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도둑 - 99%는 왜 1%에게 빼앗기고 빚을 지는가
그레이스 블레이클리 지음, 안세민 옮김 / 책세상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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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햄프셔 카운티의 베이싱스토크에서 태어난 그레이스 블레이클리는 공동 교육 독립학교인 로듣 완즈워스 대학 (LWC)을 거쳐, 옥스포드의 세인트 피터스 칼리지에서 철학과 정치학 그리고 경제학을 공부했고, 같은 대학의 세인트 안토니스 칼리지에서 아프리카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이후 그녀는 얼마간의 경영 컨설턴트 경력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정치와 관련된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2019년에 뉴 스테이츠먼이라는 잡지에 경제 해설로 칼럼과 팟캐스트 등에서 활약하고 드디어 그녀의 이력에 중요한 시점이 된, 논저 "Stolen : How to Save the World from Financialisation"을 출간합니다. 이 책은 영국 내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고 평론가인 마이클 갈란트는 "사회주의자와 회의론자 모두를 위한 자본주의에 대한 설득력 높은 비판"이라 평가를 하였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그녀의 주저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의 출판과 영국 국내의 상황을 돌이켜 보건대 신기하게도 콜린 크라우치와 비슷한 사례라고 여겨졌습니다. 이제야 글을 완독하고 나서 들었던 첫 느낌은 현재 체제에 대한 그녀의 예측과 분석이 라구람 라잔과 비견될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래서 이 글은 충분히 찬사를 받을 만한 논저라고 감히 판단해 봅니다. 그녀의 이 책은 원제,"Stolen : How to Save the World from Financialisation"으로 지난 2019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5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 글의 중요한 점이라 생각되는 것은 과거 브레턴우즈 체제 이후, 그 시기의 다소 상반된 영국에서의 짧은 케인스주의적 시대를 지나치며 어떻게 신자유주의가 '시티 오브 런던'과 이익을 함께하는 대처와 같은 정치인들에 의해 시도되었는지를 명확히 설명해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신자유주의의 화신과도 같은 마거릿 대처가 일부 보수층에 의해 현재까지도 추앙받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가 전통적인 노동당 식의 정치를 극도로 경멸했으며, 특히 노동 조합에 대한 엄청난 증오를 블레이클리의 인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었는데요. 저는 이 지점에서 로버트 달의 중요한 관점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일전에 달은 광범위한 민주주의에서 정치적 의견이나 신념이 다른 사람들이 대치해 있다 하더라도 서로가 적대시 하지 않고 사회와 건전한 정치를 위해 각자가 다원주의적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즉, 대처와 같은 보수주의 정치인이 스스로의 입장과 정치적 신념으로 그 반대에 있는 다른 정치인을 개인적 인상을 포함해, 그저 혐오하기보다는 토론을 통해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모두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하버마스 식의 장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죠. 이것은 거의 당위와도 같은 문제입니다. 물론 대처가 카를 슈미트를 일독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런식의 대결 구도와 경멸적 태도는 오늘날 미국의 티파티와 같은 인종주의적 행태와 다름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미 프랭크 푸레디는 그러한 "공포와 혐오를 매개로한 정치가 어떠한 대안도 마련할 수 없다"고 강조한 바가 있습니다. 이처럼 그녀가 레이건과 함께 주도한 신자유주의적 이행이 '대안이 없다'는 식으로 강하게 규정될 수밖에 없는 신념 체계가 어떠한 맥락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가지 분명한 점은 신자유주의가 영국인들 대다수에게 전혀 이익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자인 블레이클리가 강조하는 브레턴우즈 체제 후반의 비판적 맥락은 종전 이전의 자본 이동을 엄격히 금지한 체제에서 내심 자본가들이 요구한 소위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용인함으로써,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체제의 금융 자본주의를 잉태한 꼴이 되었는데요. 이것은 종래의 리밍치 교수의 분석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이를테면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러 자본주의가 금융 자본주의로 하이브리드화 된 것을 말하는 것이죠. 이에 기본적으로 블레이클리는 이후 전사회적으로 시행되는 이 신자유주의적 기법들이 외형상으로는 국가들간의 경제적 성장을 견인하기도 했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성장의 혜택'이 오로지 소수의 상위 자본가들에게만 돌아갔고, 일종의 지대로서 이익을 창출하는 초기 금융 자본주의의 출현과 (당연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동산이 만나 의외로 일부 중산층에게도 그들 소유의 집값 상승을 추동해, 그러한 결과로 꽤 많은 수의 영국 시민들이 대처 정권을 지지하는 지지 세력으로 탈바꿈했다고 밝힙니다. 종래에는 영국 사회에서 많은 중산층들이 노동자계층의 이익과 '노동자와 고용주 사이의 권력 관계'를 면밀히 인식하고 그들 대부분이 노동자 편을 들고 있었는데요. 이러한 체제 전반이 신자유주의에 의해 변화가 되었고 그로 인해 각 시민들에게는 자신들의 이익 추구가 삶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목표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사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명확히 알아야 할 관점은, 이러한 신자유주의가 시민 전반의 이익 추구를 중점으로 세운 것 보다는 극소수의 자본가들을 포함한 배타적 자본 축적과 사회와 정치가 이들의 이익 추구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일종의 '인위적인 개조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건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사실 그 이전의 사회에서는 케인스주의적 체제로 인해, 무엇보다 사회적 부조와 공공의 이익에 가치를 두고 정치와 경제 전반이 이를 인정하고 있었으나, 신자유주의는 이 모든 것을 일시에 바꿔 버렸던 것입니다. 결국 마거릿 대처가 노동당 정권의 스스로 경멸감에서 비롯하여 신자유주의적 시도를 추진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시티 오브 런던의 자본가 그룹을 비롯한 상위 계층에 대한 이익을 위해 움직였는지 어느 한쪽으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냉엄하게 불어닥친 민영화의 광풍과 광범위한 금융 자본주의적 변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원치 않는 방향으로 변화를 주었던 것은 거의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물론 이 부분도 다소 결과론적인 입장이긴 합니다만 밀턴 프리드먼이 주구장창 강조한 '사적 이익의 (거의 무한정대의) 추구'가 여기에서 언급되는 보수 우파들의 기득권 모임인 '몽펠리에 소사이어티'의 주된 작품인지는 모르겠으나 거듭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원한 자본가들과 이를 인지했으면서도 시장의 규제에 실패한 미국 당국의 때늦은 후회는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가히 비틀린 슘페터의 논법이기도 합니다만 자본주의에서 기업들이 시장 독점으로 귀결될 경우, 경쟁이 없는 시장은 그야말로 자본주의 체제라 불릴만한 가치조차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을텐데요. 블레이클리는 이 글 4장에서 일종의 사례로써,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도버 해협 밑의 터널 공사에도 당시 대처 정부가 '민영화'를 강조하게 된 맥락은 분명 기업의 손해가 나더라도 정부가 나서서 이를 보증하겠다는 일념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것들은 도덕적 해이, 즉 모럴 해저드라고 마땅히 비판해야 합니다만 조만간 이어질 '월스트리트의 붕괴'는 다시금 국가가 시장을 구원해 그동안 신자유주의가 입이 닳도록 주장했던 "공공 지출을 삭감하고, 작은 정부를 추구하며, 시장에 대한 규제를 철폐하는 것"등의 금과옥조를 휴지조각으로 돌린 것과 같은 사태였지만 그럼에도 신자유주의자들과 금융 자본가들 및 경제 엘리트들은 매우 태연하게 당연하듯이, 막대한 공적 자금을 전혀 양심의 가책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이 부분에서 저들이 신봉해 마지 않았던 신자유주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하지만 콜린 크라우치의 언급대로 신자유주의는 결코 죽지 않았습니다. 이미 초기 금융 자본주의화에서 일부 신자유주의자들은 체제가 급격히 변화를 맞게 되면 일정 부분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데이빗 코츠가 분석한 '신자유주의자들이 실제로 원하지 않았던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그저 낙수 효과라든지, 자본에 의한 주주 자본주의의 필요성과 금융의 첨단 기법 등 온갖 미사여구로 이를 치장해 신자유주의적 체제를 칭송하고 시민들에게 이를 주입하는 데 꽤나 열성적이었지만 그것의 결과는 이미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 블레이클리는 이 당시의 좌파는 신자유주의에 굴복해, 아무런 목소리도 낼 수 없었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동안 지젝과 미지크를 비롯한 좌파들이 자본주의의 이런 파행적 이행을 전혀 비판하지 못하고 겨우 숨만 이어간 점은 실로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것은 사적 이익에 경도된 보수 우파를 방치한 죄이자, 시민을 위해 사회를 건전한 비판을 다하지 못한 책무의 유기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굳이 케인스를 들먹이지 않아도 자본주의에서 노동 조합의 필요성과 특히 사회의 안정성을 위해 시민들이 자본가들의 횡포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는 보루가 존재해야만한다는 주지의 사실은 레이건과 대처와 같은 정치인들이 노동 조합을 거의 '금세기의 최대 악'으로 규정, 영국의 탄광 노조 사태와 더불어 신자유주의적 이행의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이들 노동 조합을 일거에 제거하기에 이릅니다.

