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제이슨 브레넌 지음, 배니나.정연교 옮김 / 궁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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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슨 F. 브레넌은 미국의 철학자이자 동시에 철학과는 좀 거리가 있는 경영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메사추세츠 턱스베리와 뉴햄프셔의 허드슨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뒤, 학부 과정으로 오하이오 주의 사립 연구 대학인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대학과 뉴햄프셔 대학에서 수학하고, 데이비드 슈미츠의 지도 하에 애리조나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이후, 브라운 대학의 철학 조교수를 거쳐, 현재는 조지타운 대학의 맥도노우 경영대학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철학 뿐만 아니라 정치철학적인 측면에서 유권자들의 고질적인 비이성적 측면과 선거 승리에 기반한 나쁜 제도와 정치인들의 개인적 이익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로 인한 전반적인 '민주주의의 취약성'에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이 점들 때문에 그가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부정적 의견을 견지하고 있는 것보다는 민주주의가 좀 더 효율적이고 이성적인 측면에서 유권자들을 위한 실질적 실체화에 다가가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즉 이런 그의 취지는 일종의 정치적 진보를 위한 조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Political Philosophy : An Introduction"으로 지난 201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제이슨 브레넌은 그의 다른 논저인 "민주주의에 반대한다"로 미국을 포함한 많은 국가들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바가 있는데요. 우선 현 시점에서 민주주의 체제 말고 실질적인 다른 대안이 가능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저 역시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자유를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적 자유주의자들이나 '시장의 자유', '경제적 자유'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이런 실질적 기반이 가능한 체제는 거의 민주주의가 유일하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모두의 동의를 기반으로 구축된 헌법 체제와 그것을 통해 민주주의 정체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국가 체계 자체는 이미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에게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왜 우리에게 정치가 중요할 수밖에 없는지를 논하고 있는데요. 단순히 루소 식의 '모두가 모두를 통치하게 된다'는 탈계급적 논법 뿐만 아니라, 이전의 자유주의가 왜 인간의 권리와 자유에 대해 강조하게 되었는지를 조금 얄팍한 분량의 책이긴 하지만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적절한 설명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특히 정치를 좀 더 보편적이고 건설적인 이론에 기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정치철학' 역시, 지식인들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로 이에 대한 사고의 폭을 확장시키는 것은 먹고 사는 것 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종래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각기 다른 이론에서 출발했으며, 여전히 이 두 가치는 경우에 따라 상반된 관점을 갖고 있기도 하다고 강조한 것은 새겨들을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이에 저자는 우선 정의(사회적 정의를 포함해)와 시민들의 권리 문제를 분석하고 이 다음 등장하는 자유(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를 일종의 양자 관계로 이론적 해제에 나서고 있습니다. 저는 일전에 일독했던 그의 "민주주의에 반대한다"에서도 받은 인상이지만 그가 꼭 '자유지상주의자들'을 이론적으로 두둔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자유와 시장 자유에 대한 그 나름의 주장을 펼치는 것을 목도한 바가 있는데요. 물론 민주주의 체제 하에 시장 지위에 대한 그의 언급에 대해 전부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대의적인 측면에서 개인들의 권리와 그것의 확대된 형태인 사회 보장에 대해, 자유지상주의자들이나 신자유주의자들이 그토록 믿어 의심치 않았던 '완벽한 시장 자유에서의 공공재 제공'이 거의 실패로 끝났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브레넌은 각각의 개인에 대한 권리는 보장해야 하는 것은 확실하고, 설사 전통적 공리 개념에 대한 기존의 신자유주의자들의 공격에도 "우리는 대다수 국민의 권리 침해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고 그러한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다만 이런 그의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많은 시민들에게 있어 도덕적 원칙에 대한 스스로의 자질이 부족한 케이스가 적지 않다는 현실은 '공리의 가치, 공리의 원칙'의 인식 결여, 뿐만 아니라 만약 법과 제도가 전무하다면 자신의 권리 주장과 다툼이 타인과 빈번하게 발생할 가능성을 예측해 볼 수 있을 겁니다. 결국 허버트 스펜서류의 '인간의 야만적 상황'과 같은 차별적 인식 또한 인간의 비합리성을 에둘러 표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말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간에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브레넌이 언급한 사회적 정의와 권리 문제라는 직면한 인식은 충분히 숙고해 볼 만한 과제라고 여겨지는데요. 다만, 기존의 공리주의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완벽히 알 수 없다는 부분과 5장의 '평등과 분배정의'에서, 존 롤스를 언급하며, 그의 '차등의 원칙'을 열거하는 부분은 실질적인 공정한 분배를 위한 제도 구축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시장의 규제가 필요하다는 진보주의자들의 역설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물론 앞선 롤스에게도 '사람들이 공정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의사 결정을 해야한다"는 전제는 풀지못한 숙제였을 겁니다. 이는 조지프 슘페터 역시 고민한 부분이며, 우리의 민주주의 정치가 좀 더 건전성을 답보할 수 있는 (사활적) 전제 조건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는 정치 역사에서 우리가 가장 풀기 힘든 문제임은 분명한데요. 브레넌이 과거 자신의 논저에서 소위 '일반적 유권자들'에 대해 회의적 시각을 갖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점에 기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일전에 존 듀이가 강조했던 '시민들이 스스로를 위한 교육'에 대한 당위와도 어느 정도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책의 다른 주제들 가운데, 6장, '사회정의론의 문제'를 보다 집중해서 보게 되었습니다. 브레넌은 이와 관련해, 자유지상주의자인 로버트 노직과 애매한 자유주의자인 존 롤스의 주장들을 비교하며, 이 사회 정의론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즉, 평등주의 사회, 국부 지향 사회, 공정 가치 사회라는 독립적 열거를 통해, 우리가 현실에서 어떤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지 이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많은 분배정의 이론들이 그저 몇몇의 주장들로 현실에서도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는 비판과 더불어, 불평등 문제 자체를 용인할 것인가 아니면 만약 개선할 수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지를 마찬가지로 살펴보고 있는데요. 저자인 브레넌 역시, 사회 정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과거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로부터 시작된 이 논점을 통해서 오늘날 '시장 자유'에 대한 의미를 다시 한 번 숙고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민들이 강고한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시장 자유라는 관념이 단순히 세뇌되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일전에 헨리 키신저가 언급했듯, 그저 신자유주의의 철저한 이행이 수반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끝으로 여전히 우리에게 공리의 문제는 사회를 변혁시키는 것 이상의 공감대를 필요로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를 '합리적 공리'라고 치환해서 생각할 것까지는 없겠지만 시민이자 유권자인 우리가 노골적인 신자유주의화와 함께, 사회가 파편화 단계에 이르러 우리 스스로 정부를 공격하는 데 앞장 서지 않았나 생각해 보기도 하는데요. 또한, 정부의 권위와 적경성을 논한 9장에서, 정부의 여러 목적들 가운데 하나인 '공공재의 공급'과 관련한 저자의 하이에크에 대한 언급은 그것의 논증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본문 밑에 역자의 주(註)로 여겨지는 "무정부 상태에서는 공공재가 제대로 공급되기 어렵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라는 문장은 저로서는 쉽게 동의하기가 어려웠는데요. 조심스럽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글, 9장의 논증은 거의 저자 본인의 주장에 불과하다고 판단됩니다. 정부의 권위와 이와 관련된 현격한 문제는 '대의 민주주의의 명확한 한계'를 전제하고 나서 접근해야지 그저 시민들의 정부에 대한 자발적 복종 정도나 그것을 강제하는 정부의 권위적 강제성 만을 나열하는것은 본질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서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자인 그가 유구한 철학의 역사를 인지하고 있다면 철학에서 기반한 자유주의적 가치와 공공연하게 자유주의를 외피로 두르고 있는 신자유주의자들에 대한 명확한 구분 정도는 이 글에서 필요했다고 보여지는데요. 자유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적 언급을 통해, 신자유주의에 대한 해석을 대신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인용과 그에 기반한 주제들의 논증 자체가 아쉬운 점은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저자인 브레넌이 왜 롤스를 인용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롤스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만 아주 단편적으로 분배 정의와 불평등의 문제를 더 확고한 자유주의 내지는 왜곡된 신자유주의로 해결할 수 있을지는 기존의 처방이 어떠했는지 살펴보면 충분히 예측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최종적으로 그가 말한, 정치철학이 근본적으로 탐구하는 주제가 공리에 기반한 권리와 자유의 문제라면 말입니다.



