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으로 인해 다양한 가능성이 묵살되고 변화에 대한 저항이 커지게 된다. 습관은 일정한 시기의 문화적 생태를 떠받치는 두꺼운 지층으로 굳어지기도 한다. 위대한 창조는 그 묵직한 습관의 지층에 습곡과 변동을 일으키는 용암의 분출과 같다. 문제는 그런 분출이 일어나는 조건과 논리적 형식을 추론하는 데 있다.”(김상환 교수 [이야기의 끈] 244 페이지)

 

“...하나의 산맥이 융기한 뒤에도 지각판은 끊임없는 활동 속에서 다른 산맥들을 만들어낸다. 산맥과도 같은 책들의 수직적 구조는 조각들을 연결하는 중심의 힘이 강력해 우리에게 커다란 세계를 열어준다. 지각의 중심적 힘이 모든 파편에 깃들어 있듯, 이런 책들은 일부만 읽어도 전체를 읽는 것과 같은 경험을 선사한다.”(이은혜 글항아리 대표 2026년 7월 22일 중앙일보)

 

상당한 수준의 지질학적 지식을 문학 또는 이야기에 응용한 수준 높은 글이다. SF를 공상과학 소설이라고 말하는 한 문예평론가와 비교하면 한 눈에 수준을 알 수 있다. 픽션을 허구라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과학이란 말과 함께 쓰면 공상이라 말하는지 궁금하다. 지층이란 말은 지각변동, 화석화, 빙하기, 진앙지, 샌드위치 구조 등과 함께 지질학에서 유래해 다른 분야에 쓰이는 개념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 신기후체제의 정치
브뤼노 라투르 지음, 박범순 옮김 / 이음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랑스의 사회학자, 인류학자, 철학자, 과학기술학 연구자인 브뤼노 라투르의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법]의 핵심 메시지는 기후 위기 시대에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무한 성장을 추구하는 세계화(Global)나 폐쇄적인 국민국가(Local)라는 기존의 정치적 지향을 버리고, 인간과 비인간이 공존하는 현실의 토대인 대지(Terrestrial)에 안착하는 새로운 정치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개념은 인류의 집단 행동과 정치적 지향을 이끄는 중력 중심을 의미하는 유인자(Attractor)란 개념이다.

 

저자에 의하면 기존의 첫 번째 유인자는 로컬이고, 두 번째 유인자는 글로벌이고, 세 번째 유인자는 엘리트들의 도피처격인 아웃 오브 디스 월드다.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이자 네 번째 유인자는 인류가 생존해야 할 실질적 토대인 대지다. 유인자라 번역한 끌개는 물리학에서 유래한 개념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물리 시스템이 초기 상태와 상관없이 결국 수렴하고 머무르게 되는 상태 공간(State Space)상의 영역이나 궤적을 의미한다.

 

저자는 지구과학의 임계 영역(critical zone)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대기권, 생물권, 토양권, 수권, 암석권이 서로 결합하여 인류를 포함한 육상 생명체의 생존을 지탱하는 지구 표면의 동적인 경계층이다. 식물의 캐노피(나뭇가지가 무성한 최상부)부터 암석이 풍화되기 시작하는 지하수의 하한선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공간이다. 저자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경험하는 지구는 사실상 놀랍게도 얇은 생물 막(biofilm)이라고 말한다.

 

이는 우리 머리 위, 그리고 발 아래로 불과 몇 킬로미터의 두께에 지나지 않고 그 안에서만 관측할 수 있는 막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는 무한한 우주를 마음대로 휘젓고 다닐 수 있다고 생각했다. 착륙지를 바꾼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곳에 위치함을 의미한다. 바로 이런 연유에서 책의 원제목인 [어디에 착륙할 것인가?]는 적절하다고 본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점잖은 사람들의 모임에서 가이아라는 말을 꺼내기가 꺼림칙하다는 것을 잘 안다고 말하며 논점은 그 배후에 신의 존재를 불가피하게 의미하는 심리적 에덴 동산 관념을 거부하고 그러한 이상적이고 심리적인 조건은 오랜 세월 생명체 자체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저자는 지구가 일종의 자율 조절 총체(ensemble)라고 말하며 만일 자율 조절이 없다면, 근대 산업에 의해 자율 조절이 흐트러지지 않았다면 왜 온도에 신경 쓰겠는가?라고 말한다. 저자는 생존의 위협을 다루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협력이 얼마나 특별해야 하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며 우리는 이 팬데믹 시기에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덧붙인다.

 

저자는 공통의 지향점을 잃어버린 상황에 저항하기 이후에 우리는 땅으로 내려와야 한다고 말한다. 어딘가에는 착륙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정동(情動)에 대해 말한다. 정동이란 물리적 접촉이나 특정한 사건을 통해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기억, 경험, 이해를 통해 어떤 일의 동인이 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효과와는 구분이 되는 개념이다.

 

이는 정동의 효과이다. 실제 정동은 1. 신체적 능력의 변화: 어떤 자극을 받아 내 신체의 활동 능력(에너지, 잠재력)이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역동적인 상태나 힘을 뜻함. 2. 의식 이전의 에너지: 언어로 정의되거나(예: "나는 지금 슬프다") 의식적으로 인지되기 전에, 몸으로 먼저 느끼는 미시적인 에너지의 흐름 등이다.

 

우리 각각은 다음과 같은 문제에 직면한다. 계속 탈주의 꿈을 꿀 것인가 아니면 우리와 우리의 아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 영역을 찾아 나서야 하는가. 저자는 글로벌화 플러스와 글로벌화 마이너스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글로벌화 마이너스의 지지자들은 구식이고 퇴행적인 모습을 보이며 자신의 작은 땅덩이만을 염려하고 자기 집에 틀어박힌 모든 위험에서 자신만을 보호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오랫동안 비난해 왔다.

 

글로벌화 플러스는 글로벌 파트너십을 심화하여 경제적 효율성과 혁신을 극대화하려는 움직임이다. 과거의 무조건적인 세계화와 달리 '신뢰할 수 있는 동맹국'을 중심으로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 특징이다. 글로벌화 마이너스는 국가 안보, 자국 산업 보호, 리스크 분산을 위해 세계화의 범위를 의도적으로 축소하거나 통제하는 움직임이다.

 

저자는 마르크스의 격언과는 반대로 역사는 단순히 비극에서 희극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비극적인 희극 속에서 한 번 더 반복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문명이라는 것은 지난 만년이 넘는 시간 동안 쌓인 습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지질학에서 볼 때 비교적 큰 변화가 없었던 지리적 공간과 시기에 출현했다. 이런 지질 시대로 명명된 홀로세는 인간 행위를 어렵지 않게 구별할 수 있게 해주는 틀의 특성을 모두 갖추고 있다.