사실 신자유주의의 파행적 이익 추구와 관련해, 많은 경제이론가들과 학자들은 자본의 이익 창출을 위해 어느 정도 거품이 필요하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결국 2008년 이전의 미국 부동산 시장에서의 거품은 투자 은행들이 이익만을 위해 무분별한 증권화를 무릅썼으며, 신용평가기관 역시 이러한 흐름에서 한 몫을 챙겼습니다. 시장의 거품 상황이 가용할 수 있는 많은 돈을 가진 자본가들에게는 분명 이익을 단단히 챙길 기회가 될지 모르겠으나 이 지점에서 분명한 사실은 거품은 언젠가는 꺼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시장 전반과 체제에 해악이 될 수 있는 거품이 꺼진 이후에 발생할 고통은 과연 누구의 몫이 될까요? 여기서 굳이 사적인 안전망을 두루 갖춘 부유층을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그 고통의 몫은 그저 공적 자금을 쥐어짜내고 삶의 기반마저 뒤흔들리게 될 우리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제학은 인간들의 기본적인 사적 이익 추구에 마땅히 제동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경제학이 아니라면 정치학과 사회학이 그렇게 만들어야 하겠죠. 이를 그저 시장에 대한 정치의 무간섭주의나 및 비개입으로 신봉해 어떠한 통제도 하지 못하게 만들어 소모적인 민주주의의 문제로 몰아가는 것은 그것 자체로 해악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도 밀턴 프리드먼을 그리워하고 신봉하는 이들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만 사회나 국가 체계 전반을 시장의 이익만을 위한 시녀로서만 여긴다면 다수의 이익은 어디서든 찾을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정치의 무쓸모를 강조시켜, 사회 전반에 정치에 대한 불신과 우리의 민주주의의 경제적 비용들을 과대 포장해, 엘리트들만의 편리한 '과두제'로 귀결시키는 결과만을 낳을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의 5장은 2008년의 뉴욕 발 금융 위기를 거침없이 다루고 있습니다. 이미 주택 금융 채권에 대한 무분별한 증권화가 어떠한 파국을 초래했는지 다들 여실히 아시리라 믿습니다. 이후 사태에서 조지 W. 부시의 뒤를 이어 수습의 책임을 가진 정치인이었던 오바마는 결국 실망스럽게도 단 한 명의 법적 기소도 없이 막대한 공적 자금으로 끝내 월 스트리트를 회복시켰습니다. 당시 책임에 있던 많은 자들이 공적 자금으로 무분별한 은퇴 자금 파티를 벌이고도 아무런 법적 처벌을 받지 않았죠. 저는 바로 그 시점에서 '오바마의 정치적 선명성'이 사망 선고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대선 캠페인에서 월 스트리트로부터 막대한 정치 자금을 받은 것을 차치하더라도 공적 자금을 신중하게 다뤄야만 하는 최상위 책임을 지는 정치인이었음에도 자신의 재무부 각료들을 비롯한 월 스트리트의 요구대로 백기 투항을 했던 것이죠. 오바마에 이어 여전히 발만 잘 뻗고 살고 있는 조지 W. 부시의 천연덕스런 상황은 덤으로 하더라도 말이죠. 하지만 다소 상반된 인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글 5장에서 저자인 블레이클리는 당시 영국의 상황을 불행한 구렁텅이에 빠져든 영국인들로 처연하게 그리고 있기도 한데요. 물론 그녀 역시 사건의 앞 뒤 맥락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겠지만 오래전부터 월 스트리트와 시티 오브 런던은 한 몸이었습니다. 당시 영국 중소 은행 한 곳의 뱅크런은 차치하더라도 신자유주의가 이미 미국과 영국을 공동 운명체로 만들었기에 (동일한 맥락으로 막대한 이득을 얻은 이들이 미국과 영국의 경제 엘리트들 모두였기에) 그 참혹한 결과 또한 공유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은 여전히 시장과 정부가 톱니바퀴처럼 잘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분명 이러한 주장에는 정부보다는 시장의 권리와 원칙이 여전히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이라 볼 수 있을텐데요. 물론 과거 볼커가 기습적으로 금리를 인상해 전세계 시장의 돈을 끌어 모은 것과 같은 사례들을 차근히 손에 올려보면 이와 같은 논법들이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지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사실 일개 체제 자체가 너무나 과도한 힘을 갖는 것은 일상적인 시민 사회와 우리 정치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상당합니다.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변형된 금융 자본주의가 시민의 건전한 삶과 지속적인 안정된 삶을 지탱했던 과거의 사회적 부조와 노동 조합을 악으로 치부해, 현재까지도 많은 시민들이 그러한 논법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그문트 바우만은 근대 자체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보다 1970년대 이후의 그 짧은 시간에 자행된 자본주의의 일방향 독재와 같은 파행들이 결국 시민 사회와 우리의 삶을 고통에 빠트리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저자의 솔직한 평가대로 자본주의가 어떤 왜곡된 이행을 거친 것이 아니라 힘의 논리에 따라 강한자에게 붙은 것이라 볼 수 있겠죠. 이 점은 그녀의 다른 논저인 '코로나 크래시'에서 자유주의가 일정 부분 자본주의에 대한 시민의 저항을 막고 있으니 자유주의가 좀 더 시민 권리에 가까운 쪽으로 변하던가 아예 시장 자유만을 외치는 자유주의자들을 도태시키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시민의 정치적 분별력이 이 즈음에 통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모두 본연의 삶의 통제력을 위해 시장 전반을 공익을 위해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결코 반자본주의적 논법으로 치부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즉, 앞으로 시장에는 마땅히 민주적 통제가 필요하며, 인간에게조차도 완벽하고 무한정의 자유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므로 시장 자유를 그러한 위치에서 해석함은 정치와 시민의 권리를 정치의 영역 바깥으로 밀어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지금의 자본주의는 소수 자본가들만을 위한 배타적 체제로 이미 심각하게 변질된 상황이며, 다수의 마땅한 권리를 위해 체제적 모순을 시정하고 개선시킬 필요성이 있는 것은 자명합니다. 이미 신자유주의자들조차 심각한 불평등의 원인이 근 50여년간의 이행으로 비롯된 것이라 인정하고 있는 실정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글의 7장에서 금융의 사회화를 비롯한 몇가지 대안을 저자가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시장에 마땅히 '통제'가 필요함을 인식하고 이것은 다수의 자본가들을 위해서라도 시민 사회의 안정과 점진적인 사회 안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물론 로버트 미지크와 같은 좌파들 또한 크게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본문 89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다른 논저들과 마찬가지로 저자 역시 부유세에 대한 논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특히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은 사회적 자원을 가진 부유층이 공익도 아닌 자신들의 사익을 위해 정부와 공공 기관을 동원하고 있기에 이것의 사회적 합의 단초조차도 매우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토록 우리의 민주주의는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는 것이죠. 


이 두 기관(정부와 기업)은 힘의 우위에 바탕을 둔 경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협력하고, 이것이 ‘자유‘처럼 보이게 한다

다시 말해, 브레턴우즈 회의는 국제 금융을 통제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제국주의를 제도화하였다

1970년대에는 자본의 이동성 증대와 브레턴우즈 체제의 종식으로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힘의 균형이 변했다

1980년대에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휩쓸면서, 무자빕한 이윤 추구가 기업의 유일한 책무라는 사상이 만연했다

자본주의가 1980년대의 변화에 의해 왜곡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가장 강한 자의 이해관계 속에서 적응했을 뿐이다

1980년대에 이러한 문제들이 명백하게 드러났지만, 영국에서는 주주 가치 이데올로기에 제약을 가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아마도 이것이 사회에서 가장 부유하고 힘 있는 사람들에게 혜택이 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금융 주도 성장 정책의 핵심은 가계가 물질적 행복을 느끼게 하는 중요한 결정 요소로서 임금을 부채와 개인의 자산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과거에 사회가 부담하던 부분을 개인보험에 의존하게 되면서, 복지국가가 위험에 처한 개인에게 제공하는 각종 혜택은 가난한 사람을 위한 것으로 혹은 시간이 지나면서 게으른 사람을 위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보다는 오히려 정책을 입안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시티오브런던 법인의 이해관계와 영국의 이헤관계를 합치시키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정부는 금융 주도 성장이 초래한 불평등의 일부를 해소하고 경기순환의 상승과 하락을 완화하기 위한 공공 지출을 민영화하려고 했다

글로벌 노스에서 자산 소유의 민주주의가 자산 소유의 과두제로 썩어들어가는 상황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은 금융자본주의가 기반을 둔 정치적, 경제적 합의가 무너지고 있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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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터라이프 2022-01-13 2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급하게 글을 작성하느라 비문이 너무 많습니다. 빨리 수정하겠습니다.
 
