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가 되는 삶들 - 모더니티와 그 추방자들 What's Up 4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 / 새물결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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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성사에서도 흔하지 않은 폴란드의 유대인으로 또한 역사의 흐름과 맞지 않게도 1970년대 폴란드에서 불어닥친 반유대주의로 인해 영국에 망명해 그곳에서 평생을 보낸 지그문트 바우만은 자신의 학문적 연구를 관통하는 모더니티, 소비주의, 액체 근대와 통찰력 있는 사고의 균일한 확장으로 전세계인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 전세기나 혹은 금세기를 포함해서도 바우만과 같은 우리의 사상적 지표는 사회학 뿐만 아니라 철학을 포함한 다른 분야에서도 감히 찾아보기 힘들텐데요. 그가 2017년에 타계했다고 들었을 때 앞으로도 충분히 많은 저서 활동과 연구로 우리의 탐욕과 방종에 비판을 가해줄 수 있는 사람이어서 더욱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같은 일개 독서인이 그러한 평가를 내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유작이 되어버린 ‘레트로토피아’의 결말이 아직도 간간히 떠오르고 있는 이즈음에서도 앞선 아쉬움은 저에게는 여전한 모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소개할 이 책의 원제는 ‘Wasted Lives : Moderniry and its Outcasts’ 이며, 지난 2004년에 출간되었습니다. 국내에는 2008년 번역 출판 되었고, 특히 이 책은 해당 출판사인 새물결에서 내고 있는 What’s Up 시리즈의 4번째 기획물인데요. 필히 입수해서 읽어봐야 되는 책들 가운데 절반정도가 이미 절판인 상태입니다. 출판 시장에 있어서 인문학 분야의 나날이 더해지는 협소함 때문인지 아니면 번역이나 여타 문제로 새로운 판을 내기 위한 준비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절판된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도 구해봐야 하는데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 책의 제목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우리의 삶을 ‘쓰레기’로 내몰거나 심지어 ‘쓰레기 인간’을 만들어 버리는 왜곡된 근대주의의 허상들과 오로지 경제적 합리성에만 집중하고 심지어 그것을 지배 올로기로 만들어버리는 신자유주의와 비판 받지 않는 시장 경제에 대한 사회철학적인 진지한 논의를 벌이고 있는 것이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직면할 논제들입니다. 바우만의 글쓰기가 그렇듯이 이 글도 내내 논점이 일관적이고 인용하고 있는 많은 학자들의 논리적 적절성과 과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물러서지도 않는 태도 또한 크게 설득력을 갖고 있습니다. 우선 바우만은 서두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위기론이나 탈주론만으로는 이러한 인간의 위기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취지의 주장으로 시작합니다. 총 4장의 주제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관통하는 요점들은 대부분 앞에서 제가 밝힌 것과 동일합니다. 사실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신자유주의의 큰 흐름은 일종의 ‘지구화 과정’일텐데요. 이 지구화 과정은 특히 자유 시장 경제의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경제적 경계를 없애는 데 기여한 논리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더 큰 이익을 얻는 부류는 말씀을 안드려도 아실테고요. 애초에 루소의 공화주의가 태동한 시기와 성숙된 계몽주의를 통해 시민들은 어떠한 정치적 억압이나 불평등한 상태가 아닌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인식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러나 발전된 경제학이 정부의 역할 논리를 규정하기 시작하면서 정치학과 경제학의 경계가 더불어 모호해지기도 했습니다만 본디 정치학의 목적은 여기의 지그문트 바우만이 확정지어 밝히는 것 처럼 ‘인간의 만연된 불확실성’을 제어하는 데 있었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바우만이 책에서 언급하는 이 인간의 불확실성에 대해 깊은 숙고를 해보게 되었습니다. 4장인 쓰레기 문화에서 채 1세기도 누리지 못하는 인간의 필멸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러한 상황에 놓여 있음에도 인간에게 영속과 지속성을 부여해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하며 그것은 끊임없는 과거를 통한 성찰, 즉 오늘날 근대성이 이것을 상실한 일방통행에 대해 꼬집어 주장합니다.

