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덕적도, 충남 태안 등을 공부하면서 인상파(仁上派)란 말을 생각한다. 고생대 데본기 퇴적, 페름기 대충돌 등과 연결되는 이 공부는 당연히 연천 지질 이해에 도움이 되는 공부다. 인상파(仁上派)란 인천상륙작전(仁川上陸作戰) 하듯 기초부(基礎部)부터가 아닌 중간부터 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문제는 인상(仁上)이 아니다. 공부 시작 시점에 처음부터 순서를 밟아 차례로 공부할 수 없었다 해도 건너 뛰거나 생략한 부분들을 찾아 꾸준히 공부하면 어느 순간 바른 궤도로 진입할 수 있다. 중요한 전기(轉機)를 잡아 전체를 염두에 두는 공부를 해 하나로 연결하는 비상 대책이 필요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랜드캐니언, 오래된 지구의 기념비 - 노아 홍수가 그랜드캐니언을 설명할 수 있을까?
    캐럴 힐 외 지음, 노동래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국 애리조나주에는 세계적 지질공원이 하나 있다. 미국의 국립공원들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웅장한 국립공원인 이 지질공원의 이름은 그랜드 캐니언 국립공원이다. 신비로운 대협곡으로 유명한 이 지질공원에 대해 정확한 학문적 분석을 하는 것은 지구 시스템을 바로 이해하는 한 방편이 될 것이다. 그것은 축복인 한편 과제다. 나는 이 과제 해결에서 더 나아가 내가 사는 곳의 지질에 대해 시사점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사는 곳의 지질이란 한탄강 세계 지질공원을 말한다.


    ‘노아 홍수가 그랜드 캐니언을 설명할 수 있을까?‘란 부제를 가진  ’그랜드 캐니언, 오래된 지구의 기념비‘는 열 명의 지질학자와 한 명의 생물학자가 함께 쓴 기념비적 저서다. 저자들 중 한 명인 웨인 래니는 자신들은 텔레비전, 전자 오븐, 휴대전화기를 우리에게 가져다준 것과 동일한 수많은 과학적 방법과 기술을 사용한다고 말한다. 래니에 의하면 그들은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받아들이는 현대의 지질학자들이다. 물론 래니가 말했듯 지구의 지질학적 이야기를 탐구하고 발견하는 것은 종교적 신념에 대한 도전이 아니다.


    이 책에는 두 개의 틈(chasm)이란 단어가 나온다. 하나는 자연이 만든 틈이고, 다른 하나는 설명 모델 사이의 틈이다. 전자는 이 책이 다루는 콜로라도강과 그 지류들이 콜로라도 고원의 남서쪽 가장자리까지 깊게 깎아 만든 1.6km 깊이의 틈이고, 후자는 홍수 지질학과 전통적 지질학의 설명 모델 사이의 틈이다. 핵심적 진술은 지표면의 거대한 균열이 콜로라도강으로 덮인 것이 아니라 거대 협곡 자체가 콜로라도강에 의해 만들어졌다(17 페이지)는 말이다. 두 개의 틈(chasm)을 이야기했거니와 두 개의 다른 설명 체계 역시 필요하다. 하나는 하천학(fluvialism)이고, 다른 하나는 홍수 지질학(diluvialism)이다. 전자는 하천의 활동이 어떻게 지구 표면을 형성하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고, 후자는 성경 그대로 4,500여 년 전에 일어난 1년 미만의 노아 홍수가 그랜드 캐니언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학문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전통적 지질학의 견해와 젊은 지구론자의 견해 모두 그랜드 캐니언의 지층과 깊은 협곡 틈들이 자연적 과정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과학적 조사의 대상이라는 데에 동의한다는 사실이다. 젊은 지구론자들의 논리적 귀결인 홍수지질학은 노아의 홍수가 인간만을 덮친 것이 아니라 전 세계를 덮쳐 지구의 암석, 화석, 지형에 보존된 방대한 기록을 남겼다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홍수지질학 vs 전통지질학의 구도는 격변론 vs 동일과정론의 구도이기도 하다. 격변론은 지구가 젊다고 반드시 믿은 것은 아니지만 지구의 역사가 한 번 이상의 격렬한 사건들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노아 홍수는 그 중 가장 최근의 사건이었으리라는 견해를 유지했다. 동일과정론은 자연법칙과 힘에는 일관성이 있어 현재 자연에서 일어나는 과정과 환경을 관찰함으로써 고대 암석을 형성한 자연의 과정과 환경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랜 관찰 결과 지구의 역사는 하나의 격변적 사건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물론 이는 노아 홍수를 부인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를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동일과정론은, 홍수 후의 큰 호수들이 격변적으로 비워짐으로써 그랜드 캐니언과 콜로라도 강이 급속하게 형성되었다는 격변론을 부정하며 그 협곡이 침식되는 데 수백만년이 소요되었다는 입장을 제시한다. 그랜드 캐니언의 모든 퇴적암 아래에는 여러 화성암이 관입된 변성암 기반(基盤)이 있다.(46 페이지) 홍수 지질학자들은 그랜드 캐니언에서 발견되는 넓은 변성암 지대의 기원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하지 않는다.(47 페이지) 그랜드 캐니언은 신생대 동안 콜로라도 고원이 융기되어 이 지역에서 바다가 물러갔을 때 그때까지 쌓인 지층들 안으로 깎여 들어가 형성되었다. 


    콜로라도강에 의한 이 지역의 침식 중 대부분은 약 6백만년전부터 현재에 걸쳐 일어났다.(62 페이지) 느슨한 퇴적물이 암석이 되려면 압축(compaction) 및 교결(cimentation) 작용이 일어나야 한다. 방해석(方解石) 모래 같은 일부 유형의 퇴적물은 깊이 묻히지 않고서도 몇 년 안에 암석으로 굳을 수 있는 반면 대부분의 퇴적물이 압축 및 교결되려면 오랫동안 깊이 묻혀여 한다.(68 페이지) 탄산칼슘 입자로 구성된 암석을 석회암이라 하고 탄산칼슘의 가장 안정적인 동질이상(同質異像)을 방해석이라 한다. 방해석은 뜨거운 물보다 찬 물에서 더 잘 녹는 소수의 광물 중 하나다. 


    그랜드 캐니언의 측면 벽에서는 다수의 석회암 지층이 나타난다. 석회암이 해양 환경에서만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일부 호수, 특히 건조한 환경에서도 석회암은 발견된다.(72 페이지) 실험실에서건 현장 관측을 통해서건 홍수 물로부터 석회암이 형성된 사례는 보고된 적이 없다. 석회암이 형성되는 데는 퇴적 작용이 일어나는 오랜 시간 즉 홍수기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랜드 캐니언은 여러 차례 해수면이 전진했다 물러가고 간헐적으로 암석이 침식되어 소실된 증거를 포함하고 있다. 현대의 석회암 퇴적물은 조개껍데기들이 형성된 장소에서 가까운 곳에 퇴적된 탄산칼슘 껍데기들이 쌓인 결과이지 먼 곳에서 침식된 석회암이나 조개껍데기 및 석회 진흙 무더기가 옮겨온 결과가 아니다.(76 페이지) 캐런 힐, 스티븐 모시어는 그랜드 캐니언의 퇴적 구조물이 왜 오늘날 현대의 환경에서 형성되는 것과 똑같이 생겼는지 묻는다. 발톱 자국 같은 정교한 형태가 격렬한 홍수 속에서 보존될 수 있었는지 묻는다. 


