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에서 만난 우리 역사
전호태 지음, 전혜전 그림 / 한림출판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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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태의 [고구려에서 만난 우리 역사]의 핵심 주제는 영토 확장 과정에서 다양한 민족을 포용하며 성장한 대표적인 다민족, 다문화 국가였던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사 전반을 통해 오늘날 한국 문화의 원형과 참된 역사의식을 규명하는 것이다. 고구려를 세운 추모왕(주몽)은 본래 동부여(또는 북부여) 왕실에서 자란 인물이다. 주몽은 부여 대소왕자의 시기(猜忌)와 생명의 위협을 피해 지지 세력을 이끌고 압록강 유역으로 남하했다. 주몽 무리는 태백산(太白山; 백두산) 꼭대기에서 비롯되어 북쪽 너른 벌판으로 흐르는 큰 강 하나를 간신히 건너고 나서야 부여 대소 왕자의 군사들을 따돌릴 수 있었다.

 

이 후 졸본 지역의 토착 세력과 결합하여 세운 나라가 고구려다.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 따르면 주몽이 처음 나라를 세웠을 때의 이름은 고구려가 아니라 졸본부여(卒本扶餘)였다. 고구려 사람들은 흙을 다져 쌓는 토성, 흙과 돌을 섞어서 쌓는 토석 혼축성도 만들었지만 돌이 많은 산간지대에 주로 살았던 까닭에 산과 평지가 맞닿는 지점의 돌로 쌓는 석성을 많이 만들었다. 고구려 석성의 벽은 가장 아랫부분에 커다란 네모꼴 바위 돌을 쌓고 그 위에 앞이 약간 넓고 뒤가 좁은 옥수수와 형태의 돌을 바깥에 놓고 베틀의 북처럼 양쪽 끝이 뾰족한 돌을 안쪽에 끼워 넣어 서로 쐐기처럼 맞물리게 하는 방식으로 쌓았다.

 

또 아래는 폭이 넓고 위로 갈수록 좁아지게 조금씩 들여 쌓는 퇴물림 쌓기를 적용하여 높이 쌓아도 견고하여 외부의 큰 충격에도 견딜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성벽 구간에 큰 바위가 나타나면 그 형태에 맞게 돌을 다듬어 붙여 쌓는 방식인 그랭이 방식으로 자연 암반이 단단한 성벽의 일부가 되게 했다. 두 방식은 인위적인 시멘트나 접착제 없는 시대에 두 돌이 이빨 맞추듯 완벽하게 밀착되어 지진이나 충격이 가해졌을 때 성돌들이 따로 놀지 않고 비정형의 돌기들이 서로를 꽉 붙잡아주기 때문에 흔들릴지언정 절대 무너지지 않는 엄청난 견고함을 자랑했다. 정리하면 그랭이 방식을 통해 땅바닥(암반)과 성벽의 첫 단을 일체형으로 단단히 고정했고, 그 위로 퇴물림 쌓기를 통해 성벽이 밖으로 쏟아지지 않도록 구조적 안정감을 완성시켰다. 그랭이는 우리 전통 건축에서 울퉁불퉁한 바탕면의 모양을 그대로 본떠 그릴 때 사용하는 집게 모양의 도구(연장)를 뜻하는 순우리말 이름이다.

 

고구려는 성벽 구간별로 책임자를 정하고 그 사실을 성돌에 새겨놓아 부실 공사로 성벽이 무너지는 일이 없도록 예방하기도 했다. 성벽을 쌓으면서 일정 구간마다 성벽에 접근한 적을 옆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직각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치()도 설치하였다. 저자는 고구려를 단순한 정복 국가가 아닌 다채로운 삶이 공존했던 문화 강국으로 조명한다. 고구려를 건국하고 지배층을 형성한 핵심 세력은 예맥(濊貊)족이다. 기원전 10세기 이전부터 만주 남부와 한반도 북부를 무대로 삼아 살았던 사람들로 예로 불리던 사람들이 고조선을 세웠고 맥으로 불리던 이들이 부여를 건국했다. 구려라고 불리다가 고구려라 불리게 되었다. 구려는 성()을 의미한다.

