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의 인민주권 정당론 클래식 1
E. E. 샤츠슈나이더 지음, 현재호.박수형 옮김 / 후마니타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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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엘머 에릭 샤츠슈나이더는 미국 피츠버그 대학을 거쳐 컬럼비아 대학의 박사학위를 받은 뒤, 30여년 간 줄곧 코네티컷 주의 웨슬리언 대학에서 학부생을 지도한 바가 있는 저명한 정치학자 입니다. 그가 주장했던 여러 가지 중에 특히 “대중들이 대체로 정치적 분별력이 전무하고 너무 무식하다”는 일종의 대중편협론에 반대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 글의 서문에서 “낙제점을 받아야 할 사람은 민주 시민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학자와 철학자들이라고 주장”한 것도 앞선 이유와 비슷해 보입니다. 그리고 그가 30여년간 대학원 생들이 아니라 학부생을 지도한 것도 어린 학생들의 정치 참여를 고양시키고 보편적인 정치 의식을 함양하기 위한 비범한 목적을 갖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 책과 관련하여 약간 애매한 부분은 센게이지 런닝 (Cengage Learning) 이라는 곳에서 저작권 대행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위키피디아에서 검색을 해봐도 특별한 내용은 없더군요. 대략적으로 대학 관련 교재를 대행하는 곳으로 추측됩니다. 1975년의 서문판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1970년판을 번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초판은 1960년에 나왔고, 원제는 ‘The Semisovereign People’ 이며, 국내에는 2008년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샤츠슈나이더의 기념비적인 논저라 지칭될 만한 이 책의 핵심 주제는 갈등, 정당, 민주주의입니다. 혹자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갈등을 먹고 산다”는 바로 샤츠슈나이더의 갈등에 관한 인식과 가까워 보입니다. 이 갈등과 관련해서 저자는 약간의 양가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본디 갈등 자체가 문제이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갈등 자체를 정치와 사회가 돌아가는 원동력으로 보고 있습니다. ‘갈등의 사회화’라는 개념도 이 책의 1장과 2장에서 많은 이익단체들이 경합하는 사회에서 경쟁과 더불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갈등’으로 보고 있으며, 갈등의 사회화 역시 이런 과정에서 ‘사회적 파급효과’ 내지는 ‘사회적 혹은 사회내에서 규명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데요. 저자가 집중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정치의 중요한 목적이 이들 갈등을 효과적으로 조절하는데 있다고 보는 것은 꽤 의미심장합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갈등이 필연적으로 생길 수 밖에 없다는 스피노자의 한줄 평가를 차치하더라도 정치의 존재에 대한 본질을 이처람 이익집단들 간의 갈등, 더 나아가 미국 정치의 핵심을 ‘정치 권력에게서 경제 권력을 분리하는 데 있었다’고 규정하는 것도 저로서는 꽤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습니다. 굳이 과거의 도금 시대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치열한 양당 정치의 대결 속에서 미국의 현대 정치가 수많은 정치 로비에 의한 ‘금권 정치’로 전락한 지 오래인데, 한때 앞선 그것이 가능했던 잭슨 대통령 시절의 정치적 이상주의 시대를 대입하는 것이라면 크게 벗어난 설명이라고 여겨집니다.

뒤이어 정당 정치에서는 “정당 정치의 관점에서 이익집단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범위는 제한되어 있다”고 저자는 인지하고 다른 특수이익집단의 그들의 ‘특수이익’과 이들 특수이익집단이 “실제 선거에서 부정적인 효과를 미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이들 집단이 정당 정치에 행사하는 영향력을 더욱 더 제약한다” 일종의 제한적 분석 또한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예를들어 현재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미국 정치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뉴욕 월스트리트의 금융인들보다 확연한데, 아마 그가 이 책을 집필했던 1960년대에는 이 복합체의 영향력이 드러나지 않았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퇴임 당시에 밝혔던 국가에 대한 이들의 영향력을 샤츠슈나이더 역시 과소 평가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봤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가지 확실한 건 그가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이 책의 많은 내용이 추가되거나 바뀌었을 것입니다.

다만, 이익 집단들이 추구하는 자신의 이익들을 공적 이익으로 전환시키려는 노력을 추동하고, 4장에서 밝히고 있는 갈등의 치환의 주제에서도 궁극적으로는 ‘갈등의 관리’ 다시금 강조하고 있습니다. “갈등이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동시에 통합한다”는 양면적 측면과 “공동체 내의 모든 긴장을 이용하려는 정치체제는 산산이 부서져 해체될 수 밖에 없다”는 부정적인 해석도 ‘관리’의 필요성으로 이어집니다. 어쩌면 이러한 사적 이익으로 인한 갈등을 공동의 이익의 측면으로 확장시키거나 이해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앞선 사적 이익을 큰틀에서 공동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닐까 감히 판단해봅니다. 어떤 민주주의 국가들보다 현재의 미국에서 이들 이익 집단들의 꽤 규모와 응집력을 보이는 것은 개인을 포함한 사적 이익을 주장하는 데 미국 만의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파악됩니다. 이것을 권위주의적 권력 독점의 출현을 예방하고자 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의 덕분이라고 할 수도 있고, 원래 자유의 이념을 가장 효과적으로 현실에 도입한 이들이 미국인이어서도 그럴 수 있겠습니다. 우리와 같은 전통적인 공동제주의적 역사가 있는 국가들에게서는 조금 이해하기 힘든 정치사회적 토양이기도 하겠습니다.

