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3년 ‘우울의 빛‘이란 책에서 평론가 강계숙 님이 한 말을 최근 다시 꺼내 보았다.
˝이해하기 힘들면 짜증부터 내고 자기방어적인 신경질을 감추지 않는 지적 천박함이 갈수록 도를 더하는 곳에서, 텍스트를 경유하여 벌인 정신의 고투와 개진을 밤 새워가며 최선을 다해 한 글자 한 글자 적는 일이 이 세계 바깥의 별스러운 행위인 양 이해와 공감을 바랄 수 없고, 생활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거듭 체험하는 것은 견디기 힘든 괴로움이다....
오늘도 내일도 다르지 않다. 비평의 무용함에 대한 확인과 절감이 내겐 생존의 문제로 다가온다.. 이런 내가 비평가로 살아갈 수 있을까? ˝
지나친 감도 있지만 기본 메시지는 공감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 사이 어떤 좋은 변화가 강 평론가에게 생겼다면 좋겠다. 좋은 변화란 교수 임명 같은 것이다.
최근 비슷한 듯 다른 정서를 자아내는 글을 한 편 읽었다. 서하진 교수가 쓴 ‘소설가 되기‘란 제목의 글이다. 나는 이 분을 소설가로 먼저 알게 되었다. 그 이후 교수가 되었으니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체제에 들어섰으리라 생각한다.
비슷한 정서라 한 것은 서 교수가 소설가 되기를 희망하는 자신의 학부생에게 한 말 때문이다. 지난 학기 자신의 수업을 들었던 한 경영학과 남학생 이야기로 경영학 전공으로 취업할 생각이 없다는 그에게 서 교수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소설가가 되기는 쉽지 않지만 되더라도 대개 대리운전, 택배원, 편의점 알바 등 두세 개의 직종을 전전하며 생계를 해결하는 것이 현실˝이다. ˝창작집 한 권을 내기까지 대략 4년이 걸˝린다. ˝초판 500부를 찍어도 재고가 남는 게 현실˝이다 등...
다행히(?) 서 교수는 ˝첫 소설이 마지막 작품이 되는 작가가 절반에 가깝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서 교수는 그 학생에게 결론 격의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모든 사람들이 소설가가 되는 세상을 꿈꾼다.˝...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두가 열심히 자신들의 일을 하고 성실히 살아 소설을 쓰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 아닌가 추정할 뿐이다.
서 교수가 꿈꾸는 이런 세상은 우울과는 거리가 있을 것이다. 평론에도 해당한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내가 잘 모르기에. 하기야 그렇다고 내가 소설을 잘 아는 것은 아니다.
시는 어떤가? 문화해설은 어떤가? 그림, 음악 등은 어떤가?
자기 일을 하며 시간과 능력이 허용할 때 수입에 크게 구애되지 않고 문화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구성원들은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구성원들도 있을 것이다. 아니 그럴 수 없는 구성원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 차이를 무화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