 

고구려는 만주와 북방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서 말갈족, 거란족, 선비족, 숙신족 등 다양한 북방 종족들을 연합하거나 속민으로 받아들였다. 고구려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흡수하고 중국의 혼란기(516국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중국계 유이민과 망명객을 정착시켰다. 5호는 다섯 유목 민족인 흉노, 선비, , , 강 등을 의미하고, 16국은 화북(華北; 중국의 북부) 지방에 세워진 유목 민족의 국가 11개와 한족 국가 5개를 합친 것을 뜻한다. 고구려의 북부 초원/산림 지대는 유목과 수렵 중심이었고, 서부 및 한반도 중북부 평야는 농경 중심이었고, 동해안 및 해안 지대는 어업 중심이었다.

 

중국의 516국 시대인 4세기~5세기는 중국 역사상 기후가 가장 악화되었던 대표적인 극심한 한랭기(2차 한랭기)였다. 당시 기온은 앞선 시대에 비해 지구 기온이 1~2도 낮았다. 이 시기는 여름(5~8)에 눈이 내리거나 서리가 빈번하게 내렸고, 겨울에는 폭설과 함께 바다나 큰 강이 얼어붙는 이상(異常) 한파(寒波)가 수십 차례 반복되었다. 한랭화와 함께 찾아온 건조 기후로 인해 대가뭄이 장기간 지속되었다. 가뭄 끝에 찾아오는 메뚜기 떼(황충)의 습격으로 화북 지방의 농작물은 초토화되었다. 몽골 고원과 만주 일대의 기온이 급락하자 초원이 황폐해져 가축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몽골의 경우 한파와 건조한 기후가 만난 것을 조드라고 한다. 생존의 기로에 선 흉노, 선비, , , 강 등 5개 유목 민족(5)이 따뜻하고 먹을 것이 있는 남쪽(중원 화북 지방)으로 대거 이동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중원의 한족(진나라) 역시 냉해와 가뭄으로 농사를 완전히 망쳤다. 국력이 극도로 약해진 상태에서 식량을 찾아 내려오는 유목민의 군사적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고구려 장수왕의 평양 천도(遷都)는 중국의 516국 시대가 끝나기 직전인 427년에 일어난 사건이다. 고구려 연구가 김용만 소장은 고구려가 국내성(중국 길림성 집안 지역에 자리한, 압록강 기슭의 좁고 긴 평야지대)을 떠나 평양으로 천도한 배경 중 하나로 국내성에 지나치게 많아진 공동묘지와 주거 환경 악화를 꼽았다. 400년 동안 인구가 누적되면서 국내성 주변 공간은 수만 기의 무덤으로 가득 차 도시 전체가 거대한 공동묘지처럼 변해버렸다.

 

전호태 교수의 본문([고구려에서 만난 우리 역사])은 이렇게 말한다. “수백 년에 걸쳐 고구려의 서울로 기능 하는 동안 왕실과 귀족 가문에서는 하나같이 국내성 일원에서 장지(葬地)를 구했다. 이런 까닭에 5세기경에는 죽은 사람의 누울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산 사람의 집터마저 밀어낼 지경이 되었다. 죽은 사람의 무덤을 지키는 무덤 지기들의 집 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왕릉에는 수백 호, 대귀족의 무덤에는 때로는 수십 호에 이르는 무덤 지기가 붙는 것이 고구려의 관례였다 .평양 천도가 추진될 무렵에는 국내성의 수도로서의 기능 역시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105 페이지)

 

지리학자 박정재 교수는 고구려의 평양 천도는 혹독한 추위를 피해 남하한 것이라 말한다. 둘 다 작용했을 것이다. 박정재 교수의 [한국인의 기원]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장수왕은 수많은 조상의 무덤이 있는 국내성을 떠나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는 파격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원 수도인 국내성에서 새로운 수도인 평양까지의 직선거리는 약 240km에 달한다. 서울에서 광주까지의 거리에 살짝 못 미치는 수준이다....그런데 당시 정점에 이른 추위를 고려하면 장수왕이 고구려의 지리적 중심인 국내성을 떠나 외곽의 평양으로 천도한 원인 중 하나로 기후변화를 제외하기란 쉽지 않다. 고구려인이 추위를 극복할 수 없어서 이주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장수왕이 고구려의 앞날을 그렸을 때 수도의 물리적 위치보다는 수도의 발전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제반 여건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점차 인구가 늘면서 작물 농경의 비중은 늘어만 가는데 기온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면 온난화 평양이 미래의 고구려 수도로서 더 나은 선택이라고 봤을 가능성이 높다. 결행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했을 것이다.”(378, 379 페이지)

 

