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욱 교수의 '스피노자 vs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라이프니츠는 성(姓)을 라이프뉘츠에서 라이프니츠로 바꾸었다. 뉘 대신 니를 택한 그는 뉘른베르크 대학의 교수 자리를 거절하고 뉘른베르크 연금술사 협회에 가입해 미래를 개척하는 길을 택했다. 라이프니츠로서는 뉘른베르크에서 나름의 전환점에 선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미적분을 두고 다투었던 뉴턴처럼 라이프니츠도 연금술에 큰 관심을 보였다는 점이다. 라이프니츠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된 인물은 토마지우스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전공자로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따르는 대부분의 종교와 달리 창조자와 피조물, 신과 자연의 분리를 주장하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그리스도교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스피노자 vs 라이프니츠', 참 유익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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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를 프레너미로 분류한 책을 읽고 있다. 스피노자의 할머니는 가톨릭으로 허위 개종했다는 이유로 마녀로 몰려 화형당했다. 스피노자의 여동생은 스피노자를 상대로 파문(破門)당한 사람은 재산 상속자가 될 수 없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이 스피노자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그는 아버지의 가업에 관심이 없었기에 상속을 포기하고 모든 재산을 여동생에게 넘겼다.

 

제국 로마의 박해를 받아 예루살렘을 떠나야 했던 유대인들 가운데 가톨릭으로 강제 개종해야 했던 사람들을 세파르디 유대인이라 한다. 스피노자는 자유인이었다. 그는 파문을 당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유대식 이름인 바루흐를 라틴식 이름인 베네딕투스(벤투)로 바꾸었다.(두 이름 모두 축복받은 사람이라는 의미다.) 스피노자는 조용함과 자유를 사랑하기에 교수직도 거절했다. 나는 무엇에 매료되어 벤투의 스케치북이라는 닉네임을 쓰는가? 내실을 기해야 한다는 의미로 스스로 하는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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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리셋, 클럽하우스 - 소셜 미디어의 새로운 미래를 만나다
김경헌 외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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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커, 리스너, 오퍼레이터가 활약하는 클럽하우스는 2021년 1월 우리나라에 상륙한 SNS다. 클럽하우스는 다양한 줄임말의 대상이 되고 있다. 클하(클럽하우스), 클생(클럽하우스 생활), 클친(클럽하우스 친구) 등이다. 무엇보다 현생이란 말이 눈길을 끈다. 클럽하우스의 클이란 단어가 들어 있지 않지만 클럽하우스가 그만큼 여러 사람으로 하여금 많은 시간을 쓰게 하는 매체임을 간접적으로 알게 하는 말이어서 주목을 요한다.

 

‘소셜 미디어의 새로운 미래를 만나다’란 부제를 가진 ‘소통의 리셋, 클럽하우스’는 컨설턴트, 북큐레이터, 프로덕트 오너, 심리학 전공의 만화가 등 여러 분야의 전공자인 다양한 저자들이 함께 쓴 클럽하우스 종합 분석서다. 책의 구성은 클럽하우스의 정체성을 논한 1부, 사람들이 클럽하우스에 빠지는 이유를 규명한 2부, 어떻게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있는가 등을 논한 3부 등 세 개의 파트로 구성되었다.

 

클럽하우스는 폴 데이비슨과 로한 세스의 만남으로 시작된 매체다. 딸이 소아 간질중첩증을 안고 태어난 로한 세스가 치료 연구를 위한 비영리단체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과거 인연이 있던 폴 데이비슨에게 조언을 구하고자 연락한 것이 계기가 된 것이다. 두 사람은 친밀감의 빠른 확장이라는 새 방향성을 바탕으로 새 앱에 클럽하우스란 이름을 붙였다.

 

클럽하우스는 이전 앱인 토크쇼와 달리 녹음이나 재방송 기능 없이 휘발성 대화를 담는 형태로 출시되었다. 절대 소셜 미디어를 만들지 않으려 했던 두 사람은 본의 아니게 새로운 형태의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를 만들었다. 2020년 3월 17일의 일이었다. 2021년 1월 우리나라에도 클럽하우스가 상륙했다. 클럽하우스의 특별함의 중심에는 실명에 기반한 계정을 만드는 데서 비롯되는 실존성과 음성과 실시간성에서 비롯되는 진정성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가 자리한다.

