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과 불교의 관계는 단편적인 시각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이슈이다. 잘 알려졌듯 조선은 숭유억불을 공식화한 나라였다. 세종은 소헌왕후와 막내 아들 부부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불교에 매달렸다.(‘조선왕조 스캔들’ 98 페이지) 여기까지 읽으면 세종이 숭유억불이라는 대의(大義)를 어기며 사익을 위해 기복신앙에 매달린 것으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사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세종에게 신하와의 투쟁에서 늘 불리하게 작용했던 두 가지 이슈가 있었다. 하나는 형인 양령대군과 관련한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불교 관련 문제이다. 물론 그럼에도 세종은 불교를 둘러싼 신하들과의 논쟁에서 만만찮은 면을 보였다.(이한우 지음 ‘세종, 조선의 표준을 세우다’ 97 페이지)
세종은 당시 7종이었던 불교 종파를 천태종과 조계종 등 2종으로 통합하고 전국의 사찰을 양대 종파에 18사씩 총 36사만 남기고 모두 없애며 상당한 사찰 재산을 국고로 환수했다.(이근호 지음 ‘궁금해서 밤새 읽는 한국사‘ 193 페이지) 불교에 의거(依據)했지만 사적 이익을 추구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왜 세종은 불교 책을 읽었을까'의 저자 오윤희 씨에 의하면 세종은 우리말 불경 주석에 유학자들에 대한 불평을 담았다. 언해불전은 세종이 불교 책을 쉬운 우리말로 옮겨 널리 보급한 결과 탄생한 책이다. 오윤희 씨는 (훈민정음과) 언해불전은 세종이 성리학 지배층을 겨냥해 이념 및 계급투쟁을 하기 위해 취한 방편이었다는 취지의 말을 한다. 세종과 불교의 관계는 결국 세종과 유교 즉 세종과 지식권력의 관계라 할 수 있다.
세종은 25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은 성종 다음으로 많은 20년간 하루도 경연(經筵)을 거르지 않은 임금이다.(이향우 지음 ‘궁궐로 떠나는 힐링 여행 경복궁‘ 120 페이지) 경연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 신하들이 임금에게 유교의 경서와 역사를 가르치던 시간을 말한다. 바람이 그물에 걸리지 않듯 유교(儒敎)적 가치관을 주입받았지만 지식(성리학)권력에 대처했다는 추론이 가능하지 않을지? 아니면 “주자학을 비켜가 잡학에 몰두하기보다 주자학의 심장부를 정면으로 돌파”(이정우 지음 ’인간의 얼굴‘ 161 페이지)한 다산(茶山)처럼 지식권력을 정면으로 돌파했다는 추론이 가능할 것이다. 관련 저서(읽기)를 부르는 세종, 대단한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