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가 되는 삶들 - 모더니티와 그 추방자들 What's Up 4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 / 새물결 / 200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계 지성사에서도 흔하지 않은 폴란드의 유대인으로 또한 역사의 흐름과 맞지 않게도 1970년대 폴란드에서 불어닥친 반유대주의로 인해 영국에 망명해 그곳에서 평생을 보낸 지그문트 바우만은 자신의 학문적 연구를 관통하는 모더니티, 소비주의, 액체 근대와 통찰력 있는 사고의 균일한 확장으로 전세계인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 전세기나 혹은 금세기를 포함해서도 바우만과 같은 우리의 사상적 지표는 사회학 뿐만 아니라 철학을 포함한 다른 분야에서도 감히 찾아보기 힘들텐데요. 그가 2017년에 타계했다고 들었을 때 앞으로도 충분히 많은 저서 활동과 연구로 우리의 탐욕과 방종에 비판을 가해줄 수 있는 사람이어서 더욱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같은 일개 독서인이 그러한 평가를 내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유작이 되어버린 ‘레트로토피아’의 결말이 아직도 간간히 떠오르고 있는 이즈음에서도 앞선 아쉬움은 저에게는 여전한 모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소개할 이 책의 원제는 ‘Wasted Lives : Moderniry and its Outcasts’ 이며, 지난 2004년에 출간되었습니다. 국내에는 2008년 번역 출판 되었고, 특히 이 책은 해당 출판사인 새물결에서 내고 있는 What’s Up 시리즈의 4번째 기획물인데요. 필히 입수해서 읽어봐야 되는 책들 가운데 절반정도가 이미 절판인 상태입니다. 출판 시장에 있어서 인문학 분야의 나날이 더해지는 협소함 때문인지 아니면 번역이나 여타 문제로 새로운 판을 내기 위한 준비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절판된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도 구해봐야 하는데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 책의 제목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우리의 삶을 ‘쓰레기’로 내몰거나 심지어 ‘쓰레기 인간’을 만들어 버리는 왜곡된 근대주의의 허상들과 오로지 경제적 합리성에만 집중하고 심지어 그것을 지배 올로기로 만들어버리는 신자유주의와 비판 받지 않는 시장 경제에 대한 사회철학적인 진지한 논의를 벌이고 있는 것이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직면할 논제들입니다. 바우만의 글쓰기가 그렇듯이 이 글도 내내 논점이 일관적이고 인용하고 있는 많은 학자들의 논리적 적절성과 과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물러서지도 않는 태도 또한 크게 설득력을 갖고 있습니다. 우선 바우만은 서두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위기론이나 탈주론만으로는 이러한 인간의 위기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취지의 주장으로 시작합니다. 총 4장의 주제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관통하는 요점들은 대부분 앞에서 제가 밝힌 것과 동일합니다. 사실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신자유주의의 큰 흐름은 일종의 ‘지구화 과정’일텐데요. 이 지구화 과정은 특히 자유 시장 경제의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경제적 경계를 없애는 데 기여한 논리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더 큰 이익을 얻는 부류는 말씀을 안드려도 아실테고요. 애초에 루소의 공화주의가 태동한 시기와 성숙된 계몽주의를 통해 시민들은 어떠한 정치적 억압이나 불평등한 상태가 아닌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인식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러나 발전된 경제학이 정부의 역할 논리를 규정하기 시작하면서 정치학과 경제학의 경계가 더불어 모호해지기도 했습니다만 본디 정치학의 목적은 여기의 지그문트 바우만이 확정지어 밝히는 것 처럼 ‘인간의 만연된 불확실성’을 제어하는 데 있었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바우만이 책에서 언급하는 이 인간의 불확실성에 대해 깊은 숙고를 해보게 되었습니다. 4장인 쓰레기 문화에서 채 1세기도 누리지 못하는 인간의 필멸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러한 상황에 놓여 있음에도 인간에게 영속과 지속성을 부여해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하며 그것은 끊임없는 과거를 통한 성찰, 즉 오늘날 근대성이 이것을 상실한 일방통행에 대해 꼬집어 주장합니다.