[고구려에서 만난 우리 역사]에도 이 부분이 언급되어 있다. 427년 장수왕은 제국 고구려의 심장부 역할을 하기에는 지나치게 좁고 교통상의 이점도 그리 크지 않은 국내성에서 주변 개발 가능성이 크면서도 방어선 확보가 용이한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400여 년 동안 수도로 기능하면서 고구려가 왕국에서 제국으로 성장하기까지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던 국내성은 고구려 귀족 가문들이 뿌리내린 도시이기도 하다. 당연히 건국 이래 국가가 겪은 고난과 영광의 주인공임을 자부하던 전통 귀족 가문들은 평양으로 수도를 이전하는 것에 반대하였다.(93 페이지)

 

광개토대왕, 장수왕 등과 인연을 맺은 곳이 경기도 연천(漣川)이다. 광개토왕은 재위 기간(391~412) 적극적인 남진 정책을 펼치며 백제를 압박했다. 396년 광개토왕은 몸소 수군과 육군을 이끌고 백제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한강 이북 지역을 장악했습니다. 이 정벌 과정에서 연천을 흐르는 임진강 일대가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임진강은 당시 고구려의 최전방 방어선이자 한성백제를 타격하기 위한 거점이 되었다. 광개토왕의 아들 장수왕(재위 413~491)은 아버지의 기반을 바탕으로 평양으로 천도(427)하고 본격적인 한반도 경영에 나섰다.

 

475년 장수왕은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처단하며 한강 유역을 완벽하게 차지했다. 장수왕이 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넓히면서 후방이 된 연천 일대(임진강 북안)에는 고구려 군대의 전초기지와 요새(보루)들이 대거 축조되기 시작했다. 고구려는 이곳에 군대를 주둔시켜 남쪽의 백제와 신라를 감시하고 보급로를 확보했다. 연천은 남한에서 유일하게 200여년 동안 고구려의 영토에 속했던 지역이다. 한강 유역(서울·춘천·충주 등)475년 장수왕 때 점령되었다가 551년 나·제 연합군에게 빼앗겨 고구려의 지배 기간이 약 70~80년에 불과했다. 반면 연천을 비롯한 임진강 북안 지역은 396년부터 668년 멸망 때까지 약 270여 년 동안 고구려의 영토로 지속되었다.

 

장수왕은 427년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48년 동안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다가 475년 한성 백제를 공격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내부 정비, 외교적 세력 균형 유지, 백제의 철저한 방어선 때문이었다. 470년대에 이르러 장수왕은 북위와의 외교 관계를 확고히 다져 북방의 위협을 완벽히 제거했다. 그 이전까지 고구려는 강력한 북위(北魏)가 있는 중원(中原) 진출도 어려웠다.”(유성운 지음 한국사는 없다’ 103 페이지) 470년대에 이르러 장수왕이 북위와의 외교 관계를 확고히 다져 북방의 위협을 완벽히 제거했다는 말은 장수왕이 겉으로는 북위에 막대한 선물을 주며 비위를 맞추었지만 속으로는 남조(南朝) 및 유연과의 동맹 카드를 쥐고 북위를 철저히 외교적으로 통제한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장수왕 시대에 고구려의 영토는 남으로 한반도의 아산만에서 영덕을 잇는 선까지 내려갔다. 한반도의 대부분이 고구려의 영토가 되고 중남부 일부 지방만 신라, 백제, 가야 연맹의 땅으로 남은 형국이었다. 백제의 패퇴 이후 요하 유역을 포함하여 그 동쪽에 펼쳐진 만주, 한반도, 일본열도 지역에서 고구려의 패권적 지위를 넘볼 수 있는 세력이나 나라는 아무도 없게 되었다.(99 페이지)

 

심광주 교수에 의하면 475년 한성(漢城) 함락 당시 고구려로 끌려간 백제 포로 8,000명 중 백제 도성 내부의 고난도 석회·토목 기술을 가진 전문 장인(기술자)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이 기술자들이 평양으로 압송되는 과정 또는 임진강·한탄강 유역의 고구려 최전방 요충지(연천)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고구려 지배층(사령관급)의 무덤인 신답리 고분을 축조하는 데 투입되었다. 그 결과 고구려식 무덤(모줄임 천장 구조)의 형태를 띠고 있으면서도 내부 접착제로는 백제의 선진 석회 기술이 접목된 고구려와 백제의 기술 융합형 무덤이 연천 신답리에 탄생하게 된 것이다.

