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의 ‘흰’을 읽었다. 형용사인 한 음절의 단어를 제목으로 설정한 것이 새롭게 느껴졌지만 그런가 보다 했다. 김인희 님의 페북 글을 통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흰’은 엔트로피의 최소점을 의미한다.(정확하게 말하면 김인희 님이 엔트로피의 최소점을 염두에 두고 ‘흰’이란 말을 사용한 것이라 해야 옳다.) 김인희 님에 따르면 ‘흰’이란 말은 기형도 시인의 ‘나의 플래시 속으로 들어온 개’란 시의 마지막 행의 마지막 시어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날, 나의 플래시 속으로 갑자기, 흰”이 그것이다. 엔트로피의 최소점이란 말을 접하고 나는 가능한 최선의 세계를 떠올린다. 이바르 에클랑의 동명의 책이 나온데 힘입어서이다.


가능한 최선의 세계는 라이프니츠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가능한 최선의 세계‘는 가능한 최선의 세계란 개념을 수학으로 풀어낸 책이다.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에서 들뢰즈는 라이프니츠의 낙관론을 이상한 것으로 본다. 그래도 신과 대화하는 학문인 수학으로 가능한 최선의 세계를 풀어낸 책이니 기대를... 그래야 하리라. “...글을 쓴다는 것/ 오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기대 없이,/ 하도록 돼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란 서동욱 시인의 ’스피노자‘란 시의 핵심부를 실천하듯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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