미국은 그 미국이 아니다 - 미국을 놓고 싸우는 세 정치 세력들
안병진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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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인 안병진 교수는 1967년 대구에서 태어나 서강대 사회학과를 거쳐 서울대에서 정치학 석사를 수여받고, 한나 아렌트와 에릭 홉스봄이 몸을 담았던 뉴스쿨(New School)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뉴욕 시립대에서 미국 정치를 가르치다 2003년에 귀국하여 현재 경희사이버대학의 미국학과 교수로 재직중에 있습니다. 우선 그는 전세계적으로 진보주의 학계에서 꽤 의미있게 통용되고 있는 '시민들에 대한 재교육'과 건전한 여론 형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으며, 더 나아가 여러 매스컴들을 통해 북한 문제와 같은 여러 이슈들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기도 한데요. TV 시사 프로그램과 라디오 교양 프로에 출현하면서 근래 대중들에게 널리 얼굴을 알리고 있는 지식인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다른 논저인 '트럼프, 붕괴를 완성하다'의 서평을 작성한 바가 있고 몇년전에 TV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한 안 교수의 발언 내용을 주의깊게 시청한 바가 있는데요. 꽤 온화한 외모에 조리있게 말을 건네던 분으로 기억이 납니다. 따라서 "미국을 놓고 싸우는 세 정치 세력들"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글은, 국내에 2021년 5월 출판되었습니다.

안병진 교수의 이 글이 어떠한 의도하에 기획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현재의 미국 정치에 대한 비평을 전문가들만의 영역이 아닌 좀 더 쉽게 대중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시도가 느껴졌습니다. 이것은 각 장의 서두에 뮤지컬과 영화를 인용하면서 독자에게 저자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일정한 흥미를 유지시키기 위한 시도가 이 글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게 하였는데요. 사실 미국 정치 상황에 대한 냉정하고 현실적인 평가가 우리에게는 유독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을겁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모두가 충분히 인지하시리라 생각하는데요. 일단 지금에 와서 하는 말이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하고 나서 한반도에 급격한 전운이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만 다행히 별 위기 없이 과거와 마찬가지로 그저 정체되는 선에서 그치게 되었습니다. 저자인 안 교수의 말마따나 지금은 트럼프의 모든 것이 낱낱이 분석된 글들이 서점가에 넘쳐나 그의 행보와 정치적 성격이 이미 폭로되었지만 초기에는 그의 정치적 행보에 대한 예견에 너무나 설왕설래가 많았던 것에 대해 한반도에 살고 있는 일개 시민으로서 정말 당시엔 우려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선 저자는 미국 정치를 전공한 학자답게 그저 트렌드와 경향에 급급한 다른 글들과는 달리 꽤 논리적이고 논증 과정에서는 높은 설득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개인적으로 '촘스키식 글쓰기'로 이해하고 있는 최신의 자료들과 다수 논저의 인용과 적지 않은 관련서들의 소개는 저자 스스로도 끊임없는 독서를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일종의 샤머니즘과 다름없는 예단과 추측으로 일관된 국내의 다른 글들과 달리 이 부분은 충분히 높이 평가받을 만한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앞서 언급한 이 책의 부제대로 저자는 현재의 미국의 정치가 세 갈래의 정치적 흐름으로 갈라져 있다고 평가하는데요. 이러한 미국 정치의 상황이 그들의 국내 정치적 모습 뿐만 아니라 점차 정치경제적으로 중국과 대결에 나서려고 하는 작금에서 독자들이 앞으로 2~30년간의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시각도 제공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즉, 달리 말하면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기초한 미국의 헌법과 자유주의를 계승하고자 하는 '토크빌주의자들'과 작고한 새뮤얼 헌팅턴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극명한 문명적 대결로서 미국의 유일주의를 내포한 '헌팅턴주의자들' 그리고 이 헌팅턴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레짐 체인지'를  내포하고 있는 미국 사회주의 정치 운동의 연원인 '데브스주의자들'이 저자가 분석한 오늘날 미국 정치 세력의 분화입니다. 물론 제가 느끼기에는 다수의 토크빌주의자들 대 나머지 소수의 헌팅턴주의자들과 데브스주의자들의 구도로 느껴지기도 합니다만 과거 예상하지 못한 트럼프 행정부의 출현은 미국 예외주의와 미국 자체와 자신을 동일시한 괴랄한 인물의 탄생으로 어느정도 세력화가 진전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비판대로 "정치인이라면 자기 내키는대로 아무거나 입밖으로 내뱉어서는 안된다"는 일종의 아주 상식을 무색하게 한 도널드 트럼프는 아무래도 미국 정치의 새로운 서막(물론 아주 부정적으로)을 밀어제낀 인물로 기억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전통적인 토크빌주의의 향수로도 읽혀지는 이 글의 2장은 엘리트주의의 면모를 보여준 알렉산더 해밀턴과 그의 대척점에 섰던 토마스 제퍼슨의 일화로 대략 요약될 수 있습니다. 후세에 많은 이들이 토머스 제퍼슨의 '제퍼슨주의'만을 열렬히 신봉하고 있는것처럼 보이기도한데요. 마찬가지로 일반 시민들 뿐만 아니라 지식인들 일각에서도 알렉산더 해밀턴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기도 합니다. 즉, 저자는 2장 초입에서 "해밀턴과 매디슨 등 연방주의자들의 가치관에 내재한 소유적 개인주의, 엘리트주의는 공공의 것이란 의미를 지니는 공화주의 가치 측면에서 결함을 내포한다"는 의미가 이를 설득력있게 뒷받침 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당시 미국의 건국 이념이 루소에 의해 기인한 '공화주의'로 인식해 이에 일견 동의하면서도 실상은 내면에 지독한 엘리트주의와 부유층에 대한 사적 소유를 배타적 권리 등으로 기록한 일련의 정치적 과정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을텐데요. 물론 그것을 차치하더라도 당시 영국 등 귀족주의적 정치에 매몰되었던 유럽에 있어서 미국의 건국 이념은 그야말로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본래의 공화주의란 "자의적 지배를 견제하고, 모든 시민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어려운 싸움을 추구하는 사상이기 때문에" 대중들에 대한 무지와 그런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해밀턴식의 엘리트주의자들이 이것에 일반적으로 동의하기란 어려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의회제도가 지극히 엘리트주의적 발상으로 돌아가고 있고 실제로 고등학교 학력의 소유자나 일반 노동자 및 하급 계층에서 자신들의 계층을 대변할 정치인들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노골적인 금권정치 내에서 제한적인 기회조차 기대할 수 없는 극명한 미국 정치의 현실이라고 볼 수 있을겁니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진정한 진보주의 정치가 미국 정치에서 실종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생각합니다. 결국 1912년 이래로 제대로 된 사회주의적 정치 역사를 갖고 있지 않은 미국에서 '한 줌도 안되는 진보주의 역사'를 고려해 봤을 때, 아마도 이것은 미국인들 스스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인주의적 가치와 노골적인 완벽한 자유에 경도된 자유 지상주의와 다름없는 '자유주의'를 내면화해 다른 정치적 주의가 뿌리 내릴 수 없는 토양이 되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지금 미국에서 진정한 공화주의가 숨을 쉬고 있느냐에 대해 지극히 회의적인 답변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동시에 그러면서도 새뮤얼 헌팅턴이 넘긴 예외주의의 유산이 트럼프를 통해 실제로 체현된 것은 미국 정치에 있어 불행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분노를 먹고 사는 이런 극단주의적 논법과 배후에 암약해 있는 이 정치 세력들이 본격적으로 트럼프 시대에 등장한 것으로 읽히는데요. 미영 전쟁이 한창이던 1814년에 백악관이 영국군에 불태워진 이후, 2021년 극우 민병대에 의해 미국 의회 건물이 점령당한 사건은 저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혐오하고 '분노의 정치'에 물들어 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기본적으로 이런 '분노를 통한 정치' 자체가 어떠한 대안도 제시할 수 없다는 점은 거의 확실한데요. 안 교수의 논증대로 미국의 공화주의에 있어 시민들이 어느 수준 이상의 정치적 분별력이 요구된다는 점은 이처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존 듀이가 말한대로 '시민들의 끊임없는 재교육'이 자신들과 사회를 위해서 필요함에도 시민들이 이미 오랜 세월동안 자본주의적 요구에 매몰되었고, 현재의 미국 선거제도가 모두에게 실질적인 실효를 제공하지 못하는 한계를 명백히 드러냄으로써, 미국의 정치가 엘리트주의적 정치로 소모된 것은 분명 불행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여기에 드러나는 헌팅턴주의에 대한 저자의 고유한 분석은 크게 나무랄 곳이 없었지만 과거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의 네오콘들이 이를 널리 인용하고 끝내 미국의 패권을 후퇴시킨 결과를 초래한 점도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이처럼 4장에서는 이들 헌팅턴주의자들이 "페미니즘과 다원주의의 부단한 확장에 불쾌감이나 어색함, 위기감을 느끼는 것"은 이들이 우리식 현상으로 얼마나 '일베적 사고'에 물들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특히 '정치적 올바름'을 베격하고 소수자들의 권리를 배타족 인종주의로 대응해, 이것을 스패니시가 없는 오로지 백인들만의 '하나된 미국'으로 승화시킨 것은 최근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상황을 오버랩하게 하는데요. 저는 오래전부터 극우 포퓰리즘과 같은 극단주의 정치를 기존의 정치 무대에 등장시킨 것만으로도 반동 우파들까지 그들의 목소리를 높이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했던 바가 있습니다. 앞선 후쿠야마의 경고대로 과연 "인종주의를 자신의 양심으로 승화시켜 거리낌없이 내뱉을 수 있는 주의나 주장"으로 표출하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정치의 모습일까요. 다만 한가지 저로서는 안교수의 평가와는 달리 이들 '헌팅턴주의자들'이 미국 내에서 갖고 있는 위상이 현실 정치에 있어 아직은 심각하게 체제를 위협하는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기존의 리버럴들에 대한 자정 능력이 크게 상실되었지만 조 바이든 대통령의 집권으로 연방정부에 대한 회의를 주장하거나 헌법과 다원주의를 부정하는 자들의 목소리가 다시 수면에 잠겼다는 점에서 한숨을 돌렸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급격한 SNS의 발달로 인해 헌팅턴주의자들을 포함한 무분별한 음모론에 심취한 사람들이 많은 것은 시대의 표상이라 할만 합니다. 리버럴을 극도로 혐오하는 티파티들의 일원이나 트럼프를 지지하는 계층이 이 음모론들을 이용해 기성 정치를 맹렬히 공격했었는데요. 물론 모든 음모론들이 어떠한 정치적 연결고리를 위장하며 현실 정치에 폐해를 일으킨 건 아니지만 '이 SNS의 시대'가 전세계의 민주주의의를 확장시키는 데 일조할 것이라고 믿었던 전문가들의 예측을 크게 벗어났던 것은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또한, 이는 정치의 건전화를 말하기에 앞서 거대 인터넷 기엄들의 배만 불렸다는 점에서 불행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미 해외에선 러시아 해커 그룹에 의한 영국 브렉시트에 대한 개입처럼 서구 민주주의를 왜곡하는 데 이 SNS가 동원되면서 앞으로 민주주의에 있어 또다른 위협이 될만한 요소를 발견한 것일텐데요. 내부적으로 차라리 이들 헌팅턴주의자들이 금권 정치 하에 우파를 지원하는 기업들과 개인들의 돈줄을 노리고 있는거라면 차라리 나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것은 마치 KKK단이 자신들의 신분이나 외형을 세탁하는 기본적인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있는그대로 거리를 활보하는 셈이니, 극우 포퓰리즘과 다름없는 저들이 미국 정치 무대에 등장한 하게 된 것은 단순히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할까요. 어느 누구도 냉전 이후 미국의 정치가 이런 식으로 귀결 될지는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끝으로, 데브스주의에 대해선 제가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는데요. 과연 미국 내에 순수한 진보주의 운동이 있는지에 대해선 저는 아직도 회의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기에 일단 저자의 분석으로만 갈음하려고 합니다. 다만, 앞으로 기후 위기나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과 국가간의 여러 문제들은 데브스주의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국제적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갖추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요즘 학계에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민주주의의 과잉"은 이 부분에서 만큼은 소명할 가치가 없을 겁니다. 이미 대니 로드릭은 국제 사회에서의 외교적 해법이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기에 기후 문제와 같은 세계적 문제의 해결을 막는 원인이라고 보기도 했습니다. 또한, 다국적 기업들의 저개발 국가로의 아웃소싱 그리고 그로 인한 해당 지역의 환경 파괴와 하이에나처럼 저노동을 따라 이동하는 이들의 행태는 기존의 민주주의적 논법과는 아주 거리가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악명은 스스로기 짊어지지 않고 회피해 해당 국가가 오명을 쓰게하는 영리한 정치적 작업은 전반적인 자본주의적 논리가 어떻게 현실에 적응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해밀턴식의 위장한 공화주의는 어느 나라나 하이브리드화 된 자본주의와 우파의 결탁으로 외형을 바꿔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겠는데요. 저자의 평가대로라면 그저 A라는 엘리트의 다른 B라는 엘리트로의 제도적인 교체 정도로 많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현실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엄밀히 미국 정치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토크빌주의나 헌팅턴주의의 분류가 아니라 미국의 '금권정치'전반을 다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대한 코크 형제와 같은 거대한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돈으로 미국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는지 그것이 먼저 낱낱이 분석하고 어떻게 이러한 돈이 오고가는 정치가 미국의 민주주의를 병들게 하고 있는지 다시금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해밀턴식의 정치 구조에서 너무나 왜곡되어 과두정치에 더욱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 글 38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 아마도 하워드 진의 주장으로 기억합니다만 이제는 정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분리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자유주의와 동등하게 진정한 민주주의적 정치 발전을 위해 사회제도와 시민의 교육 등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애초에 민주적 체제에 대한 반감과 부정적 의견을 갖고 있는 시선들이 개인주의와 능력주의적 자본주의에 기생하고 있기에 더 이상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의 시녀로 국한되지 않도록 어느 사회나 특단의 조치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2018년 악시오스 Axios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공화당, 민주당의 5분의 1일 상대를 적으로 규정한다. 공화당의 54퍼센트는 민주당이 악의에 차 있고, 민주당의 61퍼센트는 공화당이 인종주의자이고 편견에 가득 차 있거나 성차별주의자라고 규정한다

