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스님과 불교 경전 번역에 대한 말씀을 간략하게 주고 받았다. 나는 불경
번역도 오류가 있다는 말씀을 드렸고 스님은 불경 번역은 혼자 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역경원에서 내로라 하는 학자들이 참여해 검토에 검토를 거쳐
결과를 내놓는다는 취지의 말씀, 우리의 역경(譯經)과 달리 중국의 역경은 허투루 하는 경우가 없다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다. 이 말씀을 음미하니
스님께서 언급하신 것은 어느 정도 경전 번역이 체계화한 후의 말씀인 것 같다. 그러니 어쩌면 내가 염두에 둔 부분과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든 내가 찾아낸(기억해낸) 자료는 각묵 스님의 '금강경 역해(譯解)'이다.
까다로운 이야기이지만 저자가 말씀하시는 것은 구마라집이라는 천재 번역가가 니밋따와 산냐, 락샤나를 모두 상으로 옮겨 혼란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니밋따는 마음에서 물질적인 것들이 형상화되는 것(가령 칠보로 장엄되고 고대광실 기와집 등이 있는 것으로 극락세계를 그리는 것)이고
산냐는 어떤 추상적인 것을 의식화 또는 개념화하는 것이다.(94 페이지)
가령 수행자가 자신은 수행자이며 보살이라는 산냐(자의식)를 여의어야
제불세존이고, 산냐를 가지면 보살(菩薩: 구도자)이 아니라는 말이 가능하다. 반면 락샤나는 표식(標式)을 의미한다.(216 페이지) 이 말은
32가지 대인상을 표현할 때 쓰인다.(32가지 대인상이란 발바닥은 판판하고 손가락은 길고, 섬세한 미각을 가졌고 등은 편편하고 곧다 등 부처님의
신체적 특징 32가지를 표현하는 말이다.) 저자는 비슷한 개념이어서 구마라집이 여러 정황을 고려해 그 셋을 모두 상(相)으로 옮겼지만 정확한
원어의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고 오해의 소지를 남겨 250년 후에 현장(玄奘) 법사(‘서유기‘의 주인공?)가 다시 직역에 충실한 번역을 시도했다고
본다는 말씀을 한다.(94 페이지)
산스크리트어를 한역(漢譯)하는 것의 어려움은 미즈노 고겐(’경전의 성립과
전개‘)이나 김인환 교수(’상상력과 원근법‘) 등이 말하는 바와 같다. 김인환 교수는 우리의 경우 한글로도 고전을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이 애초에
없었다고 말한다. “10세기에 이르러 더 이상 번역할 경전도 없어졌고 더 이상 고쳐 번역할 경전도 없어졌을 때" "새로운 창조력이
폭발”(’상상력과 원근법‘ 190 페이지)한 중국과 너무 대조적이다.(구마라집은 인도어 Kumarajiva를 소리나는 대로 읽은 것이다.
구마라집은 중앙 아시아 구자국 출신으로 중국에 가서 인도어 경전 한역에
기여했다. 구마라집은 5세기 초, 현장은 7세기 중엽에 활동한 사람이다.) ’금강경 역해‘가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분석, 주해(註解)한 것임을
통해 알 수 있듯 이제 제대로 된 번역 작업이 시작된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는 독일어 철학서를 일본이 번역한 것을 다시 우리말로 옮긴
것(중역: 重譯)을 통해 배우던 불편함과 비효율 등을 벗어나게 된 철학계의 사정을 연상하게 한다.
(인터넷에는 팔리어/산스크리트어의 한역 오류를 지적하는 글들이 많다. 가령
http://blog.naver.com/jsy945/20106555416 .
http://blog.naver.com/dlpul1010/220263936663
설득력을 가리기보다 고도의 개념어를 번역하는 것이 어렵다는 말 정도를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