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영감을 주는 페친께서 오늘 이런 글을 올렸다.
1) “완벽한 사람도 없고 완벽한 부모는 더군다나 없다.”..

이를 보며 나는 “어떤 사람에게 밥인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다. 이런 마당에 다른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바를 남김 없이 확실히 안다고 자부하는 일이야말로 철딱서니 없는 노릇“이라는 불교학자 에드워드 콘즈의 말(‘한글세대를 위한 불교’ 100 페이지)을 인용한다.

2) “나의 작은 소견으로는 배가 고프면 먹고 배가 부르면 수저를 놓는 것,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해가 지면 요기만 하거나 먹지 않아야 한다.”...

이를 보며 나는 ‘때가 되면 자고 때가 되는 먹는 것이 수행이다. 때 아닌 때 먹거나 자면 안 되는 것이다. 수행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게 된다.

요기(療飢)란 시장기를 겨우 면할 정도로 조금 먹는 것을 말한다. 요(療)는 치료할 요, 기(飢)는 주릴 기이다. 위를 비워 치료를 기약한다는 의미가 요기란 말에 담겨 있는 듯 하다.

세계적 명상 스승 아잔 브라흐마는 자신이 아는 한 스님 이야기를 들려준다. 태국 불교계에서 가장 높은 지위인 종정(宗正)이 되려는 찰나에 그 자리를 탐낸 다른 승려가 공산주의자라고 고발함에 따라 감옥에 갇힌 승려이다.

이 승려는 작은 독방에서 소박하고 정결한 음식을 먹으며 많은 자유를 누렸다. 이 분의 비결은 어디에서든 기꺼운 마음으로 자신의 처지를 인정, 수긍하는 것이었다.(‘성난 물소 놓아주기’ 166 페이지)

케임브리지 대학 물리학도 출신의 승려 아잔 브라흐마는 명상의 힘 덕분에 건강 문제가 사라진 경험을 한 한 승려 이야기를 한다.

이 분은 암으로 고생하다가 명상 덕에 퇴원 후 25년을 더 살다가 입적했다. 이 승려의 사례를 거론하며 아잔 브라흐마는 “명상하는 사람인 내게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세계를 지어낸다는 것이 더없이 자명한 사실로 보인다.”는 결론을 내린다.(32 페이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일까? 확언하기 어렵다. 내 관심을 끄는 것은 “당신이 사물과 현상에 관여하지 않으면 그런 것들은 당신의 의식에서 말끔히 사라져 버린다,”는 말이다.(Let it go)

의식은 지어내는 만큼 사라지게도 한다는 의미일까?(물론 일체유심조든 우리가 우리 자신의 세계를 지어낸다는 말이든 나로서는 판단을 유보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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