우리는 이 경제적 신자유주의 시대에 프레카리아트를 비롯한 바우만이 지칭하는 인간 쓰레기를 각별히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쓰레기가 된 인간들, 잉여와 여분의 인간들 즉 공인 받거나 머물도록 허락받지 못했거나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지 않는 인간 집단”이라고 풀어내며, 이것을 나중에는 ‘포함/배제’의 게임으로 확장시킵니다. 여기에서 이 쓰레기 개념을 독특하게 차용하면서도 과연 우리가 자발적으로 쓰레기가 된 것인가? 아니면 시스템에 의해 쓰레기화가 된 것인가? 에 대해 누구나 짐작할 만한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장 자본주의의 일상의 ‘만연된 소비주의’를 비판할 때도 나옵니다만 결국 이 ‘인간 쓰레기화’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에 의한 상품의 생산과 소비 또한 권력과 비권력의 구분으로 선진국이 에너지를 수입해 후진국에게 공해와 쓰레기를 수출하고 있다는 근본적인 시장 자본주의의 비도덕성을 매우 비판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눈감아 버리는 악의 과정’을 인간 본연의 합리적인 경제인상 및 경제적 합리성을 옹호하면서 이를 통해 인류 모두가 발전해 왔다는 논거를 들이댈 수 있겠습니다만, 과연 이것이 공리주의적 입장인지, 아니면 자본의 배타적 축적을 옹호하는 것인지는 아주 면밀히 살펴봐야 될 문제입니다. 그 주체는 바로 시민이 되어야겠죠.

무엇보다 이 인간 쓰레기와 관련하여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바우만이 특히 강조하는 “단지 경제 발전의 부산물일 뿐인 인간 쓰레기의 생산은 비인격적이고, 순전히 기술적인 문제가 가진 모든 특징을 보여준다”며 인간이 본디 합리적인 속성을 대체로 지니고 있기 보다는 인간 뿐만 아니라 사회 역시 짐작할 수 없는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오로지 ‘물질적 권능’으로만 이를 누를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부분의 전제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인간의 취약성과 불확실성은 모든 정치 권력의 주된 존재 이유”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이러한 인간의 불확실성이 시장의 힘에 노출되었을 때 어떻게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지에 대해 이미 많은 학자와 사상가들이 경고한 바가 있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삶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을 비판한 한나 아렌트나 자꾸만 예외 상태를 만들려고 하는 이익을 가진자들을 비판한 조르조 아감벤 등이나 “자유 경쟁과 평등한 거래의 화려한 막 뒤에는 위계적 인간이 여전히 머무르고 있다”는 이를 넘어서는 바우만의 경고는 앞으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경제적 엘리트와 정치 엘리트, 사법 엘리트들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과두제’의 상황과 엇비슷합니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 목적으로 노동 시장에 수입해 이제는 사회의 목적 변질로 쓰레기가 되어버린 수많은 이민자들의 문제도 이와 같을 겁니다. 근본적인 이민자들의 이 이율배반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이런 상황 자체를 자국의 안보 위협 상황으로 몰아가는 수많은 선진국들의 행태는 우리가 과연 어떠한 삶의 환경에 놓여 있는지 목도할 수 있습니다. 일전에 바우만은 레트로토피아에서 ‘타인의 고통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자들’이 범람하고 있는 세계라고 일침을 가한적이 있습니다. 이 음울한 우리의 액체 근대가 시민을 고통에 담가버리는 세계의 결말은 과연 어떻게 될지는 이 책의 결말에서도 뚜렷한 희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근대가 벌인 ‘잉여, 유기, 거부, 배제, 소모’와 같은 책임 회피를 뒤로하고 과거의 삶을 통해 성찰하고, 시민들 모두가 서로의 네트워크화를 통해 타인의 삶 또한 지켜보고 관심을 갖는 진정한 의미로서의 지구화와 세계화가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점은 바우만도 익히 동의하리라 여겨지고요. 대다수의 시민이 동의하지 않는 주입된 삶의 태도나 경제적 합리성만을 유일로 삼아 소수자들의 견제 받지 않는 이익을 옹호하는데나 쓰여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개인의 자유일리는 만무하고, 그나마 우리가 모두 누릴 수 있는 이익을 위해 좀 더 우리 스스로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될 사활적인 이유일 것입니다.

끝으로 제가 이 책을 일독하고 느낀 것은 현재 바우만의 유고작으로 알려진 ‘레트로토피아’의 꽤 훌륭한 보론으로 보인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책이 절판된 상태라 독자들은 아무래도 출판사의 재출간을 기대해봐야 할 시점인 것 같습니다. 이 책 역시 살면서 꽤 오래도록 제 기억에 남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 번 다시 일독을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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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희망의 네트워크 - 인터넷 시대의 사회운동 분노와 희망의 네트워크 (반양장본)
마누엘 카스텔 지음, 김양욱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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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서던캘리포니아 대학의 교수이며 커뮤니케이션학, 사회학, 세계화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 세계적 석학 마누엘 카스텔은 위키피디아가 밝힌 사회과학인용색인의 2000-2014년 조사에서 사회과학 학자 중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많이 인용되었다고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커뮤니케이션 연구와 관련해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권위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은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마누엘 카스텔 교수에 대해 언급하고 싶은 것은 최근 번역된 ‘개인주의 신화’의 피터 칼레로 교수와 비슷하게 꽤 사회참여적인 지식인이라는 점입니다. 이것과 관련해 이 글의 5장 스페인 인디그나다스와 관련해 이 네트워크 운동에 직접 참여한 경험을 소개하고 있는데요. 또한 서문에서도 사회학자가 조금이라도 사회에 유익한 기여를 해야한다는 취지로 이 책의 목적과 학문의 태도를 밝히고 있습니다. 거의 1세기 전에 프랑스 철학자인 쥘리앙 방다는 지식인들을 혹독하게 비판한 바가 있는데요. 오늘날 경제학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학자들이 여러 권력에 기대어 있는 것으로 봤을 때 카스텔 교수의 학문과 현실참여의 태도는 꽤 존경 받을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이 책은 그에게 많은 명성을 가져다 준 ‘네트워크 사회’에 대한 사회적 후술과도 같은 성격이라 보여집니다. 원제는 ‘Networks of Outrage and Hope’이고 초판은 2012년에 이후 개정판은 2015년에 출간되었습니다. 국내 번역된 판은 2015년 개정판을 베이스로 하고 있습니다.

