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움, 어디서 오는가 밝은 사람들 총서 8
정준영 외 지음 / 운주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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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선종(禪宗), 서양철학, 진화심리학, 심리학 전공자 등이 괴로움을 논했다. 괴로움 없는 행복한 세상을 위해. '괴로움, 어디서 오는가'는 그 결과물이다. 초기불교의 정준영은 사성제를 토대로 범부의 괴로움과 원인, 아라한의 경험에 한정해 괴로움을 논한다. 필자에 의하면 초기 경전 안에서 괴로움을 의미하는 두카는 고성제(苦聖諦)의 것, 삼법인의 것, 느낌의 괴로움 등으로 나뉜다. 필자는 두카를 단순히 고(苦), suffering, 괴로움 등으로 번역하여 모든 것이 괴롭다고 설명한다면 잘못이라 말한다.(49 페이지)

월폴리 라훌라는 많은 사람들이 두카의 의미를 잘못 번역하여 사용함으로 인해 불교를 염세주의라고 오해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물론 두카는 고통을 의미하지만 불완전성, 무상함, 비어 있음, 실체 없음 등의 의미도 포함한다. 두카라는 단어를 그대로 쓰는 것이 의미있다. 붓다는 괴로움을 설명했지만 삶의 행복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붓다는 재가와 출가에 대한 구분 없이 여러 형태의 육체적, 정신적 즐거움에 대해 설했다.

초기경전의 설명에 따르면 재가의 즐거움, 출가의 즐거움, 애착의 즐거움, 정신적인 즐거움, 육체적인 즐거움 모두 두카이다. 수행을 통해 얻는 선정의 상태, 높은 수행 단계 역시 두카이다.(50 페이지) 두카는 일상적인 의미의 괴로움이 아니라 무상한 것은 무엇이든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의미이다. 즐거움이나 행복도 무상한 것이라면 불만족의 속성을 벗어날 수 없어 두카이다.

아라한은 괴로움을 가지고 있는가, 가지고 있지 않은가?(아라한은 깨달음을 이룬 초기 불교의 최고 성자이다.) 경전에 따르면 열반을 성취한 아라한은 육체적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 아라한은 육근(六根)을 통해 들어오는 대상에 마음을 사로잡히지 않고 혼란되지 않고 동요하지 않는다.(74 페이지) 아라한의 경우 필요에 의해 대상과 선택적인 접촉을 이룰 수 있으며 이런 접촉은 범부와 다른 환경에서 일어난다.

범부는 시각, 시각 의식, 형상이 있을 때 접촉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느낌이 일어난다. 자동반사적이다. 같은 대상이라도 대상을 바라보는 방법이 다른 것이다. 여실지견하는 지혜로운 주의를 가지고 있는 아라한에게는 접촉이 일어나지 않는다.(76 페이지) 아라한이 육체적인 괴로움을 경험한다고 해도 그 괴로움은 범부의 괴로움과 다르다. 일반 범부는 육체적인 괴로움이 일어나면 괴로움을 괴로운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근심을 섞어 괴로움을 크고 강하게 확장시킨다.

아라한에게는 오온을 통한 육체적인 느낌들만이 있을 뿐 이에 정신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지 않다.(81 페이지) 결국 두카는 마음의 문제이다.(82 페이지) 초기불교의 괴로움은 단지 통증이나 슬픔의 문제가 아니라 무상함 및 자아 관념 등의 번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87 페이지) 초기 불교의 핵심은 두카와, 두카로부터 벗어나는 길에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89 페이지) 선종 역시 번뇌 즉 보리라는 깨달음에 주안점을 두기에 번뇌 그 자체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92 페이지) 달마는 수행하는 사람이 고통이 따를 때 다겁생래의 무수겁 동안 근본인 진여본성을 버리고 지말인 번뇌망념을 따라 사생육도에 윤회하면서 원한과 미움을 일으켜 다른 이를 괴롭힘이 한량없었음을 성찰하라고 가르쳤다.(95 페이지)

서양 철학의 입장에서 박승찬은 고통은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지극히 보편적인 것이라 말한다.(141 페이지) 니체는 인간은 고통 자체보다 고통의 무의미함 때문에 더 고통받는다는 말을 했다.(142 페이지) 빅터 프랭클은 의미 있는 고통은 이미 고통이 아니라는 말을 했다.(143 페이지) 박승찬은 고통을 보다 폭 넓은 지평에서 바라보며 모든 이들과 함께 성찰하기 위해서 서양철학사의 흐름을 따라가며 새로운 방식으로 고통의 의미를 찾는다. 필자에 의하면 이런 작업은 단순히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간접적으로라도 위로나 도움이 될 수 있다.

