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으로 읽는 옛집 -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왜 건축에 중독되었는가?
함성호 지음, 유동영 사진 / 열림원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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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의 철학으로 읽는 옛집은 건축에 큰 의미를 부여한 조선의 성리학자들에 대한 기록이다. 부제는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왜 건축에 중독되었는가?’이지만 책에 등장하는 성리학자들의 행동을 중독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중독되었다고 말하려면 타지마할을 지은 인도 무굴 제국의 황제 샤자한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는 건축을 하다가 국고를 탕진해 보다 못한 아들에게 강제 폐위를 당하기까지 했다.(104 페이지) 책에 등장하는 성리학자들이란 회재(晦齋) 이언적, 남명(南冥) 조식, 퇴계(退溪) 이황, 고산(孤山) 윤선도, 다산(茶山) 정약용, 사계(沙溪) 김장생, 우암(尤庵) 송시열, 명재(明齋) 윤증 등이다.

 

흥미로운 점은 많은 성리학자들이 집을 뜻하는 재(), () 등의 글자를 채택했다는 점이다. ‘철학으로 읽는 옛집의 저자는 시인이자 건축가이다. 현역 건축가로서의 경험과 안목이 작품 서술에 충분히 반영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등장 인물들의 사상과 건축이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조선 유학을 정주계(程朱系: 정호, 정이 형제 및 주희의 학설을 따르는 학파) 성리학 일변도로 만든 원흉으로 꼽히는 이언적은 용()자 형태의 집을 지었다. 이는 자생풍수(지형풍수)를 변용한 결과이다.(61 페이지)

 

지형 풍수는 자생 풍수이고 가택 풍수는 중국 풍수이다.(27 페이지) 이언적이 자생 풍수를 변용해 지은 집이란 향단(香壇)을 말한다. 이언적은 독락당(獨樂堂)도 지었는데 이는 정치적으로 좋지 않은 시기에 지은 집이고 향단은 복원되어 경상감사를 제수받고 금의환향하여 지은 집이다.(53 페이지)

 

이상한 것은 불우한 시기에 지은 독락당은 너무도 여유롭고 완완(緩緩: 느릿느릿함)한데 화려한 시절의 집은 지극히 폐쇄적이고 우울하다는 점이다. 저자에 의하면 향단은 전체적으로 용()자 형국의 집이다.(60 페이지) ()은 일()과 월()의 합성자이다. 그리고 둘을 나란히 쓰면 일() 풀러스 월() 즉 명당(明堂)의 그 명()자가 된다.(61 페이지)

 

()가 어떻고 기()가 어떻고 논하던 성리학자들이 아무리 정치 생명, 나아가 목숨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라 해도 풍수(風水)에 의존한 것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저자는 풍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풍수는 발복의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바람과 물을 얻는 방법이고 그것을 지킨다는 의미이다.

 

관건은 나무를 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가꾸고 보살핌으로써 좋은 수세(樹勢)를 얻듯 풍수지리의 의미도 단지 좋은 땅을 선택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좋은 땅을 자자손손 지켜나가는 데 있다.(49 페이지) 명당은 없다.(22 페이지)

 

저자가 우려하는 것은 풍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술법(術法)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다.(49 페이지) 저자는 술법 풍수도 반대하지만 지세를 의생물화하는 형국론(形局論)도 반대한다.(79 페이지) 저자는 얼마나 많은 조선의 학자들이 학문적 바탕을 숨겨왔는지 전공자들이 더 잘 알 것이라 말한다.(93 페이지)

 

사상과 집을 이야기했지만 사상과 권력도 깊은 연관이 있다. 이런 구절을 보라. “()의 움직임만을 인정하는 율곡의 입장으로 볼 때 그의 제자들이 정치적 헤게모니를 쥐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현실적 감각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덕 수양의 문제를 탐구하는 퇴계의 제자들이 산림에 근거하여 공부에 전념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래서 선조 이후부터 율곡 문하의 서인은 거의 정국을 주도하는 집권 세력이 된다.”(173 페이지)

 