반면 좌파가 보기에도 미국의 통합 가능성은 거의 없다. 반동적 우파는 기존 황혼에 찬 질서를 지키기 위해 어떤 짓이라도 하리라 본다.

원래 공화주의는 자의적 지배를 견제하고, 모든 시민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어려운 싸움을 추구하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즉 미국 혁명은 토크빌과 아렌트가 찬양한 공화주의의 동등성 가치가 경제 영역여에서는 거의 발견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리고 낸시 프레이저 교수의 지적처럼 자유주의는 자본주의 정치와 경제의 문제 설정을 모호하게 회피하는 담론이다

미국 건국 시조들의 사상적 배경은 인간 이성의 특권적 힘과 과학에 대한 믿음과 중요성을 가진 계몽주의가 깔려있다

아이켄베리가 보기에 과거 전체주의 세력으로부터 오는 위험에서 자유주의 민주주의를 안전하게 방어하려던 윌슨의 고민은 오늘날 미국 지성의 고민으로부터 부활했다. 미 안팎으로 권위주의와 포퓰리즘, 전체주의 등으로 인해 민주주의의 생존이 다시 의문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피즘의 원천적인 에너지는 바로 기득권에 분노한 인민들의 반란으로서, 급진주의적 함의를 가진다

트럼프는 단지 이들을 자신의 나르시시즘 Narcissism 과 이익 목적에 이용해 단물만 빼먹는 스타일에 능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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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크래시 - 팬데믹은 (국가독점)자본주의를 어떻게 다시 일으켜 세웠는가
그레이스 블레이클리 지음, 장석준 옮김 / 책세상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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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남부인 헴프셔 카운티의 베이싱스토크 출신의 그레이스 브레이클리는 올해 1993년생으로 점차 정치 경력을 쌓고 있는 진보적 지식인입니다. 그녀는 햄프셔 북부의 공동 교육 독립 기관인 로즈 완즈워스 칼리지를 거쳐, 옥스포드 세인트 피터스 칼리지에서 철학, 정치, 및 경제학을 공부했으며, 같은 대학에서 아프리카학 석사를 취득합니다. 졸업 이후 그녀는 공공 부문 및 의료 실무 부서에서 경영 컨설턴트로, 지역 경제 정책을 주로 다루는 좌파 싱크탱크인 맨체스터 공공정책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기도 하였습니다. 현재는 영국 내 대표적인 좌파 시사 잡지인 '트리뷴'에서 일하고 있으며, 주변으로부터 촉망받는 앞날을 인정받는 청년 진보 지식인으로 금융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내에서 엘리트들의 불법적인 정치경제적 결탁과 부패에 대해 끊임없이 고발해왔으며, 자본주의 체제 전반의 놀라울 만한 비판적 인식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글의 주된 인상은 콜린 크라우치의 논법과 매우 닮아있다고 느껴졌는데요. 군더더기 없는 논증과 높은 설득력을 답보한 간결한 주장들은 크게 마음에 들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원제, "The Corona Crash"로 지난 202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4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 글의 정해진 제목으로 인해, 독자들은 잠시 글의 주제에 대해 선입견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엄밀히 따지면 블레이클리는 현재의 코로나 사태로 인한 자본주의의 강화된 경제 왜곡과 이를테면 금융 자본주의의가 북반구와 남반구의 국제경제체제 전반의 심각한 차별을 발생시키고 더욱더 빈민주화로 나아가고 있는 현실을 놀라운 논증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 주된 요점입니다. 이와 관련해 그녀는 좀 더 신랄한 어법으로 1장에서 금융위기를 '만드는 자들 makers' 에 대한 '거저먹는 자들 takers'의 승리로 빗대어 설명하고 있었는데요. 여기서 거저먹는 자들은 일종의 금융 자본가들과 이러한 시스템을 옹호하는 이들이라 볼 수 있을겁니다. 블레이클리는 이미 케인즈를 통해 자본주의의 하이브리드화라고 할 수 있는 금융 자본주의를 여실히 비판하고 있습니다. 금융 자본주의의 표면적인 움직임, 체계, 지향점 등을 굳이 분석하고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 금융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이 시스템이 결국은 소수의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과두제'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그녀 역시 경고하고 있는데요. 그래서 사실상의 결론이자 해지라고 할 수 있는 4장에서 그녀는 금융 산업 전반에 '민주적 통제'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많은 민주주의자들이 더이상 자유주의자들이 쌓아 놓은 시장 자유에 긍정하지 않게 됨으로써, 사회를 첨예한 불평등과 사회 갈등으로 내몬 이 시장 자유주의를 해결하기 위해 '민주적 통제'를 좀 더 견고한 기법으로 만들어 제시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는데요. 다만, 기존의 신자유주의자들이 이를 뭔가 사회주의적 기법의 음모로 몰고가고 있습니다만 일차적으로 '민주적 통제'에 왜 사회주의가 튀어 나오는지 저로서도 큰 의문이 듭니다.