스토아학파나 에피쿠로스학파의 주요 관심사는 고통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는가였다.(147 페이지) 스토아학파는 고통에 대한 무관심,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태도, 부동심(apatheia)을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148 페이지) 에피쿠로스는 행복한 삶을 영혼의 평정심(ataraxia)과 육체의 건강으로 규정했다. 물론 에피쿠로스는 행복을 직접적인 감각의 쾌락에서 찾지 않았다. 에피쿠로스학파에 따르면 고통은 악이지만 나중에 다가올 더 큰 쾌락을 위해 받아들여야 할 것이기에 항상 피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148 페이지)

고대 그리스의 경우 철학보다 신화, 서사시, 비극 등에서 고통을 깊이 있게 논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중세철학이 발생하면서 고통에 대한 완전히 다른 표상과 문제의식이 서구사상에 들어왔다.(150 페이지) 고통은 죄에 대한 벌로 여겨졌다. 개인의 죄와 벌 사이의 관계는 점차 공동체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선조들의 잘못으로 후손들이 형벌을 받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원죄설도 이로부터 기인한 것이다.(152 페이지)

이는 명백한 개인적 잘못을 발견하기 힘듦에도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경우를 해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응보의 논리의 문제점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죄없는 희생자가 아닌 범죄자로 만든다는 것이다. 고통이 가중되는 것이다. 초기의 순교 체험에서 강한 영감을 받은 그리스도교는 악과 고통을 악신의 탓으로 돌려 무조건 피하려는 영지주의나, 고통에 대한 무관심을 강조하는 스토아학파에 대항해서 고통을 더욱 긍정적으로 보려는 해석을 발전시켰다.

이 해석에 따르면 고통은 구원의 필수적인 사전 단계처럼 보이고 이로써 그리스도의 제자임이 확인되는 것으로 간주된다.(156 페이지) 라이프니츠의 이론 안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고통은 신이 절대적으로가 아니라 단지 더 큰 선을 이루기 위해 부차적으로 욕구하는 것일 뿐이다.(170 페이지) 영지주의와 스토아학파에 대항해 고통을 긍정적인 것으로 본 그리스도교의 지향점과 구조적으로 같음을 알 수 있다.

라이프니츠의 변신론은 칸트에 의해 강하게 비판받는다. 칸트는 라이프니츠의 변신론을 비판은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고통에 합목적적인 성격을 부여한다. 라이프니츠 등이 주장하는 철학적 변신론이나 칸트식의 비판이 지닌 문제점은 무엇보다도 전체의 이름으로 개인의 고통을 정당화함으로써 고통당하는 이를 근본적으로 소외시킨다는 것이다.(172 페이지) 라이프니츠의 변신론은 윤리적인 악조차도 궁극적으로 형이상학적 악으로 설명해 버리므로 신의 윤리적 책임에 대해서만 변명을 제공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비윤리적 행위에 대해서도 그 책임을 회피할 이론적 가능성을 제공하였다.

모든 악과 그에 대한 고통은 존재론적 불완전성에 기인하는 것이므로 결과적으로 아무도 그에 대해서 도덕적 책임을 필요 없게 만든 것이다.(172, 173 페이지) 이성의 간지(list der vernunft)에 따라 발전하는 역사 안에서 발생하는 고통을 긍정적인 것에 대한 부정 즉 부차적인 것으로 본 헤겔의 이론은 라이프니츠 변신론의 역사철학적 버전이다.(174 페이지) 니체에게는 고통이 아니라 고통의 의미 없음이 저주로 받아들여졌다. 삶에 무의미한 고통 역시 본래 무의미한 것이지만 니체는 그런 고통의 극단적 무의미성으로서 운명마저 긍정하고 사랑하라고 말한다.(amor fati) 이런 고통의 무의미성에 대처하는 방식으로 니체가 제안하는 것은 광기이다.