    홍수 지질학자들은 동일과정론을 유물론 또는 진화론과 동의어로 취급해 악마화 하면서도 자신들이 젊은 지구론을 지지하는 증거를 발견하고자 할 때에는 사실상 동일과정론의 원칙을 적용한다. 가령 유명한 홍수 지질학자들 중 일부는 1980년 세인트헬렌스 화산 폭발이 그랜드 캐니언의 급격한 형성에 단서를 제공한다고 믿는다. 그랜드 캐니언의 암석은 화산재와는 완전히 다른 물질로 이루어졌다. 이 협곡의 수직 절벽의 거대한 규모는 이 절벽이 콜로라도 강에 의해 깎이기 전에 이미 암석으로 굳어졌음을 입증한다.(87 페이지) 


    홍수 지질학자들은 물리적 과정과 화학적 과정을 묘사하는 자연법칙이 창조주간, 에덴동산에서의 타락 이전 또는 노아 홍수의 다양한 시점마다 달랐다고 가정한다. 이는 동일과정의 원칙에서 벗어나는 가정이다. 그랜드 캐니언에 노출된 대부분의 지층은 퇴적암이다. 대개 퇴적암은 방사성 측정법에 의해 직접 연대를 측정할 수 없다.(104 페이지) 방사성 측정법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광물이 생성된 연대이지 그것들이 굳어 암석이 된 연대가 아니다. 그랜드 캐니언 같은 곳의 퇴적암의 경우 기본적으로 해당 지역의 화석 기록과 전 세계의 화석 기록 사이의 비교에 기초해 연대 추정을 한다.(117 페이지) 


    이 협곡에서 가장 젊은 암석 중 일부는 테두리를 넘어 강 아래로 흘러내려 용암댐들을 형성한 용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의 용암댐은 고작 수백만년 내에 형성되었다.(112 페이지) 방사성 연대 측정법은 신뢰할 수 있는 물리법칙(가장 중요하게는 방사성 붕괴의 예측 가능성)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는 이 예측 가능성을 이용해서 원자로를 건설하고 의료장치를 개선하며 수백만 킬로미터 떨어진 행성 탐사선에 동력을 공급하기도 한다. 방사성 연대 측정법은 베수비오산 폭발과 같은 고대의 역사적 사건의 연대를 정확히 측정한다고 입증되었다.(114 페이지) 


    앞에서 틈(chasm)이란 말을 했지만 부정합은 시간의 틈을 대표한다. 부정합은 침식을 함축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117 페이지) 부정합이란 연속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오랜 단절을 겪은 후 퇴적된 지질 구조를 말한다. 더 낮은 지층에 깎임이 생겨 만들어진 수로에 위쪽 지층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물질이나 독특한 퇴적물이 채워져 있다면 부정합의 증거다.(121 페이지) 홍수지질학자들은 지각의 틈들이 창세기의 큰 깊음의 샘들이라고 믿는다.(131 페이지) 


    홍수 지질학자들은 격변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즉 몇 일만에 산이 밀어 올려진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문제가 생긴다. 마찰 저항이 열을 발생시키는 것처럼 구부리는 것도 열을 발생시킨다. 엄청나게 많은 양의 암석이 급속히 구부러지면 모든 것이 부서지고 녹을 것이다.(134 페이지) 그랜드 캐니언의 지층들은 위아래로 관통해 이어지는 파쇄대(crack)로 가득 차 있다. 파쇄대는 단순히 갈라진 균열을 의미한다. 일단 파쇄대가 형성되기 시작하면 진흙 건열처럼 이후의 비로 다시 메워지지 않으며 시간이 지나거나 응력(stress)이 증가함에 따라 더 커질 수 있다. 


    다수의 지층에 걸쳐 펼쳐져 있는 긴 파쇄대는 이 균열이 형성되기 전에 모든 지층이 이미 암석으로 굳어져 있었음을 증거하는 명확한 표시다.(138 페이지) 홍수 지질학 모델이 옳다면 그랜드 캐니언에는 한 종류의 단층만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랜드 캐니언에는 역단층과 정단층이 모두 존재한다. 이는 서로 다른 기간에 압축력(한곳으로 밀어붙임)과 장력(잡아당겨 뜯어냄)이 작용했음을 암시한다. 암석이 가소성 변형을 일으키려면 고온, 느린 이동속도, 구속압력이 결합되어야 한다. 암석이 떨어져 나갈 때는 넓은 펼쳐짐이, 한곳으로 밀릴 때는 물결 모양의 접힘이, 불규칙하게 융기하거나 침강할 때는 넓은 구부러짐이 발생한다.(143, 144 페이지)


    암석층에서 구부러짐이 발생하면 각 층에 치유되지 않는(다시 메워지지 않는) 많은 균열이 만들어진다.(145 페이지) 퇴적물이 잡히면 부드러운 물질이 쉽게 바스러져 틈을 채워서 치유되지 않는 파쇄가 거의 생기지 않는다.(146 페이지) 화석을 가지고서도 홍수지질학자들의 모순을 제시할 수 있다. 즉 여러 범주의 유기체들은 함께 발견되지 않는다. 이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화석은 노아의 홍수 때 파묻힌 동물들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의미다.(151 페이지) 저자는 거대한 물의 벽이 모든 대륙에서 밀려들었다면 왜 해양생물과 육지생물이 뒤섞여 있지 않는가?란 질문을 한다.(151 페이지) 


    가장 낮은(오래된) 지층에서 가장 높은(젊은) 지층으로 갈수록 복잡성과 다양성이 증가한다. 거대한 쓰나미가 모든 대륙에 충돌했다는 홍수 지질학자들의 말을 따르면 모든 육상생물의 형태가 해양 퇴적물과 섞여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한 그룹의 유기체가 다른 그룹을 대체하는 전 지구적 차원의 동물적 대체(代替)는 이 모든 현상이 최근에 일어난 단 한 번의 격변적인 홍수의 결과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극도로 당혹스러운 사태일 것이다. 


    저자는 '홍수 지질학자들의 주장처럼 노아 홍수가 전 세계적이었다면 왜 공룡의 유해가 그랜드 캐니언의 지층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더구나 발자국은 격렬한 홍수의 어느 단계에서도 보존되지 않을 텐데 왜 더 높은 그랜드 스테어케이스 암석의 여러 지층에서는 공룡 발자국들이 온전하게 남아 있을까?'라고 묻는다.(161 페이지) 


    화석은 특정 순서로 발견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 있는 패턴을 보여준다.(164 페이지) 이런 패턴은 생물 공동체가 살았던 유형의 환경, 생태계의 역동성, 한 그룹이 다른 그룹으로 대체되는 변화를 반영하는 특징적 화석으로 구성된다. 동물상 연속의 원칙이 있듯 식물상 연속의 원칙도 있다. 식물 화석의 복잡성이나 다양성은 젊은 지층으로 갈수록 점진적으로 증가한다. 홍수 지질학자들은 다양한 분류 체계를 통해 눈에 보이는 화석 식물의 분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지만 화석 기록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화석(포자와 꽃가루)의 분포를 설명하려는 노력은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 


    오늘날의 지질학자들은 그랜드 캐니언의 형성에 작은 물과 오랜 시간이 아니라 많은 물과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콜로라도강이 언제 어떻게 거대한 카이밥 융기 지대(또는 아치)를 깎고 길을 냈는지, 그리고 이 고지대가 깎이기 전 물은 어디로 흐르고 있었는지가 논쟁의 중심에 있다.(197 페이지) 


    저자는 실제의 과학 연구는 미로를 헤쳐 나가 정확한 길을 이해하는 일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출발점과 끝나는 지점을 볼 수 있는 종이 위에 그려진 미로가 아니라 여러 길을 실험해보아야 출구를 찾을 수 있는 실제 미로 안에 들어와 있는 경우다. 저자는 젊은 지구론자들이 과학계에 존재하는 의견 불일치를 과학적 근거의 빈약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에 대해 이런 의견을 제시한다. 즉 의견 불일치는 특정 세부 사항에 관해 논의가 진행중인 어떤 불확실성이 존재한다는 의미이지만 불일치를 해결하고 나면 궁극적으로 더 많은 이해에 도달하고 확실성이 증가한다는 것이다.(201 페이지) 


    우리가 보고 있는 암석을 만들어내기 위해 전대미문의 메커니즘이나 신비한 힘이 필요하지 않다.(215 페이지) 그랜드 캐니언의 많은 지층, 구조물, 단층은 확실히 강력한 힘들이 작용했음을 나타내지만 모두 지구의 정상적인 과정으로 설명될 수 있다. 느린 과정도 있고 빠른 과정도 있지만 모두 정상적인 과정이다. 중요한 점은 각각의 지층이나 특성에 대한 설명들이 해수면 상승과 하강, 서서히 움직이는 지각판들이 지각을 들어올리고 내리는 더 큰 이야기 안에 잘 들어맞는다는 사실이다.(229 페이지) 


    저자는 홍수 지질학자들의 설명은 지속적으로 관찰된 적도 전혀 없고 상호 배타적인 메커니즘에 의존한다고 설명한다. 가령 방대한 화석 기록은 전 세계적인 홍수가 모든 대륙을 휩쓸었다는 증거라고 주장하지만 그 홍수가 어쩐 일인지 그랜드 캐니언의 어떤 지층에도 생쥐, 갈매기, 고래, 개구리, 튤립 또는 가재 화석을 단 하나도 남기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한다. 


