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면제인 알코올이 각성제인 커피로 바뀌면서 근대가 시작되었다(신영복 지음 담론’ 20 페이지)는 글은 흥미롭다. 사실이라 하지 않고 글이라 한 것은 자료 출처가 명기되지 않아서이다. 그렇다고 내가 저 글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의 경우 글의 출처가 명기된다 해도 해당 글을 내 식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전후 맥락을 제대로 알 수 없어 그냥 잠정적인 지식으로 알고 있다. 어떻든 저 글을 수용한다면 허먼 멜빌의 모비딕의 일등 항해사인 스타벅으로 하여금 전 세계인들을 커피의 바다로 이끌게 하고 사이렌이 그들을 커피의 세계에 빠지게 한다는 스타벅스 커피점의 전략은 대단히 상징적이고 전략적이다.

 

두 로고(스타벅과 사이렌)를 사용한 것은 스타벅스의 본점이 있는 시애틀이 항구 도시이고 커피는 대개 배를 통해 전 세계로 운반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모비딕의 스타벅은 퀘이커교도이다. 퀘이커는 절대금주주의(teetotalism)를 지킨다.(물론 이것보다 중요한 것이 그들의 절대평화주의이다.)

 

대신 그들은 물, 쥬스, (), 커피 등을 마신다. 커피 모델로 쓰기에 제격이다.(절대금주주의를 지키는 퀘이커교도인 스타벅을 커피 모델로 쓰는 것은 절묘해 보인다.) 일본의 커피 오타쿠인 의사 탄베 유키히로의 커피 과학에 이런 내용들이 있다.

 

중세 아랍의 수피들이 환각제로서 커피를 마시고 대중에게 퍼뜨렸다는 기록, 카페인은 커피 나무와 차 나무가 생존 전략으로 갖게 된 성분이라는 기록..고옥주 시인은 녹차 한잔 속에 바다의 출렁임과 잔잔한 온기가 잠들어 있다는 말을 했는데 유키히로의 책에는 커피에 깃든 오래된 역사와 문화 및 과학이 있다.

 

커피를 마시며 창을 통해 밖을 내려다 보는 해찰(일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쓸데없이 다른 짓을 함)의 호사를 누리고 싶다.(당연히 혼자 가야 할 것.) 책을 읽다가 이런 글을 쓰는 것 자체가 해찰 아닌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