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36
카스 무데 외 지음, 이재만 옮김 / 교유서가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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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출신의 정치학자 카스 무데와 마찬가지로 칠레 출신의 정치학자인 크리스토발 로비라 칼트바서의 공저로 나온 이 ‘포퓰리즘’은 최근까지 나온 포퓰리즘, 즉 대중주의를 이론적으로 설명한 책들 가운데에서 분명 의미가 있는 논저라 불릴만합니다. 특히 앞의 카스 무데는 극우 운동과 극단주의 및 포퓰리즘과 관련해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연구자로 명성을 얻고 있기도 합니다. 저자 개인의 이름값이 책 전체를 보장해준다고 할 수는 없지만 포퓰리즘을 주제로 한 글들 중에서는 이에 관한 최근의 세계적 경향과 일목요연한 인식을 독자들에게 충분히 제공해주고 있지 않나 싶었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Populism : A Very Short Introduction’ 이며, 지난 2017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꽤 최근이라 할 수 있는 2019년 8월 12일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본격 논의에 앞서 이 책에 인용되었던 두 가지 주장에 대해 먼저 동의하기 힘들다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로 “필리핀 조지프 에스트라다, 남한의 노무현 같은 포퓰리스트 ‘아웃사이더들’은 대통령으로 선출되기까지 했다”는 것과 관련해 고 노무현 대통령을 저런식으로 인용한 것은 심각한 인식적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노 대통령은 변호사로서 일반적인 생활인으로 살다가 인생의 중반 이후에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정치인이었습니다. 대통령 임기 시절의 평가는 차치하더라도 그를 포퓰리스트로 규정한 것은 꽤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둘째로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은 사회 운동 단계를 넘지 못하고 단명한 포퓰리즘의 완벽한 예다”는 이 부분 역시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 마누엘 카스텔이나 필립 페팃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미국의 경제 엘리트들이 그들만의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정보와 경제 행위로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지 우리는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실망스러운 대처와 마땅히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자들이 모두 면책된 결과는 미국이 엄격한 시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수많은 제도와 토대를 비웃는 상황과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일종의 자발적 시민운동을 포퓰리즘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은 매우 받아들이기 힘들더군요.

그럼 다시 논의에 들어와서, 이 책은 총 6장의 주제로 현재 전세계에 일어나고 있는 포퓰리즘적 현상과 이론적 배경을 꽤 세심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포퓰리즘 (다른 말로 대중주의)은 “대체로 민중에 대한 호소와 엘리트에 대한 비난을 포함”하고 그 반대에 위치한 것을 소위 엘리트주의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먼저 엘리트주의는 오르테가 이 가세트와 같은 이들이 ‘민중의 어리석은 정치적 행위’에 대해 언급하면서 더 나아가서는 민주주의 자체의 가장 큰 위협을 중우정치 내지는 군중정치로 인식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민주주의 내부에 도래하고 있는 표면적인 위협인지, 아니면 민주주의로 인해 발생한 요소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기도 합니다. “부정직하고 자기 잇속만 차리는 기득권들”에 반대해 민중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해 포퓰리즘은 매우 연관이 깊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여기에다 일찍이 리처드 호프스태터가 언급한 ‘반지성주의’와 포퓰리즘이 거의 한몸과 같은 상황인 것을 우선 밝혀두고 싶습니다.

유럽의 프랑스와 네덜란드, 이탈리아와 남미의 베네수엘라와 페루 등의 정치적 포퓰리스트들은 자신들이 이미 엘리트에 준하거나 부유한 기득권에 속하면서도 기존의 엘리트 기득권과 거리를 두면서 오직 자신들만이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선동주의적 정치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탈리아의 총리를 역임했던 베를루스코니와 현재 미국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가 대표적으로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큰 해악은 로버트 달과 찰스 틸리가 옹호했던 다원주의에 심각하게 반한다는 것이며, 더불어 양극단주의와 매우 쉽게 결합된다는 점에서 다수의 많은 학자들이 포퓰리즘 자체를 일회성이거나 단순한 정치적 흐름으로 보는 것을 지극히 경계해야만 하는 증거라고 여겨집니다. 