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학과 서사 공간 - 성서의 이야기 공간에 대한 현상학적 고찰 기독교 인문 시리즈 8
안용성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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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과 서사공간’은 강남구 개포로의 그루터기 교회 안용성 목사님의 책이다. 제목이 말하는 공간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인간적 또는 사회적 관계를 통해 구성 또는 생산되는 공간이다. 저자는 지도 교수인 매리 앤 톨버트 교수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제목에도 나오는 현상학은 일상에서 발견되는 공간의 경험적, 관계적 성격을 철학적 사유의 주제로 삼아 새로운 공간 개념을 제시하는 학문이다. 저자는 현상학의 관점을 빌어 서사 공간을 해석하는 시도를 “모험”이라 말한다. 책의 목표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서사(敍事) 이해다. 저자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 르페브르의 공간의 생산 등 난해한 책들을 원서까지 비교하는 수고를 거쳤고 일반 책들에 비해 수십 배의 시간을 들여 여러 차례 정독했다. 


저자는 지리학의 공간 이론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상학의 배경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고 말한다. 저자는 국내에 바슐라르, 노베르그-슐츠, 투안, 렐프, 르페브르 같은 학자들을 소개하는 글들이 현상학에 관한 충분한 이해를 종종 갖추고 있지 못해 현상학적인 내용들을 가리거나 잘못 소개한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말한다. 현상학에서 중시하는 생활세계란 일상생활에서 언제나 눈앞에 주어져 있어서 직관적으로 경험되는 세계를 말한다. 이는 객관적인 사유의 이면에 숨어 있는 근원적이면서 아직 이성적 언어로 서술되지 않은 삶의 영역을 의미한다. 저자는 후설의 모든 것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하이데거와 메를로 퐁티의 공간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초보적 정보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후설은 세계 자체를 설명하기 전에 의식을 해명한 후 세계가 의식에 어떻게 주어지는지를 탐구했다. 의식을 다루는 것이 후설의 초월론적 현상학이고, 세계를 다루는 것이 생활세계 현상학이다. 이 둘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외적 대상들에 대한 체험은 충전적(온전히 주어짐, 전면적으로 파악됨)이지도 않고 필증적(의심의 여지 없음)이지도 않다. 후설은 일부만이 지각되는 것을 가리켜 대상이 음영(陰影)을 통해 주어진다고 말한다. 후설은 어떤 대상이 우리 이성의 반성 작업에 의해 가공되기 이전의 상태 즉 충전적이고 필증적인 상태에서 그 대상을 우리에게 원본적으로 부여하는 직관이 참된 인식의 궁극적 권리 원천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후설에 의하면 의식 자체로 돌아가는 과정을 안내하는 절차가 환원이다. 환원을 방해하는 선입견이 가동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판단중지다. 현상학에 의하면 인간의 의식은 백지가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전에 어떤 대상에 대해 갖는 태도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적합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판단중지는 파괴가 아니라 유보(留保)다. 후설이 정한 판단중지의 일차적 대상은 그 시대 개별과학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자연주의 또는 과학주의적 태도였다. 그것은 세계의 실재성에 대한 소박한 믿음이다. 직관은 추리나 반성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단계적 사고의 과정을 통한 파악이 아니라 대상을 단번에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직관은 개별적 직관과 본질 직관으로 나뉜다. 개별적 대상에 대한 경험이 개별적 직관이고, 보편자로서의 본질에 대한 경험이 본질 직관이다. 판단중지와 환원, 본질직관이라는 현상학적 절차를 통해 해명되는 의식의 본질 구조는 지향성이다. 대상이 없는 의식은 없으며 의식 작용이 없는 대상도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대상은 인식된 대상이다. 우리의 지각은 사물 자체를 향해 있는 것이지 우리와 대상 사이에 놓여 있는 표상을 매개로 하여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구성이란 노에시스(파악작용)가 질료에 혼을 불어넣어(의미를 부여하여) 노에마(파악된 대상)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현상학이 말하는 현상이란 노에시스를 가리킬 수도 있고 노에마를 가리킬 수도 있다. 


현상학에서 말하는 초월과 내재는 신학에서 말하는 초월과 내재와 완전히 다르다. 기독교 신학에서 내재란 인간의 한계 내에 있는 것이다. 초월이란 인간의 한계를 넘어 신의 차원에 들어서는 것이다. 현상학에서 내재는 우리의 의식 안에 존재하는 것이고, 초월은 순수 의식이 자신을 넘어서서 대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순수의식이 지향작용을 통해 노에시스로부터 노에마로 넘어서는 것이 초월이다. 현상학은 이 의식의 초월론적 기능을 해명하는 학문이다. 초월, 직관, 구성 등 후설 현상학의 중심 용어들은 칸트로부터 연원했다. 현상학이라는 용어도 칸트가 먼저 사용했다. 


칸트에게서 무형의 감각재료들을 하나의 통일된 대상으로 구성해내는 것이 시간과 공간과 같은 감성의 형식들, 그리고 12가지 범주와 같은 오성(悟性)의 형식들이다. 후설은 칸트와 달리 우리의 인식 대상은 처음부터 하나의 통일된 대상으로 주어진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의 의식작용은 감각 작용에 의해 주어진 무형의 질료를 분석하고 종합하여 하나의 통일체로 구성해내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의 통일체로 주어지는 대상을 직관하는 것이다. 칸트는 우리가 어떤 대상을 마주 대할 때 감각을 통해 주어지는 것은 물(物) 자체(自體)가 아니라 무형의 질료(質料)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칸트의 구성(構成)은 감성에 주어진 것들을 오성의 선험적 사유 형식인 범주를 통해 구성하는 것인데 비해 후설에게서는 인식의 형식뿐 아니라 내용까지도 선험적이다. 


후설의 구성은 대상성에 의미를 부여하여 명료하게 밝히는 것 또는 대상을 표상하게 만드는 작용일 뿐이다. 칸트의 직관이 감성적 대상에 대한 감성적 직관이라면, 후설의 직관은 범주적 대상에 대한 범주적 직관이다. 후설에게서 구성이란 실제 주어진 것보다 더 많이 사념(思念)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구성이란 지각의 지향성이 과거에 이미 주어진 의미와 현재 주어진 의미를 종합하면서 더 높은 단계의 새로운 의미를 지향하며 대상을 파악하는 작용이다. 후설은 의식을 먼저 해명한 후 이 의식에 어떻게 세계가 주어지는가, 하는 관점에서 세계에 접근했다. 즉 그는 세계가 하나의 지향적 대상으로 초월론적 주관성에 주어지고 양자가 서로 연관을 맺는 방식에 주목했다. 


