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함께 춤을
이동용 지음 / 이파르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니체와 함께 춤을’은 이동용 교수가 니체가 28세에 쓴 첫 저서인 ‘비극의 탄생’을 해설한 책이다. 530여 페이지의 압도적 분량이 눈길을 끄는 해설서이고 ‘비극의 탄생’을 상세하게 반복적으로 설명한 책이다. “‘비극의 탄생’은 쉽지 않은 책이다.“, ”니체의 전집 중 가장 논리적인 체계를 갖추었기 때문이다.”(9 페이지) ‘니체와 함께 춤을’이란 제목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에서 연유했다.


“그대들의 마음을 고양하라. 나의 형제들이여. 높이! 더 높이! 그리고 제발 다리도 잊지 마라. 그대의 다리도 들어올려라. 그대들 멋지게 춤을 추는 자들이여, 그리고 더 좋은 것은 물구나무를 서는 것이다!”(문예출판사 출간 황문수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496 페이지) '비극의 탄생‘은 그리스인들에 관한 니체 자신만의 생각을 서술한 책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33 페이지) 니체는 쇼펜하우어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니체는 처음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접했을 때 음울한 정령을 경험했다.


이 책으로부터 니체가 접한 것은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이다. 물론 니체는 염세주의에서 더 나아가 허무주의를 정초(定礎)했다. “니체에게는 이제 오직 인생, 오직 삶, 오직 이 땅 뿐이다. 이제 믿을 것이라고는 지금과 여기일 뿐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95 페이지) 이것이 허무주의이다. 허무주의란 이 곳, 이 세상 외의 곳은 없다는 개념을 담은 주장이다. 우리를 규정하는 신을 죽이고 인간에 대해 희망을 갖자는 메시지를 담은 주장이다.


니체의 허무주의 사상은 인간애를 의미한다. 얼핏 허무주의란 부정적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쇼펜하우어가 삶에의 의지를 포기하고자 했다면 니체는 삶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 집착하고자 했다.(‘니체와 함께 춤을’ 84 페이지) 허무주의 철학은 “신은 죽었다.“로 대변된다. 니체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데 몰입했다.(‘니체와 함께 춤을’ 93 페이지) 어떻든 이처럼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비극이란 개념이다. 비극이 탄생했다고 하니 슬프고 허무한 일, 나쁜 일이 생긴 것이 생겼다고 생각할 법하지만 니체가 말하는 다르다.


그가 말한 비극은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의 이중성에 의해 생겨나는 바람직하고 유용한 것이다. 니체는 예술의 발전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결부되어 있다고 보았다.(아카넷 출간 박찬국 옮김 ’비극의 탄생’ 47 페이지) 비극은 허무를 견디고 삶을 계속하게 하는 역동적인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에우리피데스를 사주(?使嗾)해 비극을 단번에 흔적도 없이 몰락시켰다는 것이 니체의 생각이다.


니체는 소크라테스를 논리에 집착해 비극을 죽인 인물, 이 세상을 무의미하고 헛된 그림자로 간주하고 이념계에 불과한 이데아를 염원하는 염세주의 철학자로 보았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 자체를 음악이라 선언했다.(‘니체와 함께 춤을’ 54 페이지) 아폴론이 그리스 신화의 태양신이라면 디오니소스는 그리스 신화의 주신(酒神)이다. 언어가 아폴론적인 영역에 속한다면 음악은 디오니소스적인 영역에 속한다.(‘니체와 함께 춤을’ 180 페이지) 아폴론적인 것이 평안과 평온을 가져다 주는 것 즉 모든 것을 설명해줌으로써 만족하게 해준다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말로 형용되거나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181 페이지)


아폴론적인 것이 개별화의 원칙을 미화해내는 힘(‘니체와 함께 춤을’ 368 페이지)이라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근원적 일자(一者)와 관련된 것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183 페이지)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음악이고, 그 음악을 모태로 한 비극이고, 황홀경에서 쏟아내는 무아지경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고, 신비로운 어스름한 빛 속에서 탄생하는 환상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297 페이지) 아폴론적인 것이 현상적이라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본질적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469 페이지) 니체 철학이 바로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다.