즉, 이 글의 4장에서 소개되는 이 ‘카리스마적 스트롱맨’이 포퓰리즘 정치인을 가장 잘 묘사하고 있는 단어라고 볼 수 있으며, 대체로 이러한 포퓰리스트들이 “모두 절대 권력자로 여길 수 있고, 따라서 결코 민주주의자가 아니다”라는 점이 강조하는 의미는 명백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저자들은 이처럼 관례적 입장에서 포퓰리즘 자체가 민주주의에 내재하는 위험이라는 것에 간접적으로 동의하고 있습니다. 또한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보는 점도 어떤식으로 포퓰리즘이 발현되던 간에 끝내는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끝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에 대해 저자들은 “포퓰리즘이 민주주의 자체에 반대하기보다 자유민주주의 자체에 반대하기 때문”이라는 것에 대체로 수긍되기도 하였습니다만 민주주의를 배경으로 태어나 결국 민주주의를 끝장낼 수도 있는 위험성은 바로 과거에 타생한 파시즘과 다를바 없다고 여겨집니다. 파시즘 역시 ‘선동하는 카리스마적 정치인’의 출현이 매개물이 되는 것과 같이 이 포퓰리즘도 역시 거의 마찬가지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이곳의 저자들은 포퓰리즘의 양면적인 측면에서 “기존의 엘리트들이 진짜 민중의 일에 안중에도 없다”는 점과 “여러 나라에서 민주적 엘리트주의자들은 정치적 선택지를 제한하기에 이르렀다”는 판단 등으로 이런 상황에서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만한 것이 있다고 살펴보고 있습니다. 즉, 대중의 정치적 참여를 독려하고 왜곡된 기득권층의 행위를 견제하게 하는 동인을 유인해 낸다고 보는 시각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퓰리즘 자체가 반지성주의와 결함해 쉽게 극단주의에 이를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앞선 긍정적인 요인도 거의 유명무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민주주의의 축소에 관련한 최선의 해결책은 시민들의 경쟁과 참여일 뿐이며, 더 나아가서는 열린 토론과 적극적 의사의 개진일 뿐일 것입니다. 이것은 로버트 달과 찰스 틸리가 주창했던 것으로 이외에 현실적으로 마땅한 해결책은 찾기 힘들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즉, 5장 말미에서 “포퓰리스트들이 충분히 강해지고 나면 민주주의의 쇠퇴 과정을 촉발할 수 있을것이다”라는 경고는 그래서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이러한 전세계적으로 포퓰리즘이 대두하는 시기에는 얼마만큼 기존의 정치 권력이 대의에 충실하고 시민들을 기만하지 않는 것에 달려있다고 봐야겠죠. 나날이 정치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금권정치에 매몰되거나 소수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사실상의 과두제를 방치하게 된다면 포퓰리즘의 독이 우리의 민주 정치를 끝장낼 시기는 그만큼 빨리 다가올 것입니다. 저는 이 포퓰리즘이 앞선 나치즘과 더불어 매우 사악하고 광범위한 정치 자체에서 크나큰 독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존 정치와 시스템을 아무런 근거없이 비난하는 선동 정치인들을 경계하고 미국의 티파티와 같은 극단주의자들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저는 이 책을 다 일독하고 나서 머릿속에 한가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는데요. 지난 전정권의 부정으로 인한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지금의 정부가 최소한 포퓰리즘에 기반한 정권이 아니라는 분명한 증거는 선동하는 정치가는 민중들에게 말도 안되는 직접적인 반란을 획책하지, 그들에게 민주주의를 지키게 위해 힘을 달라고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분명히 그때 우리는 민주주의를 지켜달라고 말했고, 그것을 수락한 한 정치인을 대통령으로 만든 것은 지극히 명확한 사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약간의 사족으로 번역가인 이재만 선생님께 한가지 아쉬운 점을 밝히고 싶습니다. 분명 원문에서는 우리나라를 South Korea로 표기되어 있었겠지만, 글 전체에서 따로 북한이 언급되지도 않는데, 우리 국명을 ‘남한’으로 표기한 것은 뭐랄까 아쉽다고 해야할까요. 한국이라고 표기해도 충분했을 것을 굳이 뉘앙스가 이상한 남한으로 했어야 했을지 이에대한 약간의 의문이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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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독점에 반대한다
