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이명호 교수의 ‘누가 안티고네를 두려워 하는가‘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안티고네는 테베의 왕인 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이고 어머니 이오카스테 사이에서 오이디푸스가 얻은 딸이다.
오이디푸스가 테베를 떠난 뒤 공동 왕이 된, 오이디푸스의 쌍둥이 아들 중 하나인 에테오클레스가 약속을 어기고 형제인 폴리네이케스에게 싸움을 걸게 되는데 이 일로 인해 둘은 치명상을 입고 죽고 만다.
숙부인 크레온이 군권을 장악하고 왕위를 차지한 뒤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크레온에게는 조카들)의 시신을 장례지내지 못하게 하는데 칙령을 어기고 안티고네가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장례를 치른다.
라이오스, 이오카스테, 오이디푸스, 폴리네이케스, 에테오클레스, 안티고네, 하이몬(크레온의 아들로 안티고네를 산 채 땅에 묻으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고 안티고네와 결혼한다. 안티고네는 하이몬의 아이를 낳는다.)의 관계도는 특별히 복잡하지 않다.
다만 안티고네의 행동에 대해 해석이 맞서고 있다는 점이 관건이다. 비평을 풍요롭게 하는 요인이 된다고 볼 수도 있는 대목이다.
헤겔은 초기 그리스 사회에서 크레온과 안티고네의 대립을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궁극적으로 이 대립은 국가에 의해 지양된다고 보았다.
안티고네의 요구는 가족이라는 사적 체계에 갇혀 보편성에 의해 지배되는 정치영역을 사유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안티고네는 공동체의 적이라는 것이다. 헤겔에 의해 산 죽음으로 내몰린 안티고네를 살려내기 위해 나선 사람이 자크 라캉과 주디스 버틀러이다.
물론 두 사람이 안티고네를 살려내는 방식은 다르다. 버틀러와 라캉의 논의는 상당히 복잡한데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 애도와 우울증에 대한 상이한 해석이다.
라캉은 안티고네를 대상은 떠나보냈지만 대상에 대한 욕망은 간직한 애도자로 읽었고 버틀러는 대상을 떠나보내지 않고 자아 속에 합체하는 우울증적 주체로 읽었다.
논점이 달라서이겠지만 분석심리학자인 리스 그린과 줄리엣 샤만버크의 ‘신화로 읽는 심리학‘의 안티고네(와 그의 가족) 독법은 명쾌하다.
두 저자는 안티고네와 폴리네이케스의 경우를 뜨거운 사랑과 의리로 설명하며 가족의 사랑은 어떤 무력감도 이겨내고 과거를 치유하며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
이명호 교수(영문학자)가 정신분석학자인 라캉과 철학자이자 젠더 이론가인 주디스 버틀러의 논의를 정리해 소개한 안티고네론은 꽤 난해하다.
힘들겠지만 아니 힘들기에 2014년에 나온 ‘누가 안티고네를 두려워 하는가‘를 역시 같은 해에 나온 조현준 교수의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 읽기와 쓰기라는 부제를 가진 ‘젠더는 패러디다‘와 함께 읽어야 할 것이다.(서재에 꽂아 두고 오래 기다려왔다.)
그런 다음 임옥희 교수의 ‘페미니스트 정신분석 이론가들‘을 읽을 계획이다. 정신분석에 매력과 불편함을 함께 느끼는 내가 걸어야 할 바람직한 길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