    홍수 지질학자들의 신조와는 달리 홍수 지질학이 다른 세계관들과 구분되는 지점은 성경에서 발견되는 구절들에 대한 집착이 아니다. 오히려 홍수지질학의 뚜렷한 특징은 성경 안이나 밖의 모순되는 증거를 고려하지 않으면서 사실로 받아들여진 성경 안의 특정 구절들에 대한 특정 해석 방식을 고수한다는 점이다.(233, 234 페이지) 


    저자들은 홍수 지질학은 비과학적일뿐 아니라 비성경적이라 말한다. 로마서 1장은 창조주의 신성이 그분의 물리적 피조물인 자연에 드러난다고 선언한다.(234 페이지) 자연이 진실한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신뢰받을 수 없다면 이 진술은 홍수 지질학자들의 하나님 이해에 무엇을 말해줄까? 저자들은 홍수 지질학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부합하는 자료나 데이터만을 취한다고 말한다. 인상적인 말은 과학은 자료가 이끄는 곳으로 가도록 허용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제프 세파흐의 ‘먼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처음에는 먼지가 없었다. 원시 가스뿐이었다.“ 팀 그레고리의 ‘운석(隕石)’에 이런 챕터가 있다. ‘가스에서 먼지로, 먼지에서 세계로’. 가스는 수소와 헬륨 등으로 이루어졌고, 먼지는 규소, 얼음 등으로 이루어졌다.(요제프 세파흐는 먼지는 우리 몸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무거운 원소들로 구성되었다고 말한다.)

    요제프 세파흐는 먼지는 너무도 가벼워서 공기가 데리고 올라가는 모든 것이라는 말을 인용했다. ‘먼지’는 읽고 있으나 흐지부지 상태이고 ‘운석’은 아직 사지 않았다. ‘먼지’를 비롯 다른 읽지 않은 책들을 읽어야 ‘운석’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관리가 필요하다. 팀 그레고리가 지질학자라는 점이 마음에 든다.(지질학자겸 우주화학자가 정확한 규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정원에서의 질문 - 뜰은 좁지만 질문하는 인간은 위대하다
      김풍기 지음 / 그린비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원에서의 질문은 무엇일까? 아니 정원에서 옛 선비들은 어떤 질문을 했을까? 저자 김풍기는 옛 사람들이 지냈던 뜰, 자신이 살았던 뜰은 몹시 작고 소박할지는 몰라도 거기서 만난 우주 삼라만상과 드넓은 사유의 지평은 장엄했노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부제가 '뜰은 좁지만 질문하는 인간은 위대하다정원에서의 질문은 이곡(李穀), 서거정(徐居正), 안평대군, 이수광, 미수 허목(許穆), 문무자 이옥(李鈺), 천수경(千壽慶), 장혼(張混), 박죽서(朴竹西) 등의 정원 관련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저자는 자신에게 일상 언어 생활에서 가장 친숙한 단어는 정원(庭園)이라 말한다. 저자는 이황의 제자인 권호문(權好文; 1532 - 1587)의 용례를 제외하고 대체로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사람들이 사용한 용어가 정원이라 설명한다. 원림(園林)은 집 안의 공간 및 집 주변의 숲을 두루 의미한다. 고전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정원보다 원림이 조금 더 넓은 범위를 포함한다.(39 페이지)


      저자는 뜰이라는 단어를 전문용어로 쓸 것을 제안한다. 박은영의 말대로 마당은 평소에는 비워 두지만 필요에 따라 여러 가지로 사용되는 곳이기에 뜰이란 단어가 적당하다.(41 페이지) 집 울타리의 경계를 넘어서 주변의 숲까지 연결되는 개념으로 뜰이라는 단어를 쓰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울타리 경계 안을 지칭할 때는 유용하다. 부제인 뜰은 좁지만 질문하는 인간은 위대하다는 허균의 말에서 비롯되었다. 아무리 누추하고 초라한 집에 산다고 해도그곳에 군자가 살고 있다면 문제가 있겠는가?”가 그것이다.


      가정(稼亭) 이곡(李穀)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버지다. 저자는 문신호령 가금불상(門神戶靈 呵禁不祥)이란 입춘방을 써 붙인 적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대문을 지키는 신령이여 상서롭지 못한 것들을 꾸짖어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란 의미다. 이곡이 살았던 고려 후기는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의 부마국이었던 시기이며 국정 문란이 극에 달했던 시기다. 의종 때 일어난 무신란을 시작으로 고려는 제국으로서의 풍모를 잃고 혼란기로 접어들었다


      고려 후기 신흥사대부들은 원나라가 국가의 학문으로 생각한 성리학을 한층 깊이 공부하는 한편 원나라에서 시행하는 과거에 응시해 급제하는 사례가 많았다. 이곡은 어려운 사정 때문에 관직 생활을 저버릴 수 없었다. 가난한 이곡에게 귀거래(歸去來)는 요원한 일이었다. 이곡은 환해(宦海) 또는 환해풍파를 떠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 했다. 이곡이 마당 한켠에 작은 텃밭을 마련한 것은 원나라의 수도 북경에 머물던 1342년이다. 이곡은 원나라 과거인 제과(制科)는 물론 고려의 과거에도 급제한 이력의 소유자다.


      이곡이 원나라에 간 것은 지원(至元)에서 지정(至正)으로 연호를 바꾼 원나라 순제를 축하하는 충혜왕의 축하 표문인 하개원표(賀改元表)를 받들고서였다.(본문에는 '하기원표賀改元表'라 나오는데 이는 오류인 듯 하다. 는 고칠 개란 글자로 이는 원나라가 원표를 바꾼 것을 반영하는 바른 단어이다.) 저자는 정원에 대해 상세히 잘 아는 것으로 보아서 실제 경험이 많은 듯 하다. 저자는 사람이 아무리 많은 관심과 손길을 준다 해도 작물 성장과 결실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소는 자연이 주는 거대한 혜택이나 재해라 말한다.(57 페이지)


      이곡은 자신이 돌보는 채마밭에서 소출이 적게 나오자 천하의 작황을 근심했다. 이는 노자가 말한 '문을 나서지 않아도 천하의 일을 안다(불출호정지천하; 不出戶庭知天下)'는 구절을 연상하게 한다.(61 페이지) 서거정편에는 대마망북(代馬望北)이란 말이 나온다. 변방에서 태어난 말은 북쪽을 바라본다는 의미다. 같은 의미로 호마망북(胡馬望北)이란 말도 있다. 도연명의 귀거래사는 팽택령(彭澤令)으로 근무하던 중 지역을 감찰하러 온 관리를 접대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자 봉록으로 받는 쌀 다섯 말 때문에 이런 소인에게 허리를 굽힐 수는 없다며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간 뒤 쓴 글이다.


      서거정 만큼 귀거래를 시문으로 노래했던 사람도 드물다.(67 페이지) 서거정은 세종 대에 벼슬을 처음 시작한 이래 여섯 임금을 모시면서 45년간 외직을 거치지 않고 오직 서울에서만 지낸 보기 드문 인물이다. 서거정은 한양 주변의 여러 시골에서 별서(別墅)를 운영했다. 그중 가장 자주 등장하는 곳은 불암산 부근이라는 양주 토산 별서와 한강 옆 광진 부근의 몽촌 별서다. 서거정에게 뜰은 권력의 세계에서 멀리 떨어져 아름다운 자연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주는 공간이었다.


      서거정은 소나무, 대나무, 연꽃, 매화(松竹蓮梅)를 원중사영(園中四詠)으로 읊었다. 서거정은 집 뜰 안의 정자를 사가정(四佳亭), 뜰을 사가원(四佳園)으로 지칭했다. 저자에 의하면 은거(隱居)는 대체로 속세에서 바쁜 사람들의 미래 모습으로 제시된다.(77 페이지) 서거정은 자신의 집을 유거(幽居)라 표현했다. 원래 산속 깊은 곳에 있어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을 지칭하는 말이다. 귀거래할 형편이 되지 않았던 서거정은 은거지와 같은 공간을 자신의 별서에 마련했다. 사람들은 별서에서 경영하는 뜰이 아무리 아름답고 고요하다 한들 귀거래를 할 수 없기에 벼슬 속으로 은거하는 이은(吏隱)을 감행했다.('시은; 市隱'은 저잣거리에 은거하는 것으로 가장 위대한 은거라고 칭해진다.)


      덕이 높고 어진 사람이 낮은 관직에 있으면서 권력과 상관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의미다. 저자는 가장 화려한 시절에 가꾼 안평대군의 뜰을 조명한다. 저자는 고려 말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에 나오는 청학동(靑鶴洞)이 무신의 난이 가져온 어지러운 세상을 벗어나고 싶은 지식인들의 욕망을 투사한 것이라면 안평대군을 비롯한 그 주변의 문인들에게 무릉도원은 무슨 의미였을까? 묻는다. 안평대군에게 비해당(匪懈堂)은 현실에서 찾을 수 없는 이상향의 대체물로 보인다. 비해당은 세종이 안평대군에게 내린 당호다. 비해(匪懈)는 시경과 장재의 서명에 나오는 이름이다


      안평대군은 자신의 뜰에 꽃과 나무를 심고 귀한 식물도 사이사이에 넣어 비해당 뜰이 저절로 차별화되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96 페이지) 안평대군이 가장 친애했고 단종에 대한 절의를 끝내 지켜내었던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의 시를 보자.“손수 심은 오동나무/ 봄이 되자 푸른 잎 가지런하다/ 언제나 완전히 자라서/ 가지 위에 봉황새 와서 깃들려나,“...


