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저런 유형의 상처를 다시 받지 않을 것‘이란 생각과 ‘나는 저런 유형의 사랑을 다시 느끼고 싶다‘는 생각 사이에 갇히는 인간 심리를 누군가 말했다

황주리 화가는 오래 전 나온 ‘아름다운 이별은 없다‘에서 자살하고 싶은 사람이 자살을 못해 술집이 더욱 붐빈다는 한 시인의 시를 인용한 바 있다.

인용된 시에 의하면 사람들이 술집을 택하는 것은 그들 나름으로 제3의 길을 택한 것이다.

배부른 소크라테스를 자칭하는 황주리 님은 ˝이 가을 낙엽을 줍는 대신 자살을 하지 않고도 견뎌낼 수 있는 삶의 기쁨 같은 것을 주워 봐야 겠다.˝고 말한다.

어떻든 필요한 것은 사랑의 달콤함만을 보는 단견과 아픔만을 보는 또 다른 단견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는 것이리라.

문제는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사랑‘, ‘아픔을 기꺼이 안는 사랑‘을 선택하기에 현실은 너무 변했다는 점이리라. 특히 헬조선의 현실에서는.

최근 흥미 있게 읽은 책이 준 카르본과 나오미 칸의 ‘결혼 시장‘과 우에노 치즈코의 ‘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이다.

‘결혼 시장‘에서 저자들은 결혼이 수요와 공급 원칙에 따라 이루어지는 시장 거래 같은 것이라 주장한다.

‘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에서 저자는 남성이 가족을 부양하고 여성은 집안일을 하며 아이를 돌보는 전통적 결혼형태는 고도성장기에 만들어진 예외적 사례이며 지금과 같은 저성장 시대에는 맞지 않는 개념이라 설명한다.

이런 쓸쓸한 현실에서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물론 나는 두 책의 논지를 전면 수용하지는 않는다. 사랑의 아름다움을 믿기 때문이다.

지금 이주한의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을 읽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사도세자의 죽음이 정신병을 앓다가 당한 개인 차원의 죽음이 아니라 나주벽서사건으로 전권을 장악한 노론에 의한 죽음 즉 정치권력 차원의 죽음임을 알게 된다.

사랑도 그렇다. 에바 일루즈의 ‘사랑은 왜 아픈가‘는 그런 점에서 시의적절하다. 저자는 마르크스가 상품을 가지고 벌인 일을 감정에, 적어도 낭만적 사랑의 감정에 적용해 보려한 것이라 말한다.

사회 차원으로 환원되지 않는 실존적 의미의 사랑의 예들은 의외로 많을 것이다. 그런 예들을 찾아내고 싶다.

물론 사랑의 상처는 개인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지만 지극히 사회적임을 역설하는 에바 일루즈의 논의에 공감하며 시작해야 할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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