일전에 대니 로드릭도 인정한 부분입니다만,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금융 자본주의가 저 '자유주의'라는 어법을 종래처럼 갖다 붙일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하기도 했는데요. 이는 정부의 막대한 구제 금융 지원을 받은 월 스트리트와 시티 오브 런던이 어떻게 스스로 자유주의 경제학을 주장할 수 있는지에 대해 비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더군다나 블레이클리는 2008년 이후의 금융 경제 체제가 더욱 정치 엘리트들과 결탁해 국가의 지원을 이끌어 냈으며, 이는 결국 정치와 경제 전반의 엄연한 명목상의 분리라는 자신들만의 금기(신자유주의자들과 일부 민주주의자들 조차도 인정하는)를 해치면서 특히 신자유주의자들 스스로의 정치경제적 명분을 잃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애덤 스미스를 방패삼아 자유주의적 경제를 여전히 주장하는 논리적 모순과 더불어 자신들이 구명을 받은 것은 아랑곳 하지 않고 '국가의 또다른 시장 개입'을 또 백안시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작금의 코로나 사태에 있어서 블레이클리의 언급대로 더 심각해진 것은 북반구와 남반구의 경제적 격차를 불러 일으킨 토대였던 자본 이동과 조세 회피의 존재와 금융 자본 전반이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국가와 정부에 사실상 요구하고 있는 현실일겁니다. 이것을 3장에서 논의되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입장권'이라고 할 수 있는 워싱턴 컨센서스를 필두로 이 클럽에 가입하기 위한 엄격한 기준을 통과하지 못한 '암흑 대륙'인 아프리카와 일부 아시아 국가들에게 있어서 국제 체제가 얼마나 이들을 가혹하게 다뤘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국제 금융에서 투자된 자본의 이동이 지금도 매우 당연시 되고 있지만 대부분의 빈국을 상대로 가혹하게 일관하고 있는 '국제 채권자 무리'들을 옹호하고 나선 이 신자유주의 체제가 사실상 모두에게 평등한 클럽이 아님을 입증시킨 바가 있습니다. 이처럼 3장에서 동일한 사례로 등장하는 잠비아와 아르헨티나의 문제는 그저 쉽게 여길 수 없는 단서들을 제공하는데요. 잠비아의 구리 수출과 관련한 시장 가격의 하락과 부실한 정부의 대응은 경제 전반을 국제 채권자 무리에게 인질이 되었으며, 아르헨티나도 역시 수차례의 구제 금융과 정치적 무능이라는 공격으로 경제 전반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현 세계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작고한 지그문트 바우만이 이미 제시한 바가 있는데요. 시민들 모두가 스스로 정치적 결단자이자 더불어 자본주의적 소비자로서 안온한 사회 체제를 위해 양자에 대한 책무란 결코 가볍게 치부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한데요. 앞서 저자인 그녀의 인식이 동일하게도 정치 엘리트들과 경제 엘리트들의 결탁, 즉 우파와 신자유주의자들의 결탁은 다수의 시민들에게 대안을 결코 제시하지 않으면서도 자유시장이라는 미명하에 시민들의 정치적 의견을 제한하고 언론을 매수해 여론을 관리하기까지 한 비정상적인 사회적 왜곡를 초래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블레이클리의 언급대로 단순히 시민 단체에 의한 기업 감시를 넘어 분명한 공적 의무를 답보하는 공공 단체로 하여금 시장 전반을 제대로 감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단순히 시민들이 원하는 '돌봄 민주주의'에 국한되지 않고 기후 변화와 환경 파괴에 대해서도 일종의 지렛대를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시민들이 맞이한 현재의 SNS 시대에 있어 지금보다 더 많은 현실적인 이슈와 경제적 불평등에 관한 활발한 토론과 정치인들의 정치적 결정을 위한 민주적인 방식의 압력을 위해 좀 더 나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최근의 전세계적 코로나 확산 사태와 지난 2018년 이전과는 체제의 상황이 일변한 것은 분명합니다. 여기에는 극우 포퓰리즘 뿐만 아니라 노골적인 자유 지상주의자들과 이에 더욱 편승한 신자유주의자들의 논법에 평범한 시민들의 비범한 사회적 변별력을 시급하게 기대해야 할 순간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저자인 블레이클리의 경고대로 이대로 넋놓고 있다가는 우리가 우려하는 과두제는 정말 일찍 다가올지도 모릅니다.



- 여전히 시장 전반에 대한 민주적 통제에 대한 조장된 반감이 사회에 만연되어 있어, 이를 시민들이 정치적 변별력으로 극복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실정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본질적으로 시급하게 긍정하는 '자유'라는 함의는 시민과 인간 본연의 자유였지만 이제는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종교보다 더 가혹하고 폐쇄적인 의미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과거 전세계적인 냉전의 영향으로 보여집니다.


코로나19 위기가 진정되었을 때 우리가 마주하게 될 과업은 이 국면을 이용해 권력과 부를 늘린 자들로부터 통제권을 다시 빼앗아오는 일일 것이다

금융화란 소수 금융 엘리트의 이득을 위해 근로 대중에 피해를 입히면서 경제 활동의 전 영역에 금융의 논리, 즉 대출, 투기, 투자의 논리를 침투시키는 과정이다

우익 사상가들은 자신들의 극단적인 자유시장 의제를 이행하고자 마거릿 대처의 출마에 모든 것을 걸었다

이로써 금융공황 이후 10년은 나폴레옹 전쟁 이래로 가장 긴 임금 정체기가 됐다

한편 세계의 경찰 미국은 주변부에서 벌어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최종 보증자 구실을 했다

2008년과 2020년의 결과로 금융기관뿐만 아니라 이제는 비금융기관까지도, 즉 ‘독점-금융‘혼종의 완전체가 국가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으며 이들은 완전히 영구적으로 국가에 의존하게 됐다

두 관점의 지지자들 모두 어쨌든 정치와 경제가 분리돼 있다는 자유주의적 통념에 의존한다

국가가 수십억 파운드를 들여 자국의 부유한 은행가들을 구제할 여력이 있다면 왜 위기가 끝나고 나서 고등 교육, 주거, 의료를 무상으로 제공하면 안되는가?