우선 본격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카스텔 교수가 밝히는 네트워크혹은 네트워크 시대에 대해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그는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비롯한 SNS와 인터넷을 비롯한 컴퓨터 관계망을 대체적으로 민주주의의 기회라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한 세계적 실례로 튀니지, 이집트, 스페인, 미국의 월스트리트 에서의 네트워크가 기본이 된 시민들의 ‘직접 민주주의적 참여 운동’을 새로운 변화된 모습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나타난 이 네트워크 시대의 미래와 이상적 형태에 대한 충고와 당위성 등을 또한 밝히고 있습니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의 중동 민주화 운동을 설명하면서 카스텔 교수는 한가지 필요한 전제 조건을 말하고 있는데요. 그것은 “권력은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이 당시 권위주의적이고 부패한 권력과 정부에 대해 촉발된 튀니지와 이집트의 민주화 요구에는 이러한 권력을 두려워하는 감정을 뛰어넘는 각 개인들의 ‘분노’가 이것을 극복하는데 기여를 하였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분노들은 전인구의 40%가 빈곤층이라는 이집트인들의 분노, 한 젊은 노점상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촉발된 튀니지인들의 분노가 그러합니다. 다만 이러한 시민들의 분노가 폭력적인 상태로 나아가지 않고 국가와 사회의 변혁의 요구,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욕구, 권력 기관의 부패와 탄압의 종식을 수많은 개인 네트워크를 이용해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그동안 역사에서 보여왔던 시민혁명과는 다른 형태였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집트 군부에 현금 지원을 하면서 현상 유지에 힘썼던 미국이 뒤에 있었고, 이는 이집트-이스라엘의 우호 관계를 압박하면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중동 지역의 안보와 질서를 위해 관여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중동에 있는 이슬람인들이 미국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와 같은 비정상적이고 비민주적인 권위주의 정부를 자신들의 이익에 유리하다는 이유로 직간접적으로 지원해 왔다는 부분입니다. 사실 외교와 국제관계에서 이상주의를 주입하는 것은 다소 의미없는 일이나 문제는 이러한 미국의 이중적 태도(자신들은 민주주의를 신봉하면서, 비민주주의 정부나 권력을 지원하는 행태)가 현지인들의 불만을 초래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뒤이어 스페인의 광장 점거 운동인 ‘인디그나다스’의 요인은 스페인 국내의 살인적인 실업률과 PIIGS 로 지칭되는 경제적 구조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국가들의 사회경제적 불안입니다. 스페인이 바로 이에 속하고 있는데요. 더불어 자신들의 유사 민주주의 상태를 진정한 민주주의로 변화시키는 것으로 요구되고 있는데요. 특히 스페인과 미국의 사례는 “전 세계 시민 대부분에게 직업 정치인 집단은, 투표하고 보수를 주는 민중을 대변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들의 기득권에만 신경 쓰는 듯한 계급으로 인식된다”는 저자의 해석과 궤를 같이 합니다. 경제 엘리트들의 금권과 적극적으로 융합해 변질된 정치 엘리트들 그리고 한나 아렌트의 나레이션과 흡사한 “형식만 새로운 대의 민주주의와 삶의 의미가 없는 경제적 합리성만 남은 꼴”이라는 비판은 이러한 세계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절실한 희망을 갖고 기대한 전임 대통령 오바마의 무능으로 직접적으로 도덕적 해이에 빠진 경제 엘리트들과 시스템에 대항한 시민 운동인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도 앞선 이유가 강했습니다. 전체적으로 중동과 스페인을 거쳐 미국에 도달한 이 시민들의 현실 참여 운동은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정치적 지도부가 없는’ 순수한 직접 민주주의의 형태인데요. 마누엘 카스텔 교수도 이렇게 달리 어떤 지도부가 없이 시민들 각자가 끊임없이 토론하고 협의하는 민주적 에너지에 큰 감명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브라질과 미국의 사례에서 일반적인 정치 지도자 및 정치 엘리트들은 이러한 시민들의 참여 운동을 꽤 불신하는 것으로 나오고 자신들이 배제된 정치적 흐름이 문제라고 보는 듯 합니다. 이 네트워크의 시민 참여는 진정 정치적일 수 밖에 없고, 자신들의 요구를 정부와 권력에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은 민주주의 본연의 정치적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루소는 공화주의에서 시민은 정부를 갈아치울 권리를 갖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지요.