미셸 볼드린, 데이비드 K. 러바인 지음, 김평수 옮김 / 에코리브르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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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의 두 공저자인 미셸 볼드린과 데이비드 K. 러바인은 미국 세인트루이스의 워싱턴 대학에서 특별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여기서 특별 교수라는 직함이 석좌 교수라는 것과 유사한 직위인지는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특별 교수 (Distinguished Professor) 자체에 대한 기본적인 정의가 구글링을 통해서도 잘 나오지는 않지만, 이 특별교수는 해당 학문 분야의 탁월한 업적이 있는 사람을 학교 측에서 초빙하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물론 전자인 석좌교수의 성격에도 일정부분 유사한 점이 있을 수도 있겠죠. 우선 앞의 미셸 볼드린은 이탈리아 출신의 경제학자로 특히 기술 진보와 지적 재산권 뷴야의 전문가이고, 뒤이어 데이비드 K. 러바인 혹은 데이비드 K. 레빈도 마찬가지로 경제학, 특히 실증 경제학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갖고 있는 학자입니다. 원제는 ‘Against Intellectual Monopoly’ 이며, 지난 2008년 출간되었습니다. 국내에는 그로부터 5년뒤인 2013년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약간의 혼란을 예방하기 위해 번역된 책 제목이 뜻하는 바를 먼저 밝혀둬야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 독점이란, 지적 재산권과 특허권 등을 비롯한 독점 지식에 관한 분야입니다. 이에 두 공저자는 “지적 재산권이 만인에게 혜택을 가져다 주어야 한다”는 명제아래 그동안 영국 산업혁명 시대부터 현재까지 뿌리를 내려온 독점적 지식이 세계의 혁신에 이바지했는가에 대한 의문을 시작으로 광범위한 비판적 논의를 진행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 책은 총 10장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으며, 1장의 서문을 비롯해 10장의 최종 결론까지 대부분의 내용이 온전하게 “앞으로 지식 독점은 다수의 공적 이익이라는 측면에서 재검토 되어야 한다”면서, 이에 관한 저자들의 아주 면밀한 토론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개인의 창작물과 지대한 비용과 시간이 투입된 특허와 관련된 소위 경제적 권리에 주목하고 인정하는 의견이 아마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두 저자의 의견 가운데 특히 “현재의 저작권법은 보장 기간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에 매우 동의하고, 경제학의 기본 개념인 경쟁과 혁신의 증대라는 측면에서 이런 지식 독점이 제한이 되어왔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4장과 5장은 특히 미국과 유럽의 여러 사례를 인용하면서 그러한 주장을 강화하고 있는데요. 과거 특허 괴물이었던 램버스 사태에 대한 설명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처럼 견고한 특허 장벽이 신규 사업자들의 시장 진입을 막아왔으며, 일부 시장 지배적 위치에 있는 대기업들의 특허 풀 patent pools 역시 기존의 참여자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기능을 해왔다고 일침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본문에서 “지적 재산 비효율성이라는 해악 때문에 특허권이 우리의 경제적 번영을 위협한다”고 평가하기에 이릅니다. 뒤이어 9장에서도 동일하게 언급되고 있지만, 제약 회사들이 벌이고 있는 특허권 문제와 약품 독점과 관련하여 “대형 제약회사들은 유럽과 미국 시장에서의 약품 가격을 끌어올리기 위해 아프리카를 에이즈 치료제 유통에서 제외시켜 인위적 희소성을 만들어낸다”고 저자들은 비판하며 이것은 즉, 아프리카에 이들 약을 싸게 공급하게 된다면, 미국과 유럽 소비자들(엄밀히 말하면 환자들)을 차별하는 지경에 이르기 때문에 아예 아프리카에는 이 치료제를 팔지 않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조금 순차적 내용에 반하는 것이긴 합니다만, 9장에서는 ‘특허없는 화학물질’이라는 다소 노골적인 표현까지 곁들이며, 이를 바탕으로 ‘특허가 없는 약품’도 정당한 인식적 기반이 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더욱이 미국은 제약회사들의 약품 특허권과 이것의 판매권에 대한 최대한의 보장을 약속하고 있어 유독 선진국 가운데서도 국민들의 의료 안전망이 계속 취약해지는 결과를 낳지 않았나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아이디어 창작권과 비롯한 지적 재산권과 관련하여 두 저자는 출판계와 관련한 현실을 꼬집고 있었는데요. 작고한 소설가의 저작권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이것을 읽는 다른 작가들의 2차 창작 내지는 발전적으로 모방된 작품이 원천적으로 금지되어 이에 대한 복잡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7장에서는 “결국, 우리가 저작권과 특허 그리고 그것이 수반하는 자유의 박탈이란 상황에 도달해야만 하고, 이것이 아주 흔한 일이 되어야만 한다는 뜻이다”라고 주장하는데, 물론 저도 이것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작권과 특허 제도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는 분명 필요해 보입니다. 앞선 2장과 3장에서는 마이크로 소프트를 비롯한 거대 소프트웨어 기업과 ‘리눅스 프로그램’의 상관관계와 특별한 장치인 ‘오픈 소스’를 설명하며, 공개된 프로그램과 공개된 소스를 바탕으로 개발된 광범위한 프로그램에 과연 특허권을 부여할 만한가에 대해 독자들에게 의구심을 알리고 있습니다. 해리포터의 작가인 J. K. 롤링과 관련해서도 해리포터의 후속편을 쓸 권리는 분명 작가인 그녀에게 전적인 권한이 있지만, 이미 충분히 이 작품으로 인한 보상을 다방면에서 부여받았다고 전제하고 이제는 작가들이 작품에 대한 적당한 최종 보수를 일시불로 받고 자신의 작품에 대한 2차 창작과 모방을 사실상 허용하는 쪽으로 가야한다고 제안합니다. 물론 시장에서의 독점을 찬양한 조지프 슘페터를 언급하고 있긴 합니다만 개인의 창작물에 대한 ‘적당한 보상’을 책정하는 기준이 어떻게 될지에 관해서는 앞으로도 논란이 있어 보입니다.