또한 5장은 정치적 패러다임이 서로 뒤바뀌게 되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정치역사적 변화를 소개하고, 규모로는 전국 정당의 위치에서 각각의 지지기반인 ‘기업-공화당, 조직 노동-민주당’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기업과 공화당 간의 관계를 적잖은 지면을 할애해 설명하고 있는데요. 이것은 오늘날에도 꽤 견고한 모델이기도 합니다. 이어서 나오는 6장은 정당 정치와 더불어 많은 수의 미국 유권자가 스스로 투표 참여를 포기하고 있는 현상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를 매우 소리 높여 “만약 4천만의 성인 시민이 법에 의해 참정권을 박탈당했다면, 우리는 그 사실을 이 체체의 성격을 보여 주는 기본적인 지표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법 외적 수단이 이런 결과를 만들어 냈다는 사실은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라고 우려합니다. 법적인 문제 없이 시민들의 자발적 참정권 포기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익히 모두가 아는 내용입니다. 저자 스스로도 이 원인에 대해 해답을 갖고 있는데요. “민주주의에 관한 모든 고전적 개념들은 사람들이 정치 공동체에 참여하는 이유와 관련하여 그들 개개인이 가진 자발적 욕구의 강도와 그 보편성을 과대평가해 왔다”고 제시합니다. 이 장의 중간에 “상당수 정치적 주장 내지 정책들이 무시되는 이유는 약 4천만 명의 투표 불참자들이 그 정책과 주장을 지지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정치체제와 정당의 현실론과 관련해 설명을 하고 있지만 크게 설득력은 없었습니다.

끝으로 우리가 민주주의에 있어서 큰 냉소를 갖게 된 것은 “대중이 너무 민주주의에 대한 매우 단순화된 정의가 상정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저자는 그 원인을 찾고 있습니다. “대중이 경쟁적인 권력 체계를 좋아하고, 민주주의와 높은 수준의 삶의 질 둘 다를 원하다는 것”은 복잡한 민주주의적 사회 현실을 대변하는 것이라 판명됩니다. 조직화된 여러 특수 이익이 미국 정치의 주된 행위자가 되어가고 있는 현실을 보면 많은 국가들에게서 유산 계급이 사실상 대중 권력에 대한 의문 부호를 갖고 있는 것과도 상반되는 견해이기도 합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대중의 권력이 중요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은 이 책에서도 분명 보이나, 날이 가면 갈수록 대중에 의한 정치 참여가 사그라드는 것은 그 이유가 대중 자신에게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치 자체가 본래적 이상주의에서 변질되어서 그런것인지는 양자 사이의 선택이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래서 정치 철학의 중요한 물음인 “과연 권력을 누가 쥐고 또 어떤식으로 행사되어야 하는 것”은 더할나위 없이 중요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일찍이 장 자크 루소는 “인민은 정부를 갈아치울 권리를 갖고 있다”고 밝혔으며. 샤츠슈나이더 역시 이 루소의 주장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대로 현실 정치의 문제가 엄연히 우리 시민에게 국한된 원인이 아니라면 더욱 현실 정치에 관여해야 되는 정당성은 충분히 있어 보입니다. 아니 당연히 그래야만 하겠죠. 듀이와 토크빌이 우려했던 우리의 민주적 정치가 기로에 서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또한 이것과는 별개로 이익 집단의 측면에서 기업들의 권력이 비대한 것에 대한 판단은 저자의 통찰력이라 볼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로 기업 권력과 정치 권력의 분리 작업에 달려 있다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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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사워드 지음, 강정인.이석희 옮김 / 까치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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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출신의 ‘정치이론가’이자 정치학자인 마이클 사워드는 영국 코벤트리에 소재하고 있는 워릭 대학의 정치학 교수이기도 합니다. 그는 또한 시드니 민주주의 네트워크 (The Sydney Democracy Network)의 회원으로 활동중인데요. 그의 주요 관심 분야는 오늘날 민감한 정치적 변화 시기의 여러 핵심적 이론들을 연구하고, 어떻게 현실에서 작용되어 왔는지에 대한 포괄적 연구들입니다. 구글 검색을 통해서 호주에서는 꽤 유명한 정치학자로 인정 받는 것을 대충 알 수 있었는데요. 아마도 현실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학문적 접근을 언론과 여러 저작을 통해 지속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이 책도 그러한 연장선상에 있는 놀라운 학문적 작업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생각했습니다. 원제는 ‘Democracy’로 지난 2003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까치에서 2018년에 번역 출판을 맡았습니다.