      특별히 정치적 의미를 담지는 않았지만 안평대군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기를 바라거나 안평대군이 자신의 능력을 활짝 펴는 날을 기대한다는 의미로도 읽힌다.(98 페이지) 안평대군이 비해당 뜰에 구현한 무릉도원 혹은 이상향은 동시대의 가장 빛나는 문화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졌다. 석가산(石假山) 이야기를 하자. 조선 전기 문인들의 글에 석가산 관련 기록에 제법 있다.(109 페이지) 조선 전기 문인들 중 제법 이름이 난 사람들 중 형편이 괜찮은 사람들은 자신의 뜰에 석가산과 같은 것을 조성해 놓고 즐기는 풍조가 있었다.


      시은(市隱), 귀거래(歸去來)보다 적극적인 방법이 석가산으로 뜰을 꾸미는 것이었다.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이 가산(假山)을 꾸민 기록이 있다. 명산을 오르고 바다를 보며 유서 깊은 고적을 두루 돌아봄으로써 호연지기를 기르고자 하는 기행(紀行) 열풍이 일어난 것은 15세기 후반의 일이었다. 그 중심에 성임, 성현, 채수, 서거정 같은 인물들이 있었다. 그들의 기행은 천하의 대관(大觀)을 돌아보는 '수양과 풍류가 공존하는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석가산 조성은 집 안으로 자연을 가지고 와 자연의 정취를 그대로 즐기는 방편이었다.


      걷지 못해 부득이 산수화를 모아 벽에 걸어놓고 감상하는 것이 성에 차지 않아 한 것이 석가산 조성이다. 기묘한 돌과 항아리, 주변을 흐르는 물을 활용하여 자기만의 완벽한 자연을 구축하고 동시에 아름다운 화초와 나무들을 심어 석가산이 자연의 축소판일 뿐 아니라 완벽한 원림으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하였다.(116 페이지) 가산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돌로 만드는 석가산, 옥을 이용하여 만드는 옥가산, 나무뿌리를 이용하여 만드는 목가산 등이다.(박경자의 조선 시대 석가산 연구라는 책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석가산 조성은 대체로 도선(道仙)적 경향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보였다. 무릉도원은 배를 타고 물길을 거슬러 오르다가 기암괴석으로 가득한 동굴을 지나야 만날 수있거니와 괴석문화와 관련을 가진 석가산은 이상향의 축소판으로 해석될 수 있다.(127 페이지) 지봉 이수광도 뜰을 만들었다. 그의 당호는 비를 가리는 집이라는 의미의 비우당(庇雨堂)이다. 겨우 바람과 비를 가린다는 의미의 근비풍우(僅庇風雨)에서 유래한 이름이지만 외가쪽 선조(先祖) 유관(柳寬)의 청백리로서의 면모를 함축한다.


      이수광은 경기도 장단(長湍)에서 태어나 한양에서 자랐다. 지방관을 끝내고 잠시 한양에서 관직 생활을 하던 이수광이 계축옥사로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면서 택한 은거지가 비우당이다. 이수광은 비우당 앞뜰을 동원이라 칭했다. 작은 공간에 있다고 해서 인간의 생각이 작은 공간으로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인류의 위대한 유산인 서책이 있었고 문자를 통해 내가 여행한 옛 성현들의 정신세계를 정리하거나 새롭게 펼쳐낼 수 있었다. 들뢰즈는 이를 앉아서 유목하기로 규정했다. 이수광의 동서는 허균이다. 엄청난 장서가였던 허균의 책이 역모로 죽은 뒤 이수광에게 전해졌다.


      이수광은 허균의 동서였기에 허균이 이이첨 권력에 협력하면서 승승장구할 때 협력할 만도 했지만 은거를 택했다. 지봉(芝峯)은 비우당 부근의 상산(商山)의 한 봉우리다.


      저자는 꼬장꼬장하고 근엄하기 그지없었던 미수의 삶에서 아름다운 순간을 기록한 글을 발견한 것을 뜻밖이라고 설명한다. 미수가 살았던 시대는 격변기였다. 미수는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시절에 태어나 중년에 병자호란을 겪었다. 미수가 경기도 연천에 자리를 잡은 시기는 부친 복상(服喪)에 참여한 시기로 보인다. 미수는 16332월 장례를 치른 후 3년상을 충실히 바쳤다. 복상이 끝난 이듬해인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12월 강원도 영동을 기착지로 해 피난했다. 이 때로부터 약 10여년을 떠돌며 한반도 여러 지역에서 우거(寓居)하다가 52세 때인 164612월 연천으로 돌아왔다.


      미수가 삼척부사를 사직하고 연천으로 돌아온 것은 68세 때인 1662년이다. 미수는 이듬해인 1663년 십청원기라는 글을 썼다. 십청원은 미수의 뜰 이름이다. 전나무, 측백나무, 박달나무, 비자, 노송, 만송, 황죽, 두충 등은 그가 십청원에 심은 가지가 길고 잎이 푸른 것들이다. 예송논쟁에서 미수는 윤휴와 함께 3년상을 주장했다. 십청원기를 쓴 것은 예송논쟁 당시 미수가 지니고 있던 마음속 풍경을 보여주는 단서이자 그의 주장이 수용되지 않은 데 따른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이었다. 미수는 산수유람을 좋아하지만 늙어 그것을 할 수 없어 돌을 쌓아 봉우리와 고개를 만들고 사이사이에 풀과 나무를 심었다고 말했다.


      미수는 천하의 산수를 모아 놓은 석가산이 있는 뜰에서 꽃의 영고(榮枯)를 보며 차라리 늘 푸른 나무가 마음에 와닿았다고 했다. 미수의 뜰에는 나무, 풀 외에 다양한 식물들이 있었다. 운은행(雲銀行), 녹나무, 풍향, 오동나무, 매화, 정향, 모란, 작약, 사간(射干), 파초, 석창포, 국화... 미수는 강회백의 정당매를 보고 감탄하기도 했다. 미수는 용주 조경에게서 대년누자를, 한산옹 송석호에게서 대년매화를 받아 뜰에 심었다. 밑둥이 오래 묵은 매화를 대년매화라 하고 노란 꽃술에 붉은 꽃이 피는 것을 대년누자라 한다.


      미수는 푸른 꽃받침으로 피는 청악매(靑萼梅)를 좋아했다.(은 꽃받침 악이다.) 미수가 살았던 연천은 미수 외에 사대부라고는 누구도 살지 않았던 곳이다. 미수는 연천에서 20년을 살며 느낀 숲속 생활의 흥취를 열 가지로 정리했다


      1) 3월에 산꽃이 만발하면 바위 모퉁이에서 산새들이 서로 지저귀는 것. 2) 숲이 깊어 해가 늦게 떠서 그늘진 벼랑으로 간밤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것. 3) 새벽녘 해가 뜰 때 첩첩한 산 쪽으로 맑은 노을이 드리운 것. 4) 비 그친 뒤 숲 너머에서 들려오는 시냇물 소리. 5) 비가 개고 앞 개울에 물이 불어나면 낚시터로 걸어나가 낚시줄을 손질하는 것. 6) 시내 바람이 비를 불러오거나 떨어지는 저녁 햇살이 산을 감싸는 것. 7) 저물녘 산 기운이 더욱 아름답고 숲 너머 마을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면서 만들어내는 어슴푸레한 빛. 8) 달밤에 움직이는 뭇 것들이 모두 고요해지면 홀로 앉아 숲 그림자가 춤추는 것을 감상하는 것. 9) 가을날 해 저문 골짜기에 안개가 피어오르고 단풍 든 붉은 나무는 천 겹으로 서 있는 것. 10) 쌓인 눈이 온 산에 가득한데 시냇가 울창한 소나무는 푸른빛으로 사랑스러운 것.


      문무자(文無子) 이옥은 소품문을 쓰지 말라는 정조(正祖)의 어명을 어겨 처벌받은 인물이다. 이옥이 만년에 터를 잡고 여생을 마치려 했던 곳은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와룡산 기슭이었다. 조선 사대부들은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꺾어 느긋하게 남산을 바라본다는 도연명의 시구절을 좋아했다. 이옥도 도연명의 시문을 읽고 자신의 뜰에 도연명의 문학적 풍경을 재현함으로써 자신의 고결한 정신세계를 드러내려 했던 것 같다. 당시는 세상을 등지고 은거를 택하는 것만으로도 시대를 비판하려는 의도를 표현하는 시대였다.