영국 좌파는 국가의 한 형태, 나아가 자본주의의 한 형태에 대한 비판을 바탕으로 부활했지만 이 자본주의 형태는 위기가 끝나면 세상에 없을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의 전 지구적 독점기업들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원을 받으며 반 경쟁 관행으로 창출한 산더미 같은 현금 방석에 앉아 있다

여기서 ‘개방‘이란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국가 주도 발전 프로그램에 착수하지 못하게 막으면서 밖으로부터 국제 자본을 이롭게 할 ‘시장 친화적‘ 정책을 강요하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이미 자본주의 시스템은 국제 독점기업들과 국가 및 국제기구 깊숙한 곳에 포진한 그들의 고객 사이의 뿌리 깊은 결탁을 특징으로 하며, 이는 온갖 부채와 비효율성을 낳고 있다

현재 많은 서방 민주주의 국가에서 출현 중인 과두제 경향에 맞서는 유일한 길은 근로 대중에 대한 공직자의 책임을 강화하고 경제 자체를 민주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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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8 01: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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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8 15: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08 21: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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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8 2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국의 마지막 기회 - 세 대통령이 초래한 제국의 위기를 넘어서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지음, 김명섭.김석원 옮김 / 삼인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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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헨리 키신저,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와 더불어 미국 외교가에서 영향력 있는 3인으로 잘 알려져 있는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한국 대중들에게는 '거대한 체스판'이라는 논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폴란드 귀족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와 독일 및 프랑스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이후 폴란드가 소련에 의해 점령당하자 캐나다에 정착해, 몬트리올에 소재한 맥길 대학에서 예술 석사를 취득하고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 받습니다. 그는 진보적 자유주의자로서 반공주의의 신봉하며 학계와 정관계를 비롯 제법 많은 이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2017년, 8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때 전세계에서 애도를 보낸 바가 있습니다. 위키 백과를 비롯 그를 설명한 여러 정보글에선 브레진스키를 미국의 국익을 주도한 냉혹한 현실주의자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어느 정도의 이상주의적 시각과 미국의 리더십에 대한 도덕성을 강조하는 등의 절충된 의견도 피력하고 있었습니다. 국제 문제에 있어서 미국의 개입론에 헨리 키신저와는 명백히 다른 노선을 표하고 있으며, 도널드 럼스펠드와 같은 네오콘들과는 그 입장이 상이하며, 조지프 나이와도 도덕주의와 관련된 명분론에 있어 상당한 이견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물론 앞선 이들과 달리 미국의 국제적 일방주의를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이를 온건한 제국주의에 빗대어 비교하고 있었는데요. 이 글 마지막 장에서 그의 이러한 시각이 잘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이 책은 원제, "Second Chnance : Three Presidents and the Crisis of American Superpower"로 지난 2007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9년 2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의견은 너무나 훌륭한 번역이어서, 일독의 어려움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글의 서두에서 브레진스키는 "미국 국제적 리더십을 책임감 있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행사해 왔는지에 대한 여부"를 규명해보고자 하는 목적을 먼저 드러냅니다. 후에 더 진술되겠지만 냉전 이후의 미국의 리더십이 상당히 정치외교적으로 주춤했던 결과를 낳은 것은 분명하며, 여기에는 조지 H. W. 부시, 빌 클리턴, 조지 W. 부시를 글로벌 1세, 글로벌 2세 그리고 글로벌 3세로 지칭하여 다른 이론가들과는 달리 미국의 제국주의를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앞선 주제에 대한 논증을 시작합니다. 물론 3인의 대통령들에게 붙인 저 제국주의적 호칭이 오로지 현대적인 제국주의적 인식에만 기반한 것이 아니라 그런 힘의 공백 즈음에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이 주도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빗댄 의미도 포함되어 있겠습니다.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비교적 주요한 경제외교 정책으로 수행된 이 세계화는 미국에 어느 정도 명과 암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브레진스키는 신자유주의적 체제에 중국을 포함시키기로 한 당시 클린턴 대통령의 결단을 그저 오판한 정도로 그치지 않고 있는데요. 중국을 세계 경제의 품 안으로 끌어들이면 당연히 자연스레 중국 국내 정치에서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릴 것이라는 낙관주의를 비판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합니다. 이와 유사한 맥락으로 이어진 5장에서도 "양쪽 정권(중국과 러시아)은 선거 민주주의에 대한 미국의 호전적 고무 행위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고 서술합니다. 이는 클린턴 행정부의 임기 말, 거의 졸속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 회담에 대한 보편적인 중동인들의 인식과도 동일하지만 미국이 어떠한 정치적 해결 의지도 없이 중동의 정치적 역사와 종교적 문제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데 이르렀고, 이는 후에 이라크 전쟁을 앞둔 조지 W. 부시와 토니 블레어의 회담에서도 거의 제국주의적 인식과 다름없는 인종적 편견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브레진스키는 대통령이 이라크 전쟁을 획책하는 듯한 발언에 그 직무에 있는 사람이 할 발언이 결코 아니다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었는데요. 뒤에 언급하겠지만 조지 W. 부시와 그를 따르던 네오콘의 국제 인식이 얼마나 기본적인 자유 민주주의적인 틀 조차 망각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역사적 사례라고 거듭 인정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미국이 주도하여 전세계적으로 이식하고자 했던 이 자유 민주주의는 이 자체로 이들의 중요한 정치적 명분이자 도덕적 명분이 되었습니다. 단순히 시장과 정치를 유연하게 만들어 미국이 추구하는 국익에 유리하게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니라, 전 임기를 통틀어 외교적으로 실패했다고 평가받는 클린턴 행정부가 유일하게 성과를 거뒀다고 여겨지는 코소보에서의 세르비아 세력의 축출처럼, 당시의 단순한 온건한 민족주의에 대한 함의가 아니라 앞선 명분처럼 개인의 자유, 민족적 자립과 관련한 기본적인 가치가 통과하는 부분이 분명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를 자유주의적 이상이라고 받아들여도 무방하겠지만 이러한 측면에서 지난 몇 백년간의 역사에서 세계 패권을 움켜쥔 다른 국가와는 다른 미국의 정치적 명분이 존재하는 것이죠. 하지만 2007년 이라크 전쟁 이후, 다수의 중동인들이 현 상태의 미국이 과거 영국의 제국주의와 다름 없음을 결국 인식하고 말았다고 저자는 꼬집고 있었는데요. 특히 조지 W. 부시의 제2차 이라크 전쟁 이후, 이라크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정치적 난맥들이 국무부 관료들조차 이 지역에 대한 역사적이고 종교적인 배경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자기들의 방식대로 개입해 온 결과인 것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사태를 브레진스키는 수니파 강국이라고 할 수 있었던 이라크를 무리하게 자신들이 제거함으로써 미국의 국익보다 테헤란의 국익과 그들을 안심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국제정치적 인식하에 과거 영국이 뼈저리게 겪었던 '지역 내의 힘의 공백 사태'를 역사적으로 답습한 것으로 이 역사에서 미국은 분명 교훈을 얻을 수 있었음에도 당시 조지 W. 부시의 선악론에 기반한 일방주의에 몰입했던 네오콘들이 미국의 외교를 거의 40년이상 후퇴시키기에 이릅니다.마찬가지로 우리와도 무관하지 않게 이어지는 다음 핵 억제 문제에 있어 저자인 브레진스키는 다소 듣기에 불쾌한 표현으로 한국을 '미국의 보호국'이라고 지칭하면서 서두를 시작합니다. 물론 이러한 인식의 일면에는 미국의 국제적 헤게모니가 여태까진 우리에게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에 기반합니다. 이를 한국 극우들이 신격화하는 '한국을 방어하는 미국의 책임감'등으로도 손쉽게 받아들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미국의 외교적 정책과 그것의 운명이 우리와 완전히 무관할 수 없다는 것에 있을 겁니다. 앞선 인식을 우리가 긍정한다면 클린턴 행정부 당시의 북한 핵문제와 관련된 또 다른 난맥들은 클린턴 대통령의 단순한 무능정도로 평가내릴 수는 없을 겁니다.  

