넘겨 이 힌트를 붙잡고 아이가 무사하기를, 아니 파트릭을 만났던 아이였기에 괜찮기를 기도하게 된다. 상상이 현실로 다가온 충격 속에서 꿈보다 막막한 삶의 문턱을 넘어서려는 결말은 이제 독자의 상상으로 자리를 옮긴다.

(한가지 혼란스러운 점은 서지정보에서 『스키 캠프에서 생긴 일』을 양장본으로 제작하며 『겨울 아이』로 바꿨음을 밝히는데 옮긴이의 말에서는 『그 해 겨울 방학』으로 작품을 언급한다. 역자해설에서까지 통일되지 않은 채 세 번째 제목으로 부른다는 점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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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터 캐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6
시어도어 드라이저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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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터 캐리(문학동네/송은주 옮김)』는 미국 자연주의 문학의 거장 시어도어 드라이저가 1900년에 발표한 데뷔작이지만 순탄치 않은 출간과정을 격었다. 해설에서 역자는 출간 후에도 작가가 신경쇠약으로 고생할 만큼 악평과 비난이 주를 이뤘던 이유는 '당시 청교도주의 전통에 근간을 둔 도덕적 엄숙주의'(p.658)가 작가의 통찰로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독자는 이 작품을 통해 ‘개인이 처한 사회적·생물학적 조건하에서 필연적인 선택을 하는 수동적 존재인 인간이 자신의 숙명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정론적 세계관에 따라(중략) 있는 그대로의 삶을 기록하고자 했’(p.660)던 자연주의 사조를 경험할 수 있다. 욕망과 우연과 운명에 무력한 인간이라는 세 겹의 보이지 않는 끈이 마리오네뜨 인형처럼 인간을 무심히 조정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없는가라고 묻는 것을 대비해 작가는 “인간은 이처럼 영원히 선과 악 사이에서 헤매지는 않을 것이다. 자유의지와 본능 간의 다툼이 조정되고, 완전한 깨달음이 자유의지에 본능을 온전히 대체할 힘을 부여하게 되면 비로소 인간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때는 이성의 지침이 진실이라는 머나먼 극점을 확실하고 변함없이 가리킬 것이다.”(p.106)라고 페이지를 할애한다. 문제는 시간의 개입이다. 그것이 언제냐 말이다. ‘이미 늦게’ 또는 ‘너무 늦게’가 되었을 때 판은 이미 비극으로 기운 후가 된다.

“캐럴라인 미버가 시카고행 오후 기차에 올랐을 때 지닌 것이라고는 작은 트렁크와 어깨에 멘 싸구려 가짜 악어가죽 가방, 점심거리를 넣은 작은 종이 상자, 노란 가죽 손지갑뿐이었다.”(p.11) 가족들에게 캐럴라인은 ‘시스터 캐리’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 “창가의 흔들의자에 앉아 결코 느끼지 못할 그런 행복을 꿈꾸리라.”(p.653)속 캐리의 모습은 외적으로 커다란 차이를 보일지언정, 내면으로 들어갔을 때 동일선상의 제자리 걸음, 기다림의 연속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녀는 타협한 적이 없고 나아지고자 또는 소유하고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캐리의 구직 순례 길에서 독자는 1889년의 시카고를, ‘미국 상업사에서 흥미로운 한 장을 차지하게 될’(p.38) 초기 백화점의 화려함을 만나기도 하지만 외면당하고 혹사당하는 통유리 뒤편의 보이지 않는 작업실을 엿보게 된다. 캐리는 ‘굶주린 개처럼 자기 뒤를 따라붙을 궁핍’(p.85)대신 드루에가 내민 손을 잡는다.