아도르노는 고통은 하나의 질적 계기 즉 개념과 동일시하여 일치될 수도 없고 보편성 아래에 포섭될 수도 없는 사유의 계기를 제공한다고 보았다.(183 페이지) 고통의 문제와 관련해 현대 철학자들 중 가장 주목을 받는 학자는 엠마누엘 레비나스(1906 - 1995)이다. 그는 칸트보다 더 철저하게, 더 드러내놓고 변신론의 종말을 주장한다. 레비나스는 어떤 정치 이데올로기도, 어떤 형이상학적 목적론도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고 부조리할 뿐인 고통의 실재를 정당화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면서도 레비나스는 자신의 철학을 통해 신과 도덕성의 이념을 여전히 유지하면서 인간의 고통을 생각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모색했는데 그것은 고통 받는 타인의 얼굴을 직면했을 때 얻게 되는 책임과 관련된다.(185 페이지)

레비나스는 자주 나의 고통이나 타자의 고통 자체는 쓸모 없고 무의미하며 타자의 고통을 위한 나의 고통 즉 대속적인 고통만이 의미있다고 주장했다.(186 페이지) 모든 고상한 사랑에는 어느 정도의 희생이 전제되어 모든 희생은 크고 작은 고통을 동반하기 때문에 고통은 사랑을 실천하는 중요한 방식이다.(189 페이지) 제이미 메이어펠트(Jamie Mayerfeld)가 말했듯 고통이 우리를 개선시켜 주기 때문에 도구적으로 좋다고 해서 고통 그 자체가 좋은 것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191 페이지) 필자는 고통의 부정적 측면만을 강조하여 이것을 무조건 없애버리려 해서도 안 되고 고통의 유용성만을 강조하여 이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라고 타인에게 강요해서는 절대 안 되며(191 페이지) 미래의 행복을 근거로 인간의 모든 고통을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191 페이지)

인간의 이기심, 무관심, 악의로 인해 빚어지는 고통은 지양될 수 있고 지양되어야 한다.(192 페이지)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나갈 아무런 희망이 없었을 때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한다.는 니체의 말을 되새기며 위기를 견뎌냈다고 한다.(193 페이지) 필자는 인간은 자신이나 타인이 겪는 고통과의 싸움 속에서 자신의 정신적인 위대함과 영적인 성숙을 드러내라는 초대를 받는다고 말한다.

필자는 인간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초래하는 것과 끝까지 싸워나갈 때에야 비로소 고통의 의미에 관한 깊은 깨달음으로서 인간의 진정한 성숙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 말한다.(194 페이지) 진화심리학의 입장에서 전중환은 자연은 본질적으로 악하지도 않고 선하지도 않고 무관심하다고 말한다.(197 페이지) 자연은 냉담하고 맹목적이다. 필자는 인간이 삶에서 겪는 괴로움에 대한 깨달음을 얻으려면 불행만이 아닌 행복도 설계해낸 자연 선택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필자에 의하면 진화심리학은 마음의 한 측면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 아닌 심리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이다. 필자에 의하면 진화심리학자들은 마음이 변천해온 과정 그 자체보다 마음이 진화의 산물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주목한다.(199 페이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가 일어나려면 다음의 세 가지 선결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개체군 내의 개체들 사이에 선결 조건이 필요하다, 둘째) 그 변이가 부모에서 자식으로 유전된다, 셋째) 이러한 유전적 형질들이 개체의 생존과 번식에 영향을 미친다. 즉 세대가 지남에 따라 여러 형질들 가운데 생존과 번식에 도움을 주는 형질이 개체군 내에 더 흔해진다.