 

이제 인간은 유일한 배우가 아닌데도 스스로는 아직도 과분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배정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69, 70 페이지) 저자는 기후 변화 부정론자들에게도 기후에 대한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들이 전력을 다해 거부하는 것이 바로 그것 아닌가라고 저자는 자신의 말에 대해 설명한다.

 

저자는 녹색당들에 대해서 한마디 한다. 그들은 어떻게 끼어들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자연에 대한 문제를 내세우면 기존 정당들은 인간의 권리를 내세우면서 반대하고 녹색당들이 사회적 문제를 제기하면 기존 정당들은 또다시 이게 당신들이 신경 쓸 문제인가?라고 묻는다. 저자는 불법적인 것은 근거지를 없애 버리는 행위이지 어디에 소속되려는 노력이 아니라고 강조한다.(80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어딘가에 착륙하기 위한 협상보다 더 혁신적인 것, 더 실전적이고 미묘하며 기술적이고 인공적인 것은 없다. 그것은 가장 투박하고 촌스러운 동시에 가장 창조적이고 현대적이다. 저자는 대지를 월딩(worlding)의 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월딩은 자연과 문화, 인간과 비인간의 이분법을 넘어 존재하는 것들의 다원성과 그들이 살아가는 다양한 방식에 세상을 개방하는 동적 과정을 말한다.

 

저자는 생태학은 정당 이름이 아니고 걱정거리도 아닌 바 그것은 대지를 향해 방향을 바꾸라는 외침이라고 말한다.(88 페이지) 저자는 우리는 과학의 온전한 힘을, 그 힘에 붙어 있던 자연의 이데올로기는 털어버리고,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유물론자이면서 합리적이어야 하고 이러한 자질들을 올바르게 써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어느 정도 사실적으로 대지의 상황을 그리기 위해서 또한 객관적이고 이성적이며 효과적인 묘사를 시작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정말이지 과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전과는 관점을 달리하는 과학 말이다.(107 페이지) 저자는 대지는 아직 제도화된 존재가 아니지만 근대인들이 자연에 부여한 정치적 기능과는 확연히 다른 역할을 하는 행위자라고 말한다.

 

저자가 보는 대지는 시간이 자극에 그대로 순응하지 않는다. 기후 변화, 팬데믹, 생태계 붕괴처럼 인간이 행동에 적극적으로 반격을 가하는 역동적인 주체다. 저자는 갈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홀로세에 있으면서 단독으로 글로벌로의 비행이나 로컬로의 탈출을 꾀하는 근대의 인간들과, 인류세에 있음을 지각하고 아직 정치적 기관의 형태는 갖추지 못한 권위 아래에서 다른 대지의 것들과 함께 거주하기를 추구하는 대지의 것들 사이의 갈등이다.

 

저자는 모든 주름과 이음매가 있는 유럽을, 그들의 피난처인 유럽을 나의 고향땅이라고 부를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지진 때문에 지난 해 5월에 읽은 롤프 마이스너의 [지구에 관한 작은 책]을 다시 펴보았다. 두 번역자 중 한 사람인 이기화 교수는 최덕근 교수가 번역이 저술보다 더 어렵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저술은, 아는 것만 쓰면 되는데 번역은 자기가 모르는 것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책을 처음에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알게 되어 대단한 행운이라 생각한다. 


저자를 통해 재미 있는 개념을 알았기 때문이다. 처음 읽었을 때 접했지만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다가 어제 그 위상과 중요성을 깨달았다. 마샤 비요르네루드의 [Geopedia]는 나오지 않고 그의 [Timefulness]에는 나온다고 알려졌다. 롤프 마이스너, 마샤 비요르네루드 모두 구조지질학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삼국시대, 진실과 반전의 역사 - 유물과 유적으로 매 순간 다시 쓰는 다이나믹 한국 고대사 ㅣ 서가명강 시리즈 12
권오영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국사학 박사 권오영은 고대사는 불확실성(문헌 자료 부족)으로 백가쟁명의 장이 되었는 바 사료가 풍부한 근현대사에서는 있을 수 없는 현상으로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더욱 엄격한 논리가 요구된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런 의미에서 역사학은 인문학임과 동시에 과학이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고대사 해석의 1등 사료인 고고학적 자료가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고, 역사학 고유의 방법이라는 도그마에 빠져 눈부시게 발전하는 자연과학, 공학, 통계학, 법의학 등 인접 학문의 방법론을 활용하는 융복합적 연구에 소홀하고, 한반도라는 좁은 공간만을 대상으로 연구와 교육을 전개하는 탓에 한국 고대사회의 특징을 외국의 사례와 비교하여 세계사적 보편성과 한국의 특수성을 설명하는 비교사적 시각이 크게 부족하다는 점에 스스로도 책임을 느끼고 [삼국시대, 진실과 반전의 역사]를 집필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은 실제 참고할 내용이 그렇게 많지 않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땅속에서 발견되는 매장문화재 즉 발굴되는 실물 자료는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고대사 연구자들이 땅에서 나오는 이 빅데이터를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 미래의 한국 고대사 연구의 성패가 달렸다. 현재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이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주제는 단연 고대국가 형성사이다. 그 다음은 삼국시대의 지배구조다. 반면 생활사 연구에 뛰어드는 이는 많지 않다. 박물관에서 시민을 대상으로 개최하는 고대사 관련 강좌를 듣노라면 금세 따분함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대사라 하면 온통 정치사나 제도사 이야기뿐이고 고고학은 토기의 형식 분류와 연대 추적을 소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는 우리에게 백제 개로왕의 죽음에 얽힌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바둑의 고수인 승려 도림을 백제에 보냈고 도림은 개로왕의 환심을 사 그의 측근이 된다. 결국 도림은 개로왕을 꼬드겨서 왕릉과 궁궐을 더 크게 짓는 토목공사를 일으키도록 한다. 개로왕은 한정된 국력을 염두에 두지 않고 대규모 토목공사를 감행했고 그 결과 국고가 텅 비어 백성들은 위기를 맞았다. 장수왕은 이 틈을 타 군대를 파견해 백제 도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인다. 이때 개로왕이 감행한 대규모 토목공사를 [삼국사기]는 증토축성(蒸土築城)이라 표현했다. 의미가 명확하지는 않았기에 수수께끼 같은 의미를 풀겠다며 많은 역사가들이 달려들었다. 증토란 흙을 찌다라는 의미인데 흙을 단단하게 다진 것이라고 보거나 많은 흙을 모았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런데 해답은 중국의 섬서성 유림 지역의 통만성에 있었다. 중국 학자들이 통만성을 발굴조사해 성을 쌓은 자료를 분석해 황토와 석회가 사용되었음을 밝혔다. 황토와 석회에 물을 섞으면 화학반응이 일어나 많은 수증기가 발생하는데 고대인들은 이 현상을 보고 흙을 찌다 즉 증토라 표현한 것이다. 결국 백제도 토목건축공사에 석회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커졌다. 이 사례는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는 연구사가 한국이란 틀 안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황토와 생석회(산화칼슘)를 섞은 뒤 물을 부으면 생석회가 물과 반응해 소석회(수산화칼슘)로 변하는 소화 반응이 일어난다. 이 반응은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내는 격렬한 발열 반응이다. 온도가 순식간에 섭씨 100도~200도 이상으로 치솟기 때문에 물이 끓어오르며 엄청난 수증기(김)가 피어오르게 된다. 조상들은 이 흙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모습을 보고 '흙을 찐다(蒸土)'고 표현한 것이다.