발생적 현상학은 정적(靜的) 현상학과 대별되는 개념이다. 정적 현상학은 의식의 형식적이고 보편적인 구조만을 고려하고 시간성과 역사성을 배제했다. 발생적 현상학에 의하면 우리의 의식이란 체험의 흐름으로서 그 흐름 속에 있는 다양한 체험들은 시간 의식에 의해 하나로 종합되고 통일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대상 지식은 최초의 앎의 시점이 있고 이로부터 지속적으로 내 안에 침전되어 나의 지속적인 획득물이 된다. 후설은 에피스테메에 밀려 천시되고 억견(臆見)으로 간주되던 독사(doxa)를 근원적인 영역이자 철학의 우선적 대상으로 격상시켰다. 지평이란 어느 지점에서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가시권을 의미한다. 


인식론적으로 지평이란 한 대상이 주체에게 드러날 수 있는 가능한 의미의 한계다. 우리의 의식이 대상을 지향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 대상만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암묵적으로 그 대상의 가능한 의미의 지평을 이해하고 있다. 꽃을 예로 들면 색(色)만이 아니라 모양, 질감, 향(香) 등 여러 지평이 있고 이것들을 포괄하는 한 차원 높은 의미 연관의 총체 즉 보편적 지평이 존재한다. 후설은 이를 생활세계라 규정했다. 외부 세계를 지각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신체는 대상을 정확히 감지하기 위해 움직인다. 후설에 의하면 목표를 인식하기 위한 감각기관들의 활동, 지각 대상을 가능한 한 전면적으로 주어질 수 있게 하는 운동들이 키네스테제다. 


후설에 의하면 감각은 지각되지 않고 체험된다. 후설은 우리가 어떤 태도로 세계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세계가 우리에게 전혀 다르게 경험될 수 있음을 잘 알려준다.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일은 인간 존재를 인식하는 일과 분리될 수 없다. 하이데거는 후설의 현상학을 이어받아 한편으로는 후설 초기의 정적(靜的) 현상학을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해석학적 현상학으로 발전시켰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세계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곧 거주하는 것이고 세계와 친숙한 관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며 세계 곁에 있는 것이라 말한다. 인간 실존은 공간과 분리될 수 없다. 데카르트가 그리는 것처럼 인간이 있고 그 밖에 공간이 있어 인간이 공간을 대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이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는 인간 실존의 일부가 된다. 서사학은 서사(narrative)를 이야기(story)와 담론(discourse)로 나눈다. 이야기는 내용, 담론은 내용을 공유하는 방식이다. 화자(話者)는 narrataor라 한다. 수화자(受話者)는 narratee라 한다. 화자와 수화자의 공간은 등장 인물의 이야기 세계와 다른 층위를 이룬다. 채트먼은 담론과 이야기의 구별에 따라 서사 공간을 담론 공간과 이야기 공간으로 나눈다. 이야기 공간은 등장인물과 사건 그리고 배경으로 구성되는 이야기 속 공간이다. 담론 공간은 화자가 수화자에게 이야기를 서술하는 담론 과정에서 형성되는 이야기 밖 공간이다. 등장인물은 이야기 세계 내에 있는 것들만을 인지할 수 있고 그의 시점 역시 이야기 공간 안에 제한되어 있다. 화자는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묘사를 통해 이야기 공간의 한계를 임의로 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의 창조자인 화자는 이야기의 어디에든 동사에 존재할 수 있다. 


언어 서사물에서 영화(映畫)의 카메라 역할을 하는 것은 화자의 위치다. 화자가 어느 위치에서 누구의 시각으로 이야기를 서술하느냐가 담론 공간의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다.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은 공간이라는 주제를 본격적으로 철학의 핵심 주제로 끌어올린 책이다. 수학적 공간의 특징이 등방성이라면 체험된 공간의 특징은 비등방성이다. 메를로 퐁티에 따르면 체험된 공간은 정위(定位)된 공간(oriented space)이다. 체험된 공간은 비균질적이다. 순수하게 기하학적으로 보면 왼쪽과 오른쪽은 위와 아래, 앞과 뒤처럼 어느 쪽이 다른 쪽보다 우월하다 할 만한 동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두 방향에 서로 다른 가치를 둔다. 우리말이나 영어에서 오른쪽이 바른(right)쪽인 것처럼 독일어에서 오른쪽을 의미하는 recht는 구불거리는 곡선과 다른 똑바름을 의미하고 richtig(참된, 정당한)는 gerecht(공평한, 정의로운)과 통한다.(160 페이지) 


체험된 공간에는 중심이 있다. 볼노프는 이 체험된 공간의 기점은 두 눈 사이 비근이 위치한 곳이라고 말한다. 내가 좌우로 고개를 돌려 주위를 돌아볼 때 내 시선은 극좌표계의 벡터이고 사물을 바라보는 나 자신이 좌표의 기점이 된다. 이것이 현상학자들의 공간 개념이다. 우리는 공간의 중심에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팽이가 제 집을 지고 다니듯 공간을 가지고 다니지는 않는다. 우리가 공간 속에서 움직인다고 말하는 것은 공간이 고정되어 있고 우리가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옮겨간다는 의미다. 그러나 공간은 그저 나의 외부에 독립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관련을 맺고 있다. 이렇게 공간은 양면적이다. 나를 중심으로 공간이 형성되지만 나는 동시에 공동체의 중심에 의해 정위된 공간 속에서 움직인다. 중심은 상황에 따라 더 많아질 수 있으며 서로 다른 중심들은 복합적인 위계질서를 갖는다.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에서 기존의 전기적 비평과 정신분석적 비평이 인과성의 원리에 입각해서 시적 이미지를 작가의 과거에 일어난 어떤 일의 결과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한다. 우리가 이러한 실증주의적 관점과 다르게 문학 작품에 담긴 시적 이미지들에 감동을 느낀 독서 체험을 되돌아보면 우리는 그것이 작가의 생애와는 무관하게 이루어졌음을 알게 된다. 즉 우리는 작가의 생애를 전혀 모르고도 문학 작품에서 감동을 받는다. 우리가 시인이 제공하는 말의 행복, 시인의 생애의 드라마마저 뛰어넘는 그 말의 행복을 체험하기 위해 시인의 괴로움들을 살아 보아야 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이미지는 과거의 어떤 원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미지의 번쩍임에 의해 먼 과거가 메아리들로 울리는 것이며 그 새로움과 악몽 속에서 시적 이미지는 그 자체의 존재와 그 자체의 힘을 가지는 것, 그래서 하나의 직접적인 존재론이라 부를 수 있다. 


