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 인사동의 한 갤러리를 찾아 그림 감상도 하고 시인도 뵙고 저녁 무렵 거리로 나와 내가 좋아하는 정독 도서관 가는 길을 걸었다.


도서관 가는 길은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한다는 느낌을 갖게 해서 좋다. 이 길에 명문당이란 출판사가 있고 이웃한 곳에 이학사라는 출판사가 있다.

이학사가 현수막에 철학자 메를로 퐁티의 ‘눈과 정신’ 강해집을 소개할 때는 교토 금각사의 철학자의 길을 걷는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도 걸려 있는 명문당 벽의 ‘쌍계사 가는 길‘ 선전 현수막을 보면서는 쌍계사 길을 걷는다는 느낌을 갖기도 했다.

'쌍계사 가는 길'은 부제가 있다. ’젊은 날의 퇴계 이황이 시 읊으며 녀던 길‘이란 것이다. 궁금증을 자아내는 것은 ’녀다’란 단어가 아니다. '녀다'는 ’다니다’란 뜻일 뿐이다.

나만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퇴계가 관계하면 낭만도 엄숙으로 느껴진다. 스물 여섯 살 연하의 기대승과 논리적 대대(對待)를 하며 깎듯한 예의를 갖춘 것도 나에게는 냉정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런 퇴계가 기생 두향(杜香)과 파격적 사랑을 나누었으니 묘한 부조화가 귀한 자료로 여겨질 정도이다.

동양 철학자 한형조는 유교의 도덕은 통념과 달리 윤리적이기보다 미학적 성격을 갖는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유교의 도덕은 선현들 말씀에 있지도 않고 이타적인 의도나 계산의 결과도 아니고 본능의 자연적 정감으로서 목적 없이 발현되는 어떤 것이기에 일종의 유희이며 예술이라는 것이다.(‘조선 유학의 거장들‘ 98 페이지)

물론 퇴계와 두향의 사랑은 다른 차원으로 볼 일일 테다.

그러니 대학자 퇴계가 시 읊으며 다니던 젊은 날의 길은 어떤 길이었을까?란 궁금증에 대해 말하자. 그 길은 벚꽃 우수수 지는 환희의 길이었을 것이다. 학문보다 실존을 알게 하는 퇴계의 시를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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