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프리드리히 횔덜린은 내 관심권에서 멀다. 하지만 피곤하고 마음이 무겁고 휑한 바람 같은 것에 점령될 때 횔덜린은 내게 온다.
그가 내 구원은 아니다. 다만 그의 무겁고 어두운 시가 내 마음을 위로해 주고 그처럼 불행한 사람도 있다는 생각이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가정교사로 일하던 집의 여주인과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가 서른셋의 나이로 죽자 정신착란 징후를 보이다가 정신병원에 강제 이송되기도 했던 그는 반평생을 정신착란 상태로 지낸 불행한 시인이다.
“오직 쓰라린 내면의 고통 속에서만 내가 사랑할 가장 아름다운 것 태어나네.”(Und unter Schmerzen nur gedeiht. Das Liebste, was mein Herz genossen.)..
이 구절은 ‘운명(Das Schicksal)’이란 제목의 시의 한 구절이다. 그의 삶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하면 무례할까?
‘하이페리온’이란 시에서 그는 “이기심으로 얼룩진 인간들끼리의 일들은 잊도록 하라. 그리고 온갖 번민과 슬픔으로 가득 차서 갈구하는 마음이여, 돌아가라! 그대의 근원인 자연으로, 방황이 없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그 품으로.“란 말을 했다.
‘저녁의 환상’이란 시에서는 “하지만 나 어디로 가나?/ 속세의 인간들/ 그 노력과 댓가로 살며, 거듭되는 어려움과 안식 속에서/ 모두 즐겁게 지내는데, 왜 내 가슴 속/ 가시만은 잠들지 않는가?”라는 말을 했다.
절실하고 무겁고 슬픈 언어들이 그의 시의 주조(主調)이다.
“그의 죽음의 잠의 침대 머리맡에는/ 초 한 자루 없어요. 당연하죠. 뭣에 쓰겠어요?/ (하지만 생전에 그가 켰던 초들이/ 일제히 밝혀져 있는 걸 내가 못 보는 건지도 모르죠.)”로 시작되는 시..
황인숙 시인의 ‘시인의 묘’라는 시가 횔덜린을 염두에 둔 것인지 생각한 적이 있지만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불행하고 슬프게 살다 간 사람들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오전에 정동 순례를 마치고 오후에는 윤동주문학관과 청운문학도서관에 들러 어슬렁거렸다. 할 일이 많은데 시작하기까지 많이 미적거리는 습관의 일환이 아니라 기분 전환을 위한 것이다.
자고 나면 마음이 한결 편해질 것이고 횔덜린처럼 ‘나 어디로 가는가.. 왜 내 가슴 속 가시만은 잠들지 않는가.‘ 같은 탄식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내일은 나의 날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