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사정과 동기는 각인각색일 것이다. "다시 더 낫게 실패하라"는 말을 한 베케트가 이런 말을 했다. "잘 하는 게 글쓰기 밖에 없어서"... 자신을 명징하게 드러내는 글을 썼다는 다산과, 감추는 방법을 잘 활용한 글을 썼다는 연암 가운데 내 글쓰기 스타일은 어디에 가깝냐고 물은 적이 있다.(물은 적이 있다고 했지만 사실 어제였다.)

 

연암쪽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다소 의외인 답을 듣고 잠시 이런 저런 생각들을 했다. 그분의 취지는 내 글을 구성하는 높은 인용 빈도가 그런 말을 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베케트의 말에 빗댄다면 내게 '체험에 근거한 깨달음이 별로 없기 때문'이라는 말이 가능할 것 같다. 그런데 사실 내가 셀프분석을 잘 한다고 말하는 분들이 몇 분 있다. 그분들 중 한 분이 바로 내가 다산과 연암 운운하며 질문을 던진 분이다.

 

바울이 베드로에 대해 말한 것은 베드로보다 바울 자신에 대해 더 많은 사실을 알게 해준다는 말이 있다. 독일의 정신과 의사 한스 요하임 마즈가 한 말이다. 내가 인용하거나 근거하는 주장이 나를 알리는 실마리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내가 인용하는 글들은 나를 드러내는 만큼 한계도 갖는다. 남의 것이기에 나를 속속들이 드러낼 수는 없으리라.

 

하기야 온전한 나의 체험이란 것이 있을까? 그런 것이 설령 있다고 해도 표현은 늘 의도를 배반하고 핵심 밖을 맴돈다. 앞 부분으로 돌아가 말하자면 곡진하다는 점에서 다산에 가까운 성향이라 생각하고 있는 나에게 연암에 가까운 글(수준이 아니라 성향)을 쓴다는 답이 돌아온 것이다. 물론 나는 두 유형이 필요한 경우가 각기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인생엔 미지수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냐고/ 나는 커다랗게 열려진 황혼의 괄호를/ 바라보면서/ 어쩔 수 없이 꿈꾸는 기분에 잠겨 있었다."란 시(*)가 생각난다.

 

* 김승희 시인의 '낯선 고향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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