 

모줄임 천장 구조(말각조정, 抹角藻井)는 네모난 방의 네 모퉁이를 비스듬히 줄여가며 천장을 위로 좁혀 쌓는 고구려 무덤의 대표적인 천장 축조 양식이다. 방의 크기보다 천장 면적을 줄이면서 위로 높여 마치 돔(Dome)이나 피라미드 내부 같은 입체적인 공간감을 만들어내는 고도의 건축 기술이다.(; 지울 말, ; 각도 각, ; 꾸밈 조, ; 우물 정) 연천 신답리 고분의 회()는 조개를 태워 만든 패회(貝灰). 백제는 풍부한 석회암 지대를 배경으로 조개껍질이 아닌 자연 석회암(광석)을 고온으로 가마에서 구워 만든 생석회 공법을 고도로 발전시켰다. 백제의 풍부한 석회암 지대란 사비(부여) 시기 백제의 중심지였던 충청도(금강 유역) 일대를 의미한다.

 

고구려 임진강 유역은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 임진강 상·중류(북한 지역)는 지질학적으로 고생대 조선누층군의 '하부 대석회암통'에 속하는 울창한 석회암 지대다. 반면 남한의 연천·포천·철원 일대는 약 50만 년 전 화산 폭발로 형성된 현무암(변성암, 화강암, 응회암 중심) 지대가 주를 이룬다. 만일 고구려가 본국(평양이나 임진강 북한 지역)에서 쓰던 전통 방식으로 무덤을 만들고자 했다면 임진강 상류에서 석회암을 가져와 구워 쓰거나 평양의 전통 방식을 그대로 썼을 것이다. 하지만 연천 신답리 고분은 연천 주변 강가나 서해안에서 구하기 쉬운 조개껍데기(패회)를 기본 원료로 썼다. 즉 먼 북방에서 석회암을 공수해 오지 않고 연천 현지에서 조달할 수 있는 원료를 택한 것이다.

 

정리하면 고구려가 남진하여 차지한 최전방 방어선인 연천 현지에서 무덤을 축조할 때는 북방의 석회암을 가져오지 않고 현지의 조개껍데기(패회)를 썼다. 이때 한성에서 생포한 백제 기술자들의 배합 노하우가 융합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과학적인 분석 결과다. 지리적 지질 분포와 고고학적 유물이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고생대 조선누층군의 '대석회암통(大石灰岩統)'은 고생대 초기(캄브리아기~오르도비스기에 해당하는 약 5~45천만 년 전) 한반도가 따뜻한 얕은 바다(해성층)였을 때 산호나 조개껍데기 같은 석회질 생물체와 침전물이 수천 미터 두께로 쌓여 형성된 한반도 최대의 석회암 지층을 뜻하는 지질학적 명칭이다.

 

고생대 초기(5~45천만 년 전) 한반도의 상당 지역(평남분지, 태백산분지)이 따뜻한 얕은 바다(조선해)여서 거대한 석회암 지층을 형성했던 것과 달리 남한의 연천 지역은 당시 바다가 아닌 거대한 대륙판의 일부(경기육괴)로서 육지 환경이었거나 지질학적 공백(결층)에 해당한다. 연천, 경기, 충청, 전라도 일부가 속한 경기 육괴는 당시 남중국판(Yangtze Craton)의 일부였다. 고생대 초기에 이 지역은 바다로 덮여 석회암을 쌓던 지역이 아니라, 오랜 기간 퇴적이 일어나지 않거나 침식을 받던 육지 환경(지질학적 공백 또는 결층)이었다. 북한, 강원도 삼척·태백 일대가 속한 평남분지와 태백산분지는 당시 북중국판(Sino-Korean Craton)의 일부였다.

 

이 두 지역은 고생대 캄브리아기~오르도비스기(5억 년 전)에 따뜻하고 얕은 바다인 조선해(조선누층군) 환경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규모 석회암 지층이 형성되었다. 연천의 미산층(Misan Formation)은 원래부터 현재의 한반도 위치에 있던 지층이 아니다. 당시 적도 부근에 있던 남중국판의 얕은 바다(대륙붕)에서 쌓인 퇴적물이 약 25천만 년 전 대륙 충돌과 함께 지금의 연천 위치로 이동해 들어온 것이다. 고생대 중기인 데본기(4억 년 전) 남중국판은 현재의 위치가 아니라 적도에 가까운 따뜻한 남반구 혹은 적도 인근에 위치해 있었다. 당시 남중국판 가장자리의 얕은 바다(대륙붕 환경)에서는 모래, 진흙, 그리고 조개껍데기 같은 석회질 물질이 번갈아 쌓이고 있었다. 이 퇴적물들이 굳어 훗날 연천 미산층의 원암(원래 암석)이 되었다. , 미산층은 '태생 자체가 남중국판 출신'인 해성층(바다에서 쌓인 지층)이다.