 


사람들은 정의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

우리가 정치적인 문제에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각자가 무엇에 얼마나 가치를 부여하는지가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사실을 보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가능한 한 우리는 대다수 국민의 권리 침해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고 그러한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평등에 병적으로 집착하지 않는다면 국부 지향 사회나 공정 가치 사회를 더 선호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코헨은 질서 정연한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정의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롤스가 말하는 정당화 가능한 불평등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노직은 한편으로는 역사적 과오를 바로잡아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존하는 제도적 결함을 보정하기 위해서라도 일정 정도 부를 재분배하고 사회안전망을 보강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포용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사회는 사회적 통념이나 종교적 규준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을 배척하는 경량이 농후하다.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자유를 제한하지 않는 다른 여러 방식에 비해 전반적으로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판단될 때, 즉 행복을 전반적으로 증진한다고 판단될 때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다면 제한해서는 안 된다.

롤스가 시장경제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부합하는 자유를 허용하는 이유는 단지 그것이 차등의 원칙을 구현하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현존하는 수많은 국가에서 롤스가 말하는 기본적인 자유권을 누리며 사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자본주의로 인해 사람들이 비참해진다면, 자유지상주의가 옹호하는 정의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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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체 이렌 네미롭스키 선집 3
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이상해 옮김 / 레모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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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렌 네미롭스키는 1903년 당시 러시아 제국이었던 키에프의 부르주아 유대인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납니다. 그녀의 가족은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러시아를 떠나 핀란드로 떠납니다. 이들은 얼마간 핀란드에서 지낸 후, 프랑스로 이주하여 마침내 파리에 안착하게 됩니다. 1921년 이렌은 파리 소르본 대학에 진학하고 이때부터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하는데요. 그리고 1926년에는 은행가인 미셸 엡스타인과 결혼하여 두딸을 두게 됩니다. 얼마 안 있어 이 부부는 자신들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둘다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데요. 이를 그저 전쟁의 광기라고 치부하기에는 이들의 운명이 너무나 가혹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렌 역시, 반 이상을 프랑스에서 살았고 심지어 프랑스어로 작품 활동을 했지만 당국으로부터 프랑스 국적을 거부당하기에 이르는데요. 더욱이 그녀는 1939년에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1941년 독일군의 프랑스 파리 점령 이후, 이듬해인 1942년 나치 독일에 부역한 비시 프랑스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1942년 7월 17일에 폴란드의 유대인 절멸 수용소인 아우슈비츠로 강제 이송됩니다. 결국 그녀는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한달 후에, 발진티푸스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Suite française, Dolce"로 지난 200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5년 초도 번역을 거쳐, 2023년 6월, 개정판이 출간되었습니다.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돌체'는 프랑스어로 부드럽고 감미로운 어떤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는데요. 여기에 더한 네미롭스키의 작명은 독일군의 프랑스 점령 초기 이후, 프랑스인들과 독일군의 당혹스럽고 불편했지만 의외로 이들의 동거가 가능했던 분위기를 에둘러 표현한 해석으로 이해됩니다. 이렇게 소설의 주된 배경이기도 한 프랑스 한 마을에서의 예기치 않은 독일군과의 동거는 이렇듯 여러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탱크를 동원해 전격전을 벌이며, 무능에 빠진 프랑스군을 궤멸시킨 독일군을 '전쟁 기계'로 묘사하면서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프랑스군의 패착을 마을 사람들의 여러 입을 통해 비판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사는 땅에 독일군이 진입한 사실 조차 매우 얼떨떨하게 여기기도 하는데요. 스스로의 삶의 터전에서 비교적 안온한 삶을 영위하고 있던 프랑스인들에게 있어 쉽게 말해 자신들의 목숨줄까지 쥔 점령군이이라 볼 수 있는 독일군이 의외로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모습과 그런 상황은 아무리 프랑스 전역에서의 전투가 마무리 되어가는 시점이라 해도 상당히 예상 밖의 서사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작가인 네미롭스키가 당시 프랑스 내부에 팽배해 있던 '프로이센'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경멸과 함께 마찬가지로 터무니 없는 두려움에 대한 이미지를 이 작품에도 투영하고 있었는데요. 이는 역사적으로 '프로이센에 의한 독일 통일'과 그런 체제의 본질이 당시 주변국에 어떠한 우려를 발생 시켰는지 아마 그녀와 같은 지식인이라면 쉬이 짐작이 되었을 겁니다. 특히, ''6월의 폭풍'과 이 작품에서도 언급되는 1870년 보불 전쟁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새로운 전쟁과 함께 두려움의 순차적인 매개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이곳에 등장하는 부르주아 계급인 '앙젤리에' 가(家)는 귀족이 저무는 세기에 한 마을의 지주 계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여기에 전통적 귀족 가문으로 등장하는 몽모르 자작 가와는 별도의 위상이라고 생각되는데요. 물론 적잖은 마을 사람들이 몽모르 자작의 땅에서 농사를 짓고 있긴 합니다만 일전에 누렸던 귀족 계급의 영향력은 역사적 뒤안길로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이 소설에서도 위와 동일한 세태를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앞선 앙젤리에 가문의 며느리인 '뤼실'은 전쟁으로 실종된 남편과는 아무런 애정도 없이 결혼했고, 그런 이유 때문에 스스로가 상당히 불행하다 느끼고 있습니다. 이 결혼의 내막은 남편이 처가의 재산 만을 보고 뤼실을 받아들인 것인데요. 이는 아들을 너무나 사랑하는 앙젤리에 노부인조차 인정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시어머니인 앙젤리에 노부인이 그런 처지의 뤼실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도 아닙니다. 극 중에 설명으로 드러나는 고부간의 벽과 보이지 않는 갈등이 그녀의 말마따나 자신이 이 저택에서 '외로운 섬'과 같은 존재로 만들고 있다 봐도 무방해 보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낯선 한 무리의 독일군이 마을에 진군하여 머물게 됨으로써 그녀를 둘러싼 일상이 크게 변하게 될 조짐을 맞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소규모 독일군을 이끄는 장교가 앙젤리에 가에 '기한 없는 숙박'을 통보했기 때문인데요. 모두의 예상과도 다르게 이러한 요청은 정중하고 부드럽게 진행되었습니다. 