우선 마이클 사워드는 자신의 이 글을 통해 밝히고자 하는 두 가지 논점이 있는데요. ‘첫번째는, 과연 평범한 사람들의 정치참여는 중요한가. 두번째로는, 오늘날 전세계의 경제적 불평등과 만연한 환경 문제를 민주주의가 해결할 수 있는가’ 입니다. 이 두 가지 주제 내지는 의문을 갖고 전반적인 민주주의의 형태, 성격, 기원, 의의 등을 논리적으로 규명해 나가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1999년 10월 파키스탄의 페르베즈 마샤라프 장군이 주도한 쿠데타와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플로리다 개표 상황, EU 체제와 유로화 가입에 대한 영국의 민주주의 캠페인 이 3가지를 ‘과연 각각의 국민 국가들에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와 그 본질성을 살펴보고, 2장은 미헬스를 거쳐 조지프 슘페터의 ‘슘페터식 민주주의’를 고찰하고 3장은 앞선 슘페터식 민주주의를 비판과 함께 이론적 대안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4장은 오늘날 민주주의 체제가 직면한 몇가지 도전들에 대해 살펴보고, 5장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떠한 길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정치철학의 이론과 현실정치의 여러 고민들을 틈새에서 몇가지 방법을 모색해보는 것으로 마지막 약간의 결론을 통해 글이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글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저자는 민주주의 이념이나 가치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개진하기 보다는 일종의 역사적 혹은 이론적 서술 (naration)을 통해 텍스트적인 상호접근식 방법의 형태로 일관되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즉, 1차대전 당시 ‘인류 문명의 파괴’에 따른 민주주의적 회의와 그에 따른 미헬스의 입장들, 뒤이어 2차대전을 치루고 이후에 등장한 조지프 슘페터의 소위 민주주의에 있어서 ‘정치과학적’ 이론 소개하고 각각의 주장을 또 다른 여러 정치학자들의 주장과 이론으로 비교하는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자 자신은 꽤 관찰자의 시선으로 민주주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증되는 곳곳에 저자의 인식이 또 보여지기도 합니다. 우선 미헬스는 그의 정당론에서 “민주주의는 과두제로 이르게 되며, 필연적으로 과두제적인 중핵을 포함한다”고 전제하며 조지프 슘페터도 동의한대로 ‘엘리트에 의한 관료지배’를 안정적인 선택으로 지지한 바가 있습니다. 또한 슘페터 역시 “유권자들의 역할이란 정부를 산출하는 것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 명백하게 단정하고 있는데요. 정치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현실주의적 정치 이론’라 여겨지지만 미헬스와 슘페터는 ‘이 현실적인 한계’를 매우 중요하게 파악했지만 동시에 정치 일반을 소급적인 수단화에 이르게 했다는 비판은 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조금 더 달리 말하면 ‘민주주의 내에서 엘리트 지배 체제에 대한 이론적 근거’가 이를 추종하는 여러 학자들에 의해 알게 모르게 되어 왔다는 점에서 국민국가에서 다수의 국민들을 단순한 권력의 위임자로 국한시켜 해석한 부분은 분명 동의하기 힘들기도 합니다.

이 엘리트 지배 체제에 대한 당위성이 민주주의 자체가 ‘민중 권력의 가시적 형태’라는 측면의 이해와 ‘오늘날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이해 관계와 정치적 상황을 과연 대중들이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와 관련해 앤서니 다운스가 옹호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주도하는 정치체제의 인식으로 변화되어 왔습니다. 더불어 ‘민주주의를 헐뜯고자 하는 사람들의 범주’가 사라지지 않은 것도 앞선 사례들과 거의 비슷해 보입니다. 저자는 이 민주주의를 헐뜯고자 하는 범주의 사람들이 작다고 평가하지만 저는 이것에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 예전에 태국의 변호사와 의사들을 비롯한 엘리트들이 농민이나 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투표권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크 랑시에르도 진단했던 바와 같이 오늘날 과두제의 위협은 지대한 것입니다. 에릭 홉스봄도 처칠과 같이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비관론을 견지했던 바가 있는데요. 이러한 소위 ‘정치과학자들’은 “평등주의적 열망은 망상”이며, “제어하기 힘든 민중적 권력에 대한 두려움”이 소위 상위 계층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 엘리트 지배 정치가 모순인 것은 “평범한 남성과 여성 대다수에 대한 깊은 불신”이 지배하는 것으로 저자 역시 이 점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로버트 달과 벤자민 바버가 천착했던 다원주의와 참여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수단만이 이러한 ‘엘리트 지배 체제’로 획일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고 저 역시 믿고 있습니다. 물론 포퓰리즘과 반지성주의와는 아주 면밀하게 구분되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죠.

