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星湖) 이익(李瀷) 선생의 전집이 17권으로 완역, 출간되었다.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은 좋아하는데 그의 스승이 누구인지 아느냐는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면 안 되겠기에 이번 출간을 계기로 확실한 계보를 그리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아시겠지만 다산의 스승은 성호 이익이다. 물론 다산 선생은 성호 선생을 사숙(私淑)했다. 성호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다산 선생의 나이는 두 살이었다. 박석무 선생은 다산이 성호의 유저遺著를 읽고 흔연히 학문을 하리라 마음먹은 뒤 학문적으로 큰 성공을 이룬 것을 성호라는 큰 호수를 다산이라는 거대한 산이 둘러싼 것으로 표현했다.(‘다산 정약용 평전’ 96 페이지) a) 궁금한 것은 다산처럼 유명한 사람이 아닌 무명의 선비가 유명한 분을 사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또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해도 사람들이 그들을 스승 - 제자 사이로 인정할까, 이다.


‘주역’에 교육에 관한 괘(卦)가 두 개 있다. 산천대축(山川大畜)과 산수몽(山水蒙)이다.(이런 이야기를 하지만 주역의 괘와 명칭의 관계도 자의적이고 그 의미도 자의적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다만 그들이 두 가지 괘를 설정했다는 말 정도를 하려는 것이다.) 산천대축은 사숙에 해당, 산수몽은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것에 해당. 나는 불교의 성문, 연각, 보살 중에서 연각(緣覺) 또는 독각(獨覺)을 좋아하기에 사숙, 산천대축을 세트로 좋아한다.(사숙: 산천대축: 연각: 독각/ 직접 배움: 산수몽: 성문(聲聞): 우파니샤드?) 성호, 다산 모두 실학자이다. 약 20년 전 한형조 교수가 ‘주희(朱熹)에서 정약용으로’를 낼 때 이제부터 ‘정약용에서 주희로’가 필요하겠다는 말을 했다.


학위 논문을 쓸 때 다산의 주자학 비판을 발전사적 관점과 진보적 시각으로 보았는데 논문을 마칠 때쯤 되자 다산의 주자학 비판이 전적으로 옳은가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직 관련 출간 소식은 없어 많이 기다려진다. 알기로 주희는 희(熹: 밝을 희)의 기운을 중화시키기 위해 그믐 회(晦)를 써서 호(號)를 회암(晦庵)으로 했다. 때마침(?) 지난 달 23, 24일 실학 담론 학술대회가 열렸다. 실학(實學)이(라고 하지만) 실천 없는 말잔치였다는 의견과 유학(儒學)의 역동적 흐름이라는 의견이 맞섰다. b) 이런 경우는 보는 입장에서 참 난감하다. 실학이 20세기 후반, 근대에 대한 절실한 욕망이 만들어낸 유령이라는 입장이 학계의 공식 입장이라고..(재작년부터 유령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백상현 교수의 ‘라캉 미술관의 유령들’부터..)


c) 유령이란 존재들의 있음의 질서 속에서는 출현할 수 없었던 무언가가 그와 같은 존재 질서의 일관된 흐름이 멈추는 지점에서 출현하게 되는 무언가이다. 세계에 출현하는 모든 것들을 환영(幻影)으로 간주한 라캉은 세계 - 현실이 가진 환영적 정체를 삶의 가짜 리얼리티, 세계를 구성하는 현상들의 정상성의 효과들을 스크린이라 표현. 스크린은 인간의 눈 앞에 펼쳐진 거대한 영화 스크린 같은 것으로 그 너머에 존재하는 실체를 가리고 은폐하는 기능을 한다.(‘라캉 미술관의 유령들’ 13, 14 페이지)


사실 실학 논쟁에서 나온 유령과 ‘라캉의 미술관‘에서 언급된 유령은 다르다. 전자는 실체가 없는 것을 가리킨다면 후자는 세계의 거짓을 가리는 스크린이 오작동을 일으킬 때 출현하는 무엇이다. 라캉은 진리를 갈구하는 주체의 응시를 진정으로 충족시키기보다 이미지의 속임수 속에서 응시를 달래는 한 줌의 유사 진리를 던져주는 그림의 속성을 언급하며 그런 화가들을 소작농 협회에 종속된 사람들이라고 비판했다. 라캉이 보기에 화가들은 우리가 꼭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진리를 보여주겠다고 하지만 오히려 진리 자체를 은폐하는 마술사, 미혹하는 자들이었다.(’라캉 미술관의 유령들‘ 86 페이지)


유령 즉 세계의 진실을 은폐하는 그림이 아닌 그것을 폭로하는 그림 이미지를 남긴 화가들의 사례를 찾아야겠다. 백상현 교수는 (진정한) 예술가들이란 유령을 소환하는 무당들이라 말한다. 현실의 질서를 구성하는 규범적 아름다움의 영상을 비틀어 낯설면서도 기이한 유령 이미지를 창조하고 그것을 새로운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삼고자 투쟁하는 사람들이라 설명한다. 저자가 예시하는 화가들은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린 피카소,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등을 그린 프란시스코 고야 등이다.


흥미로운 것은 두 화가가 전쟁을 폭로하는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이다. 피카소는 ‘게르니카‘, 고야는 ’1808년 5월 3일‘이다. 이 그림들은 현실을 폭로하는 그림들이지만 “낯설면서도 기이한 유령 이미지”를 창조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아비뇽의 처녀들’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기존의 상식을 뒤트는 그림이 된 것이다. 사각의 큐빅 모양으로 입체감을 표시했고, 여러 방향에서 본 모습을 하나의 평면에 합쳐 그림을 완성했다. 앞으로 누가 유령을 소환하는 무당으로 기록될지? 화가만이 아니라 철학자, 작가, 시인 등도 그 대열에 포함될 것이다. 내가 가장 기대하는 사람들은 단연 철학자들이다. 새 철학자들을 찾는 데 힘을 기울여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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