      이옥의 글에는 수많은 꽃과 나무들이 등장한다. 이옥은 자칫 정치적인 문제를 건드려서 죄인이 될 수 있을 천문, 지리, 인간, 성리학이 아닌 집 주변을 아름답게 장식한 자연 속 삼라만상에 눈을 돌렸다. 이는 그가 평생 관심을 기지고 써 왔던 소품문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했다.


      천수경(千壽慶; ? - 1818)은 조선 후기 여항문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여항(閭巷)은 도시의 좁고 굽은 골목을 의미하기도 하고 일반 백성들이 살아가는 마을을 의미하기도 한다. 천수경은 시사(詩社)와도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 시를 짓고 술을 마시는 모임이 그것이다. 여항문학의 주요 구성원들은 중인(中人)과 서얼(庶孼)들이다. 18세기 전반 여항문학인들은 주로 한양 인왕산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곳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양의 서쪽에 해당하기에 서촌(西村)이라 했지만 옥류동(玉流洞), 필운대(弼雲臺) 등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중심으로 다르게 칭하기도 한다.


      중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굳이 여항인이라고 하는 것은 중인들과 서얼들이 함께 문학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240 페이지) 우리 문학사에서 여항인이 부상(浮上)한 것은 17세기 최기남을 중심으로 하는 삼청시사(三淸詩社)부터다. 최기남은 선조의 부마였던 신익성 집안의 궁노 출신으로 시를 짓는 능력 때문에 당대 양반 지식인들에게 널리 알려졌을뿐 아니라 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이력이 있다. 천수경은 송석원 시사를 이끌었다. 옥류동 계곡이 처음부터 중인들의 터전이었던 것은 아니다. 임병(壬丙) 양란 이후 장동김문(壯洞金門)으로 알려진 김상헌 집안이 터를 잡고 살면서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김상헌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모친의 눈병 치료를 위해 샘물이 좋은 옥류동 골짜기로 들어왔다. 천수경의 뜰은 많은 벗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고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멋진 글을 낭송하면서 살아가는 예술가들의 살롱인 셈이었다. 송석원 시사의 범례에 글로 모이고 신의로 맺는다(회이문사 결이신의; 會以文詞 結以信義)란 구절이 있다. 이이엄(而已广) 또는 공공자(空空子) 장혼(張混)은 평생 가난하게 살았지만 반드시 자신만의 뜰을 가지고 싶다는 소망을 평생 버리지 않았던 문인이다. 그는 마침내 작은 뜰 하나를 만들었다. 천수경이 송석원 시사의 맹주(盟主)였다면 장혼은 송석원시사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막후 실세였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장혼은 누리고 싶은 청복(淸福) 여덟 가지를 꼽았다. 그중 하나가 계곡 한 구역을 즐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가 꽃과 나무 천 그루를 심어서 즐기는 것이다. 이이엄은 장혼의 호이기도 하고 그의 당호이기도 하다. 이이(而已)는 뿐이다, 그만이다라는 의미이고 엄(广)은 집을 의미한다.


      혼자 지낼 때에는 헌 거문고를 만지고 고서를 뒤적이면서 그 사이에서 생활할 뿐이고, 생각이 나면 나가서 산속을 거닐 뿐이다. 손님이 찾아오면 술상을 차리라 하고 시를 읊을 뿐이고, 흥이 나면 휘파람 불고 노래 부를 뿐이다. 배가 고프면 내 밥을 먹을 뿐이고, 목이 마르면 내 우물물을 마실 뿐이다. 추위와 더위에 따라 내 옷을 입을 뿐이고, 해가 지면 내 집에서 쉴 뿐이다. 비 내리는 아침과 눈 오는 낮, 저녁의 석양과 새벽의 달빛 등 그윽한 거처의 신비한 정취는 다른 사람에게 말해 주기 어렵거니와 말해 주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날마다 혼자 즐기다가 자손들에게 남겨 주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니 이와 같이 된다면 다 이룰 뿐이다. 운수나 목숨의 차이는 나의 천명에 맡길 뿐이다. 그래서 나의 집을이이(而已)’라고 명명한다...“란 글을 보면 이이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박죽서(朴竹西)19세기를 살았던 여성 시인이다. 그는 삼호정시사(三湖亭詩社)를 이끌었다. 저자는 박죽서의 뜰을 그리움과 외로움으로 가득한 뜰이라 표현했다. 유박(柳璞, 1730~1787)은 꽃에 미친 선비로 불리는 사람이다.


      책의 마지막 순서는 여암 신경준편이다. 여암(旅庵) 신경준(申景濬)은 전라도 순창을 근거지로 삼아 한양과 경기의 여러 지역에서 지내며 관직 생활 및 저술 활동을 한 인물이다. 신경준의 뜰은 순원(淳園)이라 불렸다. 내게 신경준은 지리학자로서 더 알려진 인물이다. 산경표는 신경준이 편찬한산수고문헌비고<여지고>를 바탕으로 하여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지리서다.


      신경준은 사람이 사물을 대함에 그 이름만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좋아하는 것은 이름 너머에 있다....내게 꽃이 있는데 좋아할 만한 것을 구하였다면 꽃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하여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란 말을 했다.


      '정원에서의 질문은 저자 자신의 정원 및 꽃, 나무 등에 관한 경험이 바탕을 이루는 좋은 책이다. 정원에서의 질문을 통해 새롭게 만난 인물이 안평대군이다. 그를 비해당(匪懈堂)과 연결지어 이야기했을뿐 정원 관련 부분을 반영해 해설하지 못해 아쉽다. 이런 점은 송석도인 천수경(千壽慶)에 대해서도 해당하는 바이다. 안평대군, 천수경 공히 서촌에서 말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이이엄 장혼 역시 그렇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반영해 해설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
      김갑동 지음 / 푸른역사 / 200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갑동의 ‘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는 36개의 파트로 이루어진 책이다. 각 파트당 두 인물을 대비시킨 책이다. 1부 고대 속으로, 2부 고려 속으로, 3부 조선 속으로, 4부 근.현대 속으로로 이루어졌다. 각 매치업에는 제목이 붙었다. 가령 왕건과 견훤에 대해서는 ’지도자가 갖춰야 할 자질과 덕목은 무엇인가’가 붙었다. 첫 편에서는 고국원왕과 근초고왕이 만났다. 장수왕의 증조부 고국원왕과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근초고왕이 붙은 것이다.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이 만난 챕터에는 경상도와 전라도는 언제부터 앙숙이었을까란 제목이 붙었다. 


      백제는 장수왕이 남진정책을 실시하자 신라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성왕은 수도를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옮겼다. 백제의 뿌리를 찾아 초심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나라 이름을 남부여라 하였다. 신라 진흥왕의 한강 하류 점령과 관산성(충북 옥천) 전투는 오랫 동안 이어온 양국의 동맹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다. 고구려의 히틀러 연개소문이란 명명이 눈에 띈다. 보장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할뿐 고구려의 실권자는 연개소문이었다. 원효와 의상은 나와 다름을 받아들이기란 이름으로 만났다.


      원효는 진덕여왕 4년(650년) 불교를 더 깊이 공부하기 위해 의상과 함께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나 요동에서 고구려군에게 붙잡히는 고초를 겪고 겨우 돌아왔다. 이후 문무왕 원년(661년)에 백제가 멸망하여 서해안 통로가 열리자 의상과 함께 중국 유학을 시도하였다. 당항성으로 가던 도중 오늘날의 충남 직산 부근을 지나다가 심한 폭우를 만났다. 두 사람은 우연히 찾은 토굴에서 하룻밤을 편히 쉬었는데 아침이 되어 보니 토굴이 아니라 무덤이었다. 계속된 폭우로 하루를 더 머물러야 했는데 귀신이 나오는 듯 하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왜 같은 장소인데도 어제는 편안하였고 오늘은 이렇게 불안하고 무서운가? 


      이로부터 원효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의상은 무열왕 8년(661년) 원효와 헤어져 중국으로 건너가 화엄종의 대종사인 지엄에게 화엄교학을 전수받았다. 의상은 완고한 골품제 사회 속에서 평등을 강조하였으며 민중들의 고통을 덜어주려 하였다. 원효는 617년생, 의상은 625년생이다. 원효는 6두품 출신이었고 의상은 진골 출신이었다. 원효는 세속적인 사랑을 하기도 했으나 의상은 단아한 수행자의 자세를 지켰다. 원효는 불교뿐 아니라 노장사상이나 의술에까지 관심을 기울였으나 의상은 화엄학의 본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큰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은 서로 배척하지 않았다. 필요할 때는 같이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면서 배움을 같이 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의 좋은 점을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했다. 