18세기 말 공화주의 시기의 루소는 그의 일반의지로서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을 포괄하고 그들 모두가 참여해서 만들어내는 공동선에 대한 개념”을 주창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가치는 충분히 공감할 만하며, 특히 “자유주의가 불안정과 불안으로 치닫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정기적인 공동체주의의 교정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설득적으로 이해됩니다. 그리고 많은 학자들의 의구심을 갖고 있는 ‘대중권력’에 대한 대안으로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로 진단하는 ‘숙의 민주주의’가 좋은 해결책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각 국가들이 지구화 과정에 놓여 있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소수에 대한 부의 집중과 경제적 불평등에 이르고 있어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상호 불균형적인 관계로 발생하는 문제들의 그 근본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로버트 달이 주장했던 ‘시장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필요해 보이지만, 이제는 국가 단위의 권력 규모를 보이고 있는 다국적 기업들과 정치 권력이 영합해 나가고 있는 거대한 경제 주체들의 영향에서 전통주의적인 민주주의를 지속해 나갈 수 있을지는 사실상 시민들의 손에 달려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런 권력이 재편되고 있는 상황에서 민주주의가 선언적인 의미로서 국한될 수 있다는 점은 바로 이 우려의 본질이라고 불릴만합니다.

글의 결말에서 보이는 대로 저자는 모두에게 각자가 인식하는 민주주의는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민주주의를 정확히 규정하는 것은 거의 딜레마에 가깝지만, 각각의 시민들이 집중하는 서로 다른 민주주의 가치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민주주의는 스스로 존속할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도 있겠죠. 전세계의 심각한 환경 오염과 이것의 피해는 세계의 국제정치가 민주주의적 메커니즘으로 돌아가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반증은 꽤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중국 학자 엔쉐퉁이 현재 세계는 “민주주의적 과잉의 시대”라고 말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도 실상은 세계의 민주주의가 ‘공표’되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현실의 민주주의를 좀 더 깊이 이해하고 그것이 어떻게 기반하고 있는지 이 책은 꽤 면밀하고 상세히 잘 보여주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더 많은 민주주의와 연관된 ‘급진 민주주의’에 대한 저자의 판단이 약간 애매하긴 하지만 딱히 책을 잡고 싶진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끝으로 로버트 달의 ‘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에서 언급된 다두제(일종의 다원주의적 정치체제)의 핵심 조건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1. 선출직 공직자들
2.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3. 포괄적인 선거권
4. (누구나) 공직에 출마할 권리
5. 표현의 자유
6. 대안적인 정보
7. 결사의 자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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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목소리가 중요한가 - 신자유주의 이후의 문화와 정치
닉 콜드리 지음, 이정엽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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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정경대(LSE)의 미디어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인 닉 콜드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네트워크와 미디어학 권위자이기도 한데요. 그의 대표적인 논저 중 ‘미디어는 어떻게 신화가 되었는가’는 큰 명성을 안겨준 글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닉 콜드리 역시 마누엘 카스텔과 비슷하게 오늘날 변화된 민주주의 환경에 대한 분석과 ‘신자유주의적 상황에서 인간 소외에 대한 해결책을 과연 1인 미디어가 갖고 있는가’와 유사한 궁금증을 갖고 있는게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네트워크와 개별적인 미디어 시대의 초래를 ‘유별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는데요. 저는 그와는 별개로 이 네트워크의 시대가 우리 민주주의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매개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콜드리의 이 책이 저에게 작은 응답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2010년에 출간된 이 글의 원제는 ‘Why Voice Matters : Culture and Politics After Neoliberalism’ 이며, 국내에는 2015년 번역 출간 되었습니다.