따라서 상상력은 기억의 재현이 아니라 이미지를 산출해내는 능력이다. 회화로 말하자면 그것은 외부 세계의 빛의 반영이 아니라 내적인 빛에 참여하는 것이다. 바슐라르는 이미지와 메타포를 구별한다. 메타포란 표현하기 어려운 인상에 구체적인 형태를 주기 위해 있는 것인데 그 인상은 다른 정신적 존재에 관련된 것이다. 그와 반대로 절대적 상상력의 소산인 이미지는 그의 전 존재를 상상력으로 얻는다. 바슐라르는 메타포는 단지 조작된 이미지, 깊고 참되고 실제적인 뿌리가 없는 조작된 이미지에 불과하며 그것은 한 번 사용되고 버려질 순간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바슐라르는 시란 정신의 현상학이 아니라 영혼의 현상학이라 말한다. 일반적으로 몽상이라 하면 흔히 꿈과 혼동되는 정신적 차원을 말한다. 그러나 시적인 몽상, 스스로를 즐길 뿐 아니라 다른 영혼들에게도 시적인 즐거움을 마련해주는 그런 몽상이란 단지 꿈꾸는 것이 아니다. 


정신은 꿈을 꾸며 휴식할 수 있지만 시적인 몽상 속에서의 영혼은 긴장 없이 휴식한 채로 맑게 깨어 활동한다. 바슐라르는 하이데거를 이렇게 비판한다. “인간은 성급한 형이상학자들이 가르치듯 세계에 내던져지기에 앞서 집이라는 요람에 놓인다. 그리고 우리의 몽상 가운데서 집은 언제나 커다란 요람이다. 삶은 잘 시작된다. 삶은 집의 품속에 포근하게 숨겨지고 보호되어 시작된다.” 인문지리학자들은 장소(place)를 공간(space)과 구별하여 특화한다. 장소란 한 마디로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과 관계를 맺는 공간이다. 


누가(복음)-(사도)행전 서사의 중심은 예루살렘이며 그 가운데서도 성전이 중심점 역할을 한다.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에서 자행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탄압과 박해를 반복해서 보여준다. 다른 복음서들에서 갈릴리는 예수께 우호적인 장소, 예루살렘은 예수께 적대적인 장소로 성격화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예루살렘이 중심적인 위치에 놓이게 되었을까? 누가복음의 모든 이야기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예루살렘으로 끝난다. 물론 누가복음에서도 예루살렘은 예수께 적대적인 장소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예루살렘은 많은 긍정적 측면들을 가지고 있다. 예루살렘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라는 비극적 사건이 일어난 장소이지만 부활과 부활 현현, 그리고 승천이 이루어진 영과의 장소이기도 하다. 


누가복음에서는 부활하신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을 만난다. 마태복음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는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난다. 사도행전에서도 예루살렘은 유대교의 중심지로서 제자들을 박해하는 장소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한 교회의 발상지이자 중심지이기도 하다. 예루살렘은 지리적 공간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예루살렘이 지리상의 한 객관적 공간이 아니라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그 정체성이 결정되는 장소 또는 사회적 공간임을 의미한다.(324 페이지) 누가-행전의 예루실렘은 이미 정립된 중심이 아니라 이제 바야흐로 중심으로 세워져 가는 과정 중의 공간이다. 예수의 공생애 첫 선포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고 예수는 종종 하나님 나라가 이미 사람들 가운데 와 있음을 강조하신다. 


누가복음이 예루살렘 공간의 재전유로 특징지을 수 있다면 사도행전은 그 중심으로부터 로마 제국의 공간을 재전유하며 세계를 다시 건설해가는 과정으로 성격화할 수 있다. 서로 적대적인 두 그룹이 동일한 장소를 동일시의 대상으로 삼을 때 거기에 대립과 갈등이 불가피하다. 그 대립과 갈등은 예루살렘 공간에 대한 예수의 재전유로 나타난다. 가장 두드러진 예는 예수의 성전 개혁이다.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는 마치 미리 계획하고 작정하신 듯 곧바로 성전에 들어가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며 성전의 질서를 바로잡으신다. 사도행전 1장 8절을 보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된다는 의미다. 나아가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된다는 의미다. 


땅끝은 어디인가? 1) 스페인이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선교 목표지를 스페인으로 제시했으며 바울이 로마에 가는 이유는 스페인으로 가는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바울은 스페인이 땅끝이라 말하지 않으며 스페인이 최종 목적지라 말하지도 않는다. 2) 로마다. 사도행전의 이야기가 로마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은 미완성으로 끝났고 독자들에게 남은 이야기를 완성하도록 요청하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로마가 이야기의 끝이라 보기 어렵다. 3) 땅끝은 지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인종적 개념이다.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은유라는 것이다. 그러나 땅끝이 가지는 지리적 함의를 무시하기 어렵다. 우리는 바울이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를 대상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단순하게 땅끝을 은유로 해석하는 입장을 따를 수 없다. 4) 땅끝이란 지구상의 어느 한 지점이 아니라 복음이 전 세계의 모든 곳으로 확장될 것을 보여주는 표현이며 이것은 지리적이고 인종적인 범주를 포괄한다. 


이것이 가장 설득력 있다. 이 입장은 현상학적 입장으로 뒷받침된다. 현상학적 공간에서 세계는 중심에 있는 세계축으로부터 경계선까지 이어진다. 땅끝이란 지도상의 어느 한 지점이 아니라 경계선을 가리킨다. 고대인들은 전 세계가 하나의 땅 덩어리로 되어 있고 그 세계 밖에는 바다가 있으며 바다 밖에는 낭떠러지가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세계관에서 땅끝이란 땅과 바다가 만나는 경계선 즉 땅의 경계들이다. 이러한 구도에 비추어 볼 때 땅끝까지 증인이 되라는 말은 곧 온 땅에 그리고 모든 민족에게 증인이 되라는 말이다. 땅끝으로 가는 것이 단지 중심으로부터 경계들을 향해 이동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중심 자체가 이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수의 중심을 세우는 것이다. 