앞선 뤼실과 더불어 극의 주요한 화자인 브루노는 독일군 엘리트 장교로서 많은 교육을 받은 인물입니다. 그도 고향에 결혼한 처가 있으며, 만약 전쟁이 아니었다면 스스로도 평범한 삶을 영위했을 겁니다. 아마도 이런 부분에서 앙젤리에 가문에 짐을 푼 브루노가 사실상 젊은 미망인이라고 볼 수 있는 뤼실을 한눈에 보자마자 큰 연민과 애정을 느끼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더욱이 그는 자신에게 매번 이죽거리는 앙젤리에 노부인에게 예의를 다하고 이 저택에 머무는 만큼은 이곳에 살고 있는 여인들에게 스스로가 폐가 되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하지만 그가 뤼실에 대해 느끼는 동질감과 연모는 날이 가면 갈수록 깊어져 가는데요. 두 사람은 서로 대화가 잘 통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뤼실은 전형적인 여성 캐릭터와는 다르게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행동거지가 진중한 여성이기도 했습니다. 그녀가 내뱉는 대화나 주변인들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 등을 종합해 봤을 때, 뤼실은 신중하고 사려 깊은 인물로 여겨집니다. 생전 보지도 못한 낯선 이방인들이 자신의 삶을 침범하고 이들이 마을에 미치는 영향이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님에도 스스로 내적 불안을 내비치지 않는 모습은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점령군 장교인 브루노의 신사다움과 여성을 배려하는 태도, 말에서 느껴지는 박학다식한 모습은 반대로 아는 게 없어서 무식하고 즉흥적인 프랑스 인들과는 사뭇 대비되는 모습이기도 했는데요. 물론 이러한 차이는 당시 시대상에 기인한 유산계급과 그렇지 못한 신분에서 오는 근본적인 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묘사되는 마을 사람들이 이 독일인들에 대해, 근원적인 프로이센에 대한 경멸과 맞물려, 이들을 '보슈'라고 멸칭하는 것까지 문명적인 정복자와 즉흥적이고 본능적인 피지배자들의 이런 대비된 관계와 묘사는 처음에는 상당히 이질적이기도 했습니다.  

프랑스가 독일에 대해 패배한 근본적 이유를 네미롭스키가 작품에서 일목요연하게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앙젤리에 노부인의 페탱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고려해 본다면, 다소나마 이를 짐작해 볼 수 있겠는데요. 특히 몽모르 자작이 프랑스가 패배한 이유가 병사들이 군기 문란과 애국심 결핍, 그들의 '나쁜 정신'에 있다고 본 점은 당시 프랑스의 문제가 어디에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해 볼 만합니다. 그럼에도 쿠엔틴 타란티노의 같은 배경의 영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나딘의 술집 장면에서 독일군들과 여실히 잘 지내고 있는 프랑스인들의 모습은 흡사 힘을 가진 이방인들에 대한 두려움이라 할지라도 네미롭스키가 만들어 놓은 서사와 일견 유사해 보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단호하게 앙젤리에 노부인은 '프랑스인들은 서로 밀고하지 않는다'는 확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많은 프랑스인들이 나치 독일에 협력했으며, 파리에 세워진 괴뢰 정부에도 프랑스인들이 자발적으로 나섰다는 점은 뭔가 우리의 역사와도 닮아 있는데요. 전후 드골이 부역자로 일했던 많은 프랑스인들을 처단한 것에 이르러, 인간이 생각하는 자신에 대한 사적인 안위와 평온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곱씹게 됩니다. 네미롭스키 역시, 인간의 이러한 진면목을 자신의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근본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뤼실과 브루노를 한 축으로 이뤄지는 이 작품의 서사는 전쟁 상황에서 평범한 사람들에게 가져다 주는 평온이 얼마나 가변적이고 이러한 상황이 어떻게 급변할 수 있는지를 극의 전개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는데요. 특히 약간 지엽적이지만 전작인 '6월의 폭풍'에서도 등장한 마들렌의 바뀐 운명과 그녀가 아직도 섬세하고 도시적인 남성을 선망하고 있다는 묘사와 그것과는 아주 상반된 인물과 가정을 꾸리며 살고 있는 모습은 한편으론 삶의 아이러니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양태들 가운데 하나라고 느껴졌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뤼실이 브루노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관습과 도덕적 이유를 포함해, 욕망과 현실의 한계라는 아이러니가 인간의 욕망에 반하여 일으키는 일종의 거부 반응이라고 이해되었는데요. 그래서 뤼실 자신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준비가 되었는지를 끊임없이 자문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보는데요. 또한 이와는 별개로, 마을 여성들이 금발의 젊은 독일군들을 향해 던지는 추파와 이들과 맺는 육체적 관계에 대한 열망은 전쟁으로 남자들을 잃은 한 공동체의 여성들이 자신들의 삶과 욕망을 지키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으로 읽히기도 했습니다. 또한 노동자들이 돈 맛을 알게 되어 전통적인 프랑스의 계급 간 위계를 망각하게 되었다는 설명과 여기에 묘사되는 농부들까지도 사회주의에 물든 것으로 이해하는 전통적 지배 계층의 뿌리 깊은 인식은 당시 이 시대가 과연 어떠한 체제였는지 능히 짐작하게 할 만합니다. 그런 와중에 독일이 주도하는 대전에 국운이 휩쓸리게 되었으니 몰염치한 인식과 계급 간의 갈등은 전반적으로 앞으로 드러나게 될 전체주의적 망령에 비하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브루노가 속한 프랑스 주둔군이 새롭게 구축되는 러시아 전선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극은 마무리 되기에 이릅니다.  


-작품 중후반부에서 브루노와 뤼실의 대화를 통해, 소위 '벌집 정신'이 언급됩니다. 이는 꿀벌들이 여왕벌의 명령을 거부하기 어려운 것처럼, 당시 독일인들의 수동적인 입장을 설명하는 데 쓰이고 있는데요. 저는 이러한 언급과 맥락이 꽤나 의미심장하다고 여겨졌습니다. 특히 작가는 물론, 수많은 유럽의 유대인들을 절멸하게 만든 독일인들의 이 참혹한 아이디어가 탄생하게 된 수많은 연유들과 함께, 그 자체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사냥하는 야만의 시대의 단초가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프랑스인의 손으로 만들어졌고, 프랑스인의 눈이 바라보았고, 프랑스인의 먼지떨이가 닿았던 물건들을 독일인이 더럽히도록 놔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른 것들은 익살맞은 그림이나 도표를 이용해 전 세계에 뻗어 있는 영국의 지배력과 혐오스러운 유대인의 횡포를 보여주었다.

마을 여자들은 증오와 욕망이 동시에 묻어나는 눈길로 적군을 바라보며 ‘우리의 주인들‘이라고 불렀다.

뤼실은 사랑으로든, 질투에 찬 혐오로든 마움이 충만했던 적이 없었다.

마들렌은 두려움에 휩싸여 생각했다. ‘저 사람이 나한테 집적대면 브누아가 뭐라고 할까?‘

보네는 잔인했다. 하지만 그것은 청소년기의 잔인함, 온전히 자신과 자신의 영혼을 향해 있는, 아주 왕성하고 섬세한 상상력에서 비롯된 잔인함이었다.

"남자는 전사가 되기 위해 태어나죠. 여자가 전사의 여흥을 위해 태어나듯이." 보네가 이렇게 대답하고는 웃었다. 순박한 프랑스 시골 여자에게 니체를 인용하는 것이 재미있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남자들의 자리가 비어 있어서 침략자들이 그들 자리를 차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몽모르 자작은 프랑스가 패배한 이유가 병사들의 군기 문란과 애국심 결핍, 그들의 ‘나쁜 정신‘에 있다고 생각했다.

부르주아들은 자작 부인이 이런 수수한 차림과 스스럼 없는 태도를 통해 그들에 대해 품고 있는 깊은 멸시감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부인 죄송하지만 그건 여자의 단어입니다. 남자는 열의 없이도 자신의 의무를 다하죠.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남자라는 것을, 진정한 남자라는 것을 인정받죠."