작가는 인물의 성격적 특징을 반복해서 설명한다. 마치 독자가 자신의 인물들을 잘못 오해할까싶어 계속 부연 설명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덕분에 경쾌와 경박을 오가는 가벼움, 악의는 없지만 어리석음이 문제인 드루에가 잘 보인다. 연이어 등장하는 살롱의 지배인 허스트우드와 배려라고는 없는-가정이 가정답게 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인내와 배려대신 ‘완벽하게 꾸며진 집’으로 그릴 수 있는(p.117)-, 어쩌면 무한히 반복되는 일반성 때문에 더 생생히 그려지는 그의 가정 분위기까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드루에를 통해 캐리를 알게 된 허스트우드는 이제 그녀만으로 자신의 마음을 채운다. 마음의 주인이 더 이상 자신이 아닌 이상 그의 흔들림은 예견된다. 그 정점은 지배인으로서의 임무, 금고를 점검하면서 저지른 사건인데 이 장면은 영혼의 거래와도 같이 긴장감 넘치게 그려진다. 이제 시카고에서 뉴욕으로 배경이 바뀌고 허스트우드의 추락은 처음의 모습과 비교했을 때 과연 동일인물이었나 싶을 만한 낙폭으로 정밀하게 그려진다. 아니 미끄러뜨린다.

많은 부분, 후반으로 갈수록 시스터 캐리를 브라더 허스트우드, 미스터 허스트우드로 읽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의 하락은 터무니없는 범죄로부터 시작되었기에 비난받아 마땅하다. 무책임과 무능, 회피와 비겁함이 교대로 등장하나 동시에 그의 전전긍긍 애쓰던 모습과 대도시의 차가운 비웃음에 두려움마저 버린 채 무력하게 작아져가고 결국 패배를 선택하고 인정하기까지의 여정이 가혹할 정도로 생생해서 안타까움을 더한다. 또 하나의 원인이 변화의 조짐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그의 무감각함인데(p.401) 이는 드루에 에게서도 특징적으로 볼 수 있고 캐리와는 대조를 이룬다. 그럼에도 어떤 도움이나 안전장치도 없이 소외되는 인간은 마음 아픈 초상일 수 있다. 그래서 캐리의 승승장구와 때때로 찾아온 각성의 기회들이 덜 빛나 보였다. 인간이 자초한 환경이지만 환경은 관계를 망가뜨리고 갈등을 증폭시키고 화해하거나 귀 기울이는 것을 방해하고 분노라는 앙금을 쌓으며 소통을 완전히 차단한다. 애초에 시작부터잘못이었음에도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잘못을 바로잡는 일은 영영 불가능할까 살피게 된다.

“이 도시를 마주하고 보니 자신이 친구들로부터 떨어져나왔다는 것, 제법 되던 재산은 물론이고 자기 이름마저 잃고 자기 자리와 안락한 삶을 위해 처음부터 다시 투쟁해야 함을 뼈저리게 느꼈다.‘(p.384) ‘자기 이름을 잃어버린다’는 허스트우드의 말은 이 작품의 주목할 부분이다. 그는 허스트우드에서 휠러가 된다. 캐럴라인인 캐리는 캐리 드루에로, 첫 번째 무대에서 드루에를 숨기고 캐리 마덴다로, 뉴욕으로 이동해서는 캐리 휠러, 휠러 부인으로, 다시 무대에 오를 때 마덴다로 이름한다. 인생의 변곡점에서 옷을 갈아입듯 이름을 바꾸는 삶이 씁쓸하게 다가온다. 주요 배경이 뉴욕이라는 점과 성공을 위해 달리는 여주인공, 그녀와 관계 맺는 주변의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에서 『맨해튼 트랜스퍼(존 더스패서스 저/문학동네/1925)』가 떠오르기도 했다. “시스터 캐리”가 나오고 5년 후에 출간된 작품으로 역시 배우였던 작중 주인공 엘렌은 많은 사람에게 열렬한 동경의 대상이었고 일레인, 엘리, 헬레나등 각각 다른 이름으로 불리웠으며 개인적 성취도 이루어냈었다. 그러나 그녀 역시 일순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공허함을 의식하나 포착하지 못한 채 지나치고 만다. 캐리보다 한 살 적은 열 일곱에 집을 나섰던 아일랜드 소녀 펠리시아(『펠리시아의 여정/문학동네』), 그녀의 무대(삶의 무대)는 어땠던가.

