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륭 님의 ‘죽음의 한 연구‘에 나오는 284자나 되는 한 문장은 유명하다.
그 문장은 ˝공문(空門)의 안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깥뜰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도도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살이의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어서, 중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중(俗衆)도 아니어서, 그냥 걸사(乞士)라거나 돌팔이중이라고 해야 할 것들 중의 어떤 것들은˝처럼 주부(主部)부터 만만치 않게 길다.
그렇게 ˝ ..별로 찌는 듯한 더위는 아니라도 갈증이 계속되며 그늘도 또한 없고 해가 떠 있어도 그렇게 눈부신 법 없는데다, 우계에는 안개비나 조금 오다 그친다는 남녘 유리(羑里)로도 모인다.˝로 끝나는 술부(述部)를 포함하는 284자의 문장은 예외적이고 특징적이다.
이 문장을 보고 나도 400자가 넘는 한 문장을 썼다. 이 글이 계기가 되어 지구과학 강사인 문화해설사 동기(同期)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의 아내가 ‘죽음의 한 연구‘를 읽었고 철학과 국문학을 전공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아내가 정신분석학에도 정통하냐는 내 질문에 동기는 자신의 아내는 정신분석에 정통한데 단 자신에 대해서만 그렇다는 말을 했다. 생각의 실마리를 찾게 하는 아리아드네의 실 같은 말이다.
그렇다면 정신분석이란 무엇일까?
박지영 시인/ 평론가는 정신분석적 비평은 ˝텍스트에 충실하고 텍스트의 행과 행 사이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읽어내는 것˝이라 말한다.(‘욕망의 꼬리는 길다‘ 7 페이지)
반면 정신분석가 김서영 교수는 ˝인물들이 움직일 수 밖에 없는 동선을 분석해내고 그 한계를 파악한 후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비평˝이라는 말로 정신분석 비평을 정의한다.(‘영화로 읽는 정신분석‘ 149 페이지)
동기의 말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것은 후자이다. 물론 두 정의(定義)는 다른 맥락에서 도출된 것이고 양자 모두 대기설법(對機說法; 듣는 사람의 이해 능력에 맞추어 다양한 수준의 가르침을 펴는 것)의 의미를 지닌 것 즉 case by case의 언설(言說)임을 고려해야 한다.
인상적인 것은 김서영 교수의 다음의 말이다. ˝이론과 개념이 들어가지 않는 분석 역시 프로이트만큼 정치(精緻; 정교하고 치밀함)한 해석을 제시한다면, 그래서 변화를 이끌어낸다면, 우리는그것을 정신분석적 비평이라 부를 수 있다.˝는 말이다.(같은 책 같은 페이지)
에드워드 핼릿 카(E. H Carr)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그는 자유주의적 역사관을 가졌던 19세기를 천진난만한 시대, 역사가들이 자신들을 가려줄 한조각의 철학도 걸치지 않고서 역사의 신 앞에서 벌거벗은 채 부끄러움도 모르고 에덴동산을 돌아다닌 시대로 정의했다.
물론 나는 이론 또는 철학은 너무 가까이 해도 안 되고 너무 멀리 해도 안 되는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의 것이라 생각한다. 불가근 불가원을 고쳐 말하면 너무 의존해서도 안 되고 도외시해서도 안 되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김서영 교수의 말은 기존 이론에 의거(依擧; 근거를 둠)하지 않으려면 적어도 그에 준할 만큼의 정교한 해석을 제시해 의미있는 변화를 이끌어내야 함을 말해준다.
그 험난한 길을 걸어 설득력 있는 해석과 전망을 내놓은 글을 만나고 싶다.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마저 ˝나를 벗어나 표준화된 길을 좇아 움직이는˝(김영민 지음 ‘진리, 일리, 무리‘ 229 페이지) 시대에 참 만나기 어려운 귀한 글을... 내 글 역시 만나기를 희망하는 대상에 포함됨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