끝으로 중동에서 촉발된 쟈스민 혁명은 이집트에서의 잠정적 실패, 시리아에 대한 중국과 러시아의 관리가 지역 전체의 민주화를 가로막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에 대한 프랑스의 적극적인 개입이 중동 유일의 동맹을 잃을 수도 있다는 푸틴의 우려를 불러일으켰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시리아 아사드 정권의 보호자를 자처한 이란과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중국의 행태도 비슷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교에 의한 샤리와와 같은 속세에 대한 개입과 아직도 견고한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 체제의 정권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아프리카-중동 지역은 아직도 갈길이 요원한 것 같습니다. 그 외 서구와 민주주의 국가들에게서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룩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는 다소 희망적으로 느껴집니다. 여기에서 관건은 중국과 같은 거대 네트워크 규제 정부나 온라인이나 공공 장소에서 시민들의 정치 토론을 금지한 베트남과 같은 선례들을 정치인들이나 정치엘리트들이 왜곡 이용하지 못하도록 시민들이 끊임없이 견제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선 민주 정부에서는 앞선 두 개의 사례가 큰 문제는 되지 않습니다만 카스텔 교수도 우려하고 있듯이 이 시민 참여 운동이 반대의 기득권적인 권위주의 정부의 강경 진압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은 ‘권력의 두려움’이 어떤 것인지 잘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고도화된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은 샹탈 무페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비슷해 보입니다. 과연 우리가 새로운 민주주의의 시대에 들어섰는지는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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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 트라우마 - 소득 격차와 사회적 지위의 심리적 영향력과 그 이유
리처드 윌킨슨.케이트 피킷 지음, 이은경 옮김, 이강국 감수 / 생각이음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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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정경대 출신으로 노팅엄 의과대의 사회역학, 요크대 초빙 교수 등을 맡으며 불평등과 시민들의 정신 및 신체 건강의 관련성을 연구하고 있는 리처드 윌킨슨과 캠브릿지와 코넬대에서 역학을 전공한 케이트 피킷이 함께 공저로 참여한 ‘불평등 트라우마’를 일독했습니다. 아마도 두 공저자의 이력에 포함되어 있는 이 ‘역학’이라는 학문은 ‘예방의학’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또한 이 책은 두 공저자의 다른 논저인 ‘평등이 답이다’의 후속 연구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도 보여지는데요. 서문에서 이와 관련해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현재 앞서 언급한 ‘평등이 답이다’는 절판이 된 상태로 나오고 있습니다. 원제는 번역된 제목과 약간 관련이 없는 ‘The Inner Level’ 이며 2018년에 출간되었습니다. 국내에는 올 3월에 번역 출판이 이뤄졌습니다. 본격적으로 논의에 앞서 번역은 딱히 나무랄데가 없었으며, 따로 감수를 두고 편집에 나선 것으로 보아 출판사의 노력이 적잖게 들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우선 이 불평등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인식은 개인의 능력의 문제이며, “유능하고 강직한 사람은 위로 올라가는 반면에 그렇지 않은 사람은 빈곤과 궁핍에 빠지게 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있다”는 다소 내면화된 문제를 끄집어 내면서 전자의 문제가 현재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먼저 밝히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 심각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문제가 교육 불평등이 초래한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데, 공교롭게도 이 양자는 닭과 계란의 문제일 정도로 서로 밀접하고 어느 것이 이 사태의 원인인지 가려내기도 어려운 실정입니다. 이렇게 일면적인 불평등의 상황을 이 정도로 짚어 보고 나서 책의 논의에 들어가는 것이 개인적으로 필요하다고 느꼈는데요. 이 두 학자의 연구물은 다른 불평등을 다룬 논저들과는 다른 접근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정신 의학과 인간 본성의 측면에서 오늘날의 불평등이 어떤 식으로 시민들의 건강과 마음의 불안을 초래하고 있는지에 대해 여러 OECD 자료들과 유럽 국가들의 통계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불평등 문제가 사회 불안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었지만, 이 연구서의 논법처럼 인간 자체의 정신 불안과 자기 혐오, 자기 비하, 굴종적인 의식 등을 초래한다는 결과는 꽤 설득적이고 인간 본연의 근본적인 문제로까지 느껴졌습니다. 더불어 이와 같이 민주주의 체제하에 시장 자유주의가 매우 가파르게 사회 구조에 영향을 주었던 것은 꽤 강제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경제 발전을 연계하여 시장 자유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사회 전체에 대한 주입은 개인 능력의 문제라든지, 개인의 수용 여부에 따른 아주 사소한 지엽적인 부분이 절대 아닙니다.