 

특기할 점은 실시간 대화의 희귀함과 소중함, 그리고 18세 이상인 자에 한해 이용가능하다는 점이다. 인간의 뇌는 예측불가능성을 갈구하도록 만둘어졌다. 클럽하우스의 특징은 예측불가능성이다. 클럽하우스는 다섯 가지 원칙을 갖는다. 1) 자기 자신으로 임하세요. 2)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세요. 3) 포용적 자세를 보이세요. 4) 공감력과 이해심을 형성하세요. 5) 의미 있고 진정성 있는 인연을 만들어가세요 등이다.

 

클럽하우스는 무대와 객석이라는 두 개의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무대에 있는 사람을 스피커라 하며 그 중 방을 만든 사람을 모더레이터라 한다. 객석에 있는 사람을 액티브 리스너라고 한다. 언제든 우측 하단에 있는 손바닥 버튼을 눌러 모더레이터에게 자신이 말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클럽하우스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1) 방 안에서의 경험. 2) 검색과 발견. 3) 신뢰와 안전을 보장하는 구조. 4) 성장과 확장 등이다. 김정원은 워낙 얼리 어답터들이 많아 솔로 어답터로서 자기소개에 부담이 가는 방들이 많았고 이제는 흡사 창세기를 보는 기분이라고 말한다. 김정원은 클럽하우스가 자신의 페르소나를 모두 충족시킨다고 말한다. 페르소나는 사회가 요구하는 자아로 자신의 본성과는 다른 태도나 성격. 사회의 규범과 관습을 내면화한 것을 의미한다.

 

김정원은 혼자가 좋지만 외롭고 싶지도 않다는 말로 자신을 설명한다. 자신의 페르소나를 모두 충족시킨다는 말은 그 만큼 클럽하우스가 다양한 분야로 세분되어 있음을 방증(傍證)한다. 크게 나누면 클럽하우스 방은 정보형, 치유형, 유희형으로 대별된다. 목차 중에는 현생 1년과 맞먹는 클생 한 달이란 말이 있다. 클럽하우스는 원하는 대화를 마음껏 할 수 있는 곳이다. 또한 타인의 관심사로 인해 내가 확장되는 곳이다. 이는 서로 멘토가 되는 곳이라는 말로도 바꿀 수 있는 말이다.

 

궁금한 것은 현생과 클생의 캐릭터가 다를 경우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란 점이다. 부담감이 없다는 말이 반갑(?)다. 심리학 전공의 이종범은 거의 모든 학습은 절대적인 진리라 부르는 것에 대한 깨달음을 제외하면 대부분 편견과 선입견을 체계적인 형태로 쌓아올린 것이라 말한다.(117 페이지) “범주화, 타자화, 편견, 선입견 등의 말은 그 자체로는 부정적인 말이 아니다. 현상과 당위를 굳이 구분하자면 편견은 현상이다.

 

인간의 뇌는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생존을 위해서 이와 같은 방법을 써야만 했다.” 편견은 인지적 절약의 한 방법이다.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의 소셜 미디어를 이용하면서 효율성을 위해 편견을 쌓는 성향은 강화되었다. 그래서 이용자들은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는 대상으로 타임라인과 피드를 구성한다. 소셜 미디어는 현실의 모사(模寫)다. 편견과 소외는 우리의 불편한 자화상이다.

 

소셜 미디어의 시대를 열어젖힌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거대한 연결망으로서 각자 서로 다른 방식으로 현실 세계를 재현했다. 그 과정 속에서 현실 세계의 한계와 문제를 함께 재현했다. 그리고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 문제에 대처했으나 결과는 비슷했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만으로 구성된 사회, 소속감과 안락함은 제공하지만 확장이 멈춰버린 네트워크, 초연결의 결과로 초분절이 생겼다.(126 페이지) 초분절이란 말이 인상적이다.

 

“현재의 초연결 사회 속에서 우리가 체험하는 온라인상의 인간관계는 대부분 과맥락(너무 많은 정보)으로 발생한 관계의 언캐니밸리에 위치한다.”(137 페이지) 언캐니밸리는 ‘으스스한 골짜기’라는 의미의 말로 일본의 로봇공학자 마사히로 모리가 1970년에 발표한 이론에서 실마리가 생겼다. 인간과 비슷한 로봇과 인간과 거의 똑같은 로봇 사이에 존재하는 불쾌감의 영역을 말한다.