총 7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특히 3장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라는 모순어법’ 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고 느꼈는데요. 책 제목과 동일하게 중요한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대에 각각의 개인들 및 시민들의 목소리에 관한 필요성을 설득하고 그것이 사실상 부재했던 우리 시대의 단면과 그 배경을 폭넓은 인용을 통해 마찬가지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악셀 호네트와 리처드 A. 포스너, 낸시 프레이저, 주디스 버틀러 그리고 짧지만 콜린 크라우치까지 이처럼 신자유주의의 비판자들은 거의 언급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선 저자는 전세계의 신자유주의적 기조의 산파가 된 인물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습니다. 루트비히 폰 미제스,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 밀턴 프리드먼이 바로 이들입니다. 여기에 레이건과 대처에 이르는 신자유주의적 정치화 과정을 언급하며, 3장의 주제와 관련된 배경으로 1980년대 이후부터 영국의 그 과정화를 특별히 비판적으로 고찰해보고 있습니다. 앞서 제가 밝힌대로 이 3장은 특히 중요한데요. 왜냐하면 많은 선진국과 워싱턴 컨센서스에 의한 이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얼마나 형용 모순이고 어떻게 그러한 모순에 근거하고 있는지 분석하고, 이를 추종하는 많은 보수 우파들의 ‘자유 민주주의’와 얼마나 유사한지 비판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었습니다. 콜드리가 주장하고 있는 이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전통적인 민주주의는 매우 다르고 또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과 관련해서도 그는 “시장 기능이라는 ‘우선적’ 요구로 추동되는 이른바 ‘민주적’ 과정은 실제로는 전혀 민주적이지 않다”고 규명합니다. 철저하게 동의할 수 밖에 없는 주장이기도 합니다. 3장에서는 이러한 분석의 주된 관점이 되는 영국과 영국 정치에 대해 설명하며 “많은 영국인들이 자신의 정치적 요구가 사실상 현실 정치에 반영되고 있지 않다”고 여기는 것을 추가하고 있는데요. 저는 여기서 한가지 궁금한 점이 생각났습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낮은 투표율은 현실 정치와 과연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가”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현실 정치에 좌절한 많은 시민들의 선택이 주된 연유가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이미 많은 학자들이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인 ‘결사와 집회의 자유’를 제한해 왔고, 궁극적으로 인간의 노동력 상품화를 불러 일으킨 ‘노동단체의 정치적 무력화’와 노동 집단에 대한 견제가 이를 통해 많은 시민들의 비판적 목소리를 무력화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진단해 왔습니다. 이 책에 소개된 어느 영국 정치인의 “부유층에 더 집중되고 있는 부의 집중화를 도덕적 문제로 다루기 전에, 모든 인간들이 엄청난 성공의 가능성을 부여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되물음은 전자의 메커니즘이 얼마나 노골적인지 엿볼 수 있습니다. 즉, 만연한 ‘시장 국가화’ 내지는 ‘정치는 효과적인 자유 시장 확대를 위해서만 존재해야한다’는 이 신자유주의 독트린의 가혹한 위상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정치적 이념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버틀란드 러셀의 주장을 다소간 차치하더라도 신자유주의를 위해 민주주의를 다소 제한하거나 축소할 수는 결코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불의적 이익에 영합한 수많은 미디어들과 그런 권력화를 논의의 확대로서 책의 4장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정치가 경제와 이익을 공유하며 초래될 수 있는 위험성과 관련하여 일찍이 자크 랑시에르는 ‘과두제’의 위협을 꼽은바가 있습니다. 이 과두제의 위협은 랑시에르 뿐만 아니라 많은 학자들이 예측한 바가 있습니다. 로버트 달도 역시 다원주의적 가치가 붕괴될 때, 각각의 기득권과 정치가 영합하여 사실상 과두 형태의 정치가 출현할 것을 예견한 바가 있는데요. 인간의 노동을 자본 축적의 수단으로 삼아 이것을 전면적인 자유 시장 체제에 부합시켜 인간 소외의 문제와 경제적 불평등의 확대로 인한 경졔 계급적 획일화를 지금 우리는 목도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도 리처드 윌킨슨의 ‘불평등 트라우마’는 시민들의 인간 소외와 여러가지 경제적 모순으로 인한 정신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제적 실천, 정치, 문화 안에 깊숙이 자리잡은 신자유주의 독트린이 여러 고통스러운 모순을 만들어냈다”는게 저자가 제기하는 일관된 주장입니다.

앞선 논증들을 바탕으로 오늘날 많은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체체하에 있는 국가들의 상황은 “기업과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화에 발전시킨 내부 시장과 아웃소싱”의 폭발적인 형태입니다. 이것을 마땅히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비판해야 하는 좌파 더불어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영국의 노동당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신자유주의적 독트린에 영합하고, 애초에 일관되게 ‘추상적 비판’에 그쳐 확실한 비판적 대안이 되지 못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현실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시민들의 더 많은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저자는 확인하고 있고 이 점과 관련해 5장과 6장에서 꽤 설득적으로 논증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아마르티아 센이 밝힌 진정한 자유로서의 발전에서 “이런 자유에는 경제적 기회 뿐만 아니라 정치적 자유 및 사회적 자유 (읽고 쓰는 능력을 포함)이 중요”한데 이것은 목소리을 내기 위한 전제 조건일 뿐만 아니라, 보편적으로 신자유주의가 말하는 경제적 자유만을 포함한 협소한 해석을 실질적으로 모든 이들의 자유 기회를 위한 가치적 자리매김이 필요해 보입니다. 어쩌면 직면한 당위성의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끝으로 콜드리의 이 글은 콜린 크라우치의 동일한 주제의 글과 함께 신자유주의 비판서의 거의 모든 것이라 평가될 만합니다. 더불어 이 논저의 높은 학문적 의의는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체제’의 허구적 모순을 과감없이 파헤친 점일 것입니다. 자유시장 이념이 절대적이고 개인이 공공선에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고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는 밀턴 프리드먼의 주장은 대체 다수의 이익과 어느 부분이 일치하는지 마땅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꽤 이상주의적일지 모르지만 사회 공통의 도덕적 규범과 공공선의 확립을 시민 모두의 중요한 가치로 인식하고 이에 대한 목소리를 끊임없이 이어 나가야 하지 않을까 다시금 생각해보게 됩니다.

