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막 문화유산해설의 세계에 입문(initiation)했다. 그런 내게 어울리는 말은 문화유산에 관심이 많은 학인(學人) 정도의 말이다. 물론 이 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설명하는 과제가 내게 남아 있다.

지난 1월 25일 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확인한 우여곡절 끝의 합격(合格) 소식을 알린 글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그간 형식과 내용 때문에 고심 하셨습니다. 이제 형식을 갖추셨으니 마음껏 내용을 펼치십시오.” 동기의 댓글이다.

오독(誤讀)인지 모르지만 기본 지식을 갖추었는지를 검증받는 형식을 통과했으니 이제 내 고유의 문제의식이 반영된 내용을 마음껏 전하라는 말로 읽히는 글이다.

물론 기본에 충실한 고유성(固有性)이어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역사학자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은 천고(遷固)라는 호를 가졌다.

이 호는 ‘사기(史記)’의 저자인 사마천의 천(遷: 옮길 천)과 ‘한서(漢書)’의 저자인 반고의 고(固: 굳을 고)를 합한 말이다.

닮으려는 두 학자로부터 천고라는 이름을 만들어낸 것은 원칙을 지키되 융통성도 발휘하라는, 또는 정체성을 지키면서

유연성도 지키라는 의미가 담긴 명명(命名)이다. 이 말이 내게 시사적임은 물론이다.

이덕일 소장에게 천고라는 호를 지어준 분은 노사(蘆沙) 기정진 선생의 학맥을 이어 한학을 하신 이준영 선생이다.(강원도민일보

2017년 1월 2일 기사 ‘“100만 촛불 민심 현대판 반정 적폐 청산 계기 삼아야“’)

일본의 대표적 다독가인 교육학자 사이토 다카시 교수에 의하면 공자는 제자들에게

명확하게 답을 주는 것은 고사하고 똑같은 질문에도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른 대답을 했다.

공자는 하나의 정답이란 없으며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답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사이토 다카시 지음 ‘내가 공부하는 이유’ 134, 135 페이지)

하나의 정답이란 없다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이렇게 들었다는 의미의 여시아문(如是我聞)이 있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의미의 여시아고(如是我考)라는 말로 나를 설명하고 싶다.

그것은 하나의 객관적 사실을 다르게 전하라는 말이 아니라 팩트에 충실하되 그것들을 잇고 꿰는(미륜: 彌綸) 방식은 새롭고도 공감할만 해야 한다는 의미라 생각한다.

누구나 시연(試演)을 통해 경험한 바이겠지만 해설사의 가장 큰 마이너스 요인은 긴장 탓에 또는 준비 부족 탓에 암기한 내용을 듣는 사람들과 소통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전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한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대상의 표상(表象)이 내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라 말했다.(프랑수아 다고네 외 지음 ‘삐딱한 예술가들의 유쾌한 철학 교실’ 137 페이지) 의미심장하다.

이 책의 여러 공동 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예술가 마르잔느 사트라피는 대중으로 표상되는 평범하고 흔한 생각에 맞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예술가들조차 자신의 작품을 대중들 앞에 발표하려고 노력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서울대 스페인어문학과 김현균 교수는 ”그대들의 선배가 너무 많이 타자(他者)의 오리엔탈리즘(동양에 대한 서양의 왜곡된

인식과 태도)에 노출되었으므로 그대들은 자신의 오리엔탈리즘을 세워보거라“고 말한 고은 시인의 말을 예로 든다.

김 교수에 의하면 이는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자신의 고유한 관점을 갖추는 것이다.(배철현 외 지음 ‘낮은 인문학’ 203 페이지)

이는 낯설게 보기를 강조하는 김영민 교수의 지론(‘공부론’ 159 페이지)과도 통한다. 김영민 교수가 곡진하게 주문하는 것은

‘전문성 – 아마추어리즘’ 그리고 ‘조건 – 한계’ 사이의 변증법적, 생산적 긴장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는 자명하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아니 다르기에 내가 추구해야 할 것은 소용 없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소용이 된다는 장자의 말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자네의 이론은 현실적으로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하는 혜자(惠子)에게 소용이 없는 것이야말로 소용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은 끝없이 넓지만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발을 디딜 수 있는 넓이 뿐이라고 해서 발바닥 밑면만을 남겨두고 그 주위의

땅을 파버린다면 어떤 결과가 오겠는가, 그래도 발바닥 밑만이 소용있겠는가라는 말로 일침을 가한 장자(莊子)의 말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우리가 전하는 것은 문화유산에 대한 지식이지만 그것은 수많은 인간의 담론들을 거쳐 나온 또는 수많은 인간의 담론들에 실려

나오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문화유산과 문화유산 아닌 것들의 관계를 엄격히 구별하는 것이다.

문화유산에 관심이 많은 학인(學人)에게 어떤 무대가 펼쳐질지 흥미롭고 또 궁금하다. 설레고 긴장된다. 오랜 시간이 지나 이 시기를

돌이켜 아쉬워하지 않기 위해서는 열심을 내되 늘 새로운 눈으로 나 자신과 세상을 보아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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