율곡은 기()의 움직임만을 인정하고 이황은 리()의 움직임만을 인정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기에 의해서 이가 가려지는 것을 극복하고 리()의 순수성으로 돌아가자는 모토를 공유했다.(175 페이지) 서인(西人)은 이율곡의 기호학파에 학문적 기반을 둔 세력이고 남인(南人)은 이황의 영남학파에 학문적 기반을 둔 세력이다.(166 페이지)

 

그러면 남명 조식은 어떤가. 그는 지리산을 노장(老莊)적 세계를 상징하는 산으로 여겼다.(95 페이지) ‘철학으로 읽는 옛집의 미덕 가운데 하나는 유교와 불교의 관계를 알 수 있다는 점이다. , , , 문왕, 무왕, 주공, 공자, 맹자로 이어지는 도통론은 부처로부터 이심전심의 비법으로 마지막 혜능에까지 이어진 법통론에 강한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27 페이지)

 

성리학은 선진(先秦) 유학이 가지고 있는 형이상학적인 단점을 보완하며 이루어졌고 아무리 성리학이 불교를 배척하며 이루어졌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불교와 도교가 정리해놓은 형이상학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25 페이지)

 

윤선도의 호 고산(孤山)은 서울 시절 별서(別墅)를 둔 남양주 수석동이 홍수로 인해 범람하면 사방이 물에 잠기고 퇴매재산만이 물 위에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을 보고 지은, 호방함이거나 철없음의 소산이다.(145 페이지) 해옹(海翁)이란 호는 윤선도가 후에(철들었을 때) 보길도 부용동에 살며 유유자적하는 생활을 자위하기 위해 지은 또 다른 호다.(148 페이지)

 

지천명이라 했지만 퇴계의 경우는 어떤가. 그는 50이 넘어 주자(朱子)를 접했다.(115 페이지) 흥미로운 것은 우리에게 주자가 본격적으로 연구될 때 이미 중국에서는 비판받고 있을 때라는 사실이다.(115 페이지)

 

다산은 다산초당의 조경 원리를 주역(周易)‘에서 찾았다. 은자(隱者)의 길함을 표상하는 것이다.(201 페이지) 이괘(履卦)에 나오는 유인(幽人)이라야 정()하고 길()하다는 사()이다. 물론 다산초당은 다산이 직접 지은 집이 아니다. 다산의 외가 친척인 윤단이 초옥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치던 곳인데 후에 다산에게 내준 것이다.(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 오른편의 묘가 윤단의 묘다.: 200 페이지)

 

철학으로 읽는 옛집은 사상과 집의 관계, 사상과 정치의 관계는 물론 사상 자체에 대해 숙고하게 하는 장점이 있는 책이다. 가령 성리학이 가진 기본적 정치 입장은 왕권신수설에 반()하는 것이라는 점이 그렇다.(209 페이지)

 

조선은 치열하게 당쟁했지만 (왕을 바꾸기보다) 왕을 내세워 자신들의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는 것이 더 주효하다는 대전제에는 암묵적으로 합의한 듯 하다(209 페이지)는 말을 보라. 이런 모습은 여야(與野)가 치열하게, 아니 진흙탕의 개처럼 싸우다가도 세비(歲費) 인상에 대해서는 일치하는 현 상황을 생각나게 한다.

 

영남학파는 퇴계의 학문에서 비롯되어 심경(心經)‘의례(儀禮)‘를 중시했고, 기호학파의 예학은 율곡과 구봉(송익필: 宋翼弼)에 의해 계도되었으며 소학(小學)‘주자가례(朱子家禮)‘를 바탕으로 했다.(209, 212 페이지)

 

()란 신의 계시를 받고 신을 섬기는 제사 의례 즉 무격신앙(巫覡信仰)에 가까운 개념이다. 그러나 이를 사상으로서 승화시킨 사람은 공자이다. 공자는 시시콜콜하게 예를 따진 사람이다.(216 페이지) 팔일무(八佾舞)란 것이 있다. 공자는 제후인 계손씨(季孫氏)가 천자의 춤인 팔일무를 춘 것을 질책했다. 공자는 계손씨를 보며 (천자가 아님에도 팔일무를 추었으니) 무엇을 차마 하지 못하겠느냐는 말을 했다.(조재모 지음 궁궐, 조선을 말하다‘ 33 페이지)