“부의 창출이 우선이라는 이유로 불평등이라는 엄연한 사실은 신자유주의 논평가들에게 종종 묵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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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는가 - 자유주의의 본질적인 모순에 대한 분석
패트릭 J. 드닌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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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인 패트릭 J. 드닌은 미국 인디애나 주의 노터테임 대학 정치학과 교수인데요. 과거 프리스턴 대학과 조지타운 대학을 거치면서 특히 미국 정치 사상과 독립 시기의 정치사 연구와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는 꽤 저명한 정치학자이기도 합니다. 또한 1995년에는 ‘레오 스트라우스’ 상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우선 이 책은 편집자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미국 예일 대학 출판부에서 펴내는 ‘정치와 문화 Politics and Culture’의 시리즈 중 하나인데요. 위의 시리즈 중 두번째 논저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원제는 ‘Why Lieberalism Failed’ 로서 지난 2018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최근인 올 4월에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오늘날 경제적 불평등을 포함한 정치적 실패가 전세계적인 문제로 대두하게 된 연유에는 이 자유주의가 너무나 성공적으로 이데올로기화 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저자는 진단하고 있습니다. 즉, 자유주의의 완벽한 성공이 바로 오늘날의 위기를 만들었다는 입장입니다. 홉스와 밀을 거쳐 근대의 시기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 자유주의는 인간의 해방과 권리의 증진 및 자유의 증대를 기본 가치로 삼았습니다. 특히 제일 앞선 ‘인간 해방’이 중요한 목표였는데요. 20세기 초에 서구는 양차대전, 특히 2차대전 당시의 전체주의를 목격하면서 개인의 자유를 포함한 광범위한 자유주의적 확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자유주의는 점차 민주주의와 병립하게 되었고, 시기상으로 약간 차이는 있지만 경제적 시장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와 함께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평가하는 대로 대다수의 선진 자유진영의 국가사회적 이데올로기가 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대두의 시기에서 앞에서 제가 언급했던 바와 같이 경제적 불평등과 시민의 파편화, 그리고 시민의 퇴출을 만들어 낸 현재 우리의 시대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회학자들과 경제학자들이 자유주의를 더 확대시켜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합니다. 이것의 진정한 진위 여부를 차치하더라도 샹탈 무페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급진 민주주의’와 앞의 ‘자유주의의 더 많은 확대(이것을 어떤 용어로 만들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가 서로 동일한 가치를 갖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당연히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이 책의 7장에서 밝히고 있는 “자유주의의 가장 해로운 허구 중 하나는 동의 이론, 즉 자율적이고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사람들이 ‘권리 보호’를 유일한 목표로 삼는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추상적인 계약을 맺었다는 가상 시나리오였다”는 긴 문장은 저의 해석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더불어 토크빌의 개인의 이기심과 이익 추구를 적절하게 제어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에 해악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던 것은 익히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자유주의에 기반한 개인의 이기심 보장과 권리 추구가 얼마나 많은 공동선과 공동체적 이익을 훼손해 왔는지 이 책의 1장과 2장에서 논증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저자는 “자유주의적 뿌리는 다양한 인간학적 가정과 사회 규범을 뒤집으려는 노력에 있었다”고 해석하며, 인간이 본디 불확실성과 비합리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많은 사회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이 불변한다’는 생각을 거부함으로써 더욱 이러한 불안정성을 무시하고 무조건적인 개인의 이익과 이기심 추구를 부채질 해 왔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 저자는 이익과 이기심을 중요한 가치로 설정해 온 보수적 자유주의자들의 “의제 가운데 근대에 정치적 우위를 점하는 동안 계속해서 성공적으로 실행한 의제는 규제 완화, 세계화, 엄청난 경제적 불평등을 포함한 경제적 자유주의 뿐이다”라고 비판하면서 동시에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진보주의자들이 그나마 성공한 정치적 의제는 ‘성적 자율성 프로젝트 뿐”이라고 더 강한 비판을 하고 있는데요. 