브루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전투를 하다 보면 숲속에 배복한 채로 며칠 밤을 보내야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 기다림은 아주 에로틱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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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폭풍 이렌 네미롭스키 선집 2
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이상해 옮김 / 레모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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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렌 네미롭스키는 1903년, 당시 러시아 제국의 키에프에서 부유한 은행가이자 유대인이었던 레온 보리소비피 네미롭스키의 딸로 태어납니다. 그녀의 가족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시작되자 러시아 제국을 떠나 핀란드를 거쳐, 프랑스 파리에 정착을 하게 되는데요. 이후 네미롭스키는 소르본 대학에 진학하고 바로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26년에 은행가인 미셸 엡스타인과 결혼하게 되는데요. 이로부터 3년 뒤인, 1929년에 그녀에게 문학적 명성을 안겨준 '데이비드 골더'의 출판이 이뤄집니다. 이런 그녀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1938년에 최종적으로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는데 실패합니다. 결국 프랑스에서 유대인이자 무국적자라는 굴레는 1942년에 비시 프랑스 정부에 고용된 경찰에 의해, "유대인 무국적자"라는 미명하에 체포되었고, 그 와중에 그녀는 자신의 딸들에게, "여행을 떠나는 것"이라는 말과 함께, 마지막 작별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네미롭스키는 오를레앙에서 북동쪽으로 37km 떨어진, 비시 프랑스 정부의 강제 수용소였던 '피티비에 집합 수용소'로 끌려갔고, 1942년 7월 17일,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당시 폴란드의 절멸 수용소인 '아우슈비츠'로 이송되기에 이릅니다. 결국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지 한 달 후에, 그녀는 발진티푸스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녀의 남편인 미셸 엡스타인 역시, 1942년 11월 6일에 아우슈비츠에 보내졌고, 즉시 가스실에서 살해당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Suite Française' 시리즈의 작품으로 원제, "Tempete en juin"으로 지난 2004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5에 초도 번역되었습니다. 제가 읽은 이 책은 전면 개정판으로 2023년 6월, 번역되었습니다. 참고로 그녀의 이 작품은 시리즈 미완성 논고로 작가 사후 최초로 프랑스 '르노도상'을 수상하게 니다.

앞서 언급했듯, 이 작품을 쓴 이렌 네미롭스키는 후에 '절멸 수용소'인 아우슈비츠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합니다. 만약 제가 당시 아우슈비츠에 있던 유대인들 중 한 사람이었다면 과연 스스로 미치지 않고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을지 고민해 보지만 막상 떠오르는 생각은 한결 같습니다. 그것은 아마 살아있어도 죽은 것이나 다름 없는 상태였을 겁니다. 이런 그녀가 '프랑스 조곡'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이 장편에 대해 얼마나 많은 고심을 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되는데요. 작가 역시 당대를 살아가던 지식인이었던 만큼 나치 독일에 점령된 파리와 그 시대에 대한 나름의 고찰과 분석이 있었을 겁니다. 즉, 자신의 딸들에 의해 발견되기 전까지 오랫동안 묻혀있던 이 원고에도 작가인 그녀의 통찰과 더불어, 여실히 그 시대의 자화상을 담고 있었는데요. 다만 이 작품의 형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개인적으로 제가 읽었던 다른 작품들 가운데, 니콜 크라우스의 '그레이트 하우스'와 묘하게 닮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바로 여러 인물들이 특별한 상황과 맞물려, 그 와중에 겪게 되는 사회적 분절과 그들을 둘러싼 다른 인물들과의 갈등과 대립은 여기에 등장하는 전쟁을 그저, '정치적 행위'라고 믿는 자들에게 큰 경종이 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이 작품이 히틀러가 집권 하기 전, 바이마르 공화국에서의 정치적 혼돈과 1940년 당시, 파리를 독일군에게 내준 '공화국 정부'의 무능이 뭔가 절묘히 매치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작가인 그녀도 당시 공화국 정부의 무능과 그로인한 여러 한심한 작태를 이 작품 여러 곳에서 독자들에게 알리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파리지앵'과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파리지앵'은 어떠한 의미 차이가 있는지 다소 불명확합니다만 폴란드가 히틀러에 의해 불법적으로 점령 당하는 것을 보고도 이 때의 프랑스 엘리트와 파리 시민들은 아마도 별다른 경각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소설과 비슷한 맥락이라 볼 수 있는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슈필만 가족이 폴란드의 동맹국이었던 프랑스가 나치 독일군의 수도 바르샤바 진군에 영국과 함께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소식이 라디오에서 들리자마자 피난을 접게 되는 장면은 지금도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 프랑스조차 수도 파리가 독일군에 의해 점령 당했으니 앞선 영화에서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는 바르샤바와는 어떤 면에서는 꽤 유사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네미롭스키의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몇몇 가족들은 영화 피아니스트의 슈필만 가족과는 달리, 1940년 6월 13일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자, 즉시 피난 길에 오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보이는 인간 군상의 민낯이 이 작품의 주제 의식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물론 작가인 네미롭스키도 일전에 읽었던 이디스 워튼 만큼이나 부르주아 계층에 대해 거의 직접적인 냉소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반 민중에 대해서도 '군중'이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야만적인 자연 상태에 빠진 사람들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있었는데요. 오로지 생존 본능으로만 움직이는 일반 시민들의 모습을 그저 비이성적인 모습이라 에둘러 비난해 볼 수 있지만 무엇보다 이런 상황을 초래한 무능한 프랑스 정부에 대해 먼저 비판의 화살을 돌려야 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해 보입니다. 이처럼 개략적인 극 서사는 파리 점령 며칠 전을 시작점으로 이 유구한 도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전쟁을 피해 무작정 피난 길에 오르고 난 며칠 뒤, 독일과 프랑스 간의 빠른 휴전이 성립되자 다시 파리로 돌아오는 여정과 이 과정에서 이들이 '점령된 파리'에서 겪게 되는 일부 충격적 사건들이 다른 여러 인물들과 겹치면서 최종적으로 서사는 그렇게 마무리 됩니다. 