다윈주의는 크고 건강하고 힘센 개체가 항상 선택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어떤 형질이든지 개체군이 처한 특정한 생태적 환경하에서 번식 가능성을 높여주는 형질이라면 무조건 선택된다. 우리의 머릿 속에는 무엇이든 잘 해결해내는 만능 공구 하나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기능에 전문화된 연장들이 빼곡히 담겨 있다.(영역 특수적; domain - specific: 204 페이지)

약 11,000년 전 시작된 농경 사회나 200년도 채 되지 않는 현대 산업 사회는 우리의 신경계에 유의미한 진화적 변화를 일으키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요컨대 현대인의 두개골에는 여전히 석기 시대의 마음이 들어 있다.(206 페이지) 부정적 정서는 우리를 괴롭히지만 우리 유전자에는 유용했기에 인간 본성의 일부가 되었다. 열이나 기침, 통증처럼 몇몇 불쾌한 신체 증상들이 우리 몸을 지켜주듯 분노, 질투, 불안, 두려움 같은 부정적인 정서는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는 유용한 방어로서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되었다.

최근 연구는 우울증도 특정 기능을 잘 수행하도록 설계된 심리적 적응이라는 관점을 지지한다. 우울증은 다른 외부 사건들에 흐트러지지 않으면서 여러 정신적, 신체적 변화를 조정하고 이끄는 기능을 한다.(217 페이지) 자연선택은 우리를 행복하게도 불행하게도 설계하지 않았다. 자연선택은 서로 경쟁하는 대립유전자들 가운데 후대에 복제본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남기는 유전자를 맹목적으로 선택하는 과정이다. 인간에게 행복은 목표인지 몰라도 자연선택에는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다.(232 페이지)

권석만은 심리학의 입장에서 삶이 괴롭고 고달픈 이유를 논한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괴로움은 매우 보편적인 경험이다.(251 페이지) 인간은 행복감보다 불행감에 더 민감하다. 인간은 부정 편향성으로 인해 행복감을 느끼기보다 불행감을 느끼기 쉬운 존재이다.(255 페이지) 필자는 한국 사회를 삼독(三毒)에 물든 사회로 본다. 탐진치(貪嗔癡) 즉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 물든 사회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물질주의적 가치관에 흠뻑 젖어 있다. 이로부터 숱한 문제점들이 생긴다.

모든 인간이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이라고 모두 괴롭고 고달픈 삶을 사는 것도 아니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하다. 생활 사건에 대한 부정적 의미 부여, 생활 사건의 의미를 왜곡하는 인지적 오류 등이 문제이다. 인지 오류의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흑백논리, 과잉일반화, 정신적 여과, 개인화, 잘못된 명명 등이다. 필자는 심리학의 입장에서 우리 삶이 괴롭고 고달픈 이유를 두 개의 공업(公業)과 하나의 사업(私業)으로 설명한다.

엔트로피 증대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이 세상에서 그런 법칙에 역행하여 살아야 하는 인류의 공업, 물질에 집착함으로써 지나치게 경쟁적인 삶에 매몰된 한국인의 공업, 성장 과정에서 겪은 나름의 고통스러운 경험과 상처 즉 개인의 사업 등이다. 자신의 고통을 여의고 안락을 얻으려는 이고득락(離苦得樂), 다른 사람의 괴로움을 없애고 즐거움을 주는 발고여락(拔苦與樂)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불교와 심리학(특히 임상심리학, 상담심리학)은 공통적이다.

특히 고통이 발생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물질적인 경제적 여건이나 신과 같은 외부적 요인에서 찾지 않고 인간의 마음에서 찾는 내향적 접근을 한다는 점에서 불교와 심리학은 유사하다.(280 페이지) 나는 개인적으로 불교 수행에 많은 신뢰를 보낸다. 위빠사나에 참여했었지만 선 수행은 어렵다는 생각에 선뜻 참여하지 못하겠다. 유식 불교에 이론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지만 실천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은유와 마음 수행에도 관심이 있다. 카렌 호나이의 책들을 읽어야겠다. '괴로움, 어디서 오는가'는 주목할 책이다. 시리즈의 세번 째 책인 '마음,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아울러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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