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품예찬 - 넘쳐야 흐른다
최재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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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거품 예찬‘을 읽게 된 이유는 책 읽기 또는 공부와 관련한 습성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어느 시기까지는 이런 저런 분야의 책을 남독(濫讀)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시기를 지나면 자연스럽게 그 습관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런데 나는 그런 습관에서 좀체 벗어나기 어려워서 문제이다. 한편으로는 읽기가 헤프고 비효율적이라 생각을 하고 한편으로는 혜자(惠子)에 대한 장자(莊子)의 일침(一針)을 생각하며 헤프고 넓게 읽는 습관을 정당화하는 습관의 반복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 나이다.


장자는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발을 딛고 서 있는 넓이 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발바닥 밑면만을 남겨두고 주위의 땅을 파버린다면 어떤 결과가 오겠는가.‘라는 말로 ’자네의 이론은 현실적으로 아무 소용이 없‘다는 혜자를 머쓱하게 했다. 장자의 일침은 촌철살인의 지혜라 할 수 있다. 서문(序文)에서 저자는 맡은 바 소임에 그저 알맞은 정도의 사람을 앉히면 허덕허덕 겨우 해낼 뿐이지만 능력이 넘치는 사람이 일을 맡아야 여유롭게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도 말했듯 이런 사고 방식은 자연주의적 오류 차원에서 볼 필요가 있다.


자연에서 관찰되는 현상을 자연스러운 것 즉 좋은 것으로 보고 그로부터 당위를 이끌어내어 사회에 적용하는 오류이다. “인간을 탐구하는 과학이 자연과학에서의 실험실 상황을 흉내냈을 때 그것은 인간적 삶의 현실을 결정적으로 왜곡하게 된다.”(이정우 지음 ’인간의 얼굴‘ 285 페이지) 같은 말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지구라는 행성의 생물은 낭비를 기본 조건으로 선택했다는 말을 한다. 저자는 자연이 낭비를 선택했듯 자본주의도 수요와 공급 측면에서 언제나 출렁이게 마련이라는 말을 하는데 자연주의적 오류를 의식해서인지 따뜻한 자본주의라는 대안을 고민하는 현실을 언급한다.


핵심 챕터인 ’자연은 낭비를 선택했다’(1부)를 포함한 다섯 개의 챕터로 이루어진 ’거품 예찬‘은 자연과 인간, 사회에 대한 짧은 이야기들을 두루 담아낸 책이다. 거품 예찬을 뒷받침하는 말은 ’넘쳐야 흐른다‘는 말이다. “무모하리만치 많이 태어나고 그중에서 특별히 탁월한 개체들만이 살아남아 번식에 이르는 과정에서 바로 자연선택의 힘이 발휘된다. 그 결과로 적응 진화도 일어나는 것이다.”(39 페이지)


’나눔과 베풂‘이란 글에서 저자는 경쟁자가 거의 다 제거되었을 때 다양성을 잃어 천재지변이나 병원균 등 외부의 침입에 취약해지는 생태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연생태계에서 지나친 독점이 파멸을 부르듯 인간 세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말은 자연과 사회를 연결짓는 저자의 주지(主旨)를 다시 접하게 하는 부분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가 얼핏 생각난다. 굴드는 생물 진화에는 목적성이나 방향성이 없다는 말을 했다. 낭비라는 개념으로 진화를 볼 필요가 있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정해진 길, 정해진 목적이 없기에 무분별하고 비효율적인 것 즉 낭비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자연은 먼 옛날 벌어진 진화의 결과에 따라 각본대로 움직이는 곳이 아니다.”(86 페이지) 저자는 흥미로운 말을 들려준다. 행동생태학의 불모지인 이 땅에 들어와 학생들의 다양한 학업 욕구를 무시한 채 자신만의 연구 주제를 고집하기 매우 어려웠다는 저자는 그래서 일찌감치 자신을 버리고 학생들과 함께 실로 다양한 동물의 행동과 생태를 연구해 왔기에 자신의 연구 논문 목록이 그야말로 산지사방(散之四方: 사방으로 흩어짐), 중구난방(衆口難防: 여러 사람의 입은 막기가 어렵다는 뜻으로, 일일이 막아 내기 어렵게 사방에서 마구 지껄여 댐을 이르는 말)이란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자에게 일관된 키워드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사회‘이다. 어떻든 나는 산지사방, 중구난방이란 저자의 말에서 넓어 헤프고 비효율적인 내 관심의 스펙트럼을 본다. 관련하에 유의미하게 읽히는 글 가운데 ’피카소처럼 살자‘를 빼놓을 수 없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이라는, 아무나 칠 수 있는 홈런이 아닌 ’최고의 홈런‘을 친 야구 선수에 비유된다면 피카소는 좋은 공, 나쁜 공 가리지 않고 열심히 방망이를 휘두르며 높은 출루율을 자랑한 야구 선수에 비유된다고 말하는 이 글의 요지는 섬광처럼 빛나는 천재성보다 성실함과 약간의 무모함이 때로 더 큰 빛을 낸다는 것이다. 거품 예찬의 진의를 제대로 알 수 있는 글이다.


실제 야구에서 이 공 저 공 다 휘두르며 높은 출루율을 기록하는 것은 거의 기대하기 어렵다. 이는 볼넷을 많이 얻어내는 타자가 출루율이 높다는 사실을 통해 드러난다. 볼넷을 얻어낸다는 말은 나쁜 볼을 골라냈다는 의미이다. 이 공 저 공 다 휘두르면 안타수는 많아진다. 야구는 안타를 치려는 타자의 시도를 정해진 룰 안에서 방해하는 상대팀 투수라는 장애물이 있지만 피카소의 경우 매너리즘이나 슬럼프에 빠지는 자신이 유일한 난제였으리라. 거품 예찬이란 말보다 피카소처럼 살자란 제목을 지었으면 어땠을까 싶은 마음이 없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거품, 천재성보다 성실함과 약간의 무모함이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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