끝으로 흔히 산업 혁명 이후의 시기를 거쳐 경제적 합리주의가 요동치고 그에 따른 ‘경제적 인간’이 칭송 받으면서 세계의 혁신과 번영은 현재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성장 동력이라면 그렇다고 볼 수 있는 혁신과 관련하여 “혁신자는 기밀 유지를 통한 사적 지대추구와 특허를 통한 공적 지대 추구 사이의 실제적 균형과 마주하게 된다 (혹은 마주하게 될 것이다)”는 예측은 과연 실현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의 시장경제가 이미 개인의 이익 창출에 대해 어떠한 한계를 두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있으며, 이러한 사적 이익이 과연 공적 이익과 수렴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그 전망이 암울해보입니다. 저는 현재의 시스템이 지적 재산과 특허를 포함한 개인과 기업의 창작권에 대한 재검토와 철회가 있지 않는 이상 이런 기조는 변하기 힘들 것이라 예측하는데요. 물론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충분히 공감할 만합니다. 또한 그 필요성도 입증될 만합니다. 아마도 이후의 결과물과 관련해서는 두 공저자들과 다른 반대편에 있는 이들의 치열한 토론과 의견 교환이 있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이 부분과는 약간 논외로 저의 소감은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꽤 최신의 세계 경향을 살펴볼 수 있었고, 저자들이 언급하고 있는 많은 사례들이 해당 분야에 대한 독자들의 상황 인지를 위해 꽤 훌륭한 글이라 여겨졌습니다. 굳이 지적재산권과 관련된 법조인과 동일 분야의 전문가들 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도 충분히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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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경제의 거대한 재균형
마이클 페티스 지음, 김성수 옮김 / 에코리브르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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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인 마이클 페티스는 미국 컬럼비아 대학 출신으로 투자은행 베어 스턴스를 거쳐 현재 베이징 대학교의 금융 및 경제학 교수이자 카네기 재단의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은 멕시코, 마케도니아, 한국을 비롯한 각 정부에 재정 정책과 관련한 조언을 해왔다는 점인데요. 글 본문에도 우리나라가 수차례 언급되고 있어서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13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에서 처음 출간되어, 국내에도 2013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원제는 ‘The Great Rebalancing’ 입니다. 아쉽게도 국내에 번역된 이 책은 현재 절판된 상태인데요. 최근 미국과 중국의 무역 분쟁과 관련된 흥미로운 해석을 책 전반에 담고 있는 가운데 개인적으로는 이 중요한 글을 국내의 독자들이 일독하지 못한다고 하니 제법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총 9장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마지막 9장은 세계 금융 위기가 이대로 지속될 것인가 아니면 변화를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결론을 담고 있어 주요 논의는 1장부터 8장에 이르는 분량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우선 1장은 2008년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에 따른 뉴욕발 세계 금융 위기가 저자의 판단으로는 아직 이어지고 있다는 상황 판단과, 2장과 3장에서는 흑자국에 의한 무역 개입으로 봐도 무방한 통화 개입과 금리를 비롯한 저축 문제를 다루고 있고, 4장과 5장은 미국과 중국의 무역 전쟁이 얼마나 무모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에 대해, 6장은 앞에서 논의된 내용과 연장선 상에서 현재 독일이 주도하고 있는 유로화 경제권과 그 반대의 입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에스파냐와 그리스와 같은 적자국들의 분석, 7장은 잠정적으로 무역 불균형은 부채 불균형을 초래한다는 입장과 8장은 종래의 의견과는 달리 미국의 달러화가 기축 통화인 상황이 마냥 미국에게 유리하거나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반론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2008년 미국 뉴욕발 세계 금융 위기는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같은 무분별한 수익을 위한 증권화 문제 뿐만 아니라 중국이 수년간 달성해 온 무역 흑자를 통해 구축된 중국 내의 과도한 저축이 미국으로 향하게 됨으로써 상황을 악화시켰다고 저자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물론 당시 많은 미국 내의 경제인들과 학자들이 중국인들의 거대한 저축 때문에 미국 경제가 초토화 되었다고 보는 것에 마냥 동의하고 있지는 않으나, 그런 중국계 자금으로 많은 미국인들이 무분별한 신용 생활을 한 것을 꼬집지 않은 것은 저자의 판단 미스라고 생각합니다. 