정말 얼마나 통렬한 평가인지 저는 적극적인 동의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우리의 이기심은 극히 한계를 모르며, 더군다나 세계의 자원은 분명 제한적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주의의 강조가 결국 사회 질서와 안정을 위해 ‘법치주의’에 더욱 의존하게 됨으로써, 사회 전체가 극히 단순한 형벌주의적 입장에 더욱 전도될 가능성을 저자는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단순히 설명하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종래의 사회적 규범과 공동체적 의식, 그리고 공동체주의로 충분히 법에 일방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사회 체계를 수립할 수 있음에도 앞선 문제를 법에 의존하는 간편주의로 만들어 결국 사회적으로 약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도 7장에서 논하고 있는 사실상의 ‘시민의 퇴출’과 ‘퇴화된 시민들’과 같은 반동적 현상은 “대중민주주의의 기원 자체와 민주주의에 참여하는 시민들을 최소로 줄이려는 노력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서 이 점도 역시 배경에는 자유주의가 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유동하는 근대로 유명한 지그문트 바우만의 ‘주변의 이웃과 공동체의 고통에 별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신자유주의자들’과 같은 해석과 유사한 저자의 다음과 같은 평가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계 어디서나 실제 이웃과 공동체의 공동 운명에 무관심한 자유주의적 규범을 신봉하는 자들”이 주도하는 세계에 “좌절한 시민들이 민주주의 주장과 대중의 통제권이 없는 현실간의 간극이 점점 벌어지는 추세를 목도”하고 있다고 공통된 인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결론에 이르러 밝히는 ‘자유주의 이후의 자유’에서 저자는 “자유주의 이후 시대로 나아가려면, 자유주의가 초기에 감탄스러운 열망을 바탕으로 호소력을 발휘했으나 대개 그런 열망의 변질에 의존해 성공해왔다는 것을 인식”해야하며, 이것과는 반대로 “민주주의는 단순히 자기 이익의 표현이 아니라 종전의 좁은 이익을 공동선에 대한 넉넉한 관심으로 바꾸는 전환”이라는 절대선으로 표명하며 약간의 현실사고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저자는 논의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선출된 기득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요. 번역의 문제인지 아니면 저자가 기득권에 대한 저런 인식을 갖고 있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사실상 저는 동의하기 힘든 개념이었습니다. 엘리트들에 기반한 정치와 관련해서도 어떤 특별한 대안을 보이고 있지 않는 점도 아쉬운 부분이었는데요. 우리는 너무나 비상식적인 엘리트주의에 대한 무비판을 받아들이고 있어서 ‘엘리트 정치 기반과 현실정치를 전복의 대상으로 삼는 포퓰리즘’ 만큼이나 민주주의적 이념을 해치는 엘리트주의와 약한 권력을 갖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사실상의 피동적 인식 태도는 필히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자가 자유주의적 비판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 나머지 ‘제한되지 않는 엘리트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대해 설명이 미흡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점은 충분히 감안하고 있고 다만 저는 ‘확대되는 민주주의’에 반하는 어떠한 정치적 입장에 대해 반대한다는 것을 밝히고 싶었습니다. 제가 밝힌 이러한 사소한 문제를 제외하면 노련한 정치학자 패트릭 J. 드닌의 이 논저는 충분히 의미있는 결과물이라고 먼저 밝혀두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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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사회와 이익사회 - 순수사회학의 기본개념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번역총서 7
페르디난트 퇴니스 지음, 곽노완.황기우 옮김 / 라움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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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베버와 게오르그 짐멜 등과 동시대인으로 독일 사회학회를 창설하여 초대 회장에 오르면서 초기 독일 사회학의 기초를 쌓으며 큰 명성을 얻은 페르디난트 퇴니스는 1933년까지 킬 대학의 특별한 연구 교수직을 역임했는데요. 특히 1932에서 1933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그가 행했던 나치당의 비판으로 스스로 궁지에 몰리게 되며, 히틀러에 의해 강제로 대학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왠지 칼 슈미트와는 유독 대비되는 행적이기도 합니다. 두 공역자의 해제에는 이상주의적이고 낭만주의적인 경향을 갖고 있었던 퇴니스의 학문적 경향과 양심에 대해서도 잘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책은 그가 28세때 저술되었으며, 이번에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번역총서로 묶어 1912년 개정판을 바탕이 되었다고, 또한 정부의 재원을 지원받아 출간된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제대 교수였던 황성모 선생의 1982년 국내 번역판을 다시 새롭게 정비하여 낸 것으로 공역자들이 다시 한번 주지하고 있습니다. 독일어 원제는 ‘Gemeinschaft und Gesellschaft’ 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책의 원제를 바로 표현한 게마인샤프트, 게젤샤프트는 매우 유명한 개념이기도 합니다. 당시 독일은 말할것도 없고, 프랑스를 비롯한 미국에서도 이 개념을 여러 곳에서 차용해 의미를 확장시켰는데요. 더불어 우리말로 공동체와 결사체라는 의미로 쓰여지기도 했습니다. 저자인 퇴니스는 공동사회와 이익사회라는 대비되는 개념으로 후자를 바탕으로 전자의 우월성을 다소 증명하는 방법을 글의 논리적 전개를 이끌고 있습니다. 