누가 - 행전은 중심을 다시 세우고 공간을 재전유하는 일뿐 아니라 이러한 중심 이동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예수는 예루살렘을 재전유하여 중심으로 세우지만 예루살렘은 결코 절대적이거나 고정된 중심이 아니다. 이 문제가 정면으로 부각된 사건이 스데반의 순교다. 스데반은 보수적인 유대주의자들에 의해 고발을 당하는데 그 죄목은 그가 율법과 성전을 모독했다는 것이다. 스데반은 이동하는 중심을 성전의 본질로 제시하면서 예루살렘에 본거지를 두고 자신들을 중심으로 절대화하려 하는 유대교 권력의 근거를 해체한다.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를 대신해 성령이 일한다. 사도행전의 중심은 예루살렘이지만 그 중심은 한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제자들이 가는 곳마다 새로운 중심이 세워진다.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 과정에서 머무른 도시들을 하나씩 세밀히 연구해 볼 수 있고 사도 바울이 개개의 도시들에 대해 가지는 장소감을 비교해 볼 수 있다. 각 도시들이 이야기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저울질해 볼 수도 있다. 이동하는 중심은 유목민의 생활 패턴에 가깝다. 유목민들에게 장소보다 영역이 더 중요하다. 길에 의해 구성되는 공간을 호돌로지라 한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면도 로마를 배경으로 묘사된다. 이 로마 제국의 영역은 누가복음에서는 주로 배경에 머물다가 사도행전에서는 점점 더 전경으로 부각되어 나타난다. 이 점에 주목하며 그 과정을 분석해볼 수 있다. 그 영역이 하나님 나라로 변해가는 과정을 살펴볼 수도 있다. 


의도하지 않은 길의 배후에는 사도행전의 핵심 주제 중 하나인 성령의 이끄심이 있다. 성령행전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사도행전은 모든 중요한 사건의 길목마다 성령이 등장하여 친히 그 사건들을 주도한다. 흩어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 주제를 잘 드러내준다. 장소보다 통로와 방향이 중요한 부분이 있다. 사도행전 8장에서 시작되는 첫 번째 이야기에서 사마리아에서 활동하던 빌립에게 주의 천사가 나타나 “일어나서 남쪽으로 나아가서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가거라. 그 길은 광야 길이다.”라고 말한다. 


장소는 정해지지 않은 채 방향만이 주어진다. 그리고 그 통로의 목표점은 특정 장소가 아니라 또 다른 통로다. 책은 이렇게 끝난다. 현상학적 방법론의 매력을 느끼기에 충분한 책이 아닐 수 없다. 호돌로지라는 말을 안 것이 다행이다. 도시 골목이 단순한 보행 경로가 아니라 정동적·서사적 공간으로 기능할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 호돌로지 이론과 체화된 서사 개념을 적용하여, 보행자의 이동 경로와 감각적 경험이 공간적 의미를 형성하는 방식을 분석한 글이 있다. 읽을 글이 많아졌다. 토폴로지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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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지과학자가 들려주는 눈덩어리 지구 이야기 - 적도까지 얼음으로 덮인 적이 있다고? 그림으로 보는 극지과학 10
    유규철.이용일 지음 / 지식노마드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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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레이크 해협은 Drake Passage라 한다. 대서양과 태평양을 가르는 해협이고 남미대륙과 남극대륙 사이의 바닷길이다. 지브롤터 해협은 Strait of Gibraltar라 한다. 대서양과 지중해를 가르는 해협이다. homo sapiens는 20만년전 등장한 인류이고 homo sapiens sapiens는 5만년전에 등장한 현생인류다. 해협 이야기를 하다가 호모 이야기를 하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천신만고 끝에 남극에 갔다 해도 전혀 쓸모 없는 땅이라는 사실에 절망했을 것이란 말을 하기 위해서다. 


    빙하기란 용어는 19세기 식물학자 카를 쉼퍼가 처음 제안했다. 일반적으로 과거 260만년전인 플라이스토세부터 지구의 평균 기온이 상대적으로 낮았던 시기를 빙하기라 하고 상대적으로 높았던 시기를 간빙기라 한다.(1만 2천년전부터 현재까지는 홀로세이다.) 큰 기후 변화 주기 내에 작은 기후 변화들이 요동치는 것이 순리다. 빙하기와 간빙기는 전 지구적인 평균 기온 변화와 지속 시간을 기준으로 정해진다. 지속 시간은 수백~수천년이다. 최초의 빙하기는 선캄브리아기인 24억년전으로 추정한다. 지구 탄생 후 21억년이 지나서였다. 최초로 증거가 발견되었다는 뜻이지 역사상 최초라는 의미는 아니다. 


    기후 지시자는 물리적으로, 화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기후에 따라 달라지는 인자들이다. 빙하 시료의 얼음 기포 내에 갇힌 온실가스가 한 예이다. 전 지구적인 기후변화 보유자에서 동일한 시기에 나타나는 비슷한 전 지구적 기후변화가 감지된다면 우리는 그 시기를 지구 역사에 나타난 빙하기나 간빙기로 지정할 수 있다. 


    지구 궤도 변화의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요인은 이심률, 자전축의 기울어짐, 세차운동이다. 이런 지구 궤도의 주기적 변화는 약 23000년(세차운동), 40000만년(지구 자전축의 기울기), 10만년(이심률) 주기로 지구 기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외에 장기적 관점에서 현재와 다른 과거의 기후 변화 요인은 지각 운동과 관련이 있다. 기후는 위도에 따른 태양 복사량의 차이와 대기의 해양순환에 따라 달라진다. 


    1만 2천년전부터 현재까지 홀로세 지질시대에서 소빙하기는 1350년부터 1850년 사이에 나타났다. 이때를 제외하고 나머지 시기는 따뜻했다. 소빙하기 내내 추웠던 것은 아니다. 태양에 흑점이 많으면 태양의 대류가 활발해 지구에 도달하는 태양 복사에너지가 많아진다. 


    눈덩어리 지구 가설을 보자. 지구의 해양과 대륙 모두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고 가정하는 이론이다. 탄생 이후 초기 지구가 마그마 바다로 덮여 데워진 상태에서 서서히 식어갔다고 추측하는 상황에서 눈덩어리 지구 가설은 논란을 낳았다. 암석은 지구의 역사를 담고 있는 기록자이다. 지질학자들이 눈덩어리 지구를 가정할 수 있었던 것은 다이아믹타이트 때문이다. 각진 암석 덩어리와 자갈부터 점토까지 불규칙하게 혼합된 퇴적상을 보여주는 사암(砂巖)이다. 오직 극지역의 빙하 주변 육상과 해양 퇴적물에서 찾을 수 있다. 