“시스터 캐리”는 발전을 거듭하며 물질 만능주의를 추구하는 거대도시를 배경으로 소무품이자 부속으로 전락하고 소외되는 인간을 보여준다. 표지판처럼 안내하는 첫 제목과 은유로 한 번 더 깊어지는 두 번째까지 이중의 제목을 가진 47장 구성이 독특하다. 47장 ‘패배한 자들의 길/바람 속의 하프’의 마지막 문단에서 작가는 해설과도 같은 자신의 목소리를 덧붙히는데 거의 모든 문장에 밑줄을 치게 한다. 촘촘한 그물로 건져낸 후 사진 찍듯 낱낱이 써내려간 작가의 문장은 독자를 타임머신을 태워 바람 쌩쌩부는, 낙엽이나 눈발 날리는 뉴욕의 거리에 내려놓는다. “미숙한 정신에 그런 하루는 미숙한 육체에 작용하는 마약과도 같다. 갈망이 생기고, 일단 한번 채워지게 되면 영원히 꿈꾸게 되어 결국 죽음으로 끝나게 되는 법이다. 아! 채워지지 않는 꿈. 정신을 갉아먹고 유혹하는 이 허망한 환상은 우리를 손짓하며 부르고, 손짓하고 또 부르다가 마침내는 죽음과 소멸이 그 힘을 녹여버리고 눈먼 우리를 자연의 품으로 되돌려보낸다.”(p.283) 이야기의 중반을 조금 넘어선 30장 ‘위대한 왕국/꿈꾸는 순례자’에 총평처럼 등장하는 문장이다. 비유와 열거의 반복은 눈앞에 그림을 그려내고 때론 시처럼, 노래처럼 아름다운 많은 지점들은 깨닫지 못하는 인간 불행의 대비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다 읽고 나면 다시 읽어야 할 장면들 때문에 책을 덮기가 아쉽다. 작가는 넓은 식물원 안에 조금씩 떨어져 있는 조각분수처럼 의미있는 문장들을 배치했는데 곱씹고 기억해야 할 그 문장들은 소설에서 걸어나와 현재를 사는 독자에게 자기를 뽐낸다. ‘어때?’라고 묻듯이. 꿈꾸지만 생각하지 않는, 그러므로 행동하지 않는 캐리라고 감히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캐리에게 찾아왔던 변화의 기회, “제가 당신이라면, 바꿀 겁니다.”(p.631)라는 에이든의 목소리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갈망하기만 할 뿐’(p.631) 스스로 기회를 놓아버린 채 익숙한 가면 속에 숨는 캐리를 작가는 내버려둔다. 감히 말할 수 없을지 모르겠다는 이유는 많은 경우 ‘현상 유지도 힘든데 도전은 가능할까’라는 잠재의식 속 목소리를 부인하기 어렵다는 점 때문이다. ‘결코 느끼지 못할 그런 행복을 꿈꾸며’(p.653) 부캐를 확장하듯 이름 즉 가면을 바꾸어가며 꿈을 쫓을 그녀는 인간 일반의 얼굴을 표상한다. 자라지 못하는 어른아이의 얼굴이다.




책 속에서>

이런 생각을 털어버릴 수 있는 것은 오히려 더 고차원적인 정신의 소유자들이다.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은 과거를 곱씹지 않고 자기만의 철학과 강인한 용기를 발휘하여 쓸데없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평범한 정신의 소유자들은 몸의 평안과 관련된 문제에 극히 예민하다.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다. 백 달러를 잃고 피눈물을 흘리는 쪽은 무식한 구두쇠쪽이다. 육체의 안락을 남김없이 다 빼앗기고도 웃음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에픽테토스이다.(p.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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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시아의 여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5
윌리엄 트레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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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트레버의 『펠리시아의 여정(1994/문학동네/박찬원 옮김)』은 서늘하고 불편한 시간을 끌고 간 후 기대하지 않았던 안도를 선사하는 묘한 작품이다. 작가들의 작가로 불리는(p.324) 윌리엄 트레버의 아일랜드 소녀 펠리시아 이야기는 가본 적 없는 도시와 거리로 줄곧 마음 졸이며 어깨를 움츠린 채 따라나서게 만든다. 인물도 사건도 극히 사실적이라 그녀의 여정은 불안한 연재 기사처럼 읽힌다. 역자는 “이 책은 선함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런데 기이하게도 선은 우리가 악이라 부르는 것을 끔찍할 정도로 가까이에서 접한 후에야 눈에 보인다.”(p.326)는 작가의 인터뷰를 인용한다. 우리는 선을 당연한 것으로 혹은 너무 무심히 대했던 것일까, 충격요법이 필요한 정도로!

