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1.21 사태를 일으킨 북한 작전 세력의 최종 목표지는 청와대였다. 당시 연천(장남면)도 통과 지점의 하나였다. 침투 세력은 청운동 자하문 고개에서 총격전 끝에 우리 군경에 의해 진압(사살, 생포)되었다.

 

윤동주 문학관 가까운 곳에 당시 침투 세력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은 최규식 총경의 동상이 있다. 연대 철학과 재학중 한국 전쟁 발발로 입대했다가 특채되어 종로 경찰서장으로 근무중이던 38세의 인재였다.

 

청운동에는 앞에서 말했듯 윤동주 문학관이 있다. 이곳의 많은 자료들은 윤동주 시인의 여동생 윤혜원 여사에 의해 옮겨진 덕에 전시되고 있는 것이다. 윤혜원 여사가 남한행을 결심한 것은 용정(龍井)이 공산화되어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아서였다.

 

여사가 서울에 무사히 도착한 것은 고향 집을 떠난 지 12개월만이다. 남편과 함께였는데 당시 그 분들은 연천을 거쳐 서울에 도착했다. 연천과 청운동이 이렇게 연결된다고 말하면 너무 작위적인가?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의 저자 고운기 (문학) 박사는 194263일 윤동주 시인의 쉽게 씌어진 시가 쓰인 릿쿄 대학을 정확히 59년만인 지난 2001년 가 보았다고 말한다. 나는 윤동주 문학관을 개관 5년만인 2017년 봄 처음 가 보았다.

 

쉽게 씌어진 시가운데 대학 노 - 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는 구절이 눈길을 끈다. 이 구절을 보고 나는 기형도 시인의 대학 시절의 한 구절인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는 구절을 떠올린다.

 

기형도 시인과 윤동주 시인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연세대 졸업(윤동주 시인은 연세대의 전신인 연희전문)이라고 말하면 너무 단순하다.

 

마광수(1951 2017) 교수라고 말하고 싶다. 윤동주 시인을 알리는 데 공헌한 분들로 윤혜원, 강처중, 정병욱 등을 들 수 있지만 마광수 교수의 윤동주 연구라는 논문(1983)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인다. 기형도 시인은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는데 이때 예선 심사위원 중 한 분이 마광수 교수였다.

 

흔한 말이지만 인연(因緣)이란 말을 떠올린다. 궁금한 것은 윤동주 시인이 영향을 받은 시인은 누구이며 기형도 시인의 경우는 누구인가, 이다. 윤동주 시인의 경우 폴 발레리, 백석(白石), 정지용, 릴케 등이다. 그럼 기형도 시인의 경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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