    육상의 지질 기록은 침식 등으로 연속적이지 않지만 해양 퇴적층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지구의 지표 환경 기록을 연속적으로 가지고 있어 암석 퇴적상을 현생 퇴적상과 서로 대조해 볼 수 있다. 유빙운반역(流氷運搬礰)도 과거 빙하기의 일면을 볼 수 있는 과학적 증거다. 높은 지대에 두껍게 쌓인 빙하는 무게에 따른 중력에 의해 낮은 지대로 흐른다. 이렇게 빙하기 이동을 하는 과정에서 육상의 암석 덩어리와 조각들은 빙하 바닥에 붙어 운반된다. 빙하 바닥의 암석은 갈려 거친 돌이 만들어진다. 


    빙하가 해안가에 이르면 지반이 더 이상 빙하를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려 바다로 흘러들어 유빙이 생성된다. 다량의 유빙이 바다로 운반되어 녹을 때 유빙에 붙어 있는 암석 파편이 바다 밑으로 떨어진다. 이때 떨어진 역들이 퇴적물에 드문드문 섞여 빙하 환경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퇴적상을 만든다. 이 역들의 표면에 운반 도중 빙하가 긁고 지나간 흔적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극지환경에서만 볼 수 있는 해양지질학의 퇴적물로 생각했지만 적도 지역을 포함해 저위도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되었다. 이를 근거로 과학자들은 오래전 지구에 전지구적인 얼음 세상이 존재했다는 가설을 세웠다.


    다이아믹타이트, 호상 점토 퇴적물, 빙하가 녹은 물에서 생성된 하천 퇴적물, 암석 표면의 빙하 흔적에서 눈덩어리 지구의 강력한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지구과학계의 혁명과도 같은 판구조론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눈덩어리 지구 가설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판이 움직인다는 살아 있는 증거는 해저 지각에 남아 있는 잔류자기의 방향이다. 지구 자기장은 계속 변해왔다. 잔류자기는 암석이나 퇴적물에 남아 있는 과거의 지자기다. 퇴적물이 쌓이면서 잔류자기 배열이 고정된다. 지각판이 이동하면 그 암석의 지자기 방향은 점차 시간적인 자기장과 달라질 것이다. 


    두꺼운 얼음으로 덮인 바다는 산소 농도가 낮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환경에서 호상 철광층이 생성된 적이 있다. 세 번(24억년전, 7억 2천만년전, 6억 5천만년전)의 눈덩어리 빙하기는 발생 시기가 서로 크게 달라 각기 원인이 다를 수밖에 없다. 45억년전에서 25억년전까지 적어도 20억년 동안 지구에는 산소가 없었다. 원시 생명체는 풍부한 대기 성분을 토대로 살아야 한다. 하지만 지구가 물바다 행성으로 바뀌면서 생명체는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생명체가 대기에서 수소를 만들기보다 너무도 풍부해진 물에서 수소를 추출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그 결과물이 시아노박테리아의 출현이다. 


    중요한 점은 그들이 수소를 만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광합성을 하는 과정에서 산소라는 부산물을 만든 것이다. 갑자기 급격하게 늘어난 대기 산소가 따뜻한 기후를 유지하도록 이어주는 온실가스의 급격한 산화(온실가스 제거, 메탄 제거)로 이어져 빙하기를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80 페이지) 극지방부터 얼기 시작한 지구는 얼음이 많아지면서 태양빛을 더 많이 반사해 결빙이 급격하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알베도(빛 반사) 지수는 물이 0.1, 육지는 0.3, 얼음은 0.45-0.65, 신선한 눈이 약 0.9다. 지구 전체가 얼어있었다면 지구로 들어오는 태양빛은 거의 우주로 반사되기에 지구는 영원히 얼음 세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 눈덩어리 지구 사건이 영원히 지속되지 못한 이유를 찾아야 한다. 지구를 덮고 있던 얼음을 녹일 수 있는 강력한 힘은 지구 내부의 뜨거운 힘 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메탄 같은 온실가스가 영구동토층과 해양 퇴적층을 뚫고 대기로 올라와 영구적일 것 같았던 눈덩어리 지구를 사라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화산 활동으로 빙하기가 올 수 있는 주된 요소는 이산화황을 포함하고 있는 에어로졸(화산재)이다. 대기로 넓게 퍼진 분출 물질은 태양빛이 지표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방패 역할을 해 지구 기온을 떨어뜨린다. 기온의 하락으로 고위도 빙하의 면적이 넓어지면서 알베도가 커지고 눈덩어리 빙하기가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완벽한 얼음 세상이라던 당시에 물이 순환하거나 얼음이 녹았던 활동의 증거가 일부 나타났다. 그래서 완전한 눈덩어리가 아닌 진창눈덩어리 지구(slushball earth), 눈덩어리에 가까운 지구(near snowball earth)를 제안했다. 


    저자는 빙하기 시대를 준비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남극대륙이라 말한다. 남극 대륙은 지구 기후 조절 요인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기에 환경적으로 보호되어야 할 곳이다. 눈덩어리 지구 이론은 가설이다. 첫 부분부터 흥미롭게 읽었지만 중반부 이후 가설 자체에 대한 논란, 해명되지 않은 부분 등이 이어져 긴장감이 덜했다. 그림으로 보는 극지과학 시리즈의 한 책으로 150 페이지 ~200 페이지 정도로 분량이 정해져 있어 아쉬운 점도 있다. 더 상세하게 조명되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저자가 추천한 ‘우리는 지금 빙하기에 산다’를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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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천역 광장에 설치된 주목(朱木) 화분을 보며 붉은 색을 의미하는 한자들 가운데 짙게 붉을 강이란 글자가 들어 있는 능마강소(凌摩絳霄)를 생각했다. 장자(莊子)가 말한 북해의 물고기 곤(鯤)이 봉(鳳)이 되어 날아오르는 것과 관련한 의미라고 들었다. 유곤독운(有鯤獨運) 능마강소(凌摩絳霄)가 한 세트이다. 도남(圖南)을 생각하게 하고 미수(眉叟) 선생님을 생각하게 한다. 주역(周易)의 비룡재천(飛龍在天)과 연관지어 생각해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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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 속에 숨겨진 진실
      문희수 지음 / 연세대학교출판부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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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 속에도 진실이 숨어 있다. 자연이 기록한 이 내용물들은 좀체 지워지지 않으며 쉽게 알아보기 어렵다. 문희수 교수의 ‘돌 속에 숨겨진 진실’은 고체 지구를 구성하는 단단한 암석 속에 숨어있듯 담긴 내용을 다룬 책이다. 그랜드 캐니언편에서 인상적인 대목을 만난다. 대협곡의 맞은편은 16~29km나 떨어졌다는 내용이다. 이는 아프리카와 유럽 사이(지브롤터 해협)가 13(또는 14)km라는 사실과 묘하게 대조를 이룬다. 그랜드 캐니언을 만든 강은 콜로라도 강이다. 그랜드 캐니언을 최초로 탐험한 사람이 웨슬리 파웰이다. 그는 미국 지질조사소(USGS)의 창설자이기도 하다. 그랜드 캐니언의 규모는 놀랍고 시간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랜드 캐니언을 연상하는 색을 하나 꼽으라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적갈색을 연상할 것이다. 암석 속의 철분이 만들어낸 결과다. 이런 색을 내는 철은 3가 철로 산화된 상태다. 