“불평등이 클수록 최상층에 있는 사람은 대단히 중요하고 최하층에 가까운 사람은 거의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거의 필연적으로 증가한다”는 주장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미국의 도금시대부터 개인의 사리사욕 추구를 전면적인 자유의 문제로 여기게 되면서 이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 하고자 사회진화학과 진화심리학 등이 여기에 가세했습니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누구나 평등하게 태어나고 각 개개인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는 14세기 이후 휴머니즘과 계몽주의를 통해 인간의 기본권을 중요한 가치로 삼아 역사의 진보를 거의 과거로 회귀시켜 버리는 반사회적 입장과도 같습니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오랜 역사를 통해 이룩했던 인류의 민주주의 가치와 평등 사상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즉 사소하게는 정신적인 문제와 의도하지 않은 부산물을 만들어내고 사회구조적으로는 사회 불안과 긴장, 갈등, 계급적 지배 체제를 심화시키는 요인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토대의 논증 과정을 이 책은 매우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고 시민들 모두가 우리의 현재 상황에 대한 면밀한 인지가 필요하다는 점을 또한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 소개된 여러 사례들중에 미국에서 불평등이 심화된 지역이 지난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한 결과를 낳았다고 보는 것은 이 불평등이 하위 계층을 오도하는 포퓰리즘의 양태로 나아갔고, “도널드 트럼프는 소득 불평등이 심각한 주에서 더 높은 지지를 얻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즉 이것은 “소득 불평등이 포퓰리즘 대두의 원인으로 지목 받았다”는 결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는데요. 그래서 각 사회가 평등의 문제에 좀 더 골몰하고 평등적인 사회가 곧 나은 사회라는 도식을 매우 겸허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이 평등의 문제와 관련해서 유독 현실을 도외시한 도덕 이상주의적 접근이라는 가치이론적 폄하가 만연했는데요. 더 이러한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좀 더 실천적인 태도와 행동의 전환이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불평등이 만든 물질주의와 소비 지상주의와 관련해서도 “물질주의는 인간이 타고난 소유욕의 징후가 아니라 불평등으로 심화된 지위 경쟁에서 자극을 받아 타인에게 자신의 자존감을 알리는 아주 기이한 소통 형태”로서 이것이 시민 사회에 만연됨으로서 불평등의 근본적인 문제를 가리고 경제적 만능의 태도를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 책은 이러한 논증 과정을 통해 ‘이기심, 소유욕, 자기중심주의, 출세주의 등을 반사회적 경향’이라고 단언하고 더 나아가서는 ‘지배적 위계체제’를 시민들에게 강요하는 것으로 이 글을 통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일전에 로버트 달의 경제 민주주의에 대한 연구가 바로 이러한 사회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고자 한 것이며, 모든 시민을 ‘불평등에 의한 지위 불안’에 빠트림으로서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위협으로 결국 이르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는 불평등으로 인한 시민의 정치 참여가 더욱 약화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를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영속성을 해친다는 것을 필히 유념해야 될 것입니다.