우선 여기에 등장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여러 인물들은 여러 사용인들을 거느리며 파리에서 상당히 윤택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 도시의 유서 깊은 가문이기도 한 '페리캉' 가(家)를 꼽을 수 있겠는데요. 또한, 노골적인 배금주의자인 가브리엘 코르타와 샤를 랑줄레는 재산과 교양이 전무한 일반 계층을 극명하게 경멸하고 이런 지독한 선입견으로 말미암아 피난 도중 스스로의 민낯을 여지없이 드러내는데요. 앞선 이들과는 대비되는 인물들로, 이 전쟁에 참전했던 장마리가 예기치 않은 부상을 입고 경험하게 되는 평화적 일상과 후반부에 그를 둘러싼 다소 난감한 결말, 이와는 달리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인물인 사제 필리프 페리캉은 작가가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몇몇 전형적인 인물들과 절묘하게 대비되어 나타나는 서사의 한 틀이기도 합니다. 특히 종교와 그것을 일체의 삶으로 여기고 신의 목소리를 갈구했던 필리프의 전혀 예상하지 못한 비참한 최후는 어쩌면 타인을 실질적으로 이해해 보려 하지 않았던 그의 운명을 나락으로 이끌게 된 것인데요. 이는 사람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먼저인가 아니면 신의 부름이 우선 인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으로 읽힙니다. 이외에도 전쟁이라는 전무후무한 사태에 이르러 힘없고 평범한 사람들이 그저 휩쓸려 나갈 수밖에 없는 그런 비참한 처지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조국의 붕괴와 피할 수 없는 가족이라는 운명 사이에서 갈등하는 위베르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가 다 똑같은 개돼지라면 한결 이해하기 편할 것"이라는 독백은 이 전쟁이 인간을 어떤 식으로 추락시키는지 독자들로 하여금 충분히 가늠하게 만듭니다. 이런 가운데 작중의 도시인 크레상주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이름 모를 마을에 등장한 독일군을 대하는 마을 사람들과 피난민들의 순진한 태도 역시, 전쟁의 진면목과 앞으로 프랑스에 드리울 운명을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불행한 미래를 한편으론 예측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특히 여기에 여러 화자들의 이야기 소재로 언급되는 1870년 보불전쟁과 1914년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은 그 성격과 양상이 완벽히 다른 전쟁이라 볼 수 있습니다. 작가가 사실상 복선을 두고 다룬 두 전쟁과 소설 속 인물들이 몸소 겪게 되는 이 인간성 상실의 2차 대전이 그 궤가 확연히 다른 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는 작가가 지난 날 프랑스가 겪었던 과거 전쟁들이 여기에 등장하는 화자들을 통해, 이에 비하면 마치 그저 순진한 전쟁이었다 해석하는 것으로도 여겨졌습니다. 이러한 느낌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감상일 수도 있지만 결말에서 일부 인물들에게 보이는 '충격적인 귀결'과 평화의 시대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이 사람들의 인식 자체의 흡사 비틀림과 냉소는 충분히 극의 중요한 맥락이기도 했습니다. 이와는 별개로 맨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작가인 네미롭스키가 자신의 사랑하는 딸들과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고 끝내 절멸 수용소인 아우슈비츠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접하고 나니, 제 마음 한구석이 저릴 수밖에 없었는데요. 그럼에도 현재 일부 극우주의자들이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이 저지른 '600만에 이르는 유대인 절멸'을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그저 유대인들의 거대한 음모로 치부하는 이자들의 민낯은 인간이 과연 이성적인 존재인가에 대해 스스로 끊임없이 자문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작금의 세계에서 단순히 역사 수정주의적 입장 정도로 국한시킬 수 없는 소위 '이성의 마비'와 다름없는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가 아닌가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의미를 드러내는 간접적인 나레이션을 통해, 드러나는 '개인의 자유', '내일의 정신'과 같은 본질적인 화두들은 작가의 진지한 고찰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그녀가 사실상 프랑스 시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로부터 국적을 취득하지 못했고, 끝내 유대인에 덧씌운 중상모략과 같은 역사적 폭력에 '개인의 삶'이 그야말로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과연 이 부분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내일의 정신'이 더 나아가 다음 세대에도 의미가 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이에 대한 의구심을 저버릴 수가 없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는 우리의 정치가 과연 이때보다 진정으로 진보했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 때문에 부부는 공화국 정부를 불신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난 그게 좋아. 여자란 자고로 크림처럼 하얀 몸이 부드럽고 풍만하고 순진한 암송아지 같아야 해. 자주 마사지를 받아서 유연하고, 연지와 분 냄새가 밴 나이든 여배우의 피부, 자네들도 알지?"

돈 많고 유명한 사람들이 판단력은 짐승들만도 못하다니까! 짐승들도 위험은 바로 알아차리는데!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결단력 없는 사람들과 정신 나간 사람들이 아직 파리에 남아 있었다.

엄밀히 말해, 그것은 불안이 아니라 인간적인 면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투지도 희망도 찾아볼 수 없는 이상한 슬픔이었다. 죽음을 기다리는 짐승, 그물에 갖혀 어부의 그림자가 지나가는 걸 바라보는 물고기의 눈에 깃든 것과 같은.

교회 안에서는 이중적인 삶이, 하루하루 반복되는 평온한 일상과 묘하게 열에 들뜬 또 다른 삶이 이어지고 있었다.

화장을 짙게 하고는 장교들로 가득한 트럭을 얻어 타고 시시덕거리던 여자들, 너무나 만연한 이기주의, 비겁함, 야만적이고 아무 의미도 없는 잔인함이 위베르를 구역질 나게 했다.

겨우 닷새 만에 프랑스의 절반을 삼켜버린 독일군 기계화 부대는 내일이면 틀림없이 이탈리아, 스위스, 스페인의 국경에 도달할 것이다.

샤를 랑줄레는 자신을 끌어들여서 공감을 얻으며 즐거워하려 했던 피란민의 의도를 꺾어놓은 것에서 변태적인 쾌감을 느꼈다. 더럽고 상스러운 종자들은 자신들이 인간적인 연민을 느낀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그것은 멜로드라마에 대한 천박한 호기심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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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센트
이언 매큐언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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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은 1948년, 영국 햄프셔주 올더숏에서 부친인 데이비드 매큐언과 모친인 로즈 릴리언 바이올렛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그의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노동자 계급 출신으로 드물게도 군에서 소령까지 올라간 군인이었습니다. 이언은 어린 시절 대부분을 싱가포르, 독일,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보냈는데, 아마도 그의 부친의 잦은 근무지 변경으로 인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결국 그가 12살이 되던 해가 되어서야 영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후 이언은 서퍽의 기숙학교인 울브스톤 홀 스쿨에서 교육을 받기 시작하고, 1970년에는 서섹스 대학에서 영문학 학위를 수여 받습니다. 그리고 노리치에 위치한 이스트 앵글리아 대학에서 일종의 자신의 창작물로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게 됩니다. 그의 첫 출판 작품은 1975년에 출간한 '첫 사랑 그리고 마지막 의식 First Love, Last Rites'로 1976년에 이 작품으로 '서머셋 몸'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는 초기에 작품 활동이 주로 어두운 인간의 내면과 그런 의식의 작용 등을 주제로 어둡고 불안정한 글을 쓰기도 했는데요. 이후 그는 좀 더 폭넓은 독자층에 다가가기 위해, 보편적인 작품 쪽으로 방향을 틀기에 이르는데요. 결국 1998년에 '암스테르담 Amsterdam'으로 부커상을 수상하고, 2005년에는 '새터데이 Saturday'로 제임스 테이트 블랙 기념상을 수상합니다. 그는 평생의 작품 활동 가운데, 6번이나 부커 상 후보에 오르기도 하는데요. 이런 문학에 대한 기여로 그는 2000년에 "대영 제국 최고 훈장"을 수여 받습니다. 또한 문학 활동과는 다른 정치적 활동 차원에서 2011년에 그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예루살렘 상"을 수상하고, 2012년에는 서섹스 대학이 수여하는 "문학에 기여한 공로"를 바탕으로 50주년 기념 메달을 수여합니다. 특히 이언은 스스로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는 가운데서 "여성과 동성애에 대한 자신의 견해"로 말미암아 이슬람주의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기에 이르는데요. 이와 관련해, 여러 오해와 억측을 불러일으키도 하였습니다. 또한 2016년 6월 영국의 유럽 연합 (EU) 탈퇴 여부를 붇는 국민 투표에 관련해서도 가디언지에 상당히 비판적인 의견을 내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그는 총 17편에 이르는 장편과 몇 가지 단편 작품을 출간했고, 이에 지금도 열성적인 집필 활동을 지속해 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 서평을 쓸 이 장편은 원제, "The Innocent"로 지난 199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4년 9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먼저 고백하자면, 이언 매큐언의 이 작품은 여러 면에서 제 예측을 벗어난 전개로 저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는데요. 이 장편의 주인공인 레너드 마넘과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 여주인공이자 이혼녀인 마리아 에크도르프와의 관계 설정 전반과 그로인한 서사적 전개가 제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결말으로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이 작품의 배경에서 2차 대전 전후, 혼란스런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에 파견되었던 레너드와 그가 앞으로 미국 정보 당국과 관련된 중대한 일을 맡게 됨으로써, 익히 예견할 수 있는 소위 존 르 카레식의 '스파이 물'로 여겨졌지만 이런 저의 예측은 놀랍게도 완벽히 빗나가게 되었습니다.