      오랜 지구를 관찰하면 지각은 정적이거나 안정된 대상이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랜드 캐니언이 해침(海浸)과 해퇴(海退)를 반복하던 과정을 중단하고 육지로 융기를 시작한 것은 전적으로 지판의 이동 결과다. 바로 북아메리카판이 융기한 그 시기가 그랜드 캐니언이 만들어진 시점(始點)이다. 제임스 허턴은 지층에 시간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인물이다. 시간을 발견한 사람이라는 의미다. 시간의 개념은 시간적 선후관계를 밝힌다는 의미이고 이는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주에 의해 한꺼번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개념을 뒤집는 것이었다. 허턴은 인간이 관찰할 수 있는 한도에서 이 세계는 시작도 끝도 없다는 말을 했다. 이는 지층이 포함하고 있는 시간은 지금까지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장구(長久)하다는 말이다. 


      많은 시간 간극(間隙)을 보여주는 말이 부정합(不整合)이다. 이는 시대가 다른 두 지층의 경계면을 나타내는 말이다. 두 지층이 시간차 없이 연속적으로 쌓인 경우를 정합이라 하며, 시간차를 두고서 퇴적된 경우를 부정합이라 한다. 경사(傾斜) 부정합은 조산운동으로 인해 지층이 기울어지고 침식 및 침강을 겪은 후 새 지층이 퇴적된 것을 말한다. 부정합면을 기준으로 상하 두 지층의 경사가 다르다. 본문에 두 개의 성론(成論)이 나온다. 화성론(火成論; Plutonism)과 수성론(水成論; Neptunism)이다. Pluto란 그리스 신화의 지하 세계의 신이고 Neptune은 바다의 신이다. 둘 다 은유(隱喩)다.(우리는 은유 없이 사유할 수 없다.) 


      수성론자들은 현무암을 가열했다가 느린 속도로 냉각시키면 유리질이 된다고 했다. 그러나 유리질이 아니라 결정질 현무암이 만들어진다. '지질학 원리'를 쓴 라이엘은 허턴이 사망한 1797년에 태어났다. 허턴이 밝힌 원리를 라이엘이 확립시킨 동일과정설은 현재는 과거의 열쇠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수성론, 격변설의 잘못을 증거한다. 알프레드 하커(1859-1939)는 화성암을 지층들 사이의 의미 없는 돌덩이가 아니라 단층, 습곡과 같은 지각변형이나 지각운동 등과 밀접하게 관계되는 대상으로 해석하려고 시도했다.(71 페이지) 하커가 생각한 것은 오늘날 불의 고리 또는 안산암대(安山巖帶)다. 판구조론이 정립된 후 불의 고리에서 일어나는 화성(火成) 활동은 대륙 지각 아래로 밀려들어가는 해양지각과의 소멸경계(섭입경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임이 밝혀졌다. 


      지질시대에 따른 환경 변화는 생물종에게도 나타나게 마련이다. 화석만으로 알 수 있는 시대는 상대적인 개념의 시간으로 지층들의 선후관계를 말해줄뿐 확실한 연령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가장 신뢰할 만한 암석 연령 측정방법은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하는 것이다. 반감기가 5730년인 탄소는 10만년이 넘는 대상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 칼륨 40이 아르곤 40이 되는데 반감기는 12.5억년이다. 우라늄 238이 납 206이 되는데 반감기는 무려 45억년이다.(74 페이지) 이런 핵종 원소들을 이용한 방사성 시계는 오직 화성암에서만 작동한다. 화성암들은 마그마로부터 만들어지기 때문에 결정화되는 순간에 자원소를 가지지 않아 방사성 원소를 포함하고 있는 광물들이 측정 대상들이 된다. 


      퇴적암들은 방사성 원소들을 이용해 암석의 생성연대를 측정할 수 없다. 방사성 원소들을 함유한 광물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퇴적암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퇴적암들은 다른 화성암, 변성암, 퇴적암들이 풍화침식에 의해 만들어진 퇴적물들이 모여 고결된 암석이다. 따라서 각개 입자들은 제각기 다른 시기에, 그리고 다른 장소에서 만들어진 광물들이다. 지구의 나이가 현세에 가까워질수록 지층에 기록된(숨겨진) 정보의 양은 증가하는 것을 반영해 신생대는 기(紀)와 세(世)로 세분된다. 고제3기는 팔레오세, 에오세, 울리고세로, 신제3기는 마이오세와 플라이오세로, 제4기는 다시 플라이스토세와 홀로세로 구분된다. 


      다른 행성과 마찬가지로 초기 지구가 수많은 운석과 파편들의 충돌에 의해 오늘날의 지구 크기로 성장하는 데 약 1억년이 소요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83 페이지) 명왕누대를 헤이디언 이언(Hadean Eon)이라 한다. 지하세계를 의미하는 하데스에서 유래한 말이다. 철질 물질은 암석을 구성하는 다른 결정질 물질들보다 용융 온도가 높아 선택적으로 먼저 녹았고 비중이 높아 지구 중심으로 내려가 핵을 구성하였다. 1882년 달이 지구로부터 떨어져 나갔다는 이론을 처음 주장한 사람은 오스몬드 피셔다. 그는 아마도 태평양은 달이 지구로부터 떨어져나갈 때 만들어진 일종의 탄생흔이라고 주장했다.(91 페이지) 물론 이는 틀린 말이다. 태평양은 달과 화학적으로 다르고 훨씬 젊기 때문이다. 