조각가의 예술이 아폴론적인 예술이라면 비조형적 예술인 음악은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99 페이지) 아폴론적인 것이 빛/ 조형(造形)/ 개인/ 꿈을 의미하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어둠/ 파괴/ 망아(忘我)/ 도취를 의미한다.(‘니체와 함께 춤을’ 121, 123 페이지) 중요한 사실은 그 둘이 모여 하나가 될 때 비극이 탄생한다는 것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371 페이지) 니체는 소크라테스를 도덕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주체로 보았다. 니체는 순수하게 심미적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사람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76 페이지)


니체는 ‘도덕은 삶을 부정하는 의지가 아닐까?‘ 생각했다. 태양신인 아폴론은 시(詩)의 신이고 조형력의 신이고 예언하는 신이기도 한데 니체는 아폴론적인 것을 꿈과 연결시킨다. 니체가 말하는 꿈은 창작을 위한 정신적 활동 중 하나이다.(니체가 말하는 꿈은 허무맹랑한 것 즉 공상 같은 것이 아니다.) 이건지 저건지 알 수 없는 흐릿한 형상은 아폴론적인 것과 상관이 없다.(‘니체와 함께 춤을’ 117 페이지) 꿈은 아름다운 가상(假想)이다. 적절한 한계 설정에 의해서만 가능한 지혜로운 평정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것이다.


아폴론적인 것이 창조를 위한 아름다운 가상을 보게 해줌으로써 모든 인간을 완전한 예술가로 만들어주었다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마력 속에서 인간은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니라 스스로 하나의 예술작품이 되어버린다.(‘니체와 함께 춤을’ 127 페이지) 아폴론적인 것이 개별화의 원리에 의한 자기인식이라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자기 포기를 통한 새로운 개체의 탄생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209 페이지)


디오니소스가 삶에 대한 고통으로 세상을 공포에 떨게 하면 아폴론은 그에 대한 치유의 손길을 뻗쳐준다. 그러다 개별화의 원리에 의해 생겨난 개별적인 인간이 자신의 모습에서 만족하지 못하게 되면 디오니소스에게 도움을 청한다.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서로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134 페이지) 니체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지적하자. 니체는 신을 죽인 것에서 그친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의 삶을 정당화하는 신을 찾았다.


또한 음악이 없다면 인생은 하나의 오류(‘우상의 황혼’ 참고)라 말했는데 이는 삶을 견디게 하고 허무감을 이기게 하는 비극으로서의 음악을 말한다. 아폴론적인 가상은 삶을 계속해서 살 수 있게 하는 또 하나의 삶으로서 유혹이 넘치는 가상인데 이를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지혜가 필요하다는 점도 인정했다.(‘니체와 함께 춤을’ 157 페이지) 플라톤이 건강한 국가를 위해 비극을 거부했다면 니체는 건강한 인생을 위해 비극을 필요로 했다.(‘니체와 함께 춤을’ 157 페이지)


니체는 비극은 근원적으로 합창일 뿐이고 합창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라고 보았다.(‘니체와 함께 춤을’ 183 페이지) 비극에서 관객은 그 자체가 비극을 이루는 구성요소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184 페이지) 비극은 형이상학적 위안을 준다. 니체도 형이상학을 인정했다. 다만 삶을 인정하는 한에서 그렇다.(‘니체와 함께 춤을’ 193 페이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서로 필요로 하는 힘이다. 아폴론적인 것이 알아들을 수 있는 서정시로 말을 하게 했다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노래를 하게 한다.


황홀경의 소리는 이성적으로 해석이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디오니소스적 지혜는 끔찍하다. 현실에 대한 구토증을 이끌기 때문이다. 의지는 위기에 봉착한다. 이때 다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아폴론적인 힘이다. 디오니소스적 도취자는 자신의 변신을 통해 자기 밖에서 새로운 환영을 자신의 현 상태의 아폴론적 환상으로 보게 된다.(‘니체와 함께 춤을’ 212 페이지) 신족과 거인족의 투쟁이라는 흥미로운 구도가 있다.