주를 포함한 글의 내용이 400여페이지가 넘는 이 연구는 시민들 자체의 건강을 악화시키는 불평등을 다루면서 이 논증 과정 만으로도 꽤 높은 설득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기존의 교육 불평등을 비롯한 사회와 경제적 및 소득 불평등에 관한 연구는 요근래 계속 되고 있지만 애초에 앞선 언급과 같은 접근을 보이는 논저는 거의 이 책이 유일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번역 작업과 함께 고정된 책의 제목이 다소 이해 안되실 수도 있지만 책을 전부 일독하시면 글의 목적과 제목이 동일함을 파악하시리라 생각됩니다. 다만 어떤 사례와 주장은 논란이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만 크게 봤을때는 글의 일관된 논점을 해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물질적 격차의 영향력을 인식하기 어려운 이유는 지위 격차나 어떤 사람의 사회 계층을 드러내는 표지가 실제보다 더 근본적으로 사람들간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처럼 여겨진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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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과 의심의 정치학
마이클 오크쇼트 지음, 박동천 옮김 / 모티브북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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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출신으로 영미 학계에 전후시기 위대한 철학자로 잘 알려져 있는 마이클 오크쇼트는 캠브리지와 런던정경대에서 강의하고 특히 헤겔의 관념론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사상가이자 학자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는 냉전시기의 당시 영국 대처 정부와도 거리를 둘 만큼 현실 정치와는 거리가 있었는데요. 이 ‘신념과 의심의 정치학’이라는 일종의 정치철학적 논저 역시 그의 이러한 사상적 본질과 궤를 같이 하는 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정치철학적 주제와 질문들이 ‘권력은 과연 누가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쓰여져야 하는가’와 유사한 일종의 인간 본연의 정치 사상을 다루는 것이라 생각되는데요. 사후 발견된 이 글의 논고가 출판이 되지 않고 지인들의 손에 의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은 어쩌면 그의 고민을 짐작할 만합니다. 이 책의 원제는 ‘The Politics Of Faith And The Politics of Scepticism’으로 1996년 출판되었고, 국내에는 지난 2015년에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우선 책 제목과 동일하게 오크쇼트는 ‘신념의 정치학’과 ‘의심의 정치학’을 철학적이고 도덕적인 접근으로 해석해 양자를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독자들은 이 두 주제가 다소 대립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는데요. 논증이 이어지는 책 중반부에 “의심 정치를 단순히 신념 정치의 반대로만 보는 것은 불완전한 이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럼 먼저 신념 정치 혹은 신념의 정치학의 태동은 아마도 12세기 중반 십자군 전쟁이 별 소득 없이 종료 되고 난 이후의 근대 유럽의 태동이 시작되었던 시점부터 15세기 말 16세기에 이르는 기간에 유럽 각국의 정부들은 신민들의 활동과 운명을 통제할 권력을 획득해 나간 시기로 저자는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 등장하는 단어들 중 가장 빈도수가 높은 것이 ‘모호성’과 ‘다스림’입니다. 전자의 모호성은 정치철학을 넘어 인간 본질의 근원, 사물의 이치 등이 단순한 어휘로 설명되는 것은 어려운 부분이며, 동시에 정치에 있어서도 이 모호성이 행위와 이념 속에서 오랜 시간 동안 존재해 왔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아마도 오크쇼트가 헤겔의 관념철학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요. 저의 이러한 해석을 차치하더라도 정치의 본질이 다소 모호하게 나타나는 것은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다스림’과 관련해서도 오크쇼트는 권력에 대한 주권의 개념 및 앞선 신민들에 대한 통제력과 관련하여 이 다스림을 해석하고 있고, 전반적으로 통제, 개입, 조절 등의 의미들과 맞닿은 이해를 보이고 있습니다. 즉 이러한 논증 과정에서 ‘신념의 정치학’은 일종의 인간 완성의 형태로 정치를 바라보는 듯 하며, 행위자와 피행위자와의 경계라든지 일반적인 정치적 이념에 대한 뚜렷한 정의를 내세워 설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인간 완성의 형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어떠한 높은 가치 등으로 이 신념의 정치학을 소개하고 있는데요. 이를테면 프랜시스 베이컨을 이 관념의 사도이자 생부로 이해시키고 있습니다.

‘의심의 정치학’은 도덕적 회의주의를 기반으로 루소의 공화주의가 태동하는 시기 이전부터 오늘날 대의적 정부들의 견제, 분립, 대응 등의 가치관과 공유하는 형태의 정치로 나타납니다. 정치를 명백히 회의적인 것으로 인식했던 홉스와 스피노자를 필두로 앞선 베이컨의 대항마로 존 로크를 대칭시키고 있습니다. “도덕적 승인이나 거부는 정부의 직무에 속하지 않는다”는 보편적 대의에서 의심의 정치학이 어느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지 명백하게 보입니다. “올바르다고 간주되는 단일한 행동 유형을 신민에게 강요하는 것이 정부가 할 일이라고 여기는 발상을 중세적 사고”라고 밝히는 부분에서도 의심의 정치학의 단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앞선 신념의 정치학이 종교적인 부분과도 연관이 있다면 이 의심의 정치학은 종교적 및 도덕적인 가치에는 일정 부분 선을 긋고 있습니다. 더욱이 기계적 장치와 유사하게 권력 분립 또한 전체를 지탱하는 부속으로 여기는 등 의심의 정치 자체는 꽤 억측과 이상적이고 낙관적인 현실을 배제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배제라기 보다는 객관성을 제일의 가치로 해석한다고 봐야하겠죠. 즉 기계 공장의 필수적인 부품들이 전체적인 균형과 운동성을 보장한다는 측면에서 법치주의라든지, 분립, 시민, 정부 등을 하나의 균일한 정치적 부속으로 바라보는 것이 이 의심의 정치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오크쇼트는 이 신념의 정치학과 의심의 정치학 모두 자기 파괴적 속성을 갖고 있으며, 의심의 정치학은 신념의 정치학과는 달리 그 파괴성이 명백하지는 않지만 자기 파괴를 네메시스로 치환시키고 이들중 하나만이 홀로 득세하는 것이 양가적인 측면에서도 좋지 못하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회의적 스타일의 정치학은 결코 무정부주의가 아니라는 측면에서 이 의심의 정치학이 신념의 정치학과 다른 점이라고 전제합니다. 