이것과 관련하여 글의 8장에서 “그 나라의 저축이 늘면 그 초과분은 틀림없이 나라 밖으로 수출된다”는 분석은 충분히 설득적이긴 합니다. 많은 중국인들과 독일인들이 미국의 국내 저축률이 그처럼 빈약한 것에는 많은 미국인들의 방만한 소비 생활을 손꼽히는 이유로 들고 있지만, 제가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는 것은 국내 소비, 즉 가계 소비를 지속적으로 억제해 온 중국과 독일의 사례가 결코 정상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특히 2010년 기준 중국의 가계 소비가 겨우 34% 수준에 이른 것은 문제가 될 만합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경제 당국과 학자들이 그동안 끊임없이 중국을 향해 요구해 온 위안화 절상과 관련하여 “위안화는 2005년 7월 이후 24%나 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역 불균형이 계속되고 있음에 비추어 통화는 분명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가정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중국 당국이 태도가 급변하여 위안화 절상에 나선다 할지라도 ‘인민폐의 절상-보조금을 더 많이 지급-가계에서 이러한 보조금을 충당-중국의 무역 흑자는 오히려 더 증가’라는 단계별 이동으로 더욱 악화될 수 밖에 없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많은 학자들에 의해 심각한 적자국 국민들에 대해 “게으르고 소비 일변도에 경제 관념에 있어 방만하기까지 하다”고 하는 도덕적 반응을 보여 왔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도덕적 평가는 사실을 오도하는 것으로 “매우 큰 규모의 지속적인 흑자와 적자는 거의 틀림없이 어느 한 나라 또는 여러 나라의 정책이 왜곡된 데서 빚어진 결과”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이 책에 소개된 독일과 중국의 정책은 꽤 이것을 뒷받침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은 미국에 대하여 더욱 지속적인 무역 흑자를 쟁취하기 위해 자신의 국내 저축 자산을 미국에 투입하고 미국이 더욱 부채의 늪에 빠지게 한다던지, 독일은 에스파냐와 그리스에 방만한 소비 생활을 그만두라고 하면서도 이들 두 나라의 채권을 수집하고 결국 같은 유럽 국가들을 자국의 수출 시장화로 만든 것과 같은 사례는 흑자국에도 분명 왜곡된 정책이 관여한 것입니다. 많은 흑자국들이 유형과 무형으로 자신들의 가계 소비를 억제한 것은 비판받을 만하며, 우리나라를 비롯 일본, 중국 그리고 브라질이 달러화 대 자국 통화를 지속적으로 인하시켜 온 것은 무역 거래에 있어서 미국에 대해 우위에 서게 되는 그와 같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것은 또한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만약 위안화와의 환율이 중국의 수출과 수입에 정말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면, 중국이 절상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정확하고 분명한 결론일 수는 없다”는 점은 중국의 대규모 대미 무역 흑자는 환율의 문제라기 보다는 중국 당국이 암암리에 지급하는 수출 보조금과 가계 소비를 억제하는 정책 등이 더 중요한 요인일 수도 있습니다. “통화 가치의 변화란 오직 다양한 부품의 가격에 영향을 미칠 경우에만 무역에 영향을 미친다는 가설”은 그래서 귀담아 들을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자인 마이클 페티스가 오늘날 세계 무역과 관련하여 중요하게 밝히고자 하는 것은 “사실상 세계적으로 지나치게 높은 저축은 글로벌 위기를 불러온 투기성 자본의 흐름과 무역 불균형의 핵심이다”라는 주장입니다. 물론 여기에 전부 동의할 수는 없지만 ‘저축의 수출’이 무역 적자국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브레튼우즈 체제가 붕괴한 이후에도 미국은 쌍둥이 적자를 자의반 타의반 감내하면서 세계 경제를 지탱해오기도 했습니다. 이런 과거의 미국적 특수 상황과 오늘날 중국의 경제적 대두에 따라 저자는 이런 양국의 무역 전쟁에 적극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것의 중요한 이유들로 첫째, 무역 전쟁은 합의 타결에 비해 세계적 성장을 더 늦춰놓는다는 점과 둘째로, 미국-중국 관계는 경제 문제를 뛰어넘어 훨씬 더 큰 중요성을 띠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많은 미국인들이 “중국은 단순히 슬리퍼나 라이터, 장난감을 만들어 미국에 파는 나라가 아님”에도 중국과 관련된 자신들의 국채문제, 중국을 대신할 나라는 얼마든지 시기에 따라 등장할 것이며, 미국 국민들의 신용 생활을 먼저 제어 하는 것이 더 시급한 문제임을 망각하고 또한 가장 시급한 미국 국내의 사회 안전망 확보에 지금까지 손놓고 있었던 것은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의 반대의 측면으로 그동안 독일이 가계 소비를 억제하고 통화를 관리함으로써 사회적 인프라와 사회 안전방 구축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했는지 제반 수치로 증명되고 있습니다.

