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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체 ㅣ 이렌 네미롭스키 선집 3
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이상해 옮김 / 레모 / 2023년 6월
평점 :
이렌 네미롭스키는 1903년 당시 러시아 제국이었던 키에프의 부르주아 유대인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납니다. 그녀의 가족은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러시아를 떠나 핀란드로 떠납니다. 이들은 얼마간 핀란드에서 지낸 후, 프랑스로 이주하여 마침내 파리에 안착하게 됩니다. 1921년 이렌은 파리 소르본 대학에 진학하고 이때부터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하는데요. 그리고 1926년에는 은행가인 미셸 엡스타인과 결혼하여 두딸을 두게 됩니다. 얼마 안 있어 이 부부는 자신들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둘다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데요. 이를 그저 전쟁의 광기라고 치부하기에는 이들의 운명이 너무나 가혹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렌 역시, 반 이상을 프랑스에서 살았고 심지어 프랑스어로 작품 활동을 했지만 당국으로부터 프랑스 국적을 거부당하기에 이르는데요. 더욱이 그녀는 1939년에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1941년 독일군의 프랑스 파리 점령 이후, 이듬해인 1942년 나치 독일에 부역한 비시 프랑스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1942년 7월 17일에 폴란드의 유대인 절멸 수용소인 아우슈비츠로 강제 이송됩니다. 결국 그녀는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한달 후에, 발진티푸스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Suite française, Dolce"로 지난 200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5년 초도 번역을 거쳐, 2023년 6월, 개정판이 출간되었습니다.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돌체'는 프랑스어로 부드럽고 감미로운 어떤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는데요. 여기에 더한 네미롭스키의 작명은 독일군의 프랑스 점령 초기 이후, 프랑스인들과 독일군의 당혹스럽고 불편했지만 의외로 이들의 동거가 가능했던 분위기를 에둘러 표현한 해석으로 이해됩니다. 이렇게 소설의 주된 배경이기도 한 프랑스 한 마을에서의 예기치 않은 독일군과의 동거는 이렇듯 여러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탱크를 동원해 전격전을 벌이며, 무능에 빠진 프랑스군을 궤멸시킨 독일군을 '전쟁 기계'로 묘사하면서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프랑스군의 패착을 마을 사람들의 여러 입을 통해 비판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사는 땅에 독일군이 진입한 사실 조차 매우 얼떨떨하게 여기기도 하는데요. 스스로의 삶의 터전에서 비교적 안온한 삶을 영위하고 있던 프랑스인들에게 있어 쉽게 말해 자신들의 목숨줄까지 쥔 점령군이이라 볼 수 있는 독일군이 의외로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모습과 그런 상황은 아무리 프랑스 전역에서의 전투가 마무리 되어가는 시점이라 해도 상당히 예상 밖의 서사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작가인 네미롭스키가 당시 프랑스 내부에 팽배해 있던 '프로이센'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경멸과 함께 마찬가지로 터무니 없는 두려움에 대한 이미지를 이 작품에도 투영하고 있었는데요. 이는 역사적으로 '프로이센에 의한 독일 통일'과 그런 체제의 본질이 당시 주변국에 어떠한 우려를 발생 시켰는지 아마 그녀와 같은 지식인이라면 쉬이 짐작이 되었을 겁니다. 특히, ''6월의 폭풍'과 이 작품에서도 언급되는 1870년 보불 전쟁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새로운 전쟁과 함께 두려움의 순차적인 매개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이곳에 등장하는 부르주아 계급인 '앙젤리에' 가(家)는 귀족이 저무는 세기에 한 마을의 지주 계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여기에 전통적 귀족 가문으로 등장하는 몽모르 자작 가와는 별도의 위상이라고 생각되는데요. 물론 적잖은 마을 사람들이 몽모르 자작의 땅에서 농사를 짓고 있긴 합니다만 일전에 누렸던 귀족 계급의 영향력은 역사적 뒤안길로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이 소설에서도 위와 동일한 세태를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앞선 앙젤리에 가문의 며느리인 '뤼실'은 전쟁으로 실종된 남편과는 아무런 애정도 없이 결혼했고, 그런 이유 때문에 스스로가 상당히 불행하다 느끼고 있습니다. 이 결혼의 내막은 남편이 처가의 재산 만을 보고 뤼실을 받아들인 것인데요. 이는 아들을 너무나 사랑하는 앙젤리에 노부인조차 인정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시어머니인 앙젤리에 노부인이 그런 처지의 뤼실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도 아닙니다. 극 중에 설명으로 드러나는 고부간의 벽과 보이지 않는 갈등이 그녀의 말마따나 자신이 이 저택에서 '외로운 섬'과 같은 존재로 만들고 있다 봐도 무방해 보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낯선 한 무리의 독일군이 마을에 진군하여 머물게 됨으로써 그녀를 둘러싼 일상이 크게 변하게 될 조짐을 맞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소규모 독일군을 이끄는 장교가 앙젤리에 가에 '기한 없는 숙박'을 통보했기 때문인데요. 모두의 예상과도 다르게 이러한 요청은 정중하고 부드럽게 진행되었습니다.