결국 이 양자의 정치학은 서로 꽤 합리적으로 균형있게 존재해야 한다고 해석할 수 있겠는데요. 저자가 이 합리성을 생전에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결론에 이르러 밝히고 있는 ‘균형자’의 개념은 실로 절묘하다고 여겨집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정치철학 및 정치학에서 이 ‘균형자’의 개념은 쓸모가 많을 것으로 파악되는데요. 플라톤의 중용을 기반으로 ‘지식과 판단을 갈구하는’ 이 균형자들의 범람이 시민 사회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사회 전반에 ‘논쟁은 있지만 증오는 없는’ 실용적인 가치를 추구하는데 조력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의심의 정치학에서도 다루는 관행의 면모를 어떤 식으로 일신해야 될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며 신념과 의심, 양자의 가치를 어떻게 균형적으로 이뤄 나갈지에 대한 현실적인 방안이 모색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이 글을 전부 일독하고 나서 찬찬히 오크쇼트의 일생을 설명한 기록들을 웹에서 검색해 보았는데요. 한때 노동당 정부를 비판한 것이나 대처 정부와 거리를 두고 라스키의 후임으로 런던정경대에 임용된 것으로 봐도 그의 사상적 삶이 얼마나 치열했을까 잠시 가늠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글이 나오게 되었고, 자기 확신의 태도 보다는 좀 더 스스로에게 객관적이었던 것이 아닐까하는 추측도 해보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이 시대의 많은 정치인들이 이 책을 손에 쥐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로 해보게 되었습니다.

“정치에서 극단을 한번 껴안은 사람들은 오로지 극단의 정치만을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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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신자유주의는 죽지 않는가 Trans & Cross 2
콜린 크라우치 지음, 유강은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영국 워릭 대학의 경영대학원 교수이자 저명한 사회학자로 알려진 콜린 크라우치의 ‘왜 신자유주의는 죽지 않는가’를 일독했습니다. 크라우치는 크게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과 포스트민주주의로 유명한데요. 얼마전에 서평을 쓴 ‘포스트 민주주의’를 읽고 나서 신자유주의를 다룬 이 책을 너무나 구하고 싶었는데요. 마침 절판된 상태라 개인 중고 거래를 제외하면 딱히 구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며칠전에 운좋게 제 손에 들어왔고, 천천히 정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원제는 The Stange Non-Death of Neoliberalism 이며, 지난 2011년 출간되었습니다. 국내에는 이듬해인 2012년 소개되었는데요. 앞서 언급해드렸지만 아쉽게도 현재는 시중에서 책을 구할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모쪼록 재간행이 이뤄지길 빌어 봅니다.

우선 크라우치의의 이 책이 관통하는 주제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겠는데요. 그것은 “민주주의는 측정 가능한 단일 지표를 제공하는 이윤처럼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과 “신자유주의는 기업과 국가의 긴밀한 관계를 전혀 문제라고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의 정치경제적 유산에서 놀라울 정도로 이탈한다”는 설명입니다. 후자의 설명과 관련하여 이 책 1장에서 저자는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구분을 시도하고 있는데요. 사실상 2차대전 당시 자유주의가 국가와 대결하던 배경과 과정이 현재의 신자유주의와는 매우 다르며, 폭넓은 시민 자유가 좌파와 연계되어 있다면, 신자유주의는 기업과 자유 시장 체제에서 광범위한 이익을 얻는 이들의 가치 체계로 진화 내지는 왜곡되어 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이와 관련된 많은 책을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전통적으로 대공황 시기의 루즈벨트 정부의 “무산자와 노동자들의 민주주의가” 많은 자본가와 기업가들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에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이 일반적으로 합리적이라는 인식을 공유하며 이러한 경제적인 관념이 점차 견제 없는 지배 이념이 되어왔던 것이 루즈벨트와 케인즈를 관으로 내몰면서 초래했던 그 과정 전체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가 모두에게 이익이 되지 못함은 자명한 것이고, 전통적으로 공리주의적 배경을 갖고 있는 유럽과 미국의 사회사상적 배경이 신자유주의의 이론으로 배격당하고 심지어는 공리주의적 기준을 철지난 계몽주의로 공격하는 일까지 등장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바로 이러한 입장에서 저자는 신자유주의와 자유 시장 문제를 근본적인 측면에서 되짚어 보고 있습니다. 즉 2장부터 4장까지가 이러한 분석을 시도하고 있는 부분인데요. 시장의 특징과 많은 경제학자들이 입을 닫고 있는 시장의 실패에 대해, 그리고 이런 자유 시장 체제에 대한 결과론이 모든 시장 참여자들의 이익이 아니라 ‘거대 기업의 이익’으로 나타났다는 것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경제 권력과 정치 권력의 융합에 대한 시도와 가능성을 매우 비판하고 있고, “시장에서 거대 기업은 자신들만 혜택을 누리게 만들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인식과 더불어 시장의 진입 장벽을 따로 논하지 않더라도 여기에 집중하는 참여자들이 매번 합리적일 수 없다는 것을 밝힙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기조와 입장을 같이하고 뒤이어 이어진 미국 행정부의 경제적 정책의 이론적 기반이 된 밀턴 프리드먼을 비롯한 시카고대 경제학파의 주장과 사상에도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독점이 지배하는 정치화한 경제의 정치적 함의를 전혀 다루지 못한다”는 점으로 요약할 수 있겠는데요. 밀턴 프리드먼의 다음과 같은 말도 그 한계가 명백합니다. “기업에게는 주주 가치 극대화 이외는 어떠한 의무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광범위한 사회적 목표를 결정할 권리도 전혀 없다”는 고백과도 같습니다.