괴테는 거인의 조건으로 다섯 가지를 언급했다. 1) 괴로워할 줄 알고, 2) 울 줄 알고, 3) 즐길 줄 알고, 4) 기뻐할 줄 알고, 5) 신의 종족을 존경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136 페이지) 니체는 신을 죽이고 인간을 살리려는 의지로 충만해 있던 사람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243 페이지) ”신을 죽이기 위해서는 거인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 거인의 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다. 그의 지혜는 영원한 고통의 대가로 획득했다. 고통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무엇인가 얻고자 하면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그것도 신을 죽이려면 얼마나 큰 고통을 치러야 할까?“(‘니체와 함께 춤을’ 243 페이지)


프로메테우스나 오이디푸스를 포함한 그리스 무대의 유명한 인물들은 모두 원래의 주인공 디오니소스가 가장(假裝)한 인물들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257 페이지) 니체는 디오니소스의 부활만을 희망으로 보았다. 그런데 비극은 에우리피데스에 의해 죽었다. 니체의 주장이다. 니체는 서사시의 연극화를 해답으로 발견했다. 서사시는 사물과 사실을 관조하고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서사시인은 사물과 일체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서 설명하는 데 주력할 뿐이다.


묘사된 사건의 내용과는 어떤 내면적 관계도 요구되지 않는 그런 소크라테스적 경향을 받아들인 예술을 니체는 아폴론적인 예술영역이라 칭했다. 그런데 이는 니체가 비극의 두 가지 충동으로 설명했던 아폴론적인 것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짝짓기되지 않은 아폴론적인 것을 말한다.(‘니체와 함께 춤을’ 297 페이지) 저자는 디오니소스적 음악의 세계를 이해해야 니체 철학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며 디오니소스 무대에서의 진정한 배우는 무감각한 냉담의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고 덧붙인다.(‘니체와 함께 춤을’ 312 페이지)


에우리피데스의 연극은 아폴론적 요소 위에서만 세워졌다. 니체가 비판하는 핵심은 이 부분이다. 비극의 종말과 함께 그리스인은 자신의 불멸성에 대한 믿음을 포기했고 이상적 과거에 대한 믿음 뿐 아니라 이상적 미래에 대한 믿음까지도 포기했다. 이성의 시대가 펼쳐짐으로써 신화시대도 끝장이 났다.(‘니체와 함께 춤을’ 317 페이지) 소크라테스가 술에 취한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그런 그와 함께 이성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다.


꿈과 도취 상채가 교묘히 오가는 상황은 더 이상 무대 위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오직 이성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되었다.(‘니체와 함께 춤을’ 319 페이지) 이런 상황에서는 알지 못하는 것이 부도덕한 것이 되고 말았다. 소크라테스 또는 플라톤에게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시인들은 거짓말을 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니체는 미학적 소크라테스주의가 비극을 죽인 살인의 원칙이라 단호하게 평했다.


저자는 정치적으로는 소크라테스를 아제비 재판을 통해 독배를 마시게 함으로써 민주주의자들이 이긴 것처럼 보이지만 사상적으로는 소크라테스의 마신(魔神)이 이겼고 이 싸움에서 패배한 아테네는 몰락의 길을 걸어야 했다고 설명한다.(‘니체와 함께 춤을’ 329 페이지) 소크라테스의 정신 속에서는 너 자신만을 알라는 명령어가 시사하듯 ‘너‘로만 가득차 있다. 거기에 ’나‘는 없다. 소크라테스는 비극적 음악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 음악이 전하는 형이상학적 위로는 전혀 감지하지 못한 사람, 모든 것을 말로 설명해야 알아듣는 전형적인 이론적 인간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387, 388 페이지)


소크라테스는 낙천주의자다. 알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적 인간은 사물의 근거를 천착하고 가상과 오류에서 진정한 인식을 분리해내는 일을 한다. ‘오직 이성’은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으며 세상을 경직되게 한다. 소크라테스적 경향은 우리 눈에 지금 보이는 것을 그림자로 파악했다. 만족하지 못했기에 이상향을 그리워한 것이다. 이데아만이 진정한 세계라고 믿으면서 만족할 줄 모르는 낙천주의적 인식은 먼 곳만을 바라본다.(‘니체와 함께 춤을’ 363, 364 페이지)