일전에 저널리스트인 하랄트 얘너가 언급했듯, 2차 대전 종전 직후의 베를린은 그야말로 비극과 야만의 도시 그 자체였습니다. 여기에 매큐언도 여주인공인 마리아를 내세워, 베를린의 일반 여성들을 향해 소련군이 자행한 그야말로 참혹한 강간의 증거를 마찬가지로 써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이는 먼저 러시아로 진군한 나치 독일의 군대가 민간인과 군인을 가리지 않는 철저한 군사 작전으로, 당시 러시아인들이 겪은 가혹한 전쟁 참상에 따른 분노와 복수가 바로 소련군에 의해, 다른 장소인 바로 이곳 베를린에서 자행된 것이기도 한 데요. 물론 저는 이것을 독일인들의 마땅한 '죄과'라고 가볍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앞선 얘너의 언급대로, 200만의 독일 여성들 가운데 이를 반쯤 체념하며 받아들였다는 실증된 사료는 상당히 중격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역시 이러한 '죄의 메커니즘'은 쉽사리 화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종전 후,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발빠른 대응과 유사하게 이 작품에서도 미국이 주도하여, 동베를린을 점령한 소련과 이를 뒷받침하는 동독 당국의 민감한 정보를 탈취하고자 일련의 비밀 작전이 수행됩니다. 마침 버밍엄 대학에서 전자 공학을 전공한 레너드가 이런 연유로 극비리에 건설된 시설에서 '도청 작전'에 임하게 되는데요. 이런 과정에서 얽히게 되는 미국 측 정부 요원인 밥 글래스와의 후에 드러나게 될 지독하게 얽힌 인연은 이 극을 이끄는 주요 복선이자, 대치점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점은 여러 복선 가운데, 비로소 극 후반부에 가서야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의 레너드는 마치 사회 초년생처럼, 인생 전반의 미흡한 경험을 안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게 되는 어리숙한 인물의 전형입니다. 또한 그는 자기만의 세계, 비좁은 인간 관계와 더불어 연애 경험까지 전무한, 우리가 20대 초반에 많은 시행착오로 '청춘의 시기'를 힘겹게 이어나간 것과 비견될 정도로 이 작품의 구조적인 면에서는 평범함을 드러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독특한 성격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여주인공인 마리아는 과거 대전의 한복판에서 여성이 홀로 베를린에서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불행한 결혼을 시작해, 남편과 끊임없는 불화를 겪게 되는데요. 더욱이 소련군이 베를린에 진주하게 되는 그 시점에서 아주 광범위하고 철저한 '강간'의 폭력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무정부의 상황, 인간이라면 마땅히 보장 받아야 하는 스스로의 안위와 안전을 이런 지옥과 같은 환경에서 자신의 힘 만으로는 유지할 수 없기에, 이 시점에서 아무런 권력도 주어지지 않은 독일인 남성이 아닌 과거 연합국의 일원이자, 자유 세계의 구성원인 레너드와 그녀는 극적인 조우를 겪게 됩니다. 물론 승전국 남성과 패전국 여성이라는 이분법 뿐만 아니라, 레너드는 마리아가 겪은 그 지옥과도 같은 기억을 전혀 예상하지 못합니다. 여자의 본성과 관계 전반에 대해 미숙한 레너드가 그저 본능적인 정복욕과 비틀린 감정에 휩싸여 그녀를 철저히 외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 사이에는 본질적인 긴장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매큐언은 우리에게 사랑은 쟁취하는 것, 혹은 마땅히 자신의 것은 스스로 요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마리아의 입을 통해, 이를 우리에게 여실히 알리고 있기도 한 데요. 이는 참혹한 전쟁을 몸소 경험하지 못한 극적인 고통의 사람과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만남과 그런 나날의 더해짐이 단순히 어긋나고 부서지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고 어쩌면 그렇게 미루어 짐작해 볼 수도 있겠는데요. 이는 억지로 주어진 평화로운 시대의 여느 평범한 관계가 완벽히 상반된 거침없는 왜곡과 잔인한 자기 합리화에 따른 본능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을 어쩌면 매큐언은 우리에게 알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서 설명한대로 인간으로서 겪을 필요가 없는 잔인한 전쟁의 본성을 체험한 한 인간이 그 이전으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이 얼마나 지난할 지는 충분히 예상이 됩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한 인간의 이중적이고 복합적인 본성으로 철저히 변질될 수도 있겠습니다. 즉 이제 나를 지켜내기 위해 무엇이든 이용하겠다는 이기적 다짐과 더불어 한편으론 모든 걸 체념하게 되는 자포자기하는 마음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마리아가 극 후반부에 레너드를 향해, "런던에 가서 다 말하겠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럴 수가 없다."는 자기 고백은 사건의 이면과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진실을 미처 다 알지 못하는 레너드에게 있어 전쟁의 기억 만큼은 아니겠지만 충분히 스스로 인생의 방향을 틀게 만드는 본질적 원인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실 되지 못한 자기 충족적인 숨겨진 관계에 의해서 말이죠. 저는 마리아의 끔찍한 자기 변명과 자신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일종의 합리화가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요. 하지만 다시 한 번, 이 작품을 곱씹고 나서, 진정한 위안처를 찾고자 하는 일전의 전쟁의 상흔을 몸소 겪은 여인의 이 같은 간절한 바람이 어쩌면 최근에 전쟁을 겪은 시리아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의 평범한 여인들의 이뤄질 수 없는 희망과도 맞닿아 있지 않나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작품 증간에 반전의 설정으로 등장하는 레너드와 마리아의 간략한 약혼과 거기에 등장한 밥 글래스의 행동 자체는 정말 이중적이고 역겨울 정도였는데요. (밥 글래스에 대한 내용 전반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언급을 자제하겠습니다.) 이것을 영국인인 작가가 바라보는 미국인의 본성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마리아에게는 뒤이어 이어지는 인생의 평온한 안식처가 되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면서 작가가 마리아가 결코 짓밟힌 적이 없는 여성이었다는 서사는 그만큼 의미심장하지 않나 생각해 보게 됩니다.



-디데이 즉,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참가한 레너드의 부친이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되자, 독일을 누구보다 증오하게 되었다는 작가의 나레이션은 어쩌면 레너드와 마리아의 결말을 이미 예견한 것과 다름없지 않나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는 전쟁을 거친 그 시기의 본질을 진실로 유념하고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레너드는 모욕에 대처할 마땅한 방법을 미처 준비해두지 못했다. 성인이 된 후로 모욕을 당해본 적이 없었다.

"45년에 이리 진군해 들어왔을 때 짐승처럼 굴었나봐요. 진짜 짐승이요. 이 여자들은 그러니까, 자기네 언니와 엄마나 심지어 망할 할멈까지 강간당하고 찔려 죽었으니까. 아니면 건너건너라도 그런 사람을 아니까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거죠."

