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양주 회암사지(檜巖寺址) 박물관을 찾았다. 나무 공부를 하기 위해 그제 창경궁에 가서 숲 해설을 들은 뒤 바로 찾은 것이기에 뜬금 없는 것은 아니다. 절터와 관련한 박물관 이야기에도 나무 이야기는 있을 것이기에..
하지만 마침 휴일인 월요일을 골라 간 여행이 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뜬금 없는 일이 된 것일까? 오래 벼르던 곳이었는데 확인도 하지 않고 방문하다니.
물론 휴일이 월요일이라는 사실을 알았어도 요일을 확인하지 않고 박물관에 갔을 가능성이 높다. 박물관은 닫혔으니 갈 곳은 회암사지일 수 밖에 없었다.
물론 회암사지 박물관 개장과 무관하게 회암사지는 찾을 수 밖에 없는 곳이다. 회암사는 왕실의 후원을 받아 많은 불사를 진행한 조선 전기의 최대 사찰이었다.
조선왕조 실록에는 회암사에 쌀 1백석(태조 6년 8월 27일), 전지(田地) 3백결(태종 2년 5월 22일), 밭 74결(태종 2년 6월 6일), 전지 120결(태종 2년 8월 8일), 쌀 50석(세종 17년 4월 17일) 등을 비롯 많은 물품을 하사한 기록이 있다.
명종 21년 4월 20일 기록에는 명종이 유생(儒生)들이 회암사를 태우려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하며 다만 그것은 유생들을 가칭(假稱)하는 자들이 하는 짓일 것이라 추측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로부터 약 30년을 건너 뛰어 선조 실록에 회암사 옛터라는 말이 나온다. 회암사가 그 중간에 불에 탔음을 알 수 있는 단서다. 물론 유생들의 소행일 것이다.
화재 이후 옛 회암사에 속해 있던 암자(庵子)가 외형이 커져 절이 되었다. 암자에 부도(浮屠)도 딸려 있었다.
내가 가진 책인 ‘새벽 산사에 가보세요’(1997년 출간)에서 저자 미영순 님은 회암사 부도를 깨어지고 금간 옛 영화라 표현해 놓았다.
회암사는 문정왕후(중종의 세 번째 비이자 명종의 어머니), 지공(指空), 나옹(懶翁) 선사 등과 연관된 사찰이다.
회암사는 지공 선사가 창건(創建)했다. 나옹 선사는 회암사에서 득도한 후 중국으로 가 지공 선사의 제자가 되었다. 회암사에 나옹 선사의 부도가 있다.
회암사지를 보며 염명순 시인의 ‘수국이 피는 곳‘이란 시를 떠올렸다. ˝수국을 기억하세요? 사람들의 발길이 자주 닿지 않는 퇴/ 락한 산사의 마당 한켠에 흰색에 가까운 보라색 수국이 피/ 는 날의 고요를. 비구니의 낭랑한 독송이 햇살에 실려 수국/ 위에 가만히 내려 앉을 즈음엔 어김 없이 해가 지고 나는 왜/ 늘 어스름에만 수국을 보았는지요...˝
이 시를 떠올린 것은 시인이 말한 퇴락한 산사와 불에 타 터만 남은 회암사를 연결지어 생각하려는 마음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신이 프랑스에서 유학하며 고국의 수국을 그리워 하다가 정작 한국에 와서는 수국을 잊고 프랑스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수국을 떠올린 사연을 전한다.
회암사는 어릴 적 불공을 드리는 어머니를 따라 가던 절이다. 그렇게 옛 추억을 더듬어 본 뒤 나는 아쉬움에 회암사지 해설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연히 이야기는 숲과 궁궐, 불교 등에 관한 주제를 따라 이어졌다. 안내 해설사는 여고때 시를 쓰시던 분이고 시골에서 자랐지만 밭 한 번 메지 않았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해설사께서 내게 메밀차를 주셨다. 답례는 아니고 염명순 시인의 ‘수국이 피는 곳’과 김명리 시인의 ‘먼길’을 읊었다.
처음 보는 분 앞이었지만 해설 내용과 관련이 있는 것이어서 어색하지는 않았다.
지난 일요일 정동 해설에서 읊은 김용범 시인의 ‘평화의 멜로디’에는 “성공회의 종(鐘)소리”란 구절이 있고 ‘먼길’에는 “전등사 범종소리”란 구절이 있다.
염명순 시인의 ‘수국이 피는 곳’에는 “비구니의 낭랑한 독송“이란 구절이 있다. 모두 퍼져나가는 것들이다.
일찍 돌아서기가 아쉬웠지만 일정 때문에 다음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따뜻한 차를 받고 따뜻한 마음을 나눈 하루였다. 헛걸음이라 할 수 없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