브레진스키에 의해 그려지는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은 가진 바 능력과 의지 및 지성이 충분한 선택받은 권력자로 여겨집니다. 냉전 이후의 혼란한 국제 정세가 그 이전보다 심각했다고 평가하는 저자는 그것에 대한 일정부분의 책임이 빌 클린턴에게 있다고 지적하기에 이르는데요. 특히, 우리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핵확산 억제 기조'가 결과적으로는 동맹의 협조와 국제 체제의 공조 없이 단일한 세계 패권국이 이를 가능하게 하기란 실제로 어려웠다는 것이 그의 거듭된 판단이기도 한데요. 당시 미국의 동맹국들이 그 어느 시대보다 미국과 잘 지내왔고 그런 측면에서 분명히 도움이 될 만한 계재가 있었음에도 인도가 핵무장을 시도할 때, 강력하게 제제로 나서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일본과 서유럽의 동맹들의 의견을 배제하고 이를 묵인하여 인도에 이어 파키스탄의 핵무장까지 사실상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과거 미국과 소련이 주도한 이 핵무기 억제와 관련해. 그 명분이 다소 부족했음에도 다수 국가들은 지구상의 핵무기 확산에 대한 공통된 우려가 기반이 되었던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무장은 자신들의 정치적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 국가들의 도덕적 한계를 거듭 시험하게 된 사건으로 이란은 말할 것도 없이 북한마저 미국의 이런 도덕적 명분의 실기를 이용하였는데요. 차기 행정부인 조지 W. 부시 조차 집단적인 협의체가 없이는 북한의 핵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끝내 인정하게 되었던 것도 그저 미국 외교의 실패라든지 굴욕으로 평가받을 필요는 없겠지만 너무 늦게 현실을 인지하게 된 것은 특히 우리에게는 불행한 일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미국은 최소한의 핵 억지 정책에 있어서 활용할 카드들이 많았지만 당시 클린턴 행정부는 전혀 이를 사용하지 않았는데요. 저자 자신이 카터 행정부 시절의 관료였음에도 같은 민주당 출신의 연방 대통령을 비판하는 데 있어 전혀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클린턴 행정부의 2기 외교 정책은 물론 1기보다는 약간 진보된 소산물이지만 르완다와 소말리아의 비극적 인종 청소를 억지로 넘어간다 하더라도 북한 핵문제에 있어서의 외교적 무능,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평화 회담을 손쉬운 정치적 잇속 만으로 취급해, 지역 내에 해당되는 국가들 뿐만 아니라 자유진영에 있어 미국의 외교적 신뢰를 급락시키게 만든 사건으로 저자는 비판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어지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오만한 선악론도 미국의 외교적 신뢰를 급전직하시킨 문제였던 것은 분명한데요., 이 전 클린턴과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기의 총체적인 외교적 무능은 냉전 이후의 미국 국익에 있어 중요한 시기를 치밀하게 분석하지 못하고 국내 정치적인 요인과 더불어 방산 로비에 굴복해 결국 미국 패권의 쇠퇴를 낳게 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 유명한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냉전의 이후, 그야말로 세계 자유진영의 평화로운 번영을 선언하였는데요. 앞서 언급한대로 네오콘들과 입장을 같이한 후쿠야마와는 달리 브레진스키는 결국 현실의 역사로서 냉전 시기보다 복잡하고 혼란한 정세를 거의 미국의 책임으로 놓고 보고 있습니다. 미국이 주도하는 연성 권력의 쇠퇴까지도 포함한 외교적 실패를 빌 클린턴과 조지 W. 부시가 함께 초래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이 글의 주요한 비판적 논점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조지 W. 부시 초기의 정책적 결정의 화두이기도 했던 신자유주의(세계화)와 신보수주의의 이행은 일부 기업인들과 자본가들에게 이익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세계에 대한 미국의 이익에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전세계에 닥친 포퓰리즘과 반미주의는 자유 민주주의를 일방적으로 강요한 대가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중동과 라틴 아메리카에서 나날이 증가하는 반미는 바로 이러한 문제에 기인한 것입니다. 브레진스키가 중동에 왜 민주주의가 뿌리 내리지 못했는가에 대해 사회가 성숙해짐에 따라 서로간의 관용적 태도를 쌓지 못하는 현실과 서구의 민주주의가 마찬가지로 어느 곳에나 뿌리 내릴 수 있다는 과도한 믿음 또한 그 실패를 답습하게 만든 것일텐데요. 여기에 이슬람의 폐쇄성과 정교일치의 율법은 그저 부차적인 문제일 것입니다. 더욱이 중동에 미국이 영국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제국주의 국가로 비쳐지는 것은 실로 미국의 현지화에 대한 정책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가히 짐작하게 되는데요. 이러한 총체적 난국을 그저 미국의 일방주의에 대한 자신감 때문인지는 아직도 불확실한 측면이 있습니다.


여기에 브레진스키가 미국 외교 정책과 국제 정세를 읽는 눈에 비판적으로 쓰게 된 것은 분명 자신들의 국익을 위해서 일겁니다. 더욱이 우리와 같은 미국의 동맹국들에게 있어 어찌됐든 자유 진영의 맏형으로서 어느 정도는 세계 질서를 존속시키기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길텐데요. 현재의 중국이 자신들의 입맛대로 국제 정치적 질서를 조종하고자 하는 의도를 당연히 불식시켜야 하며, 더 나아가 중국이 세계 패권을 차지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 미국을 포함한 우리 동맹체제의 과제일지도 모릅니다. 여전히 저는 과거 미국이 CIA를 동원해 벌인 타국에 대한 역겨운 정치 개입을 혐오합니다. 또한, 신자유주의가 추동한 세계화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입니다만 과거 미국이 소련과 벌인 핵무기 감축과 같은 노력, 핵억지 정책이라든지 주요 지역 내의 긴장을 줄이기 위해 노력한 것들을 인정하는 편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철지난 구호라고 봐도 무방하지만 그럼에도 견고한 민주주의 국가에 의한 세계 체제의 선도를 지지하는 편입니다. 이것의 요지는 중국과 러시아와 같은 국가가 전세계 질서를 좌지우지 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브레진스키가 생각하는 미국의 명분, 즉 도덕적 선명성은 외교 무대에 있어서도 중요하게 추구해야 될 가치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도덕적 명분을 무시하거나 아니면 도덕적 개입이 필요한 상황에서 돈의 문제로 이를 무시하는 것은 그만큼 대가를 치뤄야만 했다는 점이 이 글이 개괄하는 주요한 논점들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과거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전쟁을 위해 명목상 3000억 달러를 지출했다는 것은 도덕적 명분의 결여가 오히려 막대한 비용 지출을 초래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물론 거대한 방산 업체에 로비 대상으로 전락한 미연방 정부에 있어 전쟁을 통한 경제의 선순환이라는 억지 논리를 펼칠지도 모르겠으나 여기에서 한가지 확실한 점은 도덕적 명분을 상실한 전쟁의 결과가 결국은 미국의 국익에 있어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자가 언급하는 전세계의 발칸반도, 이를테면 중국의 신장과 사우디아라비아까지 아우르는 이 세계 정세의 화약고가 어떻게 세계 대전을 발화시킬지 두려운 마음으로 이를 지켜보는 것이 거의 최선이 아님은 명백할 겁니다. 이 지점에 저자가 말하는 미국의 두 번째 기회에 대한 맥락이 존재하는 것이겠죠.    



-글에서 브레진스키는 과거 네오콘 세력이 9.11을 정치적 셈법을 위해 이용했다는 것을 명백하게 인정하고 있었는데요. 흡사 마니교와 같은 조지 W. 부시의 선악론과 네오콘의 결탁은 사실상 미국의 패권을 후퇴시킨 역사적 사건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국이 국제적 리더십을 책임감 있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행사해왔는지 여부는 미국인들의 안보와 안녕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더 크게는 전세계에 대해서도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마거릿 대처나 프랑스아 미테랑 중 어느 누구도(역사적인 이유 때문에) 즉각적으로 독일의 분할을 종결시키고자 하는 조지 H. W. 부시와 헬무트 콜의 결심을 공유하지 않았다