또한 ‘부모-자식, 남편-아내, 형제-자매’ 등으로 인식된 기반의 전통적인 공동사회에 대해 개인의 향락 (아마도 안락에 더 가깝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을 위한 자원 분배의 차원에서 가부장제를 차악의 문제로 수용하고 있고, 후에 전개된 서술 기반에서 권력 관계와 장원을 언급하면서 농노와 노예 제도에 대해 ‘법적 노예 신분은 그 본질상 의롭지 못하다’고 평가하지만 앞선 가부장 제도와 마찬가지로 사실상 역사의 문제로 치환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이익사회가 출현하기 이 전의 모든 가용한 생산물이 자급자족 형태로 순환된 공동사회의 생산형태가 앞서 밝힌대로 각 구성원들의 향락의 문제에서 중요한 기반이 되었고, 이후 잘 알려진 바대로 ‘잉여생산물’을 판매의 형태로 출현한 이익사회에 대해 상인과 자본가의 해석을 크게 할애하면서 잠정적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불평등의 한계를 넘어서면 서로 상이한 것들의 통일체로서 공동사회의 본질이 지양된다”는 측면에서 자본가와 상인의 화폐권력적 우위에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특히 촌락의 구조에서 노동과 생산의 거의 완전한 구조는 선순환의 입장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반면, 각각의 개별 노동력이 수단화가 되는 이익사회의 생산체가 기존의 공동사회가 추구했던 여러 중요한 가치들을 망각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고 보는데요. 이는 “상호간의 믿음과 신뢰가 기반한 관계가 매우 성립하기 어렵게 되는” 이익사회의 단면을 평가하는 것으로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이렇게 1부에 이르는 공동사회와 이익사회의 개념의 일독을 마치고 다음 2부를 읽어나가는 도중에 명백하고 1부와 2부는 구조상 순서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부도 전자인 1부와 마찬가지로 서로 대비되는 규명으로 본질의지와 선택의지를 다루고 있는데요. 2부는 약간 미흡한 선택의지의 해석을 감안한다면 거의 본질의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쇼펜하우어와 스피노자의 영향을 받은 본질의지의 인간 전반의 사고와 관념, 감정에 대한 퇴니스의 해석은 본질적으로는 의지를 유기체로 인식하고, 감정과 사고의 영향이 서로 연계되고 주고받는 과정으로 되어 있다는 큰 틀의 인식을 고려한다면 꽤 일관된 논증을 보이고 있습니다. 인간의 고유한 기억을 의지의 영향을 주는 중요한 인자로 파악하고, 기억 자체가 ‘필연적 의견, 정언적 명령’으로 호의-습관-기억으로 비롯된 의지 형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본질은 의지와 자유에 비롯되는 것으로 자유와 의지는 곧 하나라는 관념을 잉태합니다. 이렇게 도출된 인간 의지의 개념은 욕망과 욕구와 관련해서 인간의 특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인식이며, 인간 의지 자체가 동물적, 정신적 의지에서 결정된 유기체적 의지로 확신된다면, 인간이 자신의 욕망과 이득을 위해 이기심을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경향이 거의 이해가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선택의지는 앞선 본질의지와 명백하게 대비되고 이점은 이익과 이기심의 선택의 문제로 규정됩니다. 결국 “이러한 개개인은 자기의 본질의지에 자신의 태도를 정하게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의지를 사실상 본성을 나타내는 명제로 받아들이고 해석되는 것은 일찍이 쇼펜하우어가 시도했던 철학이며, 스피노자 역시 의지와 본성의 문제를 명확히 구별하지 않고 받아들였던 태도와 유사합니다.

그리고 3부는 정의와 테제, 자연법을 정리하면서, 마찬가지로 정의와 자연법을 본질의지-선택의지 및 공동사회-이익사회라는 대비되는 논리적 전개로 확실히 표명되고 있는데요. 이익사회에서 선택의지로 기반되는 정의가 과연 반대의 본질의지와 공동사회에서의 가치로 과연 우월한 개념으로 도출될 수 있느냐와 전통적인 관습과 인습의 기반이 되는 공동사회의 관습법을 역사에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퇴니스가 규명하는 마지막 자연법과 관련된 문제는 인간의 의지와는 조금 거리가 먼 관념성과 보편성의 측면에서 찾아보고 있습니다. 따로 독특한 이해라고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공동사회의 관습법이 자연법의 일부로 귀속되고 이후 스스로 고유 영역으로서 공법적인 구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측면의 해석을 보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익사회의 고리대금과 같은 불로소득과 관련된 채권법은 개인의 이익의 수단으로 나타났고, 전체적으로 상업 발달과 자본가 계급의 출현으로 탄생한 이익사회가 어떠한 성격을 갖고 있는지 마찬가지로 보여줍니다.

이렇게 우리가 살펴본 양 사회의 분석적 측면은 과연 공동체의 국가론으로서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 혹은 공동사회나 이익사회 한쪽에 기반한 국가를 도출해야 하는지, 양자 모두에게서 공통되는 보편적 이익으로 취합해야 되는지에 대한 퇴니스의 고민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보편적인 이익과 보편적인 구속으로 누구나 인정하는 여론에 기반하는 국가체제를 갖추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겁니다. 저자 자신이 히틀러로 대표되는 국가사회주의를 목도한 바가 있듯이 자본주의 발달 시기의 독일의 경험을 비추어 본다면 양쪽을 극명하게 대립시켜 결과물을 살펴보는 일종의 경험도출론은 사실상 실행되기 어려운 문제였을 것입니다. 이익의 문제를 최고 선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이익사회가 무조건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믿음은 꽤 위험하기도 한 것입니다. 퇴니스가 자신의 독일이 거대하고 파급력이 큰 위험한 징조를 미리 본능으로 알고 이를 비판했던 것과 같이 온전한 자연법을 도덕적 기초로 삼아 국가의 기조로 삼는 것이 완전한 공동사회의 회귀를 주장하는 것 보다는 좀 더 나은 선택이 되지 않을까 고민해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자인 그가 이익사회의 단면을 과감하게 파악했듯이 우리 사회의 이 이익사회화는 꽤 변질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 책이 우리에게 어떠한 이해를 가져다줄지는 다소 불명확하긴 합니다만 초기 사회학에서 시도된 규명들이 오늘날에도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약간의 희망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끝으로 덧붙여, 98페이지에 오타 한 곳을 발견했는데요. 정부의 지원으로 출간한 책이 제대로 된 마무리도 안 된것은 매우 유감스럽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많이 팔릴 책도 아니니 다시 재출간하는 것은 익히 어려운 일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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