 

25천만 년 전(고생대 말~중생대 초) 적도 부근에 있던 남중국판이 서서히 북상하면서, 북쪽에 있던 북중국판과 격렬하게 충돌하기 시작했다. 이 거대한 대륙 충돌(송림변동) 과정에서 두 대륙 사이에 끼어있던 남중국판의 조각들과 미산층 지층이 강하게 쥐어짜이며 북중국판 밑으로 섭입하거나 밀려 올라갔다. 이때 충돌의 직접적인 '칼자국'이자 경계선이 된 곳이 바로 임진강대이며 미산층은 이 충돌대에 갇힌 채 지금의 경기 연천 지역으로 완전히 편입되었다. 단순히 위치만 이동한 것이 아니다. 두 거대 대륙판이 부딪치는 엄청난 압력과 열을 받았기 때문에 미산층은 원래의 퇴적암 형태를 잃어버렸다. 모래와 진흙, 석회질층이 번갈아 쌓여있던 구조는 고온·고압을 받아 '변성사질암''석회질 규산염암'이 시루떡처럼 번갈아 나타나는 변성퇴적암(연천층군 미산층)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551년 고구려 왕은 양원왕(陽原王)이다. 551년 고구려가 돌궐과의 전쟁에 몰두하는 동안 신라와 백제의 연합군은 한강 유역 고구려 요새들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다. 고구려는 한순간에 한강 유역뿐 아니라 동해안의 옛 옥저, 동해의 고지까지 모든 잃었다. 552년 더욱 강력해진 돌궐이 유연을 멸망시키는 등 대외 정세는 고구려에 이전보다 더 불리하게 돌아갔다. 양원왕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평양의 평지성과 산성의 기능을 모두 갖춘 새로운 형태의 고구려 성인 장안성을 쌓기 시작했다. 557년 서위가 망하고 북주가 들어서면서 고구려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더욱 더 빠르게 세력 재편을 향한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다.(136 페이지)

 

아차산성을 지키던 신라군의 화살이 공성전(攻城戰)을 지휘하던 온달 장군의 갑옷을 꿰뚫고 말았다. 장수를 잃은 고구려 군은 떨어진 사기를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아차산성 일대에서 물러났다. 이제 신라가 한강 유역 전체와 동해안 북쪽 지역을 차지한 것이 고구려가 전략상 후퇴를 단행했기 때문만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온달 장군의 전사를 계기로 한반도 정세에서 고구려가 누리던 절대적 우위는 회복할 수 없는 과거의 일임이 재확인되었다. 고구려로서는 남쪽 전선에도 북쪽 전선에 버금가는 무게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141 페이지)

 

559년에 즉위한 평원왕은 32년에 이르는 재위 기간에 격변하는 동아시아 정세에 적절히 대응하면서 고구려의 영광을 되찾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안으로는 민심을 다독이고 인재를 모았으며 밖으로는 수시로 중국 왕조들에 사절을 보내 대륙 정세의 흐름을 읽고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우호적 외교관계를 유지하려 애썼다. 평원왕대 평양 장안성 축조 공사는 계속되었고 요하부터 평양에 이르는 전략적 요충의 성과 요새의 보수 작업도 꾸준히 이루어졌다.(147 페이지)

 

연천 호로고루는 551년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상실한 시점부터 668년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약 120여 년 동안 고구려의 남쪽 국경을 지키는 최전방 방어 기지이자 국경 방어사령부 역할을 수행했다. ()나라는 고구려를 무리하게 침공하다가 건국 37년 만에 허망하게 멸망한 중국의 단명 통일 왕조다. 수나라가 무너진 혼란을 수습하고 중원을 차지한 나라가 바로 고구려의 다음 숙적이 되는 당()나라(618~907). 수나라는 단명했지만 고구려의 역사와 국운을 송두리째 흔들 만큼 치명적이고도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16년간 이어진 4차례의 전쟁 동안 고구려 전역(특히 요동 지역)이 전쟁터가 되었다. 백성들이 농사 대신 성을 지키고 군량미를 조달하느라 생산 기반이 황폐해졌다.

