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하고 싶으나 아직 이해하기에는 요원(遼遠)한 시로 느껴지는(물론 내게) 김수영
시인의 시에 그나마 친근해질 계기가 되는 것들은 내가 처한 상황과 공명하는 종로, 광화문, 왕궁 등의 시어가 있는 시들이다.
‘시골 선물’이란 시에서 김수영 시인은 “종로 네거리도 행길에 가까운 일부러 떠들썩한 찻집을/ 택하여 앉아있다...”는 말을 했고,
‘거대한 뿌리’란 시에서는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屍口門)의 진창을 연상하고...”란 말을 한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란 시에서는 “왜 나는 조그만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란 말을 한다. 이 시어들 또는 이 시들만으로 김수영 시인이 성큼 친숙해졌다고 말한다면 오버일까?
한 후배가 내게 형하고 이야기를 하면 또는 형 이야기를 들으면 자신이 부도덕하게 느껴져 불편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글쎄 내가 그렇게 도덕적인 사람인가?
어떻든 이는 김수영 시인에 대한 평가를 보고 생각한 일화(逸話)이다. 이은정 평론가는 “김수영의 시를 읽으면 안온했던 일상이 불편하게 느껴진다.”(‘김수영, 혹은 시적 양심‘ 4 페이지)고 말한다.
1950년 지적 취향이 통하는 김현경과 동거를 시작한 김수영 시인은 생계를 위해 양계업을 하기도 했다.
강진으로 유배되어 온 다산(茶山)이 면회온 큰 아들편에 작은 아들에게 보낸 편지 글에 닭 이야기가 있다.
“네가 양계를 한다고 들었다... 진실로 농서를 숙독해서 좋은 방법을 골라 시험해 보렴... 또 간혹 시를 지어 닭의 정경을 묘사해 보도록 하라... 만일 이익만 따지고 의리는 거둘떠보지
않는다거나, 기를 줄만 알고 운치는 몰라 부지런히 애써 이웃 채마밭의 늙은이와 더불어 밤낮 다투는 자는 바로 세 집 사는 마을의 못난 사내의 양계인 것이다. 너는 어떤 식으로 하려는지 모르겠구나.”
이 편지 글을 요약하자면 공부하고 즐기라는 말이 될 터이다. 다산 선생의 말씀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김수영 시인은 어땠을까?(양계를 어떻게 했을까?) 묻는다면 실례일까?
다산이 전한 말씀을 김수영 시인에게 한 것으로 상상하면 실례일까?
물론 그저 순수한 호기심일 뿐이니 그리 불편해 하지 마시길...즐김과 공부 또는 즐김과 일, 이는 즐김 속의 일(공부)을 말하는 것이다. 계속 내가 지향해야 할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