끝으로 책의 일독을 마친 후에 기존의 세계 금융 위기와 관련해 꽤 훌륭한 분석을 시도했던 라구람 라잔이나 존 아이켄베리와 견주어도 저자의 이해와 식견이 부족하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경제학자들이 단순한 도덕론적 입장에 빠져 무역 문제를 이분법으로 여기는 것에 대한 비판은 꽤 흥미로웠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앞서서 밝히기도 했지만 이 책을 더이상 시중에서 구할 수 없다는 점이었는데요. 그래서 모쪼록 출판사 측에서 많은 독자들을 위해 시급히 재간행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이클 페티스의 이 책을 알게 해주신 제 북플 친구분께 감사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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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터라이프 2019-08-17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너무 고마웠어요
 
유럽은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 - 세상을 바꾼 400년의 시간 흥망의 세계사 1
후쿠이 노리히코 지음, 송태욱 옮김 / 다른세상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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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마도 여성 학자로 여겨지는 후쿠이 노리히코는 일본 도쿄 출신으로 프랑스 근현대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일본 명문인 도쿄의 가쿠슈인 대학의 학장이라는 설명이 이 책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다만 한가지 저자와 관련하여 명확하지 않은 점은 박사 학위를 중도에 그만 두었다고 나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장을 역임할 수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한국과 일본의 대학 체계가 달라서 그런건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구글에 검색을 해봐도 저자에 대한 자료가 많이 나오지 않았는데요. 윗 부분은 이 정도 언급으로 정리하고 싶군요. 이 책은 지난 2008년 일본 고단샤 출판사 창사 100주년 기획 시리즈 물로 출간되어, 당시 일본 서점가에서 큰 인기를 누린 바 있습니다. 국내에는 지난 2013년 번역 출판되었고, 현재는 절판된 상황입니다.

제가 일전에 서평을 쓴 필립 T. 호프먼의 ‘정복의 조건’이라는 글과 후쿠이 노리히코의 이 책은 꽤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이 글의 저자는 유럽이 세계의 패권을 성공적으로 획득하게 된 연유에는 바로 ‘공업화와 국민국가’가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단순하게 2차 공업 주도의 공업화로 둔 것은 아마도 지난 일본이 미국 페리제독에게 겪은 ‘흑선’의 존재 때문이 아닌가 추측해 봤습니다. 여기에는 “기계 공업이 실질적으로 발전하기 전인 18세기 중반까지는 경제적인 면에서 유럽이 아시아에 뒤쳐졌다고 보는 게 맞다”는 분석과 이 공업화는 연계하여 설명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국주의 국가인 영국의 성공적인 산업혁명이 유럽의 모든 산업 생산 역량의 획기적인 증대로 나타나고 그런 결과물로써 농업과 수공업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중공업의 생산 확대는 수많은 식민지들에서의 다양한 자원 수집에 기인한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점은 따로 강조할 필요가 없으며, 이렇게 공업화의 과정에 들어서게 된 최초의 장면을 저자는 15세기 초 포르투갈이 인도한 유럽의 대항해시대로 꼽고 있습니다. 전면적인 전 유럽의 상업부흥을 일으킨 이 대항해시대는 상업 활동 하나만으로도 부를 축적하는 국가들을 탄생시켰고, 다시 이러한 부를 상업활동과 여타 군사력에 재투자 함으로써 유럽이 단순히 합리주의적 상업활동에 기반한 흐름만으로 유럽의 근대화를 설명하기는 분명 어렵습니다. 다만, 상업 부흥과 계몽주의의 발생은 매우 연관이 있어보였고, 영국의 귀족들이 자신들의 국왕의 왕권을 제한하기에 이른 과정도 바로 이러한 상업의 이윤 가치가 날로 증대됨에 따라 돈의 힘이 어떠한 것을 이뤄낼 수 있는지 ‘상업주의 인간’의 탄생을 목도한 것으로 봐야할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뿐만 아니라 상업의 부흥은 유럽 각국의 부르주아 계급을 잉태했고, 이들이 1770년대 미국 독립혁명과 이후의 프랑스 혁명까지 주역이 되었던 것입니다.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저자 역시 “프랑스 혁명이 복합적인 사건이었다는 인식 자체는 오늘날 공통적으로 인정되는 부분이다.”는 분석 또한 저의 판단과 일치합니다. 즉, 이 프랑스 혁명이 몇번의 굴곡을 거쳐 결국에는 유럽에 ‘국민국가’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나중에는 나폴레옹 자체가 왜곡된 정치욕으로 말미암아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존계비속에 의한 전 프랑스 통치라는 황당한 체계를 만들어 낸 치명적 선택이 대 프랑스 동맹을 만들어 내고 끝내 자신까지 파멸에 이르게 만들었지만, 초기 프랑스 혁명정부가 주변의 이웃 국가들과 대결할 즈음에 혁명의 이념의 불꽃을 조금이라도 길게 끌고 갔으면 전유럽에서의 국민국가 출현이 조금 더 앞당겨 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뒤이어 영국, 프랑스가 주도한 유럽의 식민제국과 관련하여 저자는 ‘박애적 제국주의’라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는데요. 역사학자 더든도 이와 관련하여 ‘계몽적 통치’에 주목한 바가 있습니다. 사실 박애나 계목 통치나 하는 말들은 그저 제국주의적 식민 통치에 대해 덧칠을 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으며, 아직도 이와 관련된 역사의 정리 또한 채 마무리도 되지 못했습니다. 식민지 경영을 몸소 실천했던 제국주의 국가들이 해당 지역의 근대화와 산업화라는 미명하여 인력과 자원들을 비롯한 강제 징발 및 소비기지로 만든 것이 과연 계몽이나 박애주의가 들어갈 만한 것들인지 심사숙고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합니다.