우연히 마주친 시선 때문이었다. 열일곱 살, 오빠의 결혼식에서 화사하게 다가온 만남의 순간은 펠리시아에게 사랑의 시작이었다. 동시에 애를 태우는 두려움과 고민, 당연했던 일상과 단절하고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로 편입해 들어가는 여정의 시작이었다. 펠리시아에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행복감”(p.43)의 원천이었던 그, 사라져버린 그에게 태중의 아이를 알려야 한다는 절박함까지 더해 “조니 라이서트 찾기”는 긴박하고 유일한 삶의 목표가 된다. 지체 없이 길을 떠나는 펠리시아를 염려하며 독자 또한 서둘러 뒤따른다.

조니에게 가까워졌을까, 낯선 곳에서 손에 쥔 단서라고는 ‘잔디 깍이 공장’ 뿐이다. 펠리시아는 우연히 힐디치 씨의 눈에 띈다. 구내식당 매니저인 힐디치 씨는 “공장은 다른 세상이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그의 구내식당도 마찬가지다.”(p.24)라고 생각하는데 그는 자신의 주위를 여러 겹의 각기 다른 세상으로 에워싸고 있는 사람이다. “그것을 기억의 뒤안길이라 부르는 것이 좋다.”(p.69) 펠리시아의 출현은 ‘기억의 뒤안길’에 있는 그녀들을 일깨운다. 작가는 그의 지나온 기억과 목전의 현실과 의도하는 미래를 씨실과 날실을 교차시켜 튼튼한 이중 매듭으로 고정하는 카펫 짜기처럼 엮기 시작한다. 언뜻언뜻 궁금했던 무늬가 비밀한 윤곽을 드러낼 때까지.

버림받은 어머니와 그 곁에 남은 아들이라는 관계를 조니 라이서트에게서도 볼 수 있지만 힐디치 씨와 그의 어머니에게서 훨씬 두드러진다. 힐디치 씨는 아무도 보지 않아 ‘더는 미소가 필요치 않을 때 그는 우울한 사람이’(p.19)되며 이것이 그의 본 모습이다. 사람은 어떻게 괴물이 되는가를 작가는 시간 변조와 사건의 삽입을 통해 치밀하게 그려나간다. ‘혼자 살면서도 그 일은 결코-단 한 순간도-다른 기억들이 그런 것처럼 망각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거기 그대로 있었다.’(p.292) 유년의 상처는 묵히고 방치된 채 그가 꿈꾸던 것들을 남김없이 걷어차버렸다. 식기를, 선반을 아무리 벗기고 닦아내도 기억은 깨끗해지지 않는다. 타인의 시선은 무대가 되고 결핍과 강탈, 거짓과 ‘배신’(p.299)을 새롭게 보상받으려는 자기만의 연극은 마취제처럼 의식을 중독시킨다. 그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그 작은 손, 자라지 못한 손으로 복수하기 시작하고 섬뜩함은 통제할 길 없이 폭주하게 된다.

“그녀의 가망 없는 사람 찾기 역시 이 변하는 세월의 일부라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p.141) 조니의 흔적을 찾는 일 외에는 무엇도 아랑곳없는 펠리시아. 사람들은 다가오고 강요하고 떠난다. 천국을 권하는 사람들은 지옥처럼 끈덕지고 고단한 그녀는 위험을 눈치채지 못한다. 나가달라는 요청 끝에 다다른 거리. 펠리시아는 이제 거리를 통과한다. 거리의 사람들은 책 속의 책처럼 그들만의 단단한 세계를 보여준다. “꿈속에서 그들은 때로 상처를 치유하고, 사랑을 받고, 목소리와 헛것이 전부 사라지고, 그래서 내일이면 망각에 저항하는 힘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환상을 본다.”(p.157) 거부당하고 몰락한 채 이미 비통함을 넘어선 그들은 낮에는 불평 없이 순간만을 살고 밤에는 꿈을 꾼다.