      과학에는 정설(定設)이 제시되기 전에 많은 가설이 있을 수밖에 없다. 마크 트웨인은 이를 두고 “과학에는 뭔가 매혹적인 게 있다. 한 가지 사실이라는 아주 사소한 투자 대상에서 그토록 다양한 추측들을 수익들로 거둬들이니 말이다.“란 말을 했다. 지구 역사 초기에 대양을 직접 강타한 자외선은 물을 산소와 수소로 분해했다. 가벼운 수소는 우주로 날아갔고, 산소는 대기에 집적되어 양이 늘어났다. 광합성을 하는 생명체의 등장으로 생명체로부터 배출되는 산소가 늘었다. 물속에서 만들어진 산소는 철과 화학적인 반응을 일으켜 산화철을 대양의 바닥에 침전시켰다. 철광은 자철석과 적철석 등 철산화광물층의 층과, 철분이 결핍된 셰일이나 처트층이 띠 모양으로 반복되면서 퇴적되었다. 이를 호상철광층(縞狀鐵鑛層; Banded Iron Formation; BIF)이라 한다. 


      처트층과 철광층이 교대로 나타나는 것은 낮에는 광합성 작용으로 산소가 공급되어 철광층이 침전되고 미생물의 활동이 뜸해지는(상대적으로 산소가 부족한) 밤에는 규산이 침전되었다고 설명한다. 좀 더 두꺼운 규모로 반복되는 층은 계절적 변화로 설명한다. 여름철에는 생물체의 활동이 활발해 주로 철광물들이 침전되고 겨울철에는 생물체의 활동이 미약해 주로 처트가 생성된다는 것이다.(113 페이지) 붉게 보이는 층은 자철석 – 적철석 등으로 구성된 철 광물층이고, 밝게 보이는 층이 함철(含鐵) 처트(굳고 미세한 입자의 규암으로 이루어진 퇴적암) 층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와 리처드 포티의 대립(?)도 흥미롭다. 굴드는 생명의 역사를 담은 테이프를 버제스 셰일까지 되감은 후에 똑같은 출발점에서부터 다시 돌리면 인간과 같은 지능을 가진 생물이 출현하게 될 확률은 놀라울 정도로 낮다고 말했다. 리처드 포티는 버제스 셰일에서 산출되는 화석에 대한 기존 기록에 등장하는 많은 새로운 문(門) 분류는 잘못된 점이 있다는 점을 밝히고 이런 몸집이 커지고 단단한 껍질을 가진 생물종의 출현을 위한 진화적 토대는 선캄브리아 시대에 마련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밀란코비치는 지구 자전축의 기울기 차이가 제임스 크롤이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점을 확인했다.(138 페이지) 


      고생대 데본기에 산호(珊瑚)가 번성하여 산호초(珊瑚礁)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산호는 성장을 위해 빛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물이 얕고 밝아야 한다. 따라서 퇴적물이 유입되는 양이 많은 지역에서는 수온이 높아도 살지 않는다. 산호의 폴립이 석회질 물질을 분비하는 능력이 없었다면 산호초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산호의 성장 속도는 더디다. 산호초가 차지하는 면적은 전체 해양의 0.17%에 지나지 않지만 전체 해양 생물종의 1/4 이상이 산호초를 중심으로 서식하기에 산호초는 해양의 열대 우림이라 불린다. 산호는 바위에 붙어 사는 동물이다. 산호 내에는 미세한 조류(藻類)인 미생물이 살고 있다. 이들은 대사활동을 통해 산호에게 산소와 먹이를 제공한다. 


      백악기 말의 공룡의 절멸이 운석 충돌만의 결과로 설명하는 것에 회의적 시각을 갖는 학자들도 있다. 이 시기에 일어난 인도의 데칸 트랩을 만든 대규모 화산활동을 원인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운석 충돌이 공룡의 절멸에 더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197 페이지) 운석 충돌이 공룡을 포함한 많은 생물종들의 절멸을 일으켰지만 그런 중에도 살아남은 종들도 많다. 조류(鳥類)와 포유류(哺乳類) 등이다. 폴 스튜어트는 ‘갈라파고스; 세상을 바꿔놓은 섬‘에서 갈라파고스의 화산 분출구를 지옥의 입이라 표현했다. 지옥의 입은 맨틀 플룸이 지표에 도달하는 지점을 의미하는 열점(熱點)을 이르는 말이다.(245 페이지) 


      플룸은 거대한 에너지의 경로를 의미한다. 맨틀 플룸은 주변의 암석들보다 상대적으로 고온으로 밀도가 낮아 1년에 약 10cm 속도로 상승한다. 맨틀 플룸이 지표 가까이에 상승하면 압력이 감소하면서 플룸의 일부가 녹는다. 이런 부분 용융이 일어나는 깊이는 150km 정도다. 그 이하의 깊이에서는 온도가 암석을 녹이기에 충분하지만 압력이 높아 암석을 녹일 수 없다. 저자는 판구조론의 등장은 지질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었으며 지금까지 구차한 이론으로 설명을 시도하였거나 아예 설명하기 곤란했던 거대한 지질현상들을 명쾌하게 바라 볼 수 있는 시각을 마련해 주었다고 말한다.(269 페이지) 물론 저자가 말했듯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많은 문제들이 일거에 해결되었다. 


      섭입대 하부에서도 부분용융이 일어난다. 염기성의 해양지각과 산성의 대륙지각이 섞이므로 중성 마그마가 만들어진다. 불의 고리를 안산암대라 한다. 용암, 화산재, 암설(巖屑) 등이 층층이 쌓여 만들어진 화산을 성층화산이라 한다. 주의할 것은 화산재는 화산회(火山灰)가 아니라 화산재(火山滓)라는 점이다. 재(滓)는 밀가루 같은 찌꺼기를 의미한다. 대부분의 지구의 큰 주름살격인 큰 산맥들은 요즘에는 지판의 이동에 의한 조산운동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초기 지질학자들에게는 지질학적 사유가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지향사(geosyncline)라는 개념을 동원했다. 어떤 퇴적 분지에서 퇴적층이 만들어져 퇴적층이 두꺼워지면 높은 압력이 작용한다. 그 압력으로 지층은 침강하며 다른 한쪽은 융기가 일어나는데 이게 바로 산맥을 만든다는 것이다. 