 

소석회(消石灰)의 소(消)는 사라질 소란 의미다. 생석회의 격렬한 반응(열)이 완전히 끝나 안정된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다. 소석회 자체는 생석회보다 전혀 단단하지 않으며 오히려 부드럽고 잘 부서지는 고운 가루 형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처럼 굳는다. 소석회를 진흙(황토)과 섞어 반죽해 두면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천천히 흡수한다. 이 과정에서 소석회가 원래의 단단한 암석이었던 탄산칼슘 상태로 돌아가며(탄산화 반응) 주변의 흙을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결합시킨다. 생석회를 그대로 벽에 바르면 문제가 생긴다. 비나 수분을 만나면 그 안에서 열을 내며 부피가 대폭 늘어나 벽이 다 갈라지고 터지는 것이다. 돌덩어리인 생석회로는 벽을 매끄럽게 바르거나 흙과 골고루 섞을 수 없다. 고운 가루 형태인 소석회여야만 흙, 물과 부드럽게 반죽할 수 있다. 돌덩어리인 생석회로는 벽을 매끄럽게 바르거나 흙과 골고루 섞을 수 없고 고운 가루 형태인 소석회여야만 흙, 물과 부드럽게 반죽할 수 있는 것은 단백질 음식을 먹으면 아미노산으로 분해된 뒤 다시 결합하여 근육을 만드는 단백질로 거듭나는 것을 닮았다.

 

사람의 뼈는 조선시대 후기 무덤에서 가장 많이 발견된다. 그 이유는 이때부터 황토와 석회에 물을 섞어 회격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회격묘는 시간이 지날수록 단단해질 뿐 아니라 내부 밀폐 상태가 잘 유지돼 나무 뿌리나 곤충의 침투를 효과적으로 막아낸다. 내부 환경도 안정된 상태로 유지되기에 목관과 수의도 잘 보존된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무덤 양식인 회격묘(灰隔墓)는 주희가 편찬한 가정 의례 지침서인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상례(喪禮)〉 편에 그 제작 방법이 아주 구체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석실묘의 단점을 보완하는 차원이었다. 주희가 살던 남송(南宋) 시대에는 풍수지리설이 유행하면서 부모의 묘를 화려한 돌방(석실)으로 만드는 사치 풍조가 심했다. 하지만 주희는 석실묘가 시간이 지나면 돌 사이에 틈이 생겨 물이 차고 나무뿌리가 뚫고 들어간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파악했다. 주희는 비싼 돌을 깎는 대신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석회와 흙을 짓이겨 다지면(회격) 비용은 획기적으로 줄이면서도 시간이 흐를수록 돌보다 더 단단해져 부모의 유골을 영구히 보호할 수 있다는 실용적인 비밀을 간파했다. 격(隔)은 관과 흙 사이에 석회 벽을 쳐서 외부 환경(물, 나무뿌리, 벌레)으로부터 관을 완벽하게 차단하고 가로막는다는 의미를 지닌다.

 

저자는 갓난아기 때 두개골에 압박을 가해 머리뼈 모양 자체를 납작하거나 길쭉하게 변형시키던 고대의 독특한 풍습인 편두(褊頭)를 이야기한 데 이어 사람 뼈를 잘못 해석해 역사 자체를 왜곡한 사례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저자는 도굴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도굴의 역사는 아주 유구해서 이집트에서는 피라미드를 만들 때부터 도굴이 심하게 행해졌다고 한다. 무왕의 쌍릉은 고려 때 이미 도굴을 당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수백 년 동안 쌓인 흙을 퍼내야 하는 도굴 과정에서 말끔하게 유물을 쓸어가기는 어렵기에 조심스럽게 흙을 채굴하다 보면 도굴꾼들이 흘리고 간 유물들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 전체적으로 백제는 신라나 가야처럼 엄청난 양의 부장품을 무덤에 두지는 않았다. 백제와 고구려는 무덤을 크게 만들고 순장하는 풍습을 빨리 없앴다. 그 이유는 불교를 빨리 수입한 것과 관련이 된다.

 