이제 지키고 보이고자 했던 아이도 없다. 소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는다. 그녀가 뿌렸던 향수 이름처럼 그 사랑은 ‘안개 속 사랑’으로 흐려져가고 안개가 걷혔을 때도 향기라곤 없다. 다행인 것은 그녀가 살아남았다는 것. 그렇다고 말로 준 상처를 용서받기 원하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녀가 귀환해야 이야기도 정리되고 독자도 가슴을 쓸어내리며 쉼을 얻을 텐데 말이다. “그녀는 이제 예전의 자신이 아님을 안다. (중략)한때 그녀의 것이던 순수함은 시간이 흐르며 이제 어리석음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남아 있고, 상실을 경험한 예전의 그녀는 지금의 자신으로 이끈 사람이기에 소중하다. 또다른 아침, 눅눅한 밤을 보내고 맞는 화창한 아침에 길을 걸으며, 그녀는 자신을 감싸는 평온함을 당황하지 않고 받아들이면서 새로이 깃든 그 평온함을 기뻐한다.”(p.312) 집을 떠날 때의 그녀는 아니다. 뒤안길을 자신의 현재로 삼았던 힐디치 씨와 달리 펠리시아는 과거의 부당했던 상처에 매이기를 거부하고 '더 이상한 일들도 일어나니까'(p.317) 라며 떠나보낸다.

“그 치과의사는 자신의 존재를 부랑자들의 썩은 이에, 부랑자들의 악취와 불결함에 바쳤다. 그녀의 선량함은 한 남자가 내뱉은 모든 말과 그가 한 모든 행동을 왜곡시킨 사악함보다도 더 큰 미스터리다.”(p.321) 길을 나서고 고난을 헤쳐 성장하게 된 펠리시아. 이토록 참혹한 대가를 치렀던 성장의 주인공들을 떠올리기가 어렵다. 펠리시아를 비롯한 책 속의 인물들은 자기만의 여정과 궤적을 그려내는데 만남과 선택의 연속으로 미세한 점은 선이되고 그것은 결국 얼굴이,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이 된다. 선택 불가능한 시작이었을지언정 그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다. 지금 우리의 여정은 만족스러운가.

그녀는 과거로부터 시선을 거두어들인다. 의미도 규칙도 찾지 않고 ‘확실히 아는 것’만을 선택하는 삶이다. 여전히 여정 중인 펠리시아는 더 이상 무엇도 쫓지 않는다. 여정 자체가 목적이자 완성이며 필요한 것은 한 조각의 태양빛이 전부이기에. 우리 모두는 펠리시아 아닐까, 무언가를 애타게 찾아 인생을, 1년을, 하루를 떠난다. 찾고 있는 것이 혹시 파랑새나 무지개는 아니기를, 사로잡히고 쫓기 위해 사소한 따사로움도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과거 음침한 골짜기를 걸었을지언정 더 이상 오늘의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펠리시아는 현재만을 그녀의 막대기이자 지팡이로 삼는다. 떠나보낸 뒤안길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 새로운 여정의 시작임은 물론이다.