앞선 뤼실과 더불어 극의 주요한 화자인 브루노는 독일군 엘리트 장교로서 많은 교육을 받은 인물입니다. 그도 고향에 결혼한 처가 있으며, 만약 전쟁이 아니었다면 스스로도 평범한 삶을 영위했을 겁니다. 아마도 이런 부분에서 앙젤리에 가문에 짐을 푼 브루노가 사실상 젊은 미망인이라고 볼 수 있는 뤼실을 한눈에 보자마자 큰 연민과 애정을 느끼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더욱이 그는 자신에게 매번 이죽거리는 앙젤리에 노부인에게 예의를 다하고 이 저택에 머무는 만큼은 이곳에 살고 있는 여인들에게 스스로가 폐가 되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하지만 그가 뤼실에 대해 느끼는 동질감과 연모는 날이 가면 갈수록 깊어져 가는데요. 두 사람은 서로 대화가 잘 통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뤼실은 전형적인 여성 캐릭터와는 다르게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행동거지가 진중한 여성이기도 했습니다. 그녀가 내뱉는 대화나 주변인들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 등을 종합해 봤을 때, 뤼실은 신중하고 사려 깊은 인물로 여겨집니다. 생전 보지도 못한 낯선 이방인들이 자신의 삶을 침범하고 이들이 마을에 미치는 영향이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님에도 스스로 내적 불안을 내비치지 않는 모습은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점령군 장교인 브루노의 신사다움과 여성을 배려하는 태도, 말에서 느껴지는 박학다식한 모습은 반대로 아는 게 없어서 무식하고 즉흥적인 프랑스 인들과는 사뭇 대비되는 모습이기도 했는데요. 물론 이러한 차이는 당시 시대상에 기인한 유산계급과 그렇지 못한 신분에서 오는 근본적인 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묘사되는 마을 사람들이 이 독일인들에 대해, 근원적인 프로이센에 대한 경멸과 맞물려, 이들을 '보슈'라고 멸칭하는 것까지 문명적인 정복자와 즉흥적이고 본능적인 피지배자들의 이런 대비된 관계와 묘사는 처음에는 상당히 이질적이기도 했습니다.
프랑스가 독일에 대해 패배한 근본적 이유를 네미롭스키가 작품에서 일목요연하게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앙젤리에 노부인의 페탱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고려해 본다면, 다소나마 이를 짐작해 볼 수 있겠는데요. 특히 몽모르 자작이 프랑스가 패배한 이유가 병사들이 군기 문란과 애국심 결핍, 그들의 '나쁜 정신'에 있다고 본 점은 당시 프랑스의 문제가 어디에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해 볼 만합니다. 그럼에도 쿠엔틴 타란티노의 같은 배경의 영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나딘의 술집 장면에서 독일군들과 여실히 잘 지내고 있는 프랑스인들의 모습은 흡사 힘을 가진 이방인들에 대한 두려움이라 할지라도 네미롭스키가 만들어 놓은 서사와 일견 유사해 보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단호하게 앙젤리에 노부인은 '프랑스인들은 서로 밀고하지 않는다'는 확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많은 프랑스인들이 나치 독일에 협력했으며, 파리에 세워진 괴뢰 정부에도 프랑스인들이 자발적으로 나섰다는 점은 뭔가 우리의 역사와도 닮아 있는데요. 전후 드골이 부역자로 일했던 많은 프랑스인들을 처단한 것에 이르러, 인간이 생각하는 자신에 대한 사적인 안위와 평온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곱씹게 됩니다. 네미롭스키 역시, 인간의 이러한 진면목을 자신의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근본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뤼실과 브루노를 한 축으로 이뤄지는 이 작품의 서사는 전쟁 상황에서 평범한 사람들에게 가져다 주는 평온이 얼마나 가변적이고 이러한 상황이 어떻게 급변할 수 있는지를 극의 전개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는데요. 