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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 접경지역 기행 5 : 철원 ㅣ DMZ 접경지역 기행 5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DMZ연구팀 지음 / 경인문화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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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탄강은 곡창지대 철원의 젖줄 역할을 하는 강이다. 한탄(恨歎)이 아닌 한탄(漢灘)을 쓰는 강(江)이다. 한(漢)을 크다는 의미로 쓰느냐, 은하수로 쓰느냐 하는 논쟁이 있는 듯 하다. 철원은 행정구역상으로 4개 읍, 3개 면으로 이루어진 군(郡)이다. 철원읍, 동송읍, 김화읍, 갈말읍, 근남면, 근동면, 서면 등이다. 동북쪽의 근북면, 원남면, 원동면은 군사분계선과 접한 미수복 지역이어서 행정 기능은 다른 읍면에서 대신한다.
철원읍에 철원군청이 없다. 그 이유는 1954년 수복 후 군청이 지포리에 설치되었고 지포리와 신철원리가 분할되면서 현재의 갈말읍 신철원리에 군청이 위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화강은 북쪽 김화읍의 수리봉에서 발원하여 비무장지대를 가로질러 흐르다가 김화읍 정연리에서 한탄강으로 흘러드는 강이다. 2009년 이전까지 남대천이라 불렸다. 우리나라에는 남대천이 많다. 일제가 일왕이 있는 궁궐을 향해 남쪽으로 흐르는 강을 남대천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2009년 김화읍장 이의현 씨의 노력에 힘입어 제 이름을 찾았다.
철원 노동당사 앞에는 자그마한 크기의 소이산이 있다. 이 산에 올라 북쪽을 보면 평강고원이 보인다. 평강고원은 한탄강 용암대지를 만든 용암의 시발점인 오리산이 있는 곳이다. 1000여 미터의 장암산이 아닌 400여 미터의 오리산이 한탄강 용암대지를 만든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오리산 외에 검불랑에서도 용암이 흘러왔다. 오리산 분화구를 통해 나온 용암은 북동쪽으로는 추가령을 넘어 함경남도 안변까지 흘러갔고 서남쪽으로는 임진강 하류인 파주 율곡리까지 흘러갔다. 오리산 용암은 점성이 낮다.
백마고지는 현무암으로 둘러싸인 곳에 솟아 있는 화강암 바위산이다. 직탕폭포는 세로보다 가로가 긴 폭포다. 베개용암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강물이 수직으로 떨어지는 직탄(直灘)이 원래 이름이었으나 직탕(直湯)으로 바뀌었다. 송대소(松臺沼)는 적벽(赤壁)으로 유명하다. 고석(孤石)은 화강암을 덮은 현무암이 풍화되어 모습을 드러낸 화강암 바위를 말한다. 고석의 화강암은 약 1억년전인 중생대 백악기의 화강암이다. 고석은 임꺽정 전설로 유명한 곳이다.
해방 이후 철원을 장악한 북은 1948년 당시 철원농업전문학교 토목과장 김명여를 시켜 한탄교를 건설하도록 했다. 하지만 다리의 북쪽만 완성한 상태에서 한국전쟁으로 건설이 중단되었고 1952년 주한 미군 79 공병대와 국군 62 공병대가 남쪽 교각과 보를 완성하였다. 그래서 다리 중간을 경계로 건축양식이 다르다. 북쪽의 아치는 남쪽보다 기둥이 많고 가늘며 기둥 상부는 반원형 곡선이다. 남쪽 아치는 북쪽보다 기둥이 적고 굵으며 기둥 상부는 둥근 네모 형태를 하고 있다. 이외 남과 북이 함께 만든 다리로 고성 합축교를 들 수 있다. 승일교는 이승만의 승과 김일성의 일이 만난 말이다.
순담계곡은 강 양안이 모두 화강암이다. 순담계곡은 물결이 세고 굴곡이 심하고 물결 변화가 심해 래프팅 장소로 선호된다. 월하리는 1914년 일제 강점기에 월음 마을, 하리 마을을 하나로 하면서 앞자를 따 부른 이름이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궁예와 왕건에 얽힌 전설을 더 좋아한다. 과거 왕건이 궁예의 부장으로 있을 때 궁예를 해로, 자신을 달로 낮춰 부르기 위해 월하리라 했다는 것이다.
월하리에서 노동당사를 지나 현재 민통선을 따라 백마고지 쪽으로 더 들어가면 대마리가 나온다. 북을 마주한 최전방이며 최초의 재건촌인 대마리는 남북의 가장 강력한 화기들이 집중된 냉전의 공간이다. 당시 국가는 북의 침략에 대응하면서도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전투력을 갖춘 사람들을 선발하여 67년 4월 5일 150명을 15조로 나누어 대마리에 입주하게 하였다. 한 손에 총을, 한 손에 농기구를 들었던 이스라엘의 키부츠 사람들처럼 그들은 북과의 대치 상황 속에서 식량 생산의 일꾼이자 분단국가를 지키는 선두주자로 투입되었다. 땅을 준다는 국가의 약속을 믿고 이곳으로 들어왔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땅은 잡초와 나무가 무성하며 바위와 돌들이 너브러진 데다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지뢰가 곳곳에 박히어 있는 전쟁의 땅이었다.
김화읍 생창리도 개척 마을이다. 민간인 통제선 이북 마을을 민북마을이라 한다. 금강산 전기철도는 철원역에서 내금강까지 운행하던 116.6km의 전철로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전기철도다. 1924년 완공되었다. 월정리역에서 동북 방향으로 가면 금강산 전기철도의 28개 역 중 하나인 정연역을 만날 수 있다. 정연역이 있던 정연리는 원래 평강군이었다가 한국전쟁으로 철원에 편입된 마을이다. 정연리 마을 앞에서 한탄강과 화강이 Y자를 이루며 합류한다. 그 합류점은 평강군, 김화군, 철원군이 만나는 교차지점이기도 하다.
