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는 누군가의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황동규 시인의 시 ‘즐거운 편지‘ 중 일부)이겠지만 나도 한때(2007년 1월 ~ 2009년 7월) 채식주의자(vegetarian)의 삶을 살았다.
물론 채식주의에도 등급이 있어 내가 취했던 식습관(vegetarianism)은 완전 채식주의주의(veganism)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세프 출신의 현대미술 컬럼니스트 최지영의 ‘그림의 맛‘을 읽고 있다. 예술과 요리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는 저자가 언급하는 여러 낯설고 생소한 미술 유형들 중 이탈리아의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 운동이 내 관심을 끈다.
저자는 아르테 포베라 운동은 쓰레기통을 뒤져 먹을 것과 생필품을 해결하는 자발적 가난뱅이인 프리건(freegan)을 연상하게 하는 부분이 있다고 말한다.
잘 알다시피 프리건은 자유를 의미하는 free와 완전채식주의자를 뜻하는 vegan의 합성어이다.(아르테 포베라는 art poor 즉 가난한 예술을 뜻한다.)
공감할 바이지만 나는 아르테 포베라 또는 프리건을 보며 초기 불교의 승복인 납의(衲衣)를 연상한다.(衲; 기울 납) 납의란 조각 조각 깁고 꿰맨 회색빛 옷 정도의 의미를 갖는 말이다.
깁고 꿰맨 옷을 입고 청정 수행을 하던 초기불교의 수행자들은 연꽃이 진흙탕 속에서도 청정한 모습을 유지하는 것을 닮았다.
덧붙이고 싶은 말은 옷이 누덕누덕(해지거나 터지고 찢어진 곳을 여기저기 매우 지저분하게 기운 모양)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생각이 누덕누덕한 것이 문제라는 점이다.
물론 요즘 누덕누덕한 옷을 입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허름한 옷 정도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어떻든 생각에도 퀄리티의 차이가 있다.
수행자가 아니어서 삼의일발(三衣一鉢; 세 벌의 옷과 하나의 밥그릇)의 원칙이 얼마나 유효하고 또 지켜지는지 알지 못한다.
그렇게 수행자가 아닌 이상 옷과 생각이 모두 말끔하고 단정한 것이 좋을 것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모든 편향(偏向)은 바람직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