 

이종범은 인간이 아직 태어나서 움츠러들기 전 호기심과 호의를 가지고 서로를 처음 마주했을 때와 같은 관계의 원형을 추체험하기 위해서는 협소맥락 즉 모두가 충분히 적은 양의 정보 안에서 모여야 한다고 말한다.(138 페이지)

 

알고 만나는 것보다 만나서 알아가는 것을 선호하는 말이다. 이는 관계의 리셋이라 할 수 있다. 클럽하우스가 삶의 모사가 아니라 확장이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각자 생각해 볼 일이다. 인간은 선과 불선함을 두루 갖춘 복합적 존재다. 물론 어느 한쪽 성향이 더 강하다. 대부분 불선한 성향이 강하다고 말하면 편견일까? 이종범은 인간의 근본적 한계를 인정하는 한편 근본적 선의도 인정한다고 말한다. 후편으로 갈수록 더욱 흥미로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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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의 지리학 - 2020 전국지리교사모임 추천도서
이경한 지음 / 푸른길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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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한은 ‘자리의 지리학’에서 자리를 곳, 장소, 흔적, 위치, 지위, 물건 등으로 정의한다. 이 책을 통해 자리란 명분(名分)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다. 명분은 명의(名義; 명분과 의리)나 신분에 따라 반드시 지켜야 할 도의상의 본분(本分)을 일컫는 말이다. 아울러 생태적 지위라는 의미의 니치(niche)란 말도 생각하게 된다.

 

자리는 상징이 투영되는 곳이다.(26 페이지) 사람들이 일정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여 상징을 만드는 것이다. 자리는 따라야 할 명분과 걸어야 할 길을 의미한다. 경운궁(덕수궁)에 즉조당(卽堂)이 있다. 인조가 즉위한 곳이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곳이다. 조()는 오른쪽 계단, 사당 동쪽 섬돌을 의미한다. 조계(階)라고도 한다. 율곡 이이는 ‘격몽요결‘에서 조계는 오직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 즉 주인만이 오르내릴 수 있고 그 외의 사람들은 나이가 많더라도 서쪽 섬돌을 경유한다고 썼다.

 

사람들은 사고를 반영하여 상징을 만든다. 그런데 그 상징이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에서 자리로 재현되어 사람들의 삶을 지배, 구속하는 경향이 있다.(31 페이지) 자리는 질서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는 구별짓기 행위이기도 하다. 자리는 사회의 일정한 규칙 즉 지배질서를 반영한 결과다.

 

개인이 차지하는 사회적 지위와 개인이 속한 사회구조에 의해 산출되고 내면화하는 성향, 사고, 인지, 판단 등의 행동 체계를 아비투스라 한다. 한 집단의 아비투스가 다른 집단에게는 상징폭력이 될 수 있다. 자리를 상대적 가치로 전환하려는 무리는 자리를 추상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실제와 다른 의미나 가치를 자리에 부여하여 자신들의 욕망을 감추려는 본능을 지닌다. 즉 자리를 부(富)라 말하지 않고 이를 통해 세상을 이롭게 하려고 한다고 말한다.(41, 42 페이지)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과 그 주위를 이어주는 사통팔달의 방사상(放射狀; 바큇살 모양) 도로는 지배 권력의 자리를 공간에 표현한 대표적 사례다. 파리에는 개선문을 중심으로 12개의 도로가 방사상으로 펼쳐져 있다. 별 모양으로 보여 이름이 에투알(Etoile; 프랑스어로 별을 의미)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왕을 본 프랑스 권력자들은 자신들만은 민중에게 당하지 않겠다는 생각에 파리의 도심도로를 가장 잘 감시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었다. 권력을 잡은 적은 수의 군대로 시민봉기를 통제해야 했기에 나온 디자인이 방사상 구조다. 파리에서 시민이 봉기하면 12개의 간선도로로 쏟아져 나오는데 이때 개선문 지붕에 대포만 설치하면 적은 수의 적은 수의 군대로 시민을 제압할 수 있게 된다.(2016년 11월 6일 중앙선데이 수록 유현준 글 ’800m 간격 테헤란로 걷기 싫어지는 까닭‘ 중에서)

 

모든 존재는 자리를 잡아 영역을 구축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자리에서는 끊임없이 사건이 일어난다. 그리고 자리의 사건은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기억을 만든다. 그 기억은 의미체가 되어 자리를 상징으로 만든다. 지금도 우리는 자리의 상징성을 만들고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는 자리가 가진 상징성을 타자와 나눈다.(76 페이지)

 

생태계도 자리다. 생태계라는 자리는 희생과 생존이라는 틀에서 자연스럽게 다양한 종이 보존되는 체계다. 하지만 어느 한 종의 가혹한 희생만을 강요할 때 생태계의 종 다양성은 무너지고 만다.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에게도 늦게이지만 희생의 때는 온다.