 

북쪽의 거대한 위협에 모든 국력을 쏟아부어야 했기 때문에 신라에게 빼앗긴 죽령 이북의 한강 유역 영토를 무력으로 되찾을 여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수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고구려는 언제 다시 중국 제국이 침략할지 몰라 극심한 안보 불안에 시달렸다. 이에 대비해 16년에 걸쳐 요동 국경에 천리장성을 쌓는 대공사를 진행하며 국력을 연이어 소모했다. 이 장기적인 국가 위기 속에서 군부 강경파였던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이는 고구려 지배층 내부의 심각한 분열로 이어져 훗날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고구려가 수나라를 멸망으로 몰고 갈 정도로 강대하다는 사실은 새로 들어선 당나라에 엄청난 위협으로 다가왔다.

 

당나라는 수나라의 실패를 거울삼아 철저한 준비를 거쳐 고구려를 다시 침공하게 되었으며, 결국 고구려는 수·당과 도합 70여 년에 걸친 장기 전쟁을 치르며 완전히 고갈되었다. 결과적으로 수나라와의 전쟁은 고구려 군사력의 위대함을 증명한 빛나는 승리(살수대첩)였지만 동시에 고구려의 생명력을 갉아먹어 훗날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역사의 변곡점이었다. 645년 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646년 천리장성이 완공되어 요동 방어선이 더 두터워지자 고구려는 자주 군대를 내어 신라의 변경을 두드렸다. 백제와 고구려에 협공당하는 꼴이 된 신라가 당에 구원을 청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648년 신라의 김춘추와 당태종 사이에 맺어진 비밀 군사 동맹으로 당은 고구려 외에 백제와 신라도 넘볼 수 있게 되었다. 665년 연개소문이 죽은 뒤 고구려 지배층의 권력투쟁은 극에 달했다. 패배한 자들이 자신의 세력과 함께 적국 신라와 당으로 망명하면서 저들이 지배하던 땅과 백성들을 졸지에 속한 나라가 바뀌는 웃지 못할 일이 잇따라 일어났다. 667년 당이 다시 한 번 대군을 일으킬 즈음 고구려는 이미 철벽을 자랑하던 국경 방어선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린 상태였다. 6689월 서쪽에서 당, 남쪽에서 신라의 공격을 동시에 받기 시작한 지 1년 만에 평양성은 적의 대군에 포위되었다. 겹겹이 포위된 채 공격받기 시작한 평양성은 한 달을 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246 페이지)

 

연천 무등리 2보루는 완전한 형태의 고구려 철갑옷과 제철 유적이 발견된 고구려 최고의 군수·병참 기지다. 임진강 서쪽 구릉(해발 93m)에 위치한 이 보루는 남쪽 국경의 다른 고구려 성곽들과 구별되는 매우 독특하고 중요한 고고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2보루 내부에서는 1,500년 전 고구려 장수나 보병이 입었던 철제 찰갑(비늘갑옷)과 투구 1벌이 통째로 주저앉은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남한 지역 고구려 유적 중 이처럼 완벽한 형태의 보병용 찰갑이 출토된 것은 무등리 2보루가 처음으로, 고구려 무기 제작 및 방어구 구조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가 되었다.

 

보루 내부에서 철을 제련할 때 나오는 금속 찌꺼기(슬래그)와 제철 작업 흔적이 대량 발견되었다. 군사들이 단순히 주둔만 하던 다른 보루들과 달리 이곳은 소규모 용광로를 갖추고 철제 무기와 군수품을 직접 제작하여 인근 보루들에 보급하는 병참사령부 역할을 했다. 6~9세기경의 쌀, 좁쌀 등의 탄화 곡물과 함께 수레 부속기, 농경용 보습 등이 다량 수습되었다. 동쪽과 남쪽이 험준한 절벽으로 이루어진 지형을 활용해 후방에서 조달한 군량미를 안전하게 보관하던 창고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둘레 약 350m의 석축 산성으로 대강 다듬은 현무암 석재 사이에 점토(찰흙)를 함께 채워 넣는 특이한 방식으로 성벽을 견고하게 다졌다. 성벽 외면에 점토를 두껍게 덧대어 붕괴를 막았고 성벽을 지탱하기 위해 나무 기둥을 박았던 구멍(영정주 흔적)과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치(), 배수로 등이 확인되었다. 바로 옆에 있는 무등리 1보루가 행정 관청(치소) 역할을 했다면, 2보루는 철갑옷, 제철장, 곡물창고를 갖춘 핵심 군수기지로서 두 보루가 유기적으로 결합해 임진강 변의 유연나루(교통로)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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