"낮에 한번 와보세요. 나무 한 그루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폭격을 당하지 않은 성한 나무들은 공수작전 동안 베를린 주민들이 난방용으로 다 태워버렸지요. 히틀러는 한때 이곳을 동서의 축이라고 불렀습니다."

파괴된 도시를 보며 느꼈던 처음의 우쭐함은 돌이켜 생각하니 유치하고 혐오스럽기만 했다.

1955년에 레너드 같은 배경과 품성의 남자가 스물여섯이 다 되어가도록 성 경험이 없다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 애정을 가장해 자기를 해치지 않을까 하는 이 두려움은. 아니면 성적 친밀감의 외피 아래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악의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아버지가 다니는 동네 술집 단골 중 바르샤바조약에 대해 들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베를린에서는 바르샤바조약 비준이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는데 말이다.

편안한 그리움과 기대감으로 가득했던 바로 이 시기에 그는 마리아에게 꼭 청혼을 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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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물결 - 근본적 붕괴의 시대와 아웃사이더의 부상
미치코 가쿠타니 지음, 김영선 옮김 / 돌베개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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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코 카쿠타니는 일본계 미국인으로 1995년 1월 9일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에서 태어났습니다. 특히 그녀는 예일 대학의 저명한 수학자인 시즈오 카쿠타니의 무남독녀이기도 합니다. 익히 알려진 대로, 그녀의 부친은 일본에서 태어났고 모친은 캘리포니아 버클리에서 자란 일본계 미국인인 2세대입니다. 그녀는 1976년에 예일대에서 영문학 학사를 마침과 동시에 워싱턴 포스트에 기자로 입사하게 됩니다. 이후 1979년부터는 뉴욕 타임즈로 자리를 옮겨, 2017년까지 언론계의 경력을 쌓게 되었습니다. 특히, 미치코 카쿠타니는 1983년부터 뉴욕 타임즈 도서 평론으로 미국 전역에 이름을 알리게 되고, 1998년에는 이러한 공로로 퓰리처 상을 수상합니다. 그녀는 대중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은 평론가로 유명한 작가의 책에도 날카로운 평론으로 본의 아니게 악명을 얻기도 하는데요. 2017년 뉴욕 타임즈의 수석 평론가의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이듬해인 2018년에 출간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를 비판하는 책인, "진실의 죽음 : 트럼프 시대의 거짓에 대한 노트 The Death of Truth: Notes on Falsehood in the Age of Trump"로 평단의 큰 주목을 받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번에 서평을 쓰게 될 그녀의 새로운 글 역시, 바로 이러한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데요. 연말의 미국 대선을 앞둔 시점에 그녀의 이 시론집은 민주주의 위기에 대한 경종을 우리에게 일목요연하게 전해줄 것으로 판단됩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The Great Wave : The Era of Radical Discruption and the Rise of the Outsider"로 올해인 2024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6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자인 미치코 카쿠타니는 2019년 이후의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 분열과 충격의 시대를 이른바 VUCA로 정의되는 단어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이는 변동성 volatility, 불확실성 uncertainty, 복잡성 complexity, 모호성 ambiguity의 영문 앞자로 만든 용어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이러한 시대가 초래된 근본적 원인을 무엇보다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과 그로인한 정치 전반의 변질과 추락으로 해석하고 있는데요. 여기에 논증되는 대부분의 사례와 실질적 내용들은 극단적 포퓰리스트인 트럼프의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 반이민주의, 반민주주의에 따른 정치적 붕괴에 초점을 맞추고, 그렇다면 우리 왜 이러한 시대를 직면하게 되었는지를 인문학적이고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다만, 구조적인 측면에서 이 글의 문제점은 저자가 큰 명성을 얻은 서평가 답게 작가, 정치가, 사회학자, 철학자, 경제학자 등 여러 지식인들의 고유한 주장과 사상 등을 너무 많이 언급하고 있어, 글을 읽는 내내 다소 장황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히 3장은 앞선 측면에서 글 전개에 따라 인용 구절이 많아 그만큼 산만해 보였는데요. 따라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된 문장들이 조금 과도한 측면이 있어, 독자들에 따라 일독 전반에 다소 호불호가 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서두인 1장에서 언급되는 바와 같이, 도널드 트럼프라는 아웃사이더가 미국 정치 무대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더 나아가 워싱턴의 주인이 된 그 시점부터, 이미 미국은 저자의 말마따나 "상식이 실종된 사회"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 극명한 현상에 대한 저자의 여러 비판적 분석에서 가장 공감했던 부분은 미국의 주요 정치인들, 특히 공화당 정치인들 대부분이 민주주의의 대한 헌신을 사실상 헌신짝 버리듯 내버렸다는 여러 증거였습니다. 이것은 달리 말하자면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공화당의 자진 투항에 있어, 전무후무한 폭거(2021년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의 미국 의회 난입을 포함한)에 대해 공화당 정치인들 누구도 제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는 점은 실로 미국 민주주의에 있어서 너무나 굴욕적이고 참담한 사건이라 여겨집니다. 이렇게 연이어 4장에서, 트럼프 지지자들에 의한 앞선 의회 점거 폭거에 대해, 비판적 목소리를 낸 공화당 의원들이 거의 전무했으며, 그나마 이 사건에 목소리를 낸 리즈 체니 의원이 어이가 없게도 빠르게 공화당 지도부에서 쫓겨났으며, 2022년 고향인 와이오밍주에서 열린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패했다는 사실을 저자는 특별히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공화당 다수 의원들이 이에 대해 침묵했으며, 동시에 민주주의에 대한 정치인의 의무와 책임을 내던진 것과 다름 아닌 것인데요. 이와 관련된 상반된 사례로 저자는 4장에서, 과거 닉슨 대통령의 워터 게이트 사건을 예로 들고 있었습니다. "1974년 워터 게이트 사건이 터졌을 때, 당시 상원 의원이었던 베리 골드워터는 공화당 상원의원 대표단을 이끌고 백악관으로 가서 리처드 닉슨에게 자신들이 더 이상 그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닉슨은 다음 날 사임했다"고 언급합니다. 과거의 공화당 의원들은 최소한의 금도와 견식이 있었으나, 지금의 공화당 의원들은 여러 정치학자들의 비판대로 사실상 자신들의 간판을 극우로 덧칠하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됩니다. 참고로 이 리즈 체니 의원은 바로 딕 체니 전 부통령의 딸이기도 합니다.