 

알도 레어폴드는 ’모래땅의 사계‘에서 한 종이 다른 종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하늘 아래 전에는 없었던 일이라고 썼다. 한 종이 다른 종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어느 종은 살아남아 자리를 보존하고 어느 종은 죽음을 맞았음을 의미한다. 애도를 표하는 종이 인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다른 종의 죽음을 애도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집밥 신드롬을 자리의 기억과 그 기억의 회복을 위한 몸부림이라 표현한다. 집은 그리스어로 오이코스다. 이는 공적 영역인 폴리스에 대비되는 사적 생활 단위로서의 집을 의미한다. 현대 사회학에서는 오이코스를 사회적 그룹을 묘사하는 데에 사용한다. 바이트는 오이코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다.

 

저자는 자리를 배제하고서 삶을 논하기는 어렵기에 일상에서 자리의 지리학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자리로 경계를 짓는다. 이 경계를 중심으로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대재생산한다. 이로써 차별성이 강화되고 경계가 공고화된다. 경계는 그러나 다른 자리가 존재할 수 있는 원천이 되기도 한다. 경계를 지음으로써 서로 선을 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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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물의(物議)는 성격이 나쁜 사람이 일으키기보다 생각이 바르지 못한 사람이 일으킨다. 바르지 못한 생각으로 문제를 일으키니 결과적으로 성격이 나빠 보인다. 이 부분에서 생각할 사람이 순자(筍子)다. 흔히 그의 주지(主旨)를 성악설이라 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한 바는 사람이 이익을 추구하는 본성을 좇아 행동하면 혼란과 갈등의 분쟁 상태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맹자와 반대되는 위치를 점한 순자는 교육의 역할을 강조했다.

 

물의를 빚는 사람들은 교육을 받지 않았다기보다 공부하지 않는 사람들 즉 학교 졸업과 함께 책을 놓는 사람들이다. 물론 그럼에도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탓에 문제가 빚어진다.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는 이상하고 그릇된 생각으로 엉뚱한 몽니를 부리는 것이다.

 

그들은 남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려고 한다. 그들에게 아는 척하고 싶고 지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다면 노력하라는 말을 들려주고 싶다. 단 그들의 딜레마를 모르지 않는다. 물건은 돈만 있으면 살 수 있지만 지식은 그렇지 않다. 책을 살 수 있지만 그 안에 든 내용을 일관성 있는 바른 문제의식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면 시간이 걸리고 그런 만큼 힘이 든다.

 

그래서 그들은 쉬운 길을 걷는다. 여기저기서 들은 불완전하고 불충분한 정보들을 적당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참 쉬운 일이지만 그런 어설프고 부실한 내공으로는 상대의 마음에 인상을 남기지 못할뿐 아니라 문제만 만든다.

 

2011년, 2012년 OECD가 실시한 가입국 21개국의 16세부터 65세까지의 국제성인역량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독서율에서 이런 성적을 냈다. 16 ~ 24세; 87.4%(1위), 25 ~ 34세; 85.1%(5위), 35 ~ 44세; 81.4%(8위), 45 ~ 54세; 68.8%(16위), 55 ~ 64세; 51%(21위).

 

독서률과 언어능력 사이에는 의미 있는 상관관계가 있다. 독서율 1위인 16~24세는 언어능력에서 4위에, 독서율 최하위인 55~64세는 언어능력에서 하위권에 랭크되었다. 공부하기를 바란다.

 

내가 말한 물의를 빚는 사람들이 55세에서 64세를 넘어 70세 가까운 연령대인 것은 우연이 아닌 듯 하다. 이 가운데 높은 학력(學歷)을 가진 모씨(某氏)는 책은 읽지만 문장이 너무 허술하다. 세련과 거리가 멀다. 학력과 글쓰기의 관련성을 화두로 제시해준 사람이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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