      견훤의 성은 이씨였으나 후에 견(甄)씨라 하였다.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는 경주에서 비장(裨將; 부지휘관)이 되었다. 견훤은 900년 완산주(전주)에 순행하여 그 곳에 도읍을 정하고 스스로 후백제왕이라 칭했으며 모든 관서와 관직을 정비하였다. 왕건은 877년 송악에서 태어났으나 20세까지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왕건은 후삼국시대에 궁예가 한반도 중부 지방을 석권, 철원에 도읍을 정하자 아버지와 함께 귀순하여 궁예의 부하가 되었다. 왕건은 궁예 밑에서 충성을 다해 군사활동을 하여 큰 공을 세웠다. 


      궁예의 실정이 거듭되자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의 추대를 받아 918년 6월 궁예를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왕건의 남진정책과 후백제 견훤의 북진정책은 나주 일대에서 충돌했다. 견훤의 세력이 날로 강성해지자 신라는 왕건과 연합하여 대항하고자 하였다. 왕건은 신라를 도우려다가 공산전투에서 신숭겸이 왕건과 옷을 바꿔 입고 대신 죽는 것에 힘입어 겨우 목숨을 건졌다. 왕건이 승기를 잡은 것은 고창(古昌; 현 안동) 전투다. 왕건은 고창전투에서 견훤을 대파한 후 신라를 무력으로 접수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귀순해 오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심지어 자신을 사지에 몰아넣었던 견훤도 받아들였다. 왕건은 함부로 권력을 휘두르지 않고 언제나 공명정대했다. 발해를 고구려의 후예국으로 인정하여 유민들을 받아들이는 한편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 교류를 끊었다.


      지식인의 역할은 무엇인가란 제목으로 만난 최승우 vs 최언위 편이 재미 있다. 당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3 최가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다. 최승우는 견훤의 휘하에 들어갔고 최언위는 왕건 휘하에 들어갔다. 두 사람의 실력 대결은 태조 10년(927년) 공산전투가 끝나고 왕건과 견훤 사이에 오고간 국서를 통해 알 수 있다. 공산전투에서 크게 이긴 견훤은 그 해 12월 왕건에게 국서를 보내 자신의 우위를 과시하면서 왕건을 은근히 위협하였다. 이 국서는 최승우가 중국에서 배운 해박한 지식과 문장력으로 쓴 글이다. 


      왕건은 태조 11년(928년) 정월 후백제에 답신을 보내어 자신의 건재함과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중국의 여러 고사를 예로 든 것이나 문장의 구성력 등을 보면 최언위 외에는 쓸 수 없는 것이다.(118 페이지) 국서를 주고받은 뒤 치른 고창전투에서 왕건은 대승을 거두었다. 최언위의 글이 신라인들에게 공감을 얻으면서 그들이 왕건을 도운 덕택이었다. 최언위는 민심의 동향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지도자에게 전달했다. 


      의를 따르는 길, 이익을 따르는 길에서 만난 사람은 박술희와 왕규다. 박술희는 충남 당진 면천(沔川) 출신이다. 면천은 복지겸의 고향이자 해상 무역의 요지였다. 그러므로 같은 해상 출신인 개성의 왕건이나 태조의 왕비 나주 오씨와 친밀해질 수 있었다. 박술희는 태조 왕건의 장남인 무(武)의 후견인이기도 했다. 무의 어머니의 집안은 측미(側微)했다. 신분적으로 미천하고 권력이나 군사력이 부족하다는 의미다. 왕규는 무(武; 혜종)의 장인이자 외조부였다. 태조는 정치적으로 우세한 왕규의 딸을 무와 맺어줌으로써 무의 측미함을 보완해주려 했다. 


      성종 대에 거란 소손녕과 담판을 지으러 간 사람은 합문사 장영이었다. 소손녕은 미관말직에 있는 자를 자신에게 보냈다며 화를 냈다. 이에 서희가 낙점되었다. 소손녕은 “그대 나라가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다. 그런데 그대 나라가 우리 땅을 점령하였고 우리의 국경을 접하였는데도 바다 건너 송을 섬기고 있다. 그런 고로 우리가 친히 출병한 것이다. 만일 땅을 베어서 바치고 조공을 하면 무사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서희는 “아니다. 우리는 고구려의 옛 땅에서 일어났으므로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수도를 세운 것이다. 땅의 경계로 본다면 그대 나라의 동경도 우리 경내에 있는데 어찌 국경을 침범하였다 하는가? 압록강 안팎도 우리의 경내인데 여진이 그 사이를 막아 조공을 바치지 못했다. 여진을 쫓고 우리 옛 땅을 되찾아 요새를 쌓고 도로를 이으면 왜 수교하지 못하겠는가. 장군께서는 나의 말을 당신 나라 임금에게 전하시오”라고 말했다. 고려가 평양에 수도를 세웠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서희가 몰라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다. 


      평양을 제2의 수도로 삼았다는 의미거나 소손녕이 고려의 사정을 잘 모르리라 생각해서 한 말일 것이다. 고려는 거란의 연호를 쓰고 송과의 외교를 끊기로 하였다. 대신 압록강 이남의 강동 6주를 얻는 실리를 챙겼다. 요나라 장군 소손녕과 비교했을 때 약소국의 대신 서희는 불리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80만 대군 속에 단신으로 뛰어들어 승리한 것은 서희였다. 그는 풍부한 지식과 조리 있는 말로 대군을 물리치고 피 한 방을 흘리지 않고 압록강 동쪽 땅을 얻었다. 


      고려 대량원군(현종)은 태조의 손자인 경종이 죽은 후 태조의 아들 안종 욱(郁)과 경종의 네 번째 비(妃) 헌정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안종은 경종의 숙부다. 성종의 아버지는 ‘대종; 戴宗’ ' 욱; 旭’이다.) 한편 경종의 세 번째 비이자 헌정왕후의 언니인 헌애왕후(천추태후)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자신의 아들인 7대 임금 목종 다음의 임금으로 삼으려 했다. 이에 걸림돌이 된 대량원군은 헌애왕후에 의해 개성 숭교사로 유폐되었다가 삼각산 신불사로 옮겨가게 되었다. 헌애왕후가 천추태후라 불리는 것은 아들 목종을 대신해 섭정을 했기 때문이다. 


      헌애왕후가 사람을 시켜 대량원군을 죽이려 했으나 대량원군은 승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나이를 먹으면서 태조의 손자라는 자부심을 갖게 된 대량원군은 “백운봉에서 흘러내리는 한 줄기 시냇물/ 만경창파 먼 바다로 향하는구나/ 졸졸 흘러 바위 밑에만 있다고 말하지 마라/ 용궁에 도달할 날 그리 멀지 않았으니“ 같은 시를 썼다. 1백년 가까이 지켜온 왕실을 어머니와 외척 김치양 사이에서 나온 아들에게 넘겨줄 수 없다고 생각한 목종은 강조(康兆)를 불렀다. 목종에게 미움을 사 외직으로 쫓겨나 있던 위종정, 최창 등이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강조를 죽이기 위해 거짓 왕명으로 부른 것이라 속였다. 죽은 줄 알았던 목종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강조는 뒤늦게 온 것에 대해 문책을 면할 길이 없자 정변을 단행하여 목종을 폐위하고 대량원군을 현종으로 옹립했다. 목종은 충주로 가는 중 파주 적성현에 이르러 강조가 보낸 자에게 시해당했다. 강조의 정변으로 고려는 거란의 침입을 맞게 되었고 현종은 나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묘청과 김부식은 개혁과 보수의 갈림길에서란 제목으로 만났다. 인종 대에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했다. 임금이 황제를 칭하여 추락한 왕권을 회복해야 하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자주성을 높이고 불손한 금나라를 정벌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도를 서경으로 옮겨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표 인물이 묘청이다. 서경 사람 정지상이 그들의 말을 믿었다. 묘청은 서경 천도가 어려워지자 무장 봉기를 감행했다. 그들은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였다. 군대 이름은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하였다. 


      김부식이 우두머리로 한 토벌군이 편성되었다. 김부식이 정지상을 묘청의 당으로 지목하여 죽인 것은 정지상의 문장과 재주에 대하여 시기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종의 외척인 이자겸을 내내 견제해왔던 김부식은 마침내 이자겸이 사라지자 새롭게 인종의 외척이 된 임원애와 손을 잡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이런 마당에 인종이 개경을 버리고 서경으로 간다면 이는 자신의 권력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묘청 등의 주장을 묵살하였고 마침내 토벌군의 대장이 되었다. 