세계화는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소수가 처음에 겪는 어려움들을 상당 부분 상쇄하는 이익의 재분배를 통해, 궁극적인 균형 상태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계화의 선봉으로서 미국은 물질적인 면에서는 강화되고 도덕적으로는 정당화된 전 지구적 리더십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비록 세계화가 처음에는 오직 경제적 관점에서만 수용되었지만, 세계화의 옹호자들은 세계화의 매력이 정치적 요소에 의해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재빠르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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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은 이렇게 -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지침서
마이클 왈저 지음, 박수형 옮김 / 후마니타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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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저명한 정치 이론가이지 공공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마이클 왈저는 노엄 촘스키와 하워드 진과 비견될 정도로 행동하는 양심으로도 유명한 학자입니다. 그는 매사추세츠 월섬에 있는 브랜다이스 대학을 거쳐, 명예로운 풀브라이트 장학금으로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한 후에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습니다. 그는 로버트 노직과의 논쟁에서 드러나듯 사회 정의와 체제안의 구조화 된 소위 '복잡한 평등'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다른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보편적인 민주 정치를 비교적 현실적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그런 연계에서 시민의 사회 참여를 위한 지식인의 의무와 시민 정치의 확대 필요성을 강조한 바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정치 이론과 관련해서는 레오 스트라우스와 더불어 미국 내에서 독보적인 학자로 여겨지는데요. 그만큼 왈저의 사상적이고 학문적인 영향력을 인정하는 이들이 많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은 원제, "Political Action"으로 지난 1971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4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저자인 왈저는 한국어판 서문을 통해, 이 글의 주요한 목적 의식에 대해 일정 부분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종식과 부패하고 전제적인 리더의 퇴진을 요구할 경우, 운동은 수많은 사람들을 거리로 불러 모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이는 마치 2016년 한국의 촛불집회를 떠올리게 하는 발언이기도 합니다. 이 지점에서 운동의 선명한 정치적 목표를 짐작하게 할 만한데요. 이는 글의 17장에서 거의 주제 의식과 맞닿아 있는 "일상에서든 급진적 의사표시에서든, 시민 정치는 성격상 총체적 이데올로기의 반대편에 있다는 사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는 문장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저는 앞선 문장이 이 글의 주제 뿐만 아니라 시민 정치의 중요한 목적 의식을 아우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측면에서 아무리 시민들 개개인의 의지가 모인 힘이 별반 보잘것이 없어 보이더라도 사회와 우리 정치의 건전성을 위해 그것은 매우 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에 반해 시민들의 과도한 이데올로기화가 '급진주의 세력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왈저의 경고는 특히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그동안 많은 정치 이론가들에 의해 시민들 각자가 갖고 있는 정치적 인식과 관련해, 이를 명확히 규정하는 수단에는 '도덕적 명분 혹은 도덕주의'가 기본적으로 바탕이 되어 있음을 강조한 바가 있습니다. 이것은 요즘 현실정치에서 꽤나 시대착오적인 인식으로 매도되기도 하는데요. 민주 정치에 있어서 다원주의와 더불어 이 도덕적 투명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정치 전반의 건전성이 매몰될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앞선 주장들의 맥락들이 특히 신자유주의의 개인주의적 이기심의 옹호와 사회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 있어 '돈과 자본'이 중요한 기준으로 순위에 오르게 하는데 기여한 수많은 경제학자들과 엘리트 지배체제의 책임이 막중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런 부분에서 마이클 왈저의 이 글은 현시대의 정치 문제를 과거와 비교하여 분석할 수 있는 현실의 인식 차이가 상당하다고 볼 수 있는데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미국의 많은 대학생들이 이 책에 대해 꽤 놀랐던 감정과 마찬가지로 충분히 이 글이 번역되어 널리 읽혀져야 하는 것은 분명하고 사회에 깔려있는 막연한 정치적 의견들이 어떻게 합치되어 앞으로의 체제를 어떻게 하면 개선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독자나 시민이라면 이 책의 일독이 꽤 유익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왈저는 오늘날의 SNS를 비롯한 온라인 상에서의 활발한 의견 개진과 교환을 딱히 긍정적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시민들의 정치 참여라는 이 명분과 실효적인 가능성이 이러한 인터넷 공론장이 아니라 '직접 대면'에 있다고 그는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위 요즘의 MZ세대들은 이러한 저자의 강경한 원칙론에 반대할지도 모르겠는데요. 사실 여론의 형성이라는 것이 요즘의 정치에서는 제법 중요한 화두이지만 막연한 구호나 주의 정도로 온란인에서의 정치적 각성 내지는 감화가 본질적인 의미를 갖기에는 한계가 명백하고, 이른바 정치적 운동이 스스로 생명과 실천성을 갖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람이 이슈에 대한 공감대, 정치적 의견의 상호 교환으로서 그런 전제를 우선시하기 때문입니다. 혹자들은 이를 가볍게 아날로그적 감성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겠으나 그것의 진정성은 충분히 공감이 될 정도입니다. 애초에 이러한 운동들이 명백하게 '정당의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 좀 더 명확한 사람과의 관계가 필요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이 글 1장과 5장까지의 운동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들이 정치적으로 유사한 사람들이 모인 조직을 우선적인 갖추는 것이 운동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왈저는 일개 시민이 기존 체제의 불만이나 심각한 불평등으로 인한 정치적 각성이 수반되었을 때, 흔히 운동에 관심을 갖게 마련인데. "하지만 세상은 거의 변하지 않을 것이며 기존 제도와 관행 또한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는 가정하에 운동을 계획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언급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굳이 논하지 않더라도 현실에 좌절하게 되어 끝내 극단적인 혁명에 심취하게 되는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으로도 읽히는데요. 왈저는 사회운동가와 혁명가의 비교를 통해, 과거의 혁명이 사회에 별 반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폭력으로 치닫게 한 역사를 반면 교사로 삼고 있었습니다. 위와 같은 맥락은 현실 정치 개선을 위한 사회 운동이 끝내 좌절에 이르렀을 때, 혁명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자포자기 할 그 시점에 급진주의와 극단주의의 망령이 끼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인종주의와 극우적 사고에도 마찬가지로 급진주의가 폭력을 획책할 가능성이 있기에 사회운동가라는 의미에 미리부터 좌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뒤이어 "일반적으로 특정 집단이 감내하고 있는 피해나 불의에 대응하려는 운동" 자체에 대해 왈저의 설명이 다소 부족하지만 이러한 사회적 흐름 전반이 일종의 도덕적 불감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물론 전자는 앞선 진술과 일관되게 "운동이 사회 내에서 생명력을 갖게 하는 요인"으로 볼 수 있는데요. 이런 사회적 공감대와 불만과 불평에 대한 공감이 정치 운동으로서의 세력화에 이바지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다만, 왈저의 언급대로 "유독 중산층들에게 보이는 도덕적 감정에 대한 일관되지 않는 사항"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열위한 계층의 도덕적 인식론보다 민주주의를 위해 그만큼 중요한 맥락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어느 정도의 사회적 자원을 획득하고 있는 이들 중산층들이 민주주의의 중요한 요소인 다원주의와 도덕주의를 백안시 한다면 체제 전반의 미래가 암울한 것은 분명합니다. 사실상의 시민 정치가 이들 중산층의 공통된 정치적 함의와 목표 의식에 달려 있는 만큼 최소한 자신들의 사적 이익과 관련된 행동들이 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지 않는 수준에서 균형감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민주주의 내에서 중산층의 의무와 역할이라는 것이 이러한 맥락에 맞닿아 있다고 봐야하는 것이죠.

왈저가 글의 전개 과정에서 거듭 언급하고 있는 민주주의적 갈등론이 그것 자체로 그가 민주주의에 회의를 갖고 있따고 인식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민주적 통제가 도달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노동단체들과 같은 경우와 실제적인 정당 조직에 가까워진 '일부 운동 조직'이 수직적인 명령 하달 방식 등을 민주적 방식의 위협으로 볼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들은 이슈에 대한 공감대와 정치적 목적이 뚜렷한 경우일텐데요. 이들이 기본적으로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하부로서 그리고 여론을 이끄는 주체로 어떻게 보면 천편일률적으로 '민주주의적 갈등론'으로 치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저자인 왈저의 이론은 이 점을 다소 명확하게 언급하면서 일부 운동 조직에 대한 비 민주성에 대해서도 순순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13장 이후에 인정되는 '조직 내의 분파주의'에 관련된 문제에 이관될 수도 있지만 '공통된 이슈'에 대한 논의가 끝내 '공동의 정책 프로그램'으로 연결되어 모두가 만족하는 수준으로 이르는 것은 꽤 어려운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왈저는 일개 시민의 정치적 각성과 그에 따른 행동과 조직에 대한 참여 및 나중에 정당과 연수하게 되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무엇보다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현실 바깥에서 일부의 선의라도 그것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는 그의 발언은 이를 잘 설명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아마도 이 부분은 과거 키신저에 의해 추진된 캄보디아 침공에 따른 반대 운동에서 그가 맞닥뜨린 냉엄한 현실이라고도 여겨집니다. 마이클 왈저의 이러한 인식은 마누엘 카스텔이나 노엄 촘스키와도 다르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따라서 맹렬한 이상주의가 아니라 꽤 견고한 현실주의적 입장이라 이 글의 논증들이 그만큼 설득력을 답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글의 전반적인 논증에 있어 12장은 약간의 첨언과도 같은 부분이라 따로 서평에서 언급하지는 않았는데요. 여기에선 과거 미국 정치가 여성들을 어떻게 수단화 했는지 여실히 잘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유독 여성들이 현실 정치에서 남성들과 달리 배제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기도 하는데요.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한 한나 피트킨의 여러 글들이 하루빨리 국내에 번역이 되었으면 합니다.


정치운동의 목표가 괌범하고 긴급할 때, 이를테면 전쟁의 종식, 혹은 부패하고 전제적인 리더의 퇴진을 요구할 경우, 운동은 수많은 사람들을 거리로 불러 모아야 한다

인터넷에서는 매일 수천수만명의 사람들이 글과 이미지를 남기고 교환한다. 참여민주주의처럼 보이는 것이 극단적 양극화와 끝없는 논쟁을 낳고 있다

두 번째는 우리 사회 내부에서 벌어진 부정이나 해외에서 우리 정부가 자행한 불의에 대한 분노, 개탄, 슬픔이 정치활동을 낳는 경우다.

침묵하고 운동에 나선 사람들은 자신의 분노, 즉 오랫동안 참다가 이제부터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결심의 중요성을 과장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경우든 운동이 벌이는 활동은 사회 변화를 셜멍하는 ‘참된 이론‘에 의존하지 않으며 의존할 수도 없다

일반적으로 특정 집단이 감내하고 있는 피해나 불의에 대응하려는 운동은 바로 그 집단에서 지지를 구하고자 한다

노동자들은 ‘아래로부터‘ 조직되어야 한다는 좌파들 사이에 만연해 있는 인식은 조직가의 오만을 보여 주는 가장 분명한 사례 가운데 하나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선의를 가지고 있다 해도 협력은 쉬운 일이 아니며, 실제 현실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작은 선의에도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 어떤 것이 도덕적으로 더 정당한가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제기될 수 있고, 그런 주장들이 운동에 관한 논쟁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나는 시민정치가 성공하려면 (특히 지역 수준에서) 시민 리더의 육성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말뿐이고 글뿐이라며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말과 글은 효과, 심지어 중요한 효과를 발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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