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성 있고 명확한 주제, 쉽고 친절한 내용, 독창적인 문제의식 등을 갖추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고치고 고치며 그런 점을 깨닫게 된다. 첫 시연때 ‘처음인 것을 감안하면’이란 단서를 다신 뒤 아주 잘했다고 하신 원장님의 평도 지금은 부담이 될 정도로 많은(?) 시간이 지났다. 부담이라 함은 한, 두 번 그리고 그 이상 경험이 축적되면 그에 맞는 수준 향상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서울역사박물관의 ‘중촌(中村) & 남촌(南村)’ 시연(試演)을 위해 자료를 찾고 글을 썼다. 처음에는 다산(茶山)을 권력 소유 여부와 학문의 상관관계에서 예외적이었던 분으로 든 뒤 파격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분들을 설명하며 예외와 파격이 조선을 조금이나마 역동적인 나라가 되게 했던 바 그 파격과 예외를 우리 사회의 교훈으로 삼으면 좋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파격적인 분들이란 동래부 출신의 무인(武人)으로서 영조 시대에 활약하며 자명종을 비롯 각종 기계와 악기 등을 설계, 제작하고 예술품 등을 만들었던 만능 지식인 최천약(1684 - 1755), 평민 이하의 신분으로 장악원 악사가 되어 연주자로서 최고의 명예를 누린 김성기(1649 - 1724), 신분이 낮았음에도 큰 업적을 남긴 고산자 김정호, 노비 출신 과학자로 15 세기를 이끌고 간 장영실, 전남 나주의 노비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권율 휘하에서 종군한 뒤 병자호란 때 부원수가 된 정충신(1576 - ·1636) 등이다.
그런데 이는 주제가 무거울 뿐 아니라 교훈으로 삼기에는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계급 이동(상승)이 거의 불가능한 폐쇄적인 고착 사회를 생각하면 무리가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중인들의 위상 변화를 통해 생각해보는 우리의 과제라는 글을 다시 썼다. 이 글에도 다산이 포함된 것이 특이하다면 특이하다. 문(文)을 숭상하고 과학 및 기술을 소홀히 했던 선조들을 둔 우리는 더욱 인문과 자연과학 및 기술의 조화로운 발전을 위해 성찰적 눈을 가져야 할 것인 바 제도적 장치와 함께 공부 주체들의 넓은 안목들이 필요하다는 주제를 제시했다.
중촌과 남촌에 대한 글이기에 노론 명문 가문의 연암 박지원과 몰락한 남인 가문의 다산 정약용을 비교한 글(서울신문 2012년 8월 12일 기사 다산 연구소 기획실장 김태희 씀 ‘노론 명문 가문 박지원 vs 남인 몰락 가문 정약용’)이 눈에 띄었다. 여러 가지가 비교되지만 문장 부분만 인용했다.
박지원은 사마천의 ‘사기’를 읽을 때 사마천의 마음을 읽으라 했고, 정약용은 연표를 꼼꼼히 챙기라 했다. 박지원은 글쓰기엔 요령이 있다고 가르쳤고, 정약용은 문장학이야말로 유학의 큰 해악이라고 내쳤다. 박지원의 글은 감추는 방법을 잘 활용한 글이어서 다 읽고 나서도 뜻을 제대로 포착했는지 돌아보게 하는 글이고, 정약용은 명징하게 드러내는 방법을 주로 써 곡진(曲盡: 간곡하게 정성을 다함)했다는 글이다.
나는 두 유형을 역동적이고 유연하게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를 고르라면 다산의 문체를 고를 것이다.(누가 하나를 고르라 말하겠냐만) 문장학을 내친 것은 그렇지만 명징하고 곡진한 글을 쓴 다산, 조심하고 경계했던 다산이 마음을 움직인다. 다산은 학자 같고 연암은 문장가 같다. “연암이 인상파 화가 같다면 다산은 사실주의 작가” 같다는 글도 인상적이다. 사실 연암과 다산의 사례는 두루 활용하고 상황에 맞게 익숙해져야 할 유형이다.
예전 명상 선생님은 깨달음은 있어도 깨달은 사람은 없다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깨달음을 얻었어도 매순간 새롭게 마음을 보고 다스리고 다듬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해설 글도 그렇다. 선생님들 또는 선배들이 글을 잘 쓰는 것은 사실이지만 주제에 따라. 듣는 대상에 따라 도입부와 문제의식, 주제, 자연스러운 흐름 등을 감안하는 글쓰기는 순간적인 영감에 좌우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연암과 다산의 사례를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활용해야 함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