끝으로 후쿠이 노리히코의 이 책은 상당한 분량에도 크게 고려할 만한 내용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2차대전 당시, 전체주의의 책임을 계몽주의에서 찾으려고 하는 일군의 사조에 대한 비판과 히틀러에 대한 짤막한 그녀의 평가는 다소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만, ‘국민주의로서의 내셔널리즘’이라는 분석은 꽤 마음에 들기도 했습니다. 이론적 분석이 꽤 귀담아 들을만 하다는 말씀입니다. 더불어 쿠바의 노예 해방 운동인 성 도밍그의 해방운동과 관련해 지도자인 해방 노예 ‘루베르튀르’라는 이름을 글에 적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저자 역시 꽤 많은 연구를 기울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책 외적으로 한가지를 더 말씀드리자면 일독하기가 매우 어려웠던 것으로 기억에 남을 듯 한데요. 무슨 무슨 어려운 용어가 전무함에도 이상하게 읽기가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이 점은 제 마지막 소회로 남겨보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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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반역 - 현대 대중사회의 본질을 파헤친 정치문화 비판서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장선영 옮김 / 누멘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스페인 마드리드 출신의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철학자이자 특히 자유주의를 신봉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특히 그는 1931년 부르봉 왕가의 마지막 왕인 알폰소 13세를 퇴위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사상가로서 많은 논저를 쓰기도 했는데요. 지금 소개해 드릴 이 ‘대중의 반역’이라는 글은 1930년에 출간되었던 것으로 그의 독특한 사상이 잘 녹아있는 글이기도 합니다. 국내에는 절판된 것을 포함해 여러 출판사 판의 번역이 있었는데요. 그 중에 역사비평사 판이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이 누멘의 번역본을 구해 읽게 되었는데, 다른 이유보다도 가장 최근에 출간된 이유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우선 이 책은 총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고, 저자 자신의 주요 논점은 거의 1부에, 그리고 유럽의 도덕주의적 몰락과 더불어 세계 지배의 역할을 내려놓게 된 현재의 유럽의 대해 여러가지 논의로 글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먼저, 책 제목대로 말하고자 하는 ‘대중의 반역’은 바로 “야만의 시대를 초래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즉, 이것은 “직접적인 행동”을 확실하게 꼬집어 야만이라고 일컬으며, 이것과 더불어 대중이 ‘국가를 자신의 것 또는 자신과 일체화 시켜, 국가주의에 들어서는 것’ 또한 포함하고 있습니다. 저는 방금 저자를 소개하면서 그가 자유주의를 대체로 신봉하고 있다는 것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상적 본질과는 논외로 이 책의 거의 대부분의 논점이 너무나 염세적이고 회의적이며, 글의 논조로 보아 딱히 자유주의를 옹호하거나 인간의 자유에 대해 긍정적이라 볼 만한 부분을 찾아보기 힘든 것은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해가 필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전체적인 논의에 앞서 저자는 1부 7장에서 자신의 이 글을 “정치적인 의미로 해석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즉, 이 점은 2부에서 논의될 유럽의 ‘도덕적 타락’과 더불어 “이지적, 도덕적 불복종을 철두철미하게 분석하지 않고는 이 책이 뜻하는 정리에 최종적인 명백성을 부여할 수 없다”고 그 입장을 밝히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점은 “군중에 대한 개념 자체를 어디까지나 양적이고 시각적으로 구분하고, 사회를 다수파와 우수한 소수파로 구분하는 것 등” 의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독창적 정의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앞선 ‘우수한 소수파’에 대해 일견 능력있는 엘리트 집단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이것으로 명확하지는 않고 ‘특권’을 갖고 있는 계층 내지는 ‘더 나은 삶을 위한 노력을 보이는 이들’이라는 다소 일반적이지 않은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또한 대중과 관련된 해석에 있어서도 ‘평균인’ 내지는 ‘평균화의 시대’로 정의 내리며, ‘다양한 삶을 즐기는 대중’, ‘사회의 보편적인 조류’라 또한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과 관련하여 저자는 현재 유럽 (아마도 1차대전 이전의 시기)은 기술의 진보로 인해 예전과는 확연히 차이나는 보다 나은 삶의 시대를 만들어가고 있는데, “이 대중들은 자신들이 이러한 삶을 누리는데 어떠한 조력을 하지 않았으면서도 이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이것은 배은망덕한 일이다.”라고 비판합니다. 이처럼 그가 분석하는 사회는 ‘과학자-전문직-부르주아’의 순서대로 그 능력과 책임이 구분되어 왔으며, 여기에는 일반 대중(저자가 항상 강조하는 대로 양적이며, 시각적인 구분으로서)이 그러한 기여를 해왔는지에 대해 의구심 보다는 그 자체가 회의적인 일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진보주의자들은 앞으로의 미래가 확연히 찬란한 것으로 믿고 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으며 냉정하게 현재 우리의 삶에 대한 절대적인 진단을 시도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평균적인 삶’을 살고 있는 대중이 ‘스스로 택하는 규율의 삶’을 존중할 필요가 있지만, 이 점은 소수의 ‘선택된 인간의 삶’만이 존재할 것으로 저자는 예측합니다. 대중에 의한 권력이 최대의 사기라고 언급하며, 이것에 대한 대칭을 대중 스스로가 규율의 삶을 사는 것으로 일종의 속죄를 바라는 이유가 뒤이어 나오는 대중이 스스로를 국가와 동일시하고 그것을 통해 국가주의를 출현시키고 가능하게 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저자가 미래의 파시즘을 경고하고, “볼셰비즘과 파시즘은 같은 새로운 정치 시도는 본질적인 후퇴의 그 좋은 본보기다.”라고 말하는 것과도 연결됩니다. 그렇지만 반대로서 19세기의 자유주의를 극복해 내야만 한다고 말하면서도 파시즘은 그런 자유주의를 결코 극복해 낼 수 없다고 단언하고 파시즘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그가 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도 파시즘이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밝히는 것으로 충분히 공감이 갈 만한 주장이기도 합니다.