시인 고고학자 고(故) 허수경은 “마을이 있는 곳에는 무덤도 있다. 꽃이나 음식이나 술을 들고 무덤을 방문하는 일은 죽은 자와 인연이 있던 산 자들이 아직 살아 있을 때 하는 일이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면 무덤을 방문하는 이는 도굴꾼 아니면 고고학자들이다. 어떤 맥락에서 본다면 무덤을 쫓아다니는 도굴꾼과 고고학자의 내면은 비슷할 것이다.”([모래 도시를 찾아서] 106 페이지)란 말을 했다. 저자는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문화유산의 압도적 다수가 수도 또는 수도와 관련된 유산이라는 데에 주목해보자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익숙하거나 잘 알려진 유적 또는 유산의 대부분은 한 왕조의 수도이거나 왕궁이다. 이처럼 대부분의 수도 유적은 세계문화유산에 걸맞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국가가 자국 내의 역사 수도 유적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장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청동기시대부터는 신석기시대까지 이어져 오던 평등한 사회가 깨지며 잘 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으로 나뉜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가진 집단과 못 가진 집단 간의 대립, 사회적 갈등, 긴장된 분위기 등이 청동기시대를 대변하는 이미지가 된 것이다. 이때부터 등장한 환호취락(還戶聚落)은 지속해서 발전한다. 방어적인 측면을 강조한 취락은 산 위로 올라가고 많은 주민이 사는 취락은 나지막한 구릉 위에 마련된다. 환호는 방어 기능 외에도 마을 안팎을 나누는 역할을 했는데 이 때문에 수도 안에 사는 중앙인과 바깥에 사는 지방인을 구분 짓는 차별의 시발점이 됐다. 이렇게 발전한 취락을 중심 취락 또는 거점 취락이라고 부른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사비 도성,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인 장안성도 경주 월성과 마찬가지로 바둑판 모양의 질서 정연한 토지 구획에 나섰다. 그 결과 이런 수도 유적에서는 굳이 땅을 파지 않고도 항공 촬영만으로 정연한 도시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중국 요령성 환인에는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이 건설한 왕성이라 추정되는 오녀산성이 있다. 국가를 세우며 경사가 90도에 가깝도록 가파른 산 위에 왕성을 세웠다는 것은 당시 항상적으로 전쟁이 일어났음을 ‘간접 증거’(방증; 傍證)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모두 주변 세력 또는 중국과 치열한 전쟁을 치렀다. 그러니 방어 취락이 빠르게 발전했음을 물론이고 이를 발전시켜 산성을 만든 것이다. 왕성 자체가 산성의 형태를 취한 고구려의 오녀산성과 환도산성 외에도 평지에 있는 왕성을 보호하기 위해 주변에 위성처럼 여러 개의 산성을 배치했다. 때로는 새로 정복한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때로는 외적과의 항쟁을 위한 군사적 요충지에도 산성을 쌓았다. 그 결과 삼국시대에 건설된 산성의 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어떤 연구자의 통계에 따르면 남한 지역에만 2000개가 넘는 성이 존재한다.

 

일부 재야사학자나 유튜버들이 북한 평양이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가 아니라 중국 평양이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라고 말한다. 그러나 고고학적 유물과 정식 학계의 검증 결과는 북한 평양이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장안성)이자 중심지였음을 완벽하게 증명하고 있다. 장수왕이 427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했을 때 지은 거대한 평지 왕궁인 안학궁(安鶴宮) 터, 안학궁의 배후에 있는 방어용 석축 산성인 대성산성(大城山城),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 성곽인 펑양성(장안성) 등이 북한 평양에서 발견되었다. 이 밖에 평양 고산동 고분군, 강서대묘, 덕흥리 고분, 수산리 고분 등 평양 일대에서 화려한 고구려의 생활상, 사신도, 천문도가 그려진 벽화 무덤이 무더기로 발굴되었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북성을 빠져나가 남성으로 향하던 개로왕은 고구려 군에 의해 체포된다. 그는 한강을 건너 고구려 군사기지가 있던 아차산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백제는 멸망했다. 당시 치열한 전쟁을 치렀던 현장은 국내외 사설을 통해 북성과 남성, 대성과 왕성 등의 명칭으로 표현되며 당시의 수도는 위례성과 한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들의 관계를 풀기 위한 논쟁은 1000년 이상 지속되었으나 성의 위치를 명확히 하는 데는 실패했다. 양주, 천안, 광주, 하남 등 모두를 소환해 봐도 자료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단편적인 문헌 자료를 토대로 억지로 문헌 고증을 하거나 유적의 발음을 가지고 이리저리 맞춰보는 등 초보적인 연구를 지속했지만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그런데 1925년 을축년 대홍수라 불리는 전대미문의 홍수로 인해 풍납토성 서벽이 무너지면서 중국에서 수입한 것으로 보이는 중요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러나 이 성을 백제의 왕성으로 보는 연구자는 드물었으며 오히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사성이라는 주장에 오랫동안 힘이 실렸다. 1980년대에 서울 몽촌토성과 하남 이성산성을 발굴 조사하면서부터 대부분의 연구자는 하남 위례성이 있던 곳으로 몽촌토성과 이성산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결국 1999년에 진행한 풍납토성 동벽 조사로 인해 위례성 위치 논쟁을 종결할 수 있었다. 김부식, 일연, 정약용 등 무수한 인물들이 찾으려 노력했지만 실패했던 위례성을 찾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풍납토성 발굴조사 덕분이다.

 

혹자는 풍납토성의 규모가 일본의 헤이조쿄보다 작아서 결코 백제 왕성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풍납토성의 축조시기를 3~4세기 무렵이라고 보면 710년에 완성된 헤이초교보다 400년 이상 앞선 것이다. 동아시아 수도제의 발달 과정에서 3~4세기는 왕권과 왕성만 짓던 시기로 주변 지역을 바둑판식으로 나누는 지할(地割)은 유행하지 않았다. 풍납토성이 절대 백제의 왕성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논리는 한강변에 바짝 붙어 있어 수해에 취약하기 때문에 한 국가의 왕성으로는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물론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풍납토성과 그 인근이 수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고지형을 분석해보면 현재 한강의 흐름은 근대 이후 많이 변형되었으며 과거에는 풍납토성이 지금처럼 한강변에 바짝 붙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지형적으로 보면 풍납토성은 단구(段丘) 형태로 된 한강변의 자연 제방 위에 우뚝 솟아 있었기 때문에 삼국시대에는 쉽게 침수되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 지형을 두고 1500년 전의 지형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역사의 연구는 당시 경관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이루어져야 한다.

 

저자는 공부를 할수록 민족의 기원이라는 주제 자체가 해결 불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한다. 사료적 가치를 의심받는 문헌을 토대로 짓는 집이 사상누각이라는 것도 깨달았다고 말한다. 21세기에 접어들어 우리 사회 구성원의 인종적 스펙트럼이 획득되는 모습을 보면서 민족주의 역사학의 역기능에 대해서도 생각도 되었다고 말한다. 한민족의 순수함과 우월함을 부르짖는 한편에선 차별로 소요되는 이웃이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눈부신 과학의 발달은 모든 학문 분야의 변화를 강요하고 있다고 말한다. 역사학도 예외는 아니어서 다양한 주제와 평론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변하는 실태와 담 쌓고 과거의 주제와 방법론이 여전히 주류를 이루는 분야가 한국 고대사라고 말한다. 필자 또한 이러한 현상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고백한다고 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고구려에서 만난 우리 역사
전호태 지음, 전혜전 그림 / 한림출판사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호태의 [고구려에서 만난 우리 역사]의 핵심 주제는 영토 확장 과정에서 다양한 민족을 포용하며 성장한 대표적인 다민족, 다문화 국가였던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사 전반을 통해 오늘날 한국 문화의 원형과 참된 역사의식을 규명하는 것이다. 고구려를 세운 추모왕(주몽)은 본래 동부여(또는 북부여) 왕실에서 자란 인물이다. 주몽은 부여 대소왕자의 시기(猜忌)와 생명의 위협을 피해 지지 세력을 이끌고 압록강 유역으로 남하했다. 주몽 무리는 태백산(太白山; 백두산) 꼭대기에서 비롯되어 북쪽 너른 벌판으로 흐르는 큰 강 하나를 간신히 건너고 나서야 부여 대소 왕자의 군사들을 따돌릴 수 있었다.