저자의 일관된 논증 뿐만 아니라 저 역시도 도널드 트럼프의 재집권 가능성에 대해 큰 우려를 갖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저자는 도널드 트럼프를 향해 분명하게, "민주주의에 반하는 자"로 규정하고, 이런 정치의 후퇴를 과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했던 구시대적 중앙 집권적 폭력을 거부했던 오래된 미국의 유산을 뿌리 채 흔드는 '반동'으로 지목하고 있었는데요. 굳이 정치학을 여기서 언급하지 않더라도 '개인의 자유'라는 것이 민주주의적 개방성과 다원주의적 맥락 그리고 이를 헌법이 수호하는 일련의 견고한 체계에서 실질적이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데, 트럼프와 같은 자기 이익에 밝은, 극단적 포퓰리스트가 과연 이러한 대의에 화답할 지는 모두가 알다시피 지극히 회의적이라 볼 수 있을 텐데요. 그런 의미에서 3장과 4장의 논증으로 거듭 밝혀지는, 미국 문화의 저항의식, 개방성, 그리고 다른 의미로서 시민들간의 유대가 나날이 예전만도 못한 상황으로 추락하고 있다 봐도 무방해 보였습니다. 과거에 대한 회귀가 무조건적인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보다 못한 현실에 대한 무감각과 체념이 어쩌면 더 위험하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시점에서 현재 미국 정치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는 지식인들이 많다는 것은 바로 이 점을 대변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것은 결국, 트럼프가 미국내 '증오와 혐오의 정치'를 이끄는, 마치 성서의 요한묵시록에서 그려지는 '지옥의 기수'라고도 여겨지는데요. 특히 우경화 된 공화당과 그 맨 앞에 있는 도널드 트럼프라는 반영웅(저자의 수사를 흉내낸다면 말이죠)과 그를 따르는 맹목적인 지지자들, 여기에 티파티와 같은 극단주의자들이 상대 진영을 지지하는 시민들을 정치적으로 배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격멸'이라는 단어까지 언급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또한, 저자는 트럼프를 지지하는 많은 극단적 시민들이 오히려 종교보다도 더 진실되고 신뢰의 말을 건넨다고 확신하는 가히 믿겨지지 않은 일례들을 폭로하고 있는데요. 이런 현상의 본질적인 맥락은 분명합니다. 또한 저자인 카쿠타니의 말마따나, 미국내 극단적 인종주의자들인 KKK와 같은 자들이 자신들의 상징으로 나치의 '하켄 크로이츠'를 미디어와 다수 시민들에게 아주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있는 점도 심각한 문제로 보여집니다. 이런 극단주의자들의 범람이 과연 미국 민주주의에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는 거의 분명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인문주의자이기도 한 저자가 독서와 자기 성찰이 더욱 멀어지고 있는 세태와, 그와 동시에 인간의 저열한 측면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부채질하는 극단적 인터넷 매체를 포함한 왜곡된 커뮤니티 문화에 대해 지극히 경고의 시각을 본내고 있는 점 역시, 충분히 공감이 가는 대목입니다. 즉. 앞선 내용을 보충하는 측면에서 저자는 2장의 전반적 진술을 통해, "혁신적인 디지털 기술들이 새로운 기술로 사람들을 연결했지만 또한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정파 간 혐오의 매개체가 되었던 점"을 분명히 지목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미국의 역사처럼, 이들의 민주주의 자체는 세월에 따라 켜켜이 쌓아올린, 그 유산이 엘리트들을 포함한 미국인들 전반의 귀한 정치적 공감대가 되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이는 4장 이후의 논증과 더불어, 이런 민주주의의 역사 전반을 부정하는 도널드 트럼프와 그의 모체가 된 공화당, 그리고 극단적인 그의 지지자들이 한 몸과 같이 움직이는 실정에서, 트럼프가 "민주주의 제도와 법치주의를 무시하고 선동적인 수사법을 사용하자, 진보주의자뿐 아니라 많은 중도파, 무당층, 그리고 전통적인 공화당 지지자들도 여실히 동요"했고, 지난 선거에서 트럼프가 스스로 결연하게 '부정 선거'임을 밝히자마자 공화당 정치인들 대부분이 이에 동조했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데요. 만약 건전한 사회라면 그곳의 시민들 대부분이 반민주적인 정치인을 향해 분명히 거부 의사를 밝혀야 함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선연한 이익과 사실을 대면하지 못하게 만드는 다수의 왜곡된 정보들에 따라 현실은 그런 정치적 이상과 상당히 멀어진 것은 거의 분명해 보입니다. 그동안 끊임없이 언급했던 '정치적 변별력의 결여'를 언급하기에 앞서, 마치 건강한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와도 같은 평범한 시민들이 증오와 혐오의 정치라는 병증에 한껏 몸을 맡기고 있는 상황은 저자가 지극히 우려하는 정치적 미래와 본질적으로 맞닿아 있다고 판단됩니다. 그것이 아무리 고학력의 사회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결국 미국내의 문화적 흐름과 기술 수용에 관한 방향성, 이러한 맥락에서 더욱 변질되고 있는 미국 정치 전반은 글에서 경고하는 바대로, 그 위험 수치가 마냥 목도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미국 대선에서 평범한 시민들이 견실한 정치력을 발휘해, 큰 파란을 일으켜 줄 기대와 희망의 끈을 아직은 놓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그동안 비관적으로 논증해 왔던 저자의 글과는 확연하게 상반된 기대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처럼 저자의 신랄한 발언과 그 증거 자료들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미국이라는 나라가 역사로서 쌓아올린 민주적 이상과 체제의 견고함. 더불어 문화와 시민의 선명성을 통해, 위대한 나라가 되었던 점을 그들 스스로가 잊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물론 타고난 시대의 암울함은 여전하지만 후반부에 인용되는 나오미 클라인의 희망과 마찬가지로 저자가 바라는 '정치의 올바른 회귀 가능성'의 모멘텀이 다시금 미국 정치에서 발현되기를 오직 바랄 뿐입니다. 끝으로 미국의 위대함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데에 있다는 토크빌의 명철한 분석과 함께, 저 역시, 극단주의와 인종주의의 망령이 하루 빨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적지않은 정보들 가운데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사실은 지난 2012년에 스티브 배넌이 브라이트바트 뉴스 Breitbart News를 인수했다는 점이었는데요. 누구보다 신자유주의의 기수들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 자가 헨리 키신저라면, 이 스티브 배넌은 허무적 극단주의의 기수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인터넷의 민주화 효과는 기후 활동가부터 백인 민족주의자,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가 되려는 이들까지 온갖 부류의 아웃사이더가 전통적인 게이트키퍼를 우회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남부 주들은 재건 수정헌법 (1865년과 1870년 사이에 채택되어 비준된 제13조, 제14조, 제15조 수정헌법)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보장된 권리를 철회했다. 이들 주는 연방군이 떠나자 짐 크로 법을 통과시켜 인두세와 다른 유권자 탄압 전략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분리하고 선거권을 빼앗았다.

신자유주의는 1980년대에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가 자유시장 근본주의 및 관련 시상들을 장려하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동되고 있던 뉴딜 정책의 보호무역주의 및 케인스의 경제 정책을 되돌리면서 시작되었다.

추산에 따르면 트럼프는 대통령 임기 4년 동안, 30,583건의 거짓 주장 또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주장을 했으나, 공화당에 투표한 사람들은 트럼프가 종교 지도자나 자기 가족보다 더 자신에게 진실을 말해줄 것이라 믿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미국의 두 주요 정당 가운데 하나가 가장 극단적인 일원들의 견해를 수용하고 전 대통령인 트럼프가 평화로운 권력 이양이라는 민주 통치의 초석을 뒤엎으려 하는데도 그를 지지하기로 결정하기 전의 일이었다.

다양성과 포용성에 대한 반대, 지나치게 권한을 부여받은 여성과 남성다움이 부족한 남성에 대한 반대, 이민자에 대한 반대, 사회 정의 운동에 대한 반대, 세계화에 대한 반대, 진보에 대한 반대, 어떤 사람들은 현재 미국의 모든 문제가 진보주의자 탓이라고 본다.

사실 지난 10년 동안 가장 변함없는 교훈 가운데 하나는 민주주의가 여전히 취약하면서 귀중하고 한 번의 선거나 투표로 확보될 수 없으며 지칠줄 모르고 계속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가 2025년에 재임할 경우 그의 측근들은 행정권을 확대해 연방통신위원회와 연방거래위원회 같은 독립된 기관을 대통령 통제 아래에 두고 자금 압류 관행(즉 의회가 책정한 자금의 지출을 거부하는 것이다)을 부활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고 보도했다. 요컨대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설계된 견제와 균형을 위한 시스템을 무너뜨리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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