애초에 신자유주의적 기조가 실행되기 전에 정치학자 로버트 달은 이러한 신사조가 등장하고 기업이 점차 힘을 갖게 될 때 ‘정치적 다원주의’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여겼으나, 전반적으로 이 시기의 중도 좌파 및 진보 세력의 궤멸이 정치적 다원주의라는 이상을 유감스럽게도 뒷받침하지 못하고 2008년 뉴욕발 세계 금융 위기 이후에도 이 신자유주의적 기조는 더욱 강화되어 왔습니다. 글 초입에 신자유주의가 쇠퇴하기는 커녕 더 강화되는 것으로 결론이 난 연유에는 “고삐풀린 경쟁이 금융 시장 자체를 깎아 먹는 상황임에도” 대마불사적 입장의 ‘이익은 자신들에게, 손해는 사회에게 맡기는’ 비도덕적이고 무책임한 사회와 시민을 담보로 잡는 무참한 사익추구와 금융인들의 광범위한 도덕적 해이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시장이 어떠헌 규제나 견제 장치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으나, 국가와 사회를 담보로 잡는 이 이익화에 대한 어떠한 규제적 장치가 없다는 것은 민주주의 뿐만 아니라 건전한 경제 체계에도 일절 도움이 안되는 이기심이겠죠. 마찬가지로 제가 몇번이나 언급했듯이, 2008년 이후에 정권을 잡은 오바마 행정부가 금융 위기에 책임이 있는 자들을 단 한 명도 기소하지 않은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유 시장과 정치적 다원주의를 바탕으로 기존의 ‘국가-시장-기업’ 의 3자 관계에서 새롭게 ‘시민사회’를 결합시켜 4자 관계로 확대시켜야 하며 이와 관련해 7장에서 이를 다루고 있습니다. 일찍이 ‘급진적 민주주의’ 뿐만 아니라 많은 정치학자들이 시민들의 역할과 다양한 토론과 논쟁이 수반된 좀 더 강화된 시민사회의 부활을 강조하고 있는데요. 집단 지성과 관련해서도, 또한 광범위한 정치 참여가 용이해진 오늘날의 SNS과 같은 소셜미디어의 발달을 보더라도 이러한 명제가 쉽게 도달할 것으로 보여지기도 합니다만 점차 자본주의적 소비 지상주의에 노출되고 만연된 정치적 불신에 직면한 시민들이 과연 옳은 과정으로 목표점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쉽게 단언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이를 달가워하지 않는 사회경제적 기득권들과 명목상은 이를 지지하는 척 하는 우파 정치인들에 의해 ‘시민-민주주의’의 중요한 도식이 계속 옅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책을 통해서도 간혹 엿볼 수 있지만 앞으로도 신자유주의가 중요한 지배 이데올로기로 유지될 가능성이 높고 이를 견제할 건전한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거대한 경제 불평등의 시기에 시민이 자신들이 손수 맡아서 해야 될 정치적 책임을 과연 마땅히 해낼 수 있을지 실로 많은 걱정이 앞섭니다. 그런 의미에서 크라우치의 이 책은 다시금 이러한 상황을 상기시키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지 새삼 곰곰히 생각해보게 하는 유익한 관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밝히지만 어서 빨리 재출간이 이뤄지길 간절히 빌어 봅니다.

“신자유주의는 민주주의가 일종의 희생양으로서 시장에 결합된다 혹은 결합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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