특히 약간 지엽적이지만 전작인 '6월의 폭풍'에서도 등장한 마들렌의 바뀐 운명과 그녀가 아직도 섬세하고 도시적인 남성을 선망하고 있다는 묘사와 그것과는 아주 상반된 인물과 가정을 꾸리며 살고 있는 모습은 한편으론 삶의 아이러니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양태들 가운데 하나라고 느껴졌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뤼실이 브루노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관습과 도덕적 이유를 포함해, 욕망과 현실의 한계라는 아이러니가 인간의 욕망에 반하여 일으키는 일종의 거부 반응이라고 이해되었는데요. 그래서 뤼실 자신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준비가 되었는지를 끊임없이 자문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보는데요. 또한 이와는 별개로, 마을 여성들이 금발의 젊은 독일군들을 향해 던지는 추파와 이들과 맺는 육체적 관계에 대한 열망은 전쟁으로 남자들을 잃은 한 공동체의 여성들이 자신들의 삶과 욕망을 지키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으로 읽히기도 했습니다. 또한 노동자들이 돈 맛을 알게 되어 전통적인 프랑스의 계급 간 위계를 망각하게 되었다는 설명과 여기에 묘사되는 농부들까지도 사회주의에 물든 것으로 이해하는 전통적 지배 계층의 뿌리 깊은 인식은 당시 이 시대가 과연 어떠한 체제였는지 능히 짐작하게 할 만합니다. 그런 와중에 독일이 주도하는 대전에 국운이 휩쓸리게 되었으니 몰염치한 인식과 계급 간의 갈등은 전반적으로 앞으로 드러나게 될 전체주의적 망령에 비하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브루노가 속한 프랑스 주둔군이 새롭게 구축되는 러시아 전선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극은 마무리 되기에 이릅니다.
-작품 중후반부에서 브루노와 뤼실의 대화를 통해, 소위 '벌집 정신'이 언급됩니다. 이는 꿀벌들이 여왕벌의 명령을 거부하기 어려운 것처럼, 당시 독일인들의 수동적인 입장을 설명하는 데 쓰이고 있는데요. 저는 이러한 언급과 맥락이 꽤나 의미심장하다고 여겨졌습니다. 특히 작가는 물론, 수많은 유럽의 유대인들을 절멸하게 만든 독일인들의 이 참혹한 아이디어가 탄생하게 된 수많은 연유들과 함께, 그 자체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사냥하는 야만의 시대의 단초가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프랑스인의 손으로 만들어졌고, 프랑스인의 눈이 바라보았고, 프랑스인의 먼지떨이가 닿았던 물건들을 독일인이 더럽히도록 놔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른 것들은 익살맞은 그림이나 도표를 이용해 전 세계에 뻗어 있는 영국의 지배력과 혐오스러운 유대인의 횡포를 보여주었다.
마을 여자들은 증오와 욕망이 동시에 묻어나는 눈길로 적군을 바라보며 ‘우리의 주인들‘이라고 불렀다.
뤼실은 사랑으로든, 질투에 찬 혐오로든 마움이 충만했던 적이 없었다.
마들렌은 두려움에 휩싸여 생각했다. ‘저 사람이 나한테 집적대면 브누아가 뭐라고 할까?‘
보네는 잔인했다. 하지만 그것은 청소년기의 잔인함, 온전히 자신과 자신의 영혼을 향해 있는, 아주 왕성하고 섬세한 상상력에서 비롯된 잔인함이었다.
"남자는 전사가 되기 위해 태어나죠. 여자가 전사의 여흥을 위해 태어나듯이." 보네가 이렇게 대답하고는 웃었다. 순박한 프랑스 시골 여자에게 니체를 인용하는 것이 재미있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남자들의 자리가 비어 있어서 침략자들이 그들 자리를 차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몽모르 자작은 프랑스가 패배한 이유가 병사들의 군기 문란과 애국심 결핍, 그들의 ‘나쁜 정신‘에 있다고 생각했다.
부르주아들은 자작 부인이 이런 수수한 차림과 스스럼 없는 태도를 통해 그들에 대해 품고 있는 깊은 멸시감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부인 죄송하지만 그건 여자의 단어입니다. 남자는 열의 없이도 자신의 의무를 다하죠.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남자라는 것을, 진정한 남자라는 것을 인정받죠."
브루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전투를 하다 보면 숲속에 배복한 채로 며칠 밤을 보내야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 기다림은 아주 에로틱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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