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권현형 시인의 강의(‘시: 열정과 냉정의 동시성’..용산 도서관)는 감명 깊고 만족스러웠다. 문학박사이기도 한 저자의 강의는 필요한 만큼 철학적이었고, 자신의 시와 다른 시인의 시를 세밀하게 풀어줄 정도로 친절했다.
‘열정과 냉정의 동시성‘이란 강의 제목을 통해 짐작하겠지만 새롭게 보(고 쓰)기 위해 의도적으로라도 경계(境界)에 서려고 하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묻지 못한 질문이 있어 아쉬운데 그것은 세상 또는 상투적인 것과 불화하는 것과 경계에 서는 것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이다.
나는 그 분이 한 트라우마 또는 불안에 대한 이야기에 끌렸다. 트라우마 또는 불안은 소중한 문학적 자산이 될 수 있으며 시쓰기란 결국 그것들마저 끌어안는 것이라는 말이다.
나는 조선의 두 군주(君主)를 생각했다. 폐비 윤씨의 아들 이융(李㦕)과 사도세자의 아들 이산(李祘). 어머니의 사사(賜死)라는 트라우마와 공포 속에 유폐된 이융은 조선 임금들 중 유일하게 시집을 낸 임금(이상주 지음 ‘왕의 영혼, 조선의 비밀을 말하다’ 94 페이지)이고 부왕(父王)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 이산은 창덕궁 후원에서 꽃을 감상(상화賞花)하고 낚시(조어釣魚)를 하고 옥류천(玉流川)에 술잔을 띄우고 술을 마시며 시를 썼다.(그래서 그의 모임을 상조회賞釣會라 함)
나는 그 두 인물을 언급하며 비슷한 상황에서 누구는 시를 쓰고 누구는 철학을 하는가, 란 질문을 했다. 이 질문은 시인께서 언급한 릴케의 불안에 내가 자의적으로 철학자 하이데거의 불안론을 연관지어 한 질문이었다.
시를 쓰다 보면 철학(적인) 질문을 하게 되지만 철학적 문제의식을 날 것으로 또는 지나치게 드러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푸는 것은 결국 (문제를 의식한) 나의 몫이란 생각을 했다.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