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인기도 면에서 최고의 역사 강사는 설민석이다. 물론 그는 충분한 실력도 갖추었다. 내가 여쭌 한 문화해설사는 설민석의 강의에 약간은 부정적인 견해를 표했다. 누군가는 그의 강의 스타일이 연기(演技) 같다고도 말한다. 물론 연기를 닮은 그런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이런 엇갈림은 너무 당연하다. 호평 일색이거나 악평 일색인 경우는 극히 예외적이다. 이력에 의하면 설민석은 연극영화과 졸업 후 대학원에서 역사교육학을 전공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강의는 제스추어와 리듬감 있는 언어 구사, 쉬운 스토리텔링 등으로 빛난다.
단언할 수 없지만 다이나믹함이나 리듬감이 없는 강의는 죽은 강의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이나믹하면서 리듬감 있는 언어 구사, 참여를 유도하는 강의를 니체가 말한 비극에, 그렇지 않은 강의를 소크라테스적 미학에 대응시켜 볼 여지가 있다. 물론 두 항들이 아무 문제 없이 곧바로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어떻든 그리스적 비극이 도취에 바탕한 참여, 감정 이입 등을 주요 특징으로 하는 스타일이라면 소크라테스적 미학은 이성 중심과 절제, 공감을 유도하고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 아닌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대화이다.
독서(讀書)와 간서(看書)의 차이도 중요한 단서다. 독서는 소리 내어 읽는 것(낭독朗讀)이고, 간서는 소리 없이 머리로 읽는 것(묵독黙讀)이다. 고전 평론가 고미숙 선생은 낭송(朗誦)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파동(波動)을 접하는 행위인 낭송은 텍스트와 자기의 세포가 섞여 에너지나 기운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낭송(朗誦)은 글을 소리 내어 외우거나 읽는 것이고, 낭독(朗讀)은 글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을 뜻하니 약간의 차이가 있다.(誦은 외울 송이다. 암송은 글을 보지 않고 외우는 것이고, 낭송은 보고 소리내어 읽는 것이다.)
불교의 그 유명한 결집(結集)도 오늘날처럼, 쓰인 것들을 모으거나 정독(精讀)하여 교정하고 정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고 있는 것들을 모두 입으로 함께 암송하는 모임이었다.(미즈노 고겐 지음 ‘불교의 성립과 전개’ 71 페이지) 결집이란 불전(佛典) 편집을 위한 모임이다.
석가(釋迦) 입멸(入滅) 이후 더 이상 그의 살아있는 가르침을 들을 수 없기에 말씀을 정리해 문서로 만들어야 할 필요를 반영하는 모임인 결집은 (석가모니께) 이렇게 들었다는 의미의 여시아문(如是我聞)이란 유명한 말을 낳았다.
보르헤스는 말에 비해 항구적(恒久的)이며 죽어 있는 글의 속성을, 글은 남고 말은 흐른다는 말로 설명했다. 플라톤은 말은 빠르고 신성한 것이라 설명했다. 어떻게 자연스럽게 리듬을 타며 함께 하는 해설을 할 수 있을까, 란 궁리가 설민석을 말하게 한 것이다. 말을 진정 살아 있는 것이 되게 하려면 유도하고 변화를 주고 역동적이게 해야 한다.
이서영 아나운서는 스토리텔링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정적인 실체에 동적이고 생생한 서사 구조를 삽입함으로써 그 실체에 생동감을 부여하고 그로 인해 그 실체를 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내용을 쉽게 이해하고 떠올리기 쉽도록 하며 자신과 연관 짓기 쉽게 하는 것을 말한다고 설명했다.(‘7일 만에 끝내는 스피치’ 220 페이지)
지난 12월 22일 서울역사박물관 중촌 & 남촌 시연은 내 단점을 고스란히 드러낸 시간들이었다. 적당한 간격과 완급조절이 없었던 내 모습은 변화구 없이 강속구 일변도의 투구를 하다 난타당한 정통파 투수를 닮았다고나 할까?(더구나 긴장 때문에 듣는 분들과 눈을 맞추지도 못했다.) 반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