 

사계(沙溪) 김장생은 임이정(臨履亭)을 지었다. 이는 (두려워하고 조심하기를) 깊은 못에 임()하는 것처럼 하고 엷은 얼음을 밟는 것 같디 하라는 시경(詩經)‘의 여림종연(如臨淙淵) 여리박빙(如履薄氷)에서 따온 것이다.(230 페이지)

 

저자는 우암(尤庵)을 주자(朱子) 탈레반, 사계(沙溪) 예학의 사도(司徒) 바울이라 부른다.(233 페이지) 송시열이 어린 아이처럼 따랐던 스승은 오직 한 사람 주자(朱子)였다.(242, 243 페이지) 송시열은 사계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으로부터 배웠다. 송시열은 공자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공자와 주희의 말이 다를 경우 주자의 말을 따르겠다고 밝혔다.(249 페이지)

 

윤선도와 더불어 송시열은 조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심한 건축 중독자 중 한 명이었다.(257 페이지) 저자는 이황이 툇간을 내면서까지 지키려고 했던 검박(儉薄)한 생활 양식이 17세기에 들어서면서 무너진 것은 왕권에 비해 신하들의 권력이 커진 사회상을 반영한다고 본다.(257 페이지)

 

이언적이 회재(晦齋)를 주자(朱子)의 호인 회암(晦庵)에서 따온 것처럼 송시열은 주자의 호 회암에서 암()을 따와 우암(尤庵)이라 한 것은 유명하다.(271 페이지) 송시열(1607 1689)도 오래 살았지만 그의 정적인 윤증(尹拯: 1629 1724)도 오래 살았다. 윤증은 조선 후기 노론과 소론의 분립과정에서 소론의 영수로 활동했던 조선의 문인이다. 파격적이게도 윤증은 81세에 집을 지었다.(295 페이지)

 

송시열의 주자근본주의에 대항했던 젊은 학자들의 학문적 입장은 양명학(陽明學)이다. 이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다.(299 페이지) 성리학에서 쓰이는 사문난적이란 교리를 어지럽히고 그 사상에 어긋나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 말을 가장 적극적으로 쓴 최초의 인물이 맹자이다. 그는 공자의 도가 아니라고 생각되는 모든 학설을 이단으로 여겨 철저하게 배격했고 공자와 다른 설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단호히 붓을 들어 탄핵했다.(300 페이지)

 

윤증의 사랑채의 당호는 리은시사(離隱時舍)이다.(318 페이지) ()나 당()이 아니라 사()를 쓴 것이다. 주역 중천건괘(重天乾卦) 구이(九二: 두번째 양효)는 현룡재전(見龍在田) 이견대인(利見大人)이다. 리은 즉 숨어 있던 곳에서 벗어나는 것이기에 현룡이고 땅 위에 있으므로 밭에 있다고 한 것이다.

 

()는 집이라는 의미, ()의 의미가 있는 글자이다. 깊이 생각하고 지은 이름임을 알 수 있다. 리은시사는 용이 숨어 있다가 세상에 나올 때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때를 기다려서 나온다는 의미이다.(322 페이지)

 

실사구시의 학풍과 양명학자들을 송시열의 칼날에서 비호한 절대 공로자는 윤증이다. 그는 주자학이나 양명학,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고 서인이나 남인 할 것 없이 두루 교류하며 주자근본주의 시대에 다각적 추론의 장을 열어놓았던 윤증의 집은 비단 학문이나 정치에서뿐 아니라 민중의 삶에서도 그러했다.

 

흉년이 들면 마을에 공사를 일으켜 그 노임으로 쌀을 지급하고 추수 때는 나락을 길가에 두어 배고픈 마을 사람들이 가져가도 모른 체했다. 그런 윤씨 가문의 가풍 때문에 이 집안은 동학혁명 때도 한국전쟁 때도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322, 323 페이지) 다 읽고 나니 통쾌한 느낌이 든다. 주자 탈레반 송시열이란 표현 때문이지만 그보다는 윤증의 학문과 삶이 보여준 모범적인 일치 때문일 것이다.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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