 

이 후 졸본 지역의 토착 세력과 결합하여 세운 나라가 고구려다.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 따르면 주몽이 처음 나라를 세웠을 때의 이름은 고구려가 아니라 졸본부여(卒本扶餘)였다. 고구려 사람들은 흙을 다져 쌓는 토성, 흙과 돌을 섞어서 쌓는 토석 혼축성도 만들었지만 돌이 많은 산간지대에 주로 살았던 까닭에 산과 평지가 맞닿는 지점의 돌로 쌓는 석성을 많이 만들었다. 고구려 석성의 벽은 가장 아랫부분에 커다란 네모꼴 바위 돌을 쌓고 그 위에 앞이 약간 넓고 뒤가 좁은 옥수수와 형태의 돌을 바깥에 놓고 베틀의 북처럼 양쪽 끝이 뾰족한 돌을 안쪽에 끼워 넣어 서로 쐐기처럼 맞물리게 하는 방식으로 쌓았다.

 

또 아래는 폭이 넓고 위로 갈수록 좁아지게 조금씩 들여 쌓는 퇴물림 쌓기를 적용하여 높이 쌓아도 견고하여 외부의 큰 충격에도 견딜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성벽 구간에 큰 바위가 나타나면 그 형태에 맞게 돌을 다듬어 붙여 쌓는 방식인 그랭이 방식으로 자연 암반이 단단한 성벽의 일부가 되게 했다. 두 방식은 인위적인 시멘트나 접착제 없는 시대에 두 돌이 이빨 맞추듯 완벽하게 밀착되어 지진이나 충격이 가해졌을 때 성돌들이 따로 놀지 않고 비정형의 돌기들이 서로를 꽉 붙잡아주기 때문에 흔들릴지언정 절대 무너지지 않는 엄청난 견고함을 자랑했다. 정리하면 그랭이 방식을 통해 땅바닥(암반)과 성벽의 첫 단을 일체형으로 단단히 고정했고, 그 위로 퇴물림 쌓기를 통해 성벽이 밖으로 쏟아지지 않도록 구조적 안정감을 완성시켰다. 그랭이는 우리 전통 건축에서 울퉁불퉁한 바탕면의 모양을 그대로 본떠 그릴 때 사용하는 집게 모양의 도구(연장)를 뜻하는 순우리말 이름이다.

 

고구려는 성벽 구간별로 책임자를 정하고 그 사실을 성돌에 새겨놓아 부실 공사로 성벽이 무너지는 일이 없도록 예방하기도 했다. 성벽을 쌓으면서 일정 구간마다 성벽에 접근한 적을 옆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직각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치(雉)도 설치하였다. 저자는 고구려를 단순한 정복 국가가 아닌 다채로운 삶이 공존했던 문화 강국으로 조명한다. 고구려를 건국하고 지배층을 형성한 핵심 세력은 예맥(濊貊)족이다. 기원전 10세기 이전부터 만주 남부와 한반도 북부를 무대로 삼아 살았던 사람들로 예로 불리던 사람들이 고조선을 세웠고 맥으로 불리던 이들이 부여를 건국했다. 구려라고 불리다가 고구려라 불리게 되었다. 구려는 성(城)을 의미한다.

 

고구려는 만주와 북방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서 말갈족, 거란족, 선비족, 숙신족 등 다양한 북방 종족들을 연합하거나 속민으로 받아들였다. 고구려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흡수하고 중국의 혼란기(5호 16국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중국계 유이민과 망명객을 정착시켰다. 5호는 다섯 유목 민족인 흉노, 선비, 갈, 저, 강 등을 의미하고, 16국은 화북(華北; 중국의 북부) 지방에 세워진 유목 민족의 국가 11개와 한족 국가 5개를 합친 것을 뜻한다. 고구려의 북부 초원/산림 지대는 유목과 수렵 중심이었고, 서부 및 한반도 중북부 평야는 농경 중심이었고, 동해안 및 해안 지대는 어업 중심이었다.

 

중국의 5호 16국 시대인 4세기~5세기는 중국 역사상 기후가 가장 악화되었던 대표적인 극심한 한랭기(제2차 한랭기)였다. 당시 기온은 앞선 시대에 비해 지구 기온이 1~2도 낮았다. 이 시기는 여름(5~8월)에 눈이 내리거나 서리가 빈번하게 내렸고, 겨울에는 폭설과 함께 바다나 큰 강이 얼어붙는 이상(異常) 한파(寒波)가 수십 차례 반복되었다. 한랭화와 함께 찾아온 건조 기후로 인해 대가뭄이 장기간 지속되었다. 가뭄 끝에 찾아오는 메뚜기 떼(황충)의 습격으로 화북 지방의 농작물은 초토화되었다. 몽골 고원과 만주 일대의 기온이 급락하자 초원이 황폐해져 가축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몽골의 경우 한파와 건조한 기후가 만난 것을 조드라고 한다. 생존의 기로에 선 흉노, 선비, 갈, 저, 강 등 5개 유목 민족(5호)이 따뜻하고 먹을 것이 있는 남쪽(중원 화북 지방)으로 대거 이동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중원의 한족(진나라) 역시 냉해와 가뭄으로 농사를 완전히 망쳤다. 국력이 극도로 약해진 상태에서 식량을 찾아 내려오는 유목민의 군사적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고구려 장수왕의 평양 천도(遷都)는 중국의 5호 16국 시대가 끝나기 직전인 427년에 일어난 사건이다. 고구려 연구가 김용만 소장은 고구려가 국내성(중국 길림성 집안 지역에 자리한, 압록강 기슭의 좁고 긴 평야지대)을 떠나 평양으로 천도한 배경 중 하나로 국내성에 지나치게 많아진 공동묘지와 주거 환경 악화를 꼽았다. 400년 동안 인구가 누적되면서 국내성 주변 공간은 수만 기의 무덤으로 가득 차 도시 전체가 거대한 공동묘지처럼 변해버렸다.