      서경으로 출동한 김부식의 토벌군은 1년여 만에 평양성을 점령하고 묘청 일당을 제거하였다. 이는 ‘고려사’에 근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인데 저자는 묘청이 금의 압력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서경을 중심으로 민심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주장을 한 것으로 본다. 저자에 의하면 묘청은 일종의 현실개혁운동가다. 묘청이 개혁의 중심지로 서경을 택한 것은 그가 서경 출신이기 때문이었겠지만 서경이 옛 고구려의 수도로 고려 초기 이래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금과 사신 왕래가 빈번하여 서경 지역이 다른 지역보다 경제적 피해가 컸고 과중한 역과 별공의 상납에 시달렸던 탓도 있었으리라. 묘청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신채호가 처음이다. 그는 이 사건을 낭(郞), 불(佛) 대 유가, 국풍파 대 한학파, 독립당 대 사대당,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으로 보고 조선 1천년 이래 제일 큰 사건이라 평하였다. 묘청은 전자의 대표,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라 하였다. 


      공민왕은 왕비(노국대장공주)의 신뢰에 힘을 얻어 반원개혁정치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불법적인 인사행정의 온상이었던 정방(政房)을 혁파하고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토지와 인민의 탈점을 시정토록 하였다. 변발과 호복을 풀고 고려식 복장을 하여 고려의 부흥을 도모했다. 공민왕 재세시는 원이 쇠망해가는 시대였다. 공민왕은 기황후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던 기철 등의 권문세족을 일망타진하였다. 고려의 내정간섭기관이었던 정동행성을 혁파하고 동북면의 쌍성총관부를 수복하였다. 


      원나라의 연호도 폐지하고 관제도 문종대의 것으로 복구하였다. 원과 권문세족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고 홍건적이 고려를 침략했다. 홍건적의 두 번째 침입에 개경이 함락되고 왕은 안동으로 피난했다. 환궁하던 공민왕은 흥왕사에 머무르다 원과 결탁한 김용 일당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공민왕은 왕비를 잃은 슬픔과 상실감에 정사에 뜻을 잃고 불교에 귀의했다. 이때 신돈이 등장했다. 공민왕은 세상을 떠나 독립한 사람을 얻어 크게 써서 폐단을 고치려 하였다. 신돈은 공민왕에게 서경 천도를 건의하기도 했다. 


      신돈은 자신이 5도의 사심관이 되어보고자 삼사의 관원을 시켜 그 제도를 부활시킬 것을 건의하게 했다. 공민왕은 ”충숙왕이 심한 가뭄을 당했을 때 각 도의 사심관을 폐지했더니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고 한다. 그런데 어찌 내가 선왕의 뜻을 잊겠는가?“ 하고는 상소문을 불태웠다. 그 뒤에도 계속 건의가 올라오자 공민왕은 ”무슨 도적 무슨 도적 해도 제일 큰 도적은 각 고을의 사심관이다.”라며 일축하였다. 공민왕은 사심관의 폐해가 컸음을 알고 있었다. 신돈은 공민왕을 제거하려 하였다. 발각되어 신돈은 결국 처형당했다. 공민왕과 신돈의 관계는 7년만에 끝났다. 공민왕은 왕위에 오른 지 23년만에 자제위 소속의 홍륜과 내시 최만생에게 살해당하였다. 신돈의 이야기는 ‘고려사’반역전에 실려 있다. 


      최영의 본관은 철원이다. 홍건적의 두 번째 침입에 고려는 안우를 상원수로 삼고 김득배를 도병마사로 삼아 이를 방어하였으나 개경이 함락당하고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을 갔다. 최영은 정세운, 안우, 김득배, 이방실, 이성계 등과 더불어 20여만의 병력으로 개경을 되찾았다. 김용은 공민왕이 세자 시절 원에 있을 때 모셨던 공으로 대호군에 오른 인물이었으나 원의 기황후 세력과 손잡고 공민왕의 임시행궁인 흥왕사를 습격하였다. 이때 최영은 자신의 직속 군대를 거느리고 행궁으로 가 난을 진압하였다.


      신돈이 막강한 권세를 부리던 시절에 최영은 많은 수난을 당했다. 신돈이 집권하던 초기에 계림부윤으로 좌천된 것을 비롯 신돈의 모함으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최영은 우왕의 장인이 되었다. 명이 철령 이북의 땅을 회수하고 철령위를 설치했다. 고려는 박의중을 사신으로 보내 철령위 설치를 중지하도록 요청하였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자 요동 정벌에 나섰다. 최영은 이성계의 반대를 일축하고 우왕을 움직여 정벌을 단행하였다. 최영은 늙었고 왕의 장인이었기에 평양에 머물렀고 이성계와 조민수만 출정하여 압록강의 위화도에 이르렀다. 


      최영은 이성계의 회군으로 고봉에 유배되었다가 창왕 즉위년에 참수되었다. 최영이 대체로 권문세족의 이익을 대변했다면 이성계는 신진사류들과 뜻을 같이 했다. 최영은 성공 여부는 둘째 치더라도 명나라에 굽히지 않고 오히려 정벌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확고한 자주성과 용맹성을 높이 살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부패하고 모순된 현실을 개혁하려 하지 않았으며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을 갖지 못했다. 


      정도전 일파는 폐가입진의 논리를 세웠다. 우왕과 그 아들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것에 근거한 지침이었다. 정도전이 있었기에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수 있었고, 이성계가 있었기에 정도전도 그의 뜻을 펼칠 수 있었다. 정도전과 이성계의 돈독한 관계는 세자 책봉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정도전은 이방원 편에 선 하륜을 외직으로 쫓아내고 이방원을 제거하려 하였다. 이성계에게 정도전이 있었다면 이방원에게는 하륜이 있었다. 정도전은 신하들이 주체로서 국가를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군주 일인이 좌지우지하는 전제적인 체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이다.(206 페이지) 


      하륜은 허약한 군주보다 강한 추진력을 가진 군주가 어렵게 세운 나라를 지킬 수 있고 그래야만 신하도 그를 도와 일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210 페이지) 정도전과 하륜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주역들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갈라선 것은 국가와 지도자에 대한 생각의 차이 때문이었다. 중종과 조광조는 섣부른 개혁은 화를 부른다는 제목으로 만났다. 조광조는 17세 때 함경남도 영변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갔다가 한훤당 김굉필을 만났다. 조광조는 무오사화로 죄를 받고 귀양 와 있던 김굉필을 통해 글과 학문을 배웠다. 


      김굉필은 길재와 정몽주의 학풍을 이어받은 도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후일 조광조가 도학정치를 실현하려 한 것은 그의 학풍과 깊은 관련이 있다. 조광조는 인물이 수려하였지만 엄격하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 하루는 외방에 나갔다가 날이 저물어 어느 집에 머물게 되었다. 그 집 여주인이 그를 사모하여 둘만 있는 틈을 타 비녀를 뽑아 그에게 주었다. 당시 비녀를 뽑아주는 것은 남자에게 모든 것을 허락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는 비녀를 받아 말없이 벽 틈에 꽂아두고는 그 길로 그 집을 나와버렸다.(224 페이지)


      조광조는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할 것을 주장했다. 정치를 개혁하고 부패한 구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참신한 인재가 필요하다는 논리였다.(226 페이지) 종래의 타락한 과거제도로는 참다운 인재를 뽑을 수 없으므로 중앙이나 지방에서 유능한 사람을 천거하면 왕이 이를 시험하여 인재를 뽑는 것이다. 과거는 하루의 재주로 시취하는 것이고 문장에 치중하는 폐단이 있다. 그러나 천거제는 덕행이 단정한 자를 뽑아 다시 시험하는 것이니 만큼 재행을 겸비해야 한다. 어떤 이는 불공평하게 잘못 천거할까 우려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천거하므로 하나 둘 불공평한 이가 섞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천거제를 막는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지난날 김굉필 같은 유학자는 부패한 과거에 나가지 않겠다고 하였는데 이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현량과 실시로 홍경주, 심정, 남곤 등 기성세력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갈등과 대립, 위기의식은 위훈삭제(僞勳削除) 사건으로 폭발하였다. 반정(反正)으로 즉위한 중종은 유교적인 개혁을 실시하려 했다. 좋은 신하를 얻어 공정하고 불편부당한 정치를 하고자 했다. 그런 이유로 조광조를 발탁한 것이다. 그러나 조광조는 지나치게 급하고 과격한 개혁을 추구했다. 원칙과 이상에만 치우쳐 기성세력을 무시하면서 모든 것을 다 바꾸려 하였다. 


      시에 인생을 담다라는 제목으로 만난 황진이와 허난설헌의 매치업은 재미 있다. 중종 19년(1524년)이 황진이의 출생년이다. 황진이는 당대의 석학 서경덕을 사숙(私淑)했다. 황진이는 소세양과 헤어진 후에도 그를 그리워하며 사모하는 마음을 시로 읊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도려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시는 밤이면 굽이굽이 펴리라..” 허난설헌은 명종 18년(1563년) 태생이다. 황진이가 자연을 읊고 명사들과의 사랑에 빠진 것에 비해 허난설헌은 여인들의 고된 삶에 눈을 돌리기도 하였다. 


