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창덕궁 후원 관람 – 반드시 해설사와 동행해야 하는 – 시간에 연경당(演慶堂) 부속 건물인 청수정사(淸水精舍)를 보았다. 창덕궁 후원이 정조와 가장 관련이 깊다고 했는데

태종은 후원에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고 세조는 후원 영역을 크게 넓혔고 인조는 후원에 많은 정자를 지었다.

정조는 부용지(芙蓉池) 일대를 이루어 놓았다. 순조때에는 의두합(倚斗閤)과 연경당(演慶堂)이 지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순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던 효명세자가 의두합(倚斗閤)과 연경당(演慶堂)을 건립한 것이다. 연경당은 경사스러움을 행하는 집이라는 의미이다.

문제(?)는 정사란 이름이다. 연경당 자체가 의문의 건물이라 말해진다. 연경당이 의문의 건물인 것은 이 건물이 세워질 때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동궐도’의 연경당과 현재의

연경당이 위치와 모양에서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최종덕 지음 ‘조선의 참 궁궐 창덕궁’ 184 페이지)

정사(精舍)는 불교식 용어이다. 붓다가 가장 오래 머문 공간인 제따와나가 중국식으로는 죽림정사이다. 선원(禪院)이라 할 수 있는 곳 즉

사찰이라기보다 그에 못 미치는 소박한 선원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 이 문제(?)로 인해 해설 중간의 쉬는 시간에 잠시 가벼운 설왕설래가 있었다.

내가 불교식 이름이 유교 건물 내에 있네요, 라고 말했더니 해설사와 한 어르신이 아니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 분들은 연경당은 별채이거나 공부를 하는 곳이니 사찰과는 의미가 다르다고 하셨다.

자료에 의하면 연경당은 궁궐 내의 집이면서도 단청을 하지 않았고 배치 형식이 사대부 집을 닮았다.(‘조선의 참 궁궐 창덕궁’ 185 페이지)

한 인터넷 자료는 청수정사를 학문을 강론하는 집, 정신을 수행하는 집 정도로 풀이한다. 흥미로운 것은 정사를 서원(書院)으로 발전하기

이전의 학당으로 풀이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다. 흥미롭다고 한 것은 불교에서 정사(精舍)는 사찰(寺刹)보다 작은 곳이기 때문이다.

연경당이 영향을 받은 아니 빌린 것은 내용이 아니라 이름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용은 다르게, 이름은 같게‘라 할 수 있다. 앞서 말한 논전(?)에서 나는 유교(儒敎)의 이(理)는 유교

형이상학이 불교의 공(空) - 대단히 관념적인 – 을 모방해 제시한 전략적 개념이라는 말을 전했다. 그러니 정사도 불교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의미로 한 말이었다.

물론 공(空)을 보고 이(理)를 만들었다 해서 유교가 다른 부분에서 모두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자료를 보자. 김인환은 불교가 들어왔을 때 중국은 4천년의

문화적 토양 속에서 거두어놓은 비판적 시각과 창조적 능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전력을 다해 새로운 세계로 뛰어들었으나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버리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그들에게 불교는 중국어의 새로운 가능성을 단련하는 언어의 연병장”이었다.(’상상력과 원근법‘ 188 페이지) 한 인터넷 자료는 도교와 유교가 정사(精舍)라는 개념을 마음대로 가져다 썼다고 말한다.

나는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언어의 연병장(練兵場)“이란 말 때문만은 아니다.

강릉여고와 국군간호사관학교, 성균관대를 나온 철학박사/ 여성 유학자 김용남은 ’성리학, 유불도의 만남‘에서 불교를 비판하면서 탄생한 성리학이 실상 불교 사상을 토대로 성립되었다는 주장을 한다.

배불운동의 선두에 섰던 당(唐) 말기의 이고라는 유학자의 사상이 배불성(排佛性)과 사불성(似佛性)을 함께 띠게 되었으며 성리학이 종교성을 띠게 되는 것도 불교의 영향이라 해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영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야기가 풍부해지는 것에 관심을 둔다. 청수정사(淸水精舍), 뭐하는 곳이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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