 

전호태 교수의 본문([고구려에서 만난 우리 역사])은 이렇게 말한다. “수백 년에 걸쳐 고구려의 서울로 기능 하는 동안 왕실과 귀족 가문에서는 하나같이 국내성 일원에서 장지(葬地)를 구했다. 이런 까닭에 5세기경에는 죽은 사람의 누울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산 사람의 집터마저 밀어낼 지경이 되었다. 죽은 사람의 무덤을 지키는 무덤 지기들의 집 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왕릉에는 수백 호, 대귀족의 무덤에는 때로는 수십 호에 이르는 무덤 지기가 붙는 것이 고구려의 관례였다 .평양 천도가 추진될 무렵에는 국내성의 수도로서의 기능 역시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105 페이지)

 

지리학자 박정재 교수는 고구려의 평양 천도는 혹독한 추위를 피해 남하한 것이라 말한다. 둘 다 작용했을 것이다. 박정재 교수의 [한국인의 기원]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장수왕은 수많은 조상의 무덤이 있는 국내성을 떠나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는 파격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원 수도인 국내성에서 새로운 수도인 평양까지의 직선거리는 약 240km에 달한다. 서울에서 광주까지의 거리에 살짝 못 미치는 수준이다....그런데 당시 정점에 이른 추위를 고려하면 장수왕이 고구려의 지리적 중심인 국내성을 떠나 외곽의 평양으로 천도한 원인 중 하나로 기후변화를 제외하기란 쉽지 않다. 고구려인이 추위를 극복할 수 없어서 이주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장수왕이 고구려의 앞날을 그렸을 때 수도의 물리적 위치보다는 수도의 발전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제반 여건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점차 인구가 늘면서 작물 농경의 비중은 늘어만 가는데 기온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면 온난화 평양이 미래의 고구려 수도로서 더 나은 선택이라고 봤을 가능성이 높다. 결행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했을 것이다.”(378, 379 페이지)

 

[고구려에서 만난 우리 역사]에도 이 부분이 언급되어 있다. 427년 장수왕은 제국 고구려의 심장부 역할을 하기에는 지나치게 좁고 교통상의 이점도 그리 크지 않은 국내성에서 주변 개발 가능성이 크면서도 방어선 확보가 용이한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400여 년 동안 수도로 기능하면서 고구려가 왕국에서 제국으로 성장하기까지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던 국내성은 고구려 귀족 가문들이 뿌리내린 도시이기도 하다. 당연히 건국 이래 국가가 겪은 고난과 영광의 주인공임을 자부하던 전통 귀족 가문들은 평양으로 수도를 이전하는 것에 반대하였다.(93 페이지)

 

광개토대왕, 장수왕 등과 인연을 맺은 곳이 경기도 연천(漣川)이다. 광개토왕은 재위 기간(391~412년) 적극적인 남진 정책을 펼치며 백제를 압박했다. 396년 광개토왕은 몸소 수군과 육군을 이끌고 백제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한강 이북 지역을 장악했습니다. 이 정벌 과정에서 연천을 흐르는 임진강 일대가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임진강은 당시 고구려의 최전방 방어선이자 한성백제를 타격하기 위한 거점이 되었다. 광개토왕의 아들 장수왕(재위 413~491년)은 아버지의 기반을 바탕으로 평양으로 천도(427년)하고 본격적인 한반도 경영에 나섰다.

 

475년 장수왕은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처단하며 한강 유역을 완벽하게 차지했다. 장수왕이 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넓히면서 후방이 된 연천 일대(임진강 북안)에는 고구려 군대의 전초기지와 요새(보루)들이 대거 축조되기 시작했다. 고구려는 이곳에 군대를 주둔시켜 남쪽의 백제와 신라를 감시하고 보급로를 확보했다. 연천은 남한에서 유일하게 200여년 동안 고구려의 영토에 속했던 지역이다. 한강 유역(서울·춘천·충주 등)은 475년 장수왕 때 점령되었다가 551년 나·제 연합군에게 빼앗겨 고구려의 지배 기간이 약 70~80년에 불과했다. 반면 연천을 비롯한 임진강 북안 지역은 396년부터 668년 멸망 때까지 약 270여 년 동안 고구려의 영토로 지속되었다.

 

장수왕은 427년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48년 동안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다가 475년 한성 백제를 공격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내부 정비, 외교적 세력 균형 유지, 백제의 철저한 방어선 때문이었다. 470년대에 이르러 장수왕은 북위와의 외교 관계를 확고히 다져 북방의 위협을 완벽히 제거했다. 그 이전까지 “고구려는 강력한 북위(北魏)가 있는 중원(中原) 진출도 어려웠다.”(유성운 지음 ‘한국사는 없다’ 103 페이지) 470년대에 이르러 장수왕이 북위와의 외교 관계를 확고히 다져 북방의 위협을 완벽히 제거했다는 말은 장수왕이 겉으로는 북위에 막대한 선물을 주며 비위를 맞추었지만 속으로는 남조(南朝) 및 유연과의 동맹 카드를 쥐고 북위를 철저히 외교적으로 통제한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장수왕 시대에 고구려의 영토는 남으로 한반도의 아산만에서 영덕을 잇는 선까지 내려갔다. 한반도의 대부분이 고구려의 영토가 되고 중남부 일부 지방만 신라, 백제, 가야 연맹의 땅으로 남은 형국이었다. 백제의 패퇴 이후 요하 유역을 포함하여 그 동쪽에 펼쳐진 만주, 한반도, 일본열도 지역에서 고구려의 패권적 지위를 넘볼 수 있는 세력이나 나라는 아무도 없게 되었다.(99 페이지)

 

심광주 교수에 의하면 475년 한성(漢城) 함락 당시 고구려로 끌려간 백제 포로 8,000명 중 백제 도성 내부의 고난도 석회·토목 기술을 가진 전문 장인(기술자)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이 기술자들이 평양으로 압송되는 과정 또는 임진강·한탄강 유역의 고구려 최전방 요충지(연천)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고구려 지배층(사령관급)의 무덤인 신답리 고분을 축조하는 데 투입되었다. 그 결과 고구려식 무덤(모줄임 천장 구조)의 형태를 띠고 있으면서도 내부 접착제로는 백제의 선진 석회 기술이 접목된 고구려와 백제의 기술 융합형 무덤이 연천 신답리에 탄생하게 된 것이다.