전쟁 전까지 구 철원제일교회는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교회로 교인 수가 500여명에 달하였던 교회다. 1919년 3월 10일 강원도에서 처음으로 3.1 만세 운동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1942년 강종근 담임목사가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거부해 구속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고문을 받다가 순교했다. 노동당사는 1994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발해를 꿈꾸며 뮤직 비디오를 촬영한 곳이다. 1946년 완공된 건물로 규모가 참 크다. 한국전쟁 전까지 평강, 김화, 철원의 업무를 담당한 곳이다.
소이산은 작은 산이지만 고려시대부터 봉수대가 설치될 정도로 군사적 요충지였다. 한국전쟁 당시부터 소이산은 미군의 미사일 기지와 레이더 기지가 자리 잡고 있었으며 철원평야를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구실을 하였다. 2012년 민간인에게 완전히 개방되면서 이 산은 지뢰밭이 지킨 평화의 숲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한국단편소설의 완성자로 불리는 상허 이태준의 고향이 철원이라는 사실은 그의 명성에 비해 덜 알려져 있다. 그의 책 ‘문장강화’와 짧은 산문집인 ‘무서록’은 80년 세월을 넘어 지금도 판매되는 스테디셀러다. 전쟁으로 인해 분단된 철원의 지형은 동서로 넓게 뻗은 모양이다. 특히 북동부 DMZ 지역은 험준한 산악지형이어서 철원평야가 펼쳐진 서북부보다 접근성이 떨어진다. 군사분계선과 인접한 철원의 4개의 전망대 중 가장 동쪽에 있는 승리전망대는 이 지역의 육군 15사단 승리부대의 이름을 딴 전망대다. 군사분계선 155 마일 정중앙에 있다. 2002년 개관했다. 남북이 서로를 관측하기에 가장 쉬운 지형으로 불과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승리전망대에서 보이는 북녘땅은 바로 눈앞에 있지만 사진을 찍을 수도 없고 한 발짝도 들어가 볼 수 없다.
평화전망대 바로 앞에 궁예가 세운 태봉국 도성터가 있다. 남북을 동서로 가르는 군사분계선은 정확히 태봉국 도성터를 반으로 가르고 있다. 백마고지의 원래 이름은 395고지다. 백마고지란 이름은 계속된 포격으로 온통 하얗게 피어오른 포연이 걷힌 뒤 드러난 모습이 수목을 태운 잿더미들이 쌓여 마치 백마가 쓰러져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52년 10월 6일에서 15일까지 열흘간 중국군 제 38군과 한국군 제9사단이 30만발이 넘는 포탄을 상대에게 쏟아부으며 고지의 주인이 일곱 번이나 바뀌는 혈전을 치른 곳이다. 최종 승자는 한국군 제9사단 백마부대다.
소이산(所伊山)은 눈 덮인 철원평야를 굽어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학저수지는 일제강점기인 1925년 인근 협곡에서 물길을 모아 축조한 인공저수지다. 상류에 토고저수지가 완공되면서 저수량과 수계의 규모가 확연히 줄었다. 물이 말라 이제는 저수지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다. 철원 두루미는 199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개체수가 늘었다. 북한을 덮친 대기근 때문이었다. 원래 두루미가 철원보다 자주 찾던 월동지는 철원 북쪽 70km 지점인 북한 안변 평야였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이라 불린 대기근이 북한을 덮치면서 북한 농민들은 기근을 피하기 위해 논의 낙곡을 필사적으로 주워갔다. 그 결과 겨울에 두루미가 먹을 낙곡이 사라졌고 함께 안변의 겨울을 지키던 240여 마리의 두루미가 사라졌다. 철원이 두루미에게 매력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로 한국전쟁으로 생겨난 비무장지대의 습지와 민간인 출입통제선(민통선) 주변 논이 두루미의 적합한 월동지역이 된 것을 들 수 있다.
철원의 동쪽 끝자락 화천과의 경계를 겹겹이 막아서는 대성산, 복주산 사이로 해발 1057미터의 복계산이 있다. 이 산기슭 해발 595 미터 정상에 깎아 세운 듯 우뚝 선 40미터의 층암절벽이 있다. 이곳이 바로 조선 초기 방랑 시인으로 유명한 김시습의 호 매월당과 같은 이름을 가진 매월대다. 매월당(梅月堂)의 매월은 매화, 달의 결합어다. 상촌 신흠이 쓴 오동은 천년을 늙어도 제 가락을 간직하고 매화는 한평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고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디 모습을 간직하고 버드나무는 백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돋아난다는 시가 생각난다.
금오신화를 지으면서란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작은 집 푸른 담요에 따뜻함이 넘치는데 달이 밝아 오니 매화 그림자가 창을 가득 채우네. 김시습은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것에 충격받아 전국을 유랑하며 은둔 생활을 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단종의 비극적인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공부하던 책을 불태우고 출가했으며, 이후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세상을 풍자하는 시를 남겼다.
궁예도성으로 불리던 도성 터는 2005년 공식적으로 태봉국 도성으로 정정되었다. 궁예가 마지막 격전에 나선 곳이 보개산성이다. 보개산은 강원도 철원, 경기도 연천, 포천이 만나는 경계 지점에 있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고려사에는 궁예가 평강(부양)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