결국 저자는 국가라는 시스템 내지는 조직체가 매우 불안하다고 강조하고, 여기에 몸을 맡기는 대중들이야 말로 위험하고 끔직하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대중인들이 경박한 조류에 온몸을 내맡긴다”면서도 다수의 대중이 지성을 갖출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계몽의 시대를 겪은 유럽인이 판단하기에는 아쉬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대중은 자신의 운명을 잘 인식해야 하며, 그것을 거역하는 것은 그야말로 ‘반역이다’ 라고 하는 점도 사회적 규율과 사회를 인도하는 지배체제에 복종하라는 뜻이기도 하여 오늘날에 이런 그의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매우 복잡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앞선 볼셰비즘과 관련해서도 ‘혁명’의 기운에 경고하고 대중이 정치적 인식을 갖는 것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것도 ‘그렇게 하지 말라’는 잠정적 명령으로 보이기도 했습니다만 당시의 기술발전과 과학 진보의 시대에 놓여 있는 대중들의 역할을 의도하지 않은 대로 움직이면 반역과 같고, 규율의 삶을 선택하지 않으면 그냥 대중이라고 못박는 것은 불행한 일로 보였습니다.

사실 이 책은 많은 우파들에게 영감을 안겨 주었고, 특히 스펜서를 비롯한 사회진화론자들과 엘리트 지배 체제를 강조하는 소수의 기득권들에게도 이론의 뒷배경을 더한 글이기도 합니다. 물론 타인과 타인들이 모인 사회의 공동생활을 강조한 것이라든지, 사회의 규범을 중요하게 여기는 등의 사회 일반의 선을 중요하게 여긴 점 등은 물론 저자의 혜안을 돋보이게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1부의 12장에서도 “평균인은 그 세계 안에서 지나칠 정도로 풍부한 물질적 혜택만을 느꼈지, 고민 따위는 도무지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는 등과 13장에서 최대의 위험은 국가라고 일갈하는 부분 또한 여러모로 현대인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습니다. 제가 이 책에서 가장 주목하는 부분인 “국가를 마치 소유물로 여기려 드는” 대중인의 행태가 대체 어디서 기인하는지 명확하게 서술되지 않았고, 장자크 루소의 인민 주권을 거부하는 듯한 “단지 인간으로 태어나서 그러한 주권을 가졌다.”는 신랄한 문장도 어떤 여지를 갖는 것 또한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끝으로 저자의 이 책과 관련해 자신이 진정 말하고 싶었던 점은 “민중의 힘과 사회의 힘의 평형”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대중의 힘이 사회를 넘어서고 국가를 좌지우지 하는 것이 반역과 쇠퇴 및 몰락이라고 여겼다면 자신을 넘어서고 자신의 삶을 도약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일부 소수의 우수한 자들만의 계획된 사회가 과연 모두의 선이 될 수 있을지는 어려운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확대된 민주주의를 초민주주의라 지칭하면서 민주주의 자체를 비판하는 자들이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것이 다수에 의한 중우정치라 할때, 오늘날에도 일반 대중은 단지 권력에 복종하는 편이 낫다라는 논법을 설파하는 자들이 아직도 많은 시점에서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이 책이 더욱 오독되는 일이 없기를 단지 바라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신봉하는 자유주의조차 극복해야된다는 주장을 펼치는 저자의 논법 만으로도 이 책은 매우 어려운 편이 속하는 글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약간 사족으로, 본문 14페이지와 32페이지에 오타를 발견했는데요. 두 군데의 오타를 수정하지 않고도 출판을 한 출판사에 더할나위 없는 실망을 느낍니다. 이것은 독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여겨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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