 

모줄임 천장 구조(말각조정, 抹角藻井)는 네모난 방의 네 모퉁이를 비스듬히 줄여가며 천장을 위로 좁혀 쌓는 고구려 무덤의 대표적인 천장 축조 양식이다. 방의 크기보다 천장 면적을 줄이면서 위로 높여 마치 돔(Dome)이나 피라미드 내부 같은 입체적인 공간감을 만들어내는 고도의 건축 기술이다.(抹; 지울 말, 角; 각도 각, 藻; 꾸밈 조, 井; 우물 정) 연천 신답리 고분의 회(灰)는 조개를 태워 만든 패회(貝灰)다. 백제는 풍부한 석회암 지대를 배경으로 조개껍질이 아닌 자연 석회암(광석)을 고온으로 가마에서 구워 만든 생석회 공법을 고도로 발전시켰다. 백제의 풍부한 석회암 지대란 사비(부여) 시기 백제의 중심지였던 충청도(금강 유역) 일대를 의미한다.

 

고구려 임진강 유역은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 임진강 상·중류(북한 지역)는 지질학적으로 고생대 조선누층군의 '하부 대석회암통'에 속하는 울창한 석회암 지대다. 반면 남한의 연천·포천·철원 일대는 약 50만 년 전 화산 폭발로 형성된 현무암(변성암, 화강암, 응회암 중심) 지대가 주를 이룬다. 만일 고구려가 본국(평양이나 임진강 북한 지역)에서 쓰던 전통 방식으로 무덤을 만들고자 했다면 임진강 상류에서 석회암을 가져와 구워 쓰거나 평양의 전통 방식을 그대로 썼을 것이다. 하지만 연천 신답리 고분은 연천 주변 강가나 서해안에서 구하기 쉬운 조개껍데기(패회)를 기본 원료로 썼다. 즉 먼 북방에서 석회암을 공수해 오지 않고 연천 현지에서 조달할 수 있는 원료를 택한 것이다.

 

정리하면 고구려가 남진하여 차지한 최전방 방어선인 연천 현지에서 무덤을 축조할 때는 북방의 석회암을 가져오지 않고 현지의 조개껍데기(패회)를 썼다. 이때 한성에서 생포한 백제 기술자들의 배합 노하우가 융합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과학적인 분석 결과다. 지리적 지질 분포와 고고학적 유물이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고생대 조선누층군의 '대석회암통(大石灰岩統)'은 고생대 초기(캄브리아기~오르도비스기에 해당하는 약 5억~4억 5천만 년 전) 한반도가 따뜻한 얕은 바다(해성층)였을 때 산호나 조개껍데기 같은 석회질 생물체와 침전물이 수천 미터 두께로 쌓여 형성된 한반도 최대의 석회암 지층을 뜻하는 지질학적 명칭이다.

 

고생대 초기(5억~4억 5천만 년 전) 한반도의 상당 지역(평남분지, 태백산분지)이 따뜻한 얕은 바다(조선해)여서 거대한 석회암 지층을 형성했던 것과 달리 남한의 연천 지역은 당시 바다가 아닌 거대한 대륙판의 일부(경기육괴)로서 육지 환경이었거나 지질학적 공백(결층)에 해당한다. 연천, 경기, 충청, 전라도 일부가 속한 경기 육괴는 당시 남중국판(Yangtze Craton)의 일부였다. 고생대 초기에 이 지역은 바다로 덮여 석회암을 쌓던 지역이 아니라, 오랜 기간 퇴적이 일어나지 않거나 침식을 받던 육지 환경(지질학적 공백 또는 결층)이었다. 북한, 강원도 삼척·태백 일대가 속한 평남분지와 태백산분지는 당시 북중국판(Sino-Korean Craton)의 일부였다.

 

이 두 지역은 고생대 캄브리아기~오르도비스기(약 5억 년 전)에 따뜻하고 얕은 바다인 조선해(조선누층군) 환경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규모 석회암 지층이 형성되었다. 연천의 미산층(Misan Formation)은 원래부터 현재의 한반도 위치에 있던 지층이 아니다. 당시 적도 부근에 있던 남중국판의 얕은 바다(대륙붕)에서 쌓인 퇴적물이 약 2억 5천만 년 전 대륙 충돌과 함께 지금의 연천 위치로 이동해 들어온 것이다. 고생대 중기인 데본기(약 4억 년 전) 남중국판은 현재의 위치가 아니라 적도에 가까운 따뜻한 남반구 혹은 적도 인근에 위치해 있었다. 당시 남중국판 가장자리의 얕은 바다(대륙붕 환경)에서는 모래, 진흙, 그리고 조개껍데기 같은 석회질 물질이 번갈아 쌓이고 있었다. 이 퇴적물들이 굳어 훗날 연천 미산층의 원암(원래 암석)이 되었다. 즉, 미산층은 '태생 자체가 남중국판 출신'인 해성층(바다에서 쌓인 지층)이다.

 

2억 5천만 년 전(고생대 말~중생대 초) 적도 부근에 있던 남중국판이 서서히 북상하면서, 북쪽에 있던 북중국판과 격렬하게 충돌하기 시작했다. 이 거대한 대륙 충돌(송림변동) 과정에서 두 대륙 사이에 끼어있던 남중국판의 조각들과 미산층 지층이 강하게 쥐어짜이며 북중국판 밑으로 섭입하거나 밀려 올라갔다. 이때 충돌의 직접적인 '칼자국'이자 경계선이 된 곳이 바로 임진강대이며 미산층은 이 충돌대에 갇힌 채 지금의 경기 연천 지역으로 완전히 편입되었다. 단순히 위치만 이동한 것이 아니다. 두 거대 대륙판이 부딪치는 엄청난 압력과 열을 받았기 때문에 미산층은 원래의 퇴적암 형태를 잃어버렸다. 모래와 진흙, 석회질층이 번갈아 쌓여있던 구조는 고온·고압을 받아 '변성사질암'과 '석회질 규산염암'이 시루떡처럼 번갈아 나타나는 변성퇴적암(연천층군 미산층)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551년 고구려 왕은 양원왕(陽原王)이다. 551년 고구려가 돌궐과의 전쟁에 몰두하는 동안 신라와 백제의 연합군은 한강 유역 고구려 요새들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다. 고구려는 한순간에 한강 유역뿐 아니라 동해안의 옛 옥저, 동해의 고지까지 모든 잃었다. 552년 더욱 강력해진 돌궐이 유연을 멸망시키는 등 대외 정세는 고구려에 이전보다 더 불리하게 돌아갔다. 양원왕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평양의 평지성과 산성의 기능을 모두 갖춘 새로운 형태의 고구려 성인 장안성을 쌓기 시작했다. 557년 서위가 망하고 북주가 들어서면서 고구려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더욱 더 빠르게 세력 재편을 향한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다.(136 페이지)

 