      19세기 중엽 미국의 지질학자 제임스 홀과 제임스 다나에 의해 제안된 지향사 개념은 판구조론이 등장하는 이전까지 산의 형성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받아들여졌다. 지향사 이론이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대규모 산맥의 형성을 설명하는 이론으로는 결격 사유가 많은 이론이었다. 인도와 아시아 대륙의 충돌로 만들어진 히말라야 산맥은 아프리카와 유럽 대륙의 충돌로 만들어진 알프스 산맥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장대한 규모이고 만들어진 산들의 높이 또한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런 차이는 근본적으로는 인도 대륙의 북상 속도가 빠른데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물론 대륙의 이동 속도만이 높은 산을 형성한 유일한 일은 아니었지만 결정적 역할 중 하나였다. 


      지판의 섭입(소멸) 경계는 화산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지진도 일으킨다. 지진이란 지층 속에 응력이 축적되었다가 그 한계점을 지나면 단층 발생과 함께 방출되는 에너지다. 지구가 살아 움직이는 실체임을 보여주는 것은 지진만이 아니다. 여기저기서 목격할 수 있는 화산활동은 가장 역동적이며 직접적인 증거다. 지판의 소멸 경계나 열점에서만 화산활동이 수반되는 것은 아니다. 지판의 생성 경계에서도 지속적인 화산활동에 의해 새로운 지각이 만들어지고 있다. 대부분의 생성 경계는 태평양이나 대서양 등 바다 바닥에 위치해 목격하기가 쉽지 않을 뿐이다. 


      아프리카 열곡대는 아이슬란드에서 관찰할 수 있는 열곡대와는 규모면에서 차원이 다르다. 아프리카 열곡대는 장대한 규모다. 규모가 너무 크기 때문에 인공위성으로 찍은 영상을 통해서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더 편리할 정도이다. 아프리카 대륙 동쪽으로 60여 킬로미터 연장되는 열곡대는 19세기 영국의 지질학자 죤 월터 그레고리에 의해 명명되었다. 이 열곡대는 북쪽으로는 시리아부터 시작하여 홍해를 거쳐 아덴만을 아프리카 대륙의 에티오피아를 거쳐 남쪽으로 연장되면서 서부와 동부 열곡대로 나누어진다. 아프리카 대륙이 갈라지고 있는 현장이 바로 열곡대이다. 아프리카 열곡대는 지각의 진화를 보여주는 현장이어서 중요하지만 인류의 기원을 밝히는 데도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이 지역은 1500만년 전만 해도 열대우림으로 뒤덮여 있는 녹색지대였다. 열대우림의 숲이 번성할수록 나무들은 키높이 경쟁을 하는 듯 하늘로 올라가는 대신 바닥의 환경은 열악해지기 마련이다. 동물의 세계 역시 변화하는 환경에 적합하게 그 자신을 적응시켜야만 생존이 가능했다. 이런 숲에 적응하기 위한 생물종들이 바로 수상(樹上) 생활을 하는 고등 영장류였다. 그들은 수상 생활에 적합한 긴 팔과 손, 그리고 발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무를 떠나지 않은 채 나무 열매를 먹으면서 생활하였으므로 안전한 나무 위를 떠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멈추지 않는 지각의 진화로 인해 바로 1500만년 전을 기점으로 이 지역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바로 아프리카 대륙의 동쪽에 융기하기 시작하면서 고지대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새롭게 만들어진 산맥의 서쪽과 동쪽의 기후대가 달라졌다. 서쪽은 강수량이 풍부해서 열대 우림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으나 산맥의 동쪽은 강수량이 줄면서 열대 우림이 축소되어 사바나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초원지대에서는 이제 영장류들이 나무에 매달려 살기에는 부적합한 환경이 되었다. 당시 가능한 변화를 상상해보는 데에 굉장한 추리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아프리카 열곡대 동쪽은 강우량이 줄어들면서 열대 우림이 축소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숲에서 나무들의 간격이 멀어져 양장류들은 더 이상 나무와 나무 사이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게 되었다. 고고학자 클라이브 갬블(Clive Gamble)은 이를 열대림은 마치 사바나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섬과 같았다고 묘사했다. 


      이런 생태계 교란은 호미니드의 출현 및 진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지금껏 이야기한 모든 지각변동 및 진화는 흙 이야기로 수렴될 것이다. 암석들이 풍화하여 흙으로 변하는 속도보다 침식되는 속도가 빠르면 문제다. 문명의 종말이 초래될 것이란 말이다. 인간의 활동이 그런 속도를 강화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저자는 현대 과학이 비약적 발전을 거듭하고 있지만 아직 우리는 돌 속에 숨은 진실을 완전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공감한다. 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돌은 흥미 요소와 의미를 모두 가진 우리의 토대이자 친구가 아닌가 싶다. 저자가 제시한 이야기는 돌 속에 숨은 진실이라기보다 장대한 서사시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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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뜻밖의 책들로부터 단서를 많이 얻곤 한다. 뜻밖이란 읽고 별다른 실마리를 찾지 못하다가 때가 되어 얻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생각하지도 않다가 우연히 발견하고 실마리를 찾는 경우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최근 이민성, 김종온 저자가 번역한 ’아프리카 대륙에서 지구를 안다‘를 알고 번역자의 한 분인 이민성 교수의 책을 검색하다가 ’현대지질학의 창조과학비판‘을 알게 되었다.
        작년(2024년) 10월 25일 나온 책인데 열심히 신간 검색을 하는 입장에서 어, 이런 책이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희수 교수의 ’돌 속에 숨겨진 진실’은 조원식 교수의 ‘우리땅 우리돌 길라잡이’를 다 이해하지 못해 고른 돌이란 단어가 들어간 책이다.
        알라딘 중고 코너를 통해 구입해 읽고 있다. 같은 내용을 다루어도 저자의 관심사나 설명 방식, 주제에 따라 책이 말하는 깊이나 맥락이 많이 다름을 느낀다. 문장력과 단어 (선택)도 차이가 많은 부분이다. 이런 점은 여러 책을 읽어야 말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니 내게도 독서의 역사가 충분히 쌓인 셈이라 할 수 있겠다. 이미 알고 있는 부분을 건너 뛰며 읽으며 느낄 수 있는 점이 축적된 독서력이다. 일본의 한 작가는 (새 책) 독서는 축적된(선행) 독서력으로 한다고 말했다. 이런 축적은 미국의 과학 작가 나탈리 앤지어의 ‘원더풀 사이언스’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이 책에 ‘지질학; 세계의 조각들을 상상하기’란 챕터가 있다. 오래 전에 안 책이고 챕터이지만 당시는 지질학에 관심을 갖기 이전이어서 선택하지 않다가 오늘 파주 파평도서관에서 빌려왔다. 내용 이상으로 문장에 초점을 두고 읽을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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