(인용 및 공백 제외, 약 1800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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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 고전의세계 리커버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서병훈 옮김 / 책세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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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책세상/서병훈 옮김)』은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이 1859년 출간한 저서로 역자는 “<자유론>을 빼고 자유와 민주주의와 현대 정치 사회의 본질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p.239)고 해제에서 말한다. “밀은 일생 아마추어 철학자였으며 전문직으로서 ‘학자’였던 적은 한 번도 없”(p.135/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야마구치 슈/다산초당)었음에도 이 기념비적 저서를 중요한 고전으로 후세에 남긴다. 야마구치 슈는 밀의 파트에 “끝까지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는가?-악마의 대변인-”라는 제목을 붙힌다. “자유론” 2장 “생각과 토론의 자유”편을 중점적으로 내세움을 알수 있으며 “악마의 대변인이란 다수파를 향해 의도적으로 비판과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을 뜻한다.”(p.135/상동)라고 설명한다. 가능한 일말의 진실에도 귀기울여한 한다는 밀(p.58)의 생각을 엿볼수 있다. “자유론”의 다섯 개의 장은 무분별한 또는 무책임한 허용이나 방임이 아닌 ‘일정한 방향’, ‘좋은 삶을 추구하기 위한 방향의 틀’(p.265, 해제)을 전제한 자유에 대해 단계적으로 접근한다.

“자유론”의 첫 장인 “머리말”에서 저술의 목적을 밝힌다. “사회가 개인을 상대로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성질과 그 한계”(p.21)를 살피는 것인데 말미에 거듭 정리하는 책의 목적은 하나의 원리를 통해 “사회가 개인에 대해 강제나 통제를 가할 수 있는 경우를 최대한 엄격하게 규정하는 것”(p.35)이라고 한다. 그 원리란 자기 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 누구든 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는 천명이다. 다시 자유의 기본 영역을 세 가지로 구분하면서 “자유 가운데서도 가장 소중하고 또 유일하게 자유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거나 자유를 얻기 위한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 각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자유이다.”(p.41) 밀은 일관되게 강제나 통제의 부당함을 강조하고 있다.

2장 “생각과 토론의 자유”에서는 더욱 확실하게 자신의 주장을 편다. “전체 인류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다른 생각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 이것은 어떤 한 사람이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나머지 사람 전부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만큼이나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p.50) 생각의 자유는 지켜져야 한다고 그 한 사람의 목소리에 힘을 더할 때 밀의 논조는 민감하고도 구체적이다. 토론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밀의 확신은 꽤나 강력하다. 인류 발전을 가능케 했던 인간 정신의 한 특징, 근원은 자신의 잘못을 시정할 수 있는 능력이고 이는 경험 만으로는 부족한 자질로 반드시 토론이 있어야 한다고 차분히 설명한다. 다양한 토론의 형태를 일상적으로 접하게 되는 요즘, 저자는 토론의 필요 불가결함을 위한 거의 모든 요소를 망라하고 있다. 동시에 매너리즘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숙고하게끔 몇 몇 질문을 던진다. “어떤 사안이 의심할 여지 없이 확실하다면서 그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치명적인 악습”(p.98)이라는 지적, 변증법의 유용함(p.100), 부정적 비판의 가치(p.101)등을 다루고 재요약한다.

3장에서는 ‘행복한 삶을 위한 중요한 요소’로 “개별성”을 설명한다. 개별성을 짓밟는 체제는 어떤 이유를 대건 최악의 독재 체제(p.138)라며 그가 생각하는 ‘천재론’을 설명한다. ‘개별성’은 대중여론, 관습, 다수, 집단적 의지로부터 동떨어진 곳에서 자유와 발전을 가능케 한다. 4장은 “사회가 개인에게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의 한계”로 곳곳에 저자의 배려와 인간애를 확인할 수 있다. “그 사람이 우리를 불쾌하게 만들면 우리는 싫은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를 불쾌하게 만드는 그 일은 물론이고 그 사람도 멀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일로 그 사람의 삶을 불편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모든 벌을 벌써 받고 있다고 또는 받게 되리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 사람이 일을 잘못 처리해서 이미 자신의 삶을 망치고 있는데, 그러한 잘못을 이유로 그의 삶을 더 망치게 해서는 안된다.”(p.170)