아차산성을 지키던 신라군의 화살이 공성전(攻城戰)을 지휘하던 온달 장군의 갑옷을 꿰뚫고 말았다. 장수를 잃은 고구려 군은 떨어진 사기를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아차산성 일대에서 물러났다. 이제 신라가 한강 유역 전체와 동해안 북쪽 지역을 차지한 것이 고구려가 전략상 후퇴를 단행했기 때문만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온달 장군의 전사를 계기로 한반도 정세에서 고구려가 누리던 절대적 우위는 회복할 수 없는 과거의 일임이 재확인되었다. 고구려로서는 남쪽 전선에도 북쪽 전선에 버금가는 무게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141 페이지)

 

559년에 즉위한 평원왕은 32년에 이르는 재위 기간에 격변하는 동아시아 정세에 적절히 대응하면서 고구려의 영광을 되찾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안으로는 민심을 다독이고 인재를 모았으며 밖으로는 수시로 중국 왕조들에 사절을 보내 대륙 정세의 흐름을 읽고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우호적 외교관계를 유지하려 애썼다. 평원왕대 평양 장안성 축조 공사는 계속되었고 요하부터 평양에 이르는 전략적 요충의 성과 요새의 보수 작업도 꾸준히 이루어졌다.(147 페이지)

 

연천 호로고루는 551년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상실한 시점부터 668년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약 120여 년 동안 고구려의 남쪽 국경을 지키는 최전방 방어 기지이자 국경 방어사령부 역할을 수행했다. 수(隋)나라는 고구려를 무리하게 침공하다가 건국 37년 만에 허망하게 멸망한 중국의 단명 통일 왕조다. 수나라가 무너진 혼란을 수습하고 중원을 차지한 나라가 바로 고구려의 다음 숙적이 되는 당(唐)나라(618년~907년)다. 수나라는 단명했지만 고구려의 역사와 국운을 송두리째 흔들 만큼 치명적이고도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16년간 이어진 4차례의 전쟁 동안 고구려 전역(특히 요동 지역)이 전쟁터가 되었다. 백성들이 농사 대신 성을 지키고 군량미를 조달하느라 생산 기반이 황폐해졌다.

 

북쪽의 거대한 위협에 모든 국력을 쏟아부어야 했기 때문에 신라에게 빼앗긴 죽령 이북의 한강 유역 영토를 무력으로 되찾을 여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수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고구려는 언제 다시 중국 제국이 침략할지 몰라 극심한 안보 불안에 시달렸다. 이에 대비해 16년에 걸쳐 요동 국경에 천리장성을 쌓는 대공사를 진행하며 국력을 연이어 소모했다. 이 장기적인 국가 위기 속에서 군부 강경파였던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이는 고구려 지배층 내부의 심각한 분열로 이어져 훗날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고구려가 수나라를 멸망으로 몰고 갈 정도로 강대하다는 사실은 새로 들어선 당나라에 엄청난 위협으로 다가왔다.

 

당나라는 수나라의 실패를 거울삼아 철저한 준비를 거쳐 고구려를 다시 침공하게 되었으며, 결국 고구려는 수·당과 도합 70여 년에 걸친 장기 전쟁을 치르며 완전히 고갈되었다. 결과적으로 수나라와의 전쟁은 고구려 군사력의 위대함을 증명한 빛나는 승리(살수대첩)였지만 동시에 고구려의 생명력을 갉아먹어 훗날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역사의 변곡점이었다. 645년 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646년 천리장성이 완공되어 요동 방어선이 더 두터워지자 고구려는 자주 군대를 내어 신라의 변경을 두드렸다. 백제와 고구려에 협공당하는 꼴이 된 신라가 당에 구원을 청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648년 신라의 김춘추와 당태종 사이에 맺어진 비밀 군사 동맹으로 당은 고구려 외에 백제와 신라도 넘볼 수 있게 되었다. 665년 연개소문이 죽은 뒤 고구려 지배층의 권력투쟁은 극에 달했다. 패배한 자들이 자신의 세력과 함께 적국 신라와 당으로 망명하면서 저들이 지배하던 땅과 백성들을 졸지에 속한 나라가 바뀌는 웃지 못할 일이 잇따라 일어났다. 667년 당이 다시 한 번 대군을 일으킬 즈음 고구려는 이미 철벽을 자랑하던 국경 방어선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린 상태였다. 668년 9월 서쪽에서 당, 남쪽에서 신라의 공격을 동시에 받기 시작한 지 1년 만에 평양성은 적의 대군에 포위되었다. 겹겹이 포위된 채 공격받기 시작한 평양성은 한 달을 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246 페이지)

 

연천 무등리 2보루는 완전한 형태의 고구려 철갑옷과 제철 유적이 발견된 고구려 최고의 군수·병참 기지다. 임진강 서쪽 구릉(해발 93m)에 위치한 이 보루는 남쪽 국경의 다른 고구려 성곽들과 구별되는 매우 독특하고 중요한 고고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2보루 내부에서는 1,500년 전 고구려 장수나 보병이 입었던 철제 찰갑(비늘갑옷)과 투구 1벌이 통째로 주저앉은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남한 지역 고구려 유적 중 이처럼 완벽한 형태의 보병용 찰갑이 출토된 것은 무등리 2보루가 처음으로, 고구려 무기 제작 및 방어구 구조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가 되었다.

 

보루 내부에서 철을 제련할 때 나오는 금속 찌꺼기(슬래그)와 제철 작업 흔적이 대량 발견되었다. 군사들이 단순히 주둔만 하던 다른 보루들과 달리 이곳은 소규모 용광로를 갖추고 철제 무기와 군수품을 직접 제작하여 인근 보루들에 보급하는 병참사령부 역할을 했다. 6~9세기경의 쌀, 좁쌀 등의 탄화 곡물과 함께 수레 부속기, 농경용 보습 등이 다량 수습되었다. 동쪽과 남쪽이 험준한 절벽으로 이루어진 지형을 활용해 후방에서 조달한 군량미를 안전하게 보관하던 창고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둘레 약 350m의 석축 산성으로 대강 다듬은 현무암 석재 사이에 점토(찰흙)를 함께 채워 넣는 특이한 방식으로 성벽을 견고하게 다졌다. 성벽 외면에 점토를 두껍게 덧대어 붕괴를 막았고 성벽을 지탱하기 위해 나무 기둥을 박았던 구멍(영정주 흔적)과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치(雉), 배수로 등이 확인되었다. 바로 옆에 있는 무등리 1보루가 행정 관청(치소) 역할을 했다면, 2보루는 철갑옷, 제철장, 곡물창고를 갖춘 핵심 군수기지로서 두 보루가 유기적으로 결합해 임진강 변의 유연나루(교통로)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