      이황과 이이는 학자로서의 참된 자세는 무엇인가란 제목으로 만났다. 주자(朱子)는 이기이원론을 주장했다. 우주의 근원이 되는 이(理)와 기(氣)는 서로 떠날 수 없는 관계이나 섞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황은 주자의 설을 그대로 따랐지만 이와 기를 둘로 나누어 보는 데에 중점을 두어 이와 기가 서로 섞일 수 없음을 더욱 강조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는 기의 활동의 근거로서 기를 주재하고 통제하는 실재이다. 그러므로 결국 주리적인 입장에 선 것이다. 이황 이후 주리파는 유성룡, 김성일 등의 제자가 영남학파로서 계통을 이었다. 


      주기설의 선구적 존재는 서경덕이었다. 주기설을 대성시킨 이가 이이였다. 이이는 이와 기를 이체이물(二體二物)로 규정하는 주자 및 이황의 순수이원론에 반대하였다. 이와 기는 일체양면적인 것이어서 이를 분석하면 둘이되 양자의 관계에서 보면 동전의 양면처럼 일물(一物)일뿐이라는 것이다. 이(理)는 일반적인 것, 무활동적인 것, 추상적인 것이어서 이를 외부로 표출하여 현실적인 것으로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는 활동적인 기의 작용을 필요로 한다. 이황은 정치적 실천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학자의 본분에 충실했다. 이이는 마음 공부를 중시하면서도 정계에 나아가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경세제민을 실천하려 하였다. 


      송시열과 윤증은 독단적인 학문 추구의 종착지는 어디인가란 제목으로 만났다. 송시열은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그러나 1년만에 스승을 여의고 스승의 아들 김집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송시열은 동기로서 친밀하게 지내던 윤선거와 조금씩 사이가 벌어졌다. 백호 윤휴의 경전 해석에 대한 이견에서 비롯되었다. 송시열은 여러 경전을 독자적으로 해석한 윤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윤휴는 이이의 학설을 비판했다. 윤선거는 경전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경전에 대한 주자의 해석만이 절대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송시열과 윤선거의 입장 차이는 후일 윤선거의 아들 윤증에게 이어져 노론, 소론으로 갈라지는 한 요소가 되었다. 송시열과 윤증의 대립은 회니시비로 불린다. 회니는 송시열이 살았던 회덕(懷德)의 회와 윤증이 살았던 니성(泥城)의 니를 딴 이름이다. 윤선거는 학문과 사상에 있어 비판의 자유를 주장하여 윤휴를 두둔했고 예송논쟁에서도 송시열에게 동조하지 않고 윤휴를 옹호하였다. 윤증은 송시열에게 가서 아버지 윤선거의 묘명(墓銘)을 지어달라고 했다. 송시열은 성실하지 못한 비문을 지어보냈다. 송시열은 개찬(改撰) 요청에도 성실하게 임하지 않았다. 


      윤증은 비명을 요청할 때 기유의서(己酉疑書)를 가지고 갔다. 윤선거가 죽기 4년전(1665년)에 쓴 것으로 윤휴, 허목 등에게 혹 잘못이 있다 해도 같은 사류이므로 이들을 너무 배척하지 말고 차차 등용하여 쓰는 것이 옳다고 송시열에게 충고하는 내용이었다. 신유의서(辛酉疑書; 1684년)는 윤증이 송시열에게 보내려고 쓴 것으로 송시열의 학문은 그 근본이 주자학이라 하나 그 기질이 편벽해 주자가 말하는 실학을 배우지 못하였고 송시열에 내세우는 존명벌청(存明伐靑)은 방법을 말로만 내세우고 실익이 없다는 것이다. 


      윤증은 이 의서를 먼저 박세채에게 보였다. 박세채는 이를 보내지 말 것을 권고하였다. 그런데 박세채의 사위이면서 송시열의 손자인 송순석이 몰래 가져가 송시열에게 보여주었다. 이때부터 송시열과 윤증이 절의(絶義)하고 노소분당을 굳힌 것으로 본다. 송시열을 영수로 한 노론과 윤증을 영수로 한 소론은 여러 면에서 의견을 달리하여 대립하였다. 송시열은 학문적으로 주자절대주의자였으며 정치적으로 숭명반청을 고집하였다. 윤증은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허용하였으며 현실에 입각한 정치를 주장하였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는 쇄국과 개방의 줄다리기란 제목으로 만났다. 민비와 대원군은 나름대로 정치철학을 가지고 개혁을 하려 했다. 그러나 각자의 정책은 음모와 방해로 번번이 좌절되었고 서로 발목을 잡는 꼴이 되어 뜻대로 이를 수 없었다. 조선은 결국 준비 없는 개방을 하여 마침내 한일병합이라는 비극을 맞이했다. 


      식민사학의 내용은 1) 타율성론, 2) 반도적 성격론, 3) 정체성론으로 이루어졌다. 1)에 의하면 단군 조선의 존재는 부정되고 기자동래설은 인정된다. 타율성론의 또 다른 갈래는 만선사관이다. 만주사를 중국사와 분리해 한국사와 더불어 한 체계 속에 넣어야 한다는 만선사관은 침략적 목적에 의한 것이다. 2)는 한국사의 성격을 부수성, 주변성, 다린성(多隣性)으로 규정하고 그 원인을 반도라는 지리적 조건에서 찾은 이론이다. 3)은 한국이 왕조 교체 등 사회적 변혁에도 불구하고 사회 경제 구조에 아무런 발전을 가져오지 못했으며 특히 근대사회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봉건사회를 거치지 못하여 전근대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 역시 정치적 목적이 있다. 한국이 전근대적인 상황에 멈춰 있기 때문에 한국을 근대화하기 위해서는 이웃 나라인 일본이 간섭해야 한다는 논리가 되었다. 그러나 식민사학에 대해 당시 양심 있는 한국의 지식인들은 이것의 허구성을 타파하고 극복하려 하였다. 그 한 일파가 민족의 혼과 정신을 일깨우려 한 민족주의 사학이고 다른 일파가 유물사관에 입각하여 한국사의 발전성을 강조하려 한 사회경제사학이었다. 전자의 대표자가 신채호이고 후자의 대표자가 백남운이다. 


      여운형과 박헌영은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초래한 비극이란 제목으로 만났다. 박헌영과 같은 사회주의 계열이면서도 좌나 우를 가리지 않고 통일된 조국을 만들려 한 이가 여운형이다. 여운형도 한국의 독립을 위해 공산주의를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 중 하나였다. 따라서 공산주의만 절대적으로 신봉하지 않고 때로는 우파와의 연합도 서슴지 않았다. 박헌영은 달랐다. 그는 철저한 공산주의자였다. 해방 이후 박헌영이 벌인 활동도 오로지 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한 운동의 일환이었다.


      여운형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박헌영은 가난한 서자로 태어났다. 여운형은 만일의 사태를 위한 방패막이로 일본의 몇몇 요인들과 친교를 맺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일본이 패망하자 그들은 여운형에게 제일 먼저 찾아와 행정권 이양 교섭을 벌였다. 여운형은 이를 수락하고 건국동맹을 모태로 하여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발족시켰다. 여운형은 남한에 남아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 1947년 7월 19일, 괴한의 총격으로 숨을 거두었다. 위치가 너무 컸기에 그는 좌익과 우익 양측에서 모두 꺼리고 두려워 하는 인물이었다. 


      박헌영은 철저히 공산당으로서 활동을 벌였으나 여운형을 따라갈 수 없었다. 해방 후에도 친미에서 반미로 변신하면서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하려 했으나 항상 여운형의 그늘 아래 있었다. 그가 북으로 간 것은 신변의 위협과 더불어 그의 한계를 인식하였기 때문이었으리라. 


      김갑동의 '옛사람 72인에게서 지혜를 구하다'는 고대, 고려, 조선, 근현대 등으로 구성된 책이다. 나의 경우 고려, 조선에 많이 관심을 기울여왔고 고대, 근현대에는 상대적으로 등한했음이 드러난다. 마지막 챕터인 김구와 이승만편은 읽지 않았다. 문제적 인물에게서도 교훈 거리를 얻어야겠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과거의 문제적 인물을 모리(謀利)적 의도로 거듭 불러내는 세태가 싫다. 물론 저자의 이승만 논의는 김구와 비교해 나름의 교훈을 얻으려는 의도임을 모르지 않는다. 식민지근대화론과 부일(附日)로 어수선한 이 때에 오래 전에 나온 저자의 책을 읽는 것은 지식을 얻기 위해서일뿐이다. 좋은 경험이었다. 발전을 위해 근현대에 집중해야겠다고 다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