5장은 “현실 적용”으로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였던 밀은 자신의 주장이 이론을 위한 이론, 철학을 위한 철학에 머물지 않고 인간을 움직이고 삶을 변화시키기 원한다. “국가의 힘은 결국 국가를 구성하는 개인에게서 나온다.”(p.235)로 시작하며 마지막 문장을 마무리하는데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경고 섞인 질문을 하고 있다. “남에게 해를 주지만 않는다면” 인간은 자유로울 권리가 있고, 이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밀의 목소리가 200여년을 거슬러 1800년대 중반에 이미 세상에 나왔다는 사실은 놀라움을 안긴다. 여전히 자유로울 권리를 위한 투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사소한 개인적 취향부터 국가 및 연합단위에 이르기까지 오래되었으면서 동시에 새로운 화두로 주목하게 한다. 경청하고 존중하는 문화가 일상으로 정착한다면 다툼은 없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럼에도 “자유론”이 옛 고전의 서가보다는 반복해서 펼치고 줄 칠 가장 가까운 커피 테이블에 있어야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유 가운데서도 가장 소중하고 또 유일하게 자유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거나 자유를 얻기 위한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 각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자유이다.(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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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 책 베스트 세계 걸작 그림책 54
레미 쿠르종 지음, 이성엽 옮김 / 주니어RHK(주니어랜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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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 쿠르종의 『아무것도 없는 책(주니어RHK/이성엽 옮김)』 앞표지에는 주홍빛 표지 가운데 정말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채 백지로 펼쳐진 한 권의 책이 놓여 있습니다. 청녹색 면지 역시 종이의 자잘한 결이 보일 뿐입니다. 오래전 어느 날을 회상하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그때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아무것도 없는 책’을 선물하셨었죠. 아무것도 없는 책이라니, 아이는 아리송하지만 할아버지의 설명에 귀 기울입니다. 펼칠 때마다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게 하는 마법 같은 책! 어떤 생각도 떠오를 수 있다니 가능한 생각의 종류를 찾아볼까요? 그 중에서도 ‘기막힌 생각’의 예는 근사한 그림으로 양면 빼곡하게 담아냅니다. 각각의 그림에 대해 나만의 해석을 덧붙히기 시작하면 재미는 배가 되겠고요, ‘기막힌 생각 릴레이’ 게임이라도 한다면 시간 가는 줄 모를 것 같네요.

할아버지는 떠나셨지만 알리시아는 깨닫습니다. 생각이 가득한 책처럼 할아버지는 생각이 가득한 세상으로 옮겨가셨음을. 그리고 생각이 풍성해지는 “아무것도 없는 책”으로부터 자신의 첫 번째 책을 완성합니다. 생각대로 사랑도 찾아옵니다. 함께 하니 더 멋진 일도 있지만 상실도 겪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책”을 잃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일이 가능할까요? 요술에 필적할만한 파워를 가진 책일지라도 약점은 있습니다. 그 취약점과 특별함이 선물을 더 아끼고 소중히 보듬게 하지요. 그리고 이 또한 본질일리 없다는, 온전한 가능성을 가로막는 허상일 수 있음을 서서히 알아채게 됩니다.

할아버지의 유산은 마법책이 아니라 알리시아로 하여금 생각을 찾아내는 게 몸에 배게끔 변화시켰다는 점일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다가오더라도 우리는 ‘생각’을 할 수 있고, 그렇다면 희망은 충분할지 모릅니다. 그 작은 가능성이야말로 마법을 일으키는 필요 충분 조건임을 믿게 됩니다. 작품 속 글과 그림은 동어반복이 아닌 서로를 충실히 보완하기에 글대로, 그림대로 꼼꼼히 찾아보게끔 독자의 시선을 붙잡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책”은 처음 등장한 순간부터 알리시아의 손을 통해 함께 만지고 열어보는 듯한 물성을 획득합니다. 내게도 이 책이 필요하다고 열망하게 되고요. 나라면 어떤 생각을 끄집어 내겠어, 얼마든지 예상해볼 수 있습니다. 책의 부재(不在)가 이미 무의미해지는 순간, 마법은 완벽해집니다. 찬란한 현실이 되는거죠. 아마도 펼칠 때마다 다른 것을 발견할 것이기에 “아무것도 아닌 책”을 꺼낼 그때는 또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될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주니어 RHK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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