우리는 이 경제적 신자유주의 시대에 프레카리아트를 비롯한 바우만이 지칭하는 인간 쓰레기를 각별히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쓰레기가 된 인간들, 잉여와 여분의 인간들 즉 공인 받거나 머물도록 허락받지 못했거나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지 않는 인간 집단”이라고 풀어내며, 이것을 나중에는 ‘포함/배제’의 게임으로 확장시킵니다. 여기에서 이 쓰레기 개념을 독특하게 차용하면서도 과연 우리가 자발적으로 쓰레기가 된 것인가? 아니면 시스템에 의해 쓰레기화가 된 것인가? 에 대해 누구나 짐작할 만한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장 자본주의의 일상의 ‘만연된 소비주의’를 비판할 때도 나옵니다만 결국 이 ‘인간 쓰레기화’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에 의한 상품의 생산과 소비 또한 권력과 비권력의 구분으로 선진국이 에너지를 수입해 후진국에게 공해와 쓰레기를 수출하고 있다는 근본적인 시장 자본주의의 비도덕성을 매우 비판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눈감아 버리는 악의 과정’을 인간 본연의 합리적인 경제인상 및 경제적 합리성을 옹호하면서 이를 통해 인류 모두가 발전해 왔다는 논거를 들이댈 수 있겠습니다만, 과연 이것이 공리주의적 입장인지, 아니면 자본의 배타적 축적을 옹호하는 것인지는 아주 면밀히 살펴봐야 될 문제입니다. 그 주체는 바로 시민이 되어야겠죠.

무엇보다 이 인간 쓰레기와 관련하여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바우만이 특히 강조하는 “단지 경제 발전의 부산물일 뿐인 인간 쓰레기의 생산은 비인격적이고, 순전히 기술적인 문제가 가진 모든 특징을 보여준다”며 인간이 본디 합리적인 속성을 대체로 지니고 있기 보다는 인간 뿐만 아니라 사회 역시 짐작할 수 없는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오로지 ‘물질적 권능’으로만 이를 누를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부분의 전제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인간의 취약성과 불확실성은 모든 정치 권력의 주된 존재 이유”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이러한 인간의 불확실성이 시장의 힘에 노출되었을 때 어떻게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지에 대해 이미 많은 학자와 사상가들이 경고한 바가 있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삶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을 비판한 한나 아렌트나 자꾸만 예외 상태를 만들려고 하는 이익을 가진자들을 비판한 조르조 아감벤 등이나 “자유 경쟁과 평등한 거래의 화려한 막 뒤에는 위계적 인간이 여전히 머무르고 있다”는 이를 넘어서는 바우만의 경고는 앞으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경제적 엘리트와 정치 엘리트, 사법 엘리트들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과두제’의 상황과 엇비슷합니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 목적으로 노동 시장에 수입해 이제는 사회의 목적 변질로 쓰레기가 되어버린 수많은 이민자들의 문제도 이와 같을 겁니다. 근본적인 이민자들의 이 이율배반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이런 상황 자체를 자국의 안보 위협 상황으로 몰아가는 수많은 선진국들의 행태는 우리가 과연 어떠한 삶의 환경에 놓여 있는지 목도할 수 있습니다. 일전에 바우만은 레트로토피아에서 ‘타인의 고통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자들’이 범람하고 있는 세계라고 일침을 가한적이 있습니다. 이 음울한 우리의 액체 근대가 시민을 고통에 담가버리는 세계의 결말은 과연 어떻게 될지는 이 책의 결말에서도 뚜렷한 희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근대가 벌인 ‘잉여, 유기, 거부, 배제, 소모’와 같은 책임 회피를 뒤로하고 과거의 삶을 통해 성찰하고, 시민들 모두가 서로의 네트워크화를 통해 타인의 삶 또한 지켜보고 관심을 갖는 진정한 의미로서의 지구화와 세계화가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점은 바우만도 익히 동의하리라 여겨지고요. 대다수의 시민이 동의하지 않는 주입된 삶의 태도나 경제적 합리성만을 유일로 삼아 소수자들의 견제 받지 않는 이익을 옹호하는데나 쓰여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개인의 자유일리는 만무하고, 그나마 우리가 모두 누릴 수 있는 이익을 위해 좀 더 우리 스스로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될 사활적인 이유일 것입니다.

끝으로 제가 이 책을 일독하고 느낀 것은 현재 바우만의 유고작으로 알려진 ‘레트로토피아’의 꽤 훌륭한 보론으로 보인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책이 절판된 상태라 독자들은 아무래도 출판사의 재출간을 기대해봐야 할 시점인 것 같습니다. 이 책 역시 살면서 꽤 오래도록 제 기억에 남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 번 다시 일독을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