음악에서 비극 예술이 탄생했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음악의 힘에서 발견된다. 진정한 음악의 정신은 디오니소스적 황홀경에 도달하게 해준다. 음악은 개체를 파멸시키지만 또 다른 세계로의 영입을 가능하게 해준다.(‘니체와 함께 춤을’ 374 페이지) 진정한 자유는 고통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고통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자유가 주어진다.(‘니체와 함께 춤을’ 377 페이지) 디오니소스적 예술은 눈에 보이는 현상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데 의미가 있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 허무주의 철학의 근본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382 페이지) 믿고 따라온 논리의 결과 앞에서 파멸을 예감하는 이론적 인간의 위기, 그것이 현대의 위기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407 페이지) 모든 것을 알려고만 하는 충동이 현대인을 위기로 몰고 있다. 모르면 불안하다. 니체는 오페라의 등장을 소크라테스적 문화의 산물로 보았다.(‘니체와 함께 춤을’ 419 페이지) 니체가 염원한 것은 고대 그리스 비극의 재탄생이었다.


디오니소스적 충동이 건강을 위협할 정도의 끔찍한 진리를 깨닫게 했다면 이제는 아폴론적인 충동이 건강회복의 마법을 보여준다. 물론 아폴론적인 것이 확고해지면 해질수록 권태와 구토증으로 또다시 위기기 초래되는데 이때 다시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구원의 힘으로 작용한다.(‘니체와 함께 춤을’ 459 페이지) 타당한지 자신할 수 없지만 나는 쉬운 길과 고전이 아닌 다이제스트, 묵직한 진실이 아닌 즐거운 것만 찾는 시대는 비극이 사라지고, 고통이 외면받는 시대의 새로운 버전이란 생각을 한다.


전대호가 ‘철학은 뿔이다’에서 분류한 존재파와 주체파의 대립(?)이 생각난다. 물론 이 대립은 비극과 이론의 대립과 무관하다. 전대호는 존재파는 주로 자연의 광활함 앞에서 철학의 동기를 얻는 사람이고 주체파는 시장의 난장판에서 철학의 동기를 얻는 사람이라 말한다. 니체는 비극이 사라진 시대의 음악이 아폴론적 내용을 근본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묘사수단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보았다.(‘니체와 함께 춤을’ 459 페이지)


진정한 예술가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완벽하게 균형과 조화를 이뤄낼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둘의 힘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니체와 함께 춤을’ 472 페이지) 플라톤은 사람을 약하게 한다고 비극을 부정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혼탁한 감정은 카타르시스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정화된다고 보았다. 니체는 아리스토텔레스적 해석을 따랐다.(‘니체와 함께 춤을’ 483 페이지)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최초로 연구한 사람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491 페이지) 그러나 ”어쩌면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비극을 오해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501 페이지) 비극적 신화는 오로지 디오니소스적 지혜가 아폴론적 예술 수단을 통해 형상화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니체와 함께 춤을’ 486 페이지) 에우리피데스 이후 사라진 비극은 전혀 다른 형식으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마치 그것이 비극인 양 여겨지는 것이 문제이다.


저자는 말로 설명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예술 애호가들로 넘치는 시대가 되었음을 지적한다. 니체는 고통을 극복하라고 말한다. ”아름다운 가상, 새로운 미화의 가상, 희망, 이런 것이 삶을 삶 속에 붙잡아두게 해준다. 희망을 가지는 것도 능력이다. 그 희망의 힘을 전하는 것도 능력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523 페이지) ”인간은 환상이 필요하다. 이 세상 이 대지를 위한 환상이어야 한다. 지금과 여기를 버리고 내세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내세를 버리고 끔찍하기 짝이 없는 지금과 여기의 실존을 받아들이는 환상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524 페이지)


아폴론적인 힘은 세상의 더러운 꼴들을 아름다운 베일로 덮어주고 그것을 견디게 해주는 것이다. 니체와 디오니소스는 니체와 차라투스트라처럼 둘이면서 하나이다. 디오니소스는 미학적 차원에서 거론되는 개념이고 차라투스트라는 도덕의 이름에서 등장한다.(‘니체와 함께 춤을’ 529 페이지) 디시 한번 말하는 바이지만 니체 특히 ‘비극의 탄생’은 환희와 고통, 비탄과 감동이 뒤범벅된 채 전전반측하듯 씨름하듯 읽게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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