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분야라 해야 할지 기독교 분야라 해야 할지 철학 분야라 해야 할지 모르나 읽고 싶은 책이 두 권 생겼다. ‘바울과 철학의 거장들’, ‘플라톤과 예수 그리스도’ 등이다. 이 책들을 읽는다면 올해 초 읽은 ‘케노시스 창조이론’에 이어 올해 읽은 두 번째, 세 번째 신학 또는 기독교 책으로 기록될 것이다.
신학 또는 기독교 책을 잘 안 읽는다 해도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을 의미하는 ‘케노시스’를 다룬 책도 읽었다는 점은 자랑스런 일이다. 시간을 더 오래 전으로 끌고 가면 나는 러셀 스태나드의 ‘과학 신 앞에 서다’와 리처드 마우의 ‘진화는 어떻게 내 생각을 바꾸었나?’, ‘젊은 지구론에 대한 합리적 비판‘을 부제로 하는 임택규의 ’아론의 송아지‘ 등을 읽었다.
‘케노시스 창조이론’은 읽을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지금 이 책은 그리스도인들 또는 목회자들이 탐욕과 위선을 버리고(자기를 비우고) 살아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어떻든 기독교인인 나는 한 번도 바울을 정통(?) 해설로 읽은 경험이 없다. 1990년대 민중신학자들의 비판적 담론으로 바울을 읽은 이래 2013년 출간된 ‘싸우는 인문학’에 나오는 철학자 서동욱 교수의 ‘사도 바울은 왜 급진 정치철학자로 각광받는가’와 다른 책들에 나오는 몇 편의 글을 통해 바울을 만난 바 있다.
민중신학자들의 바울론은 바울이 기독교를 세계 종교가 되게 했지만 예수의 메시지를 관념화시켰다는 데로 모아진다. 아감벤, 지젝 등의 논리는 기독교 메시지로 로마를 돌파한 바울에게서 신자유주의 타개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는 등의 논리라 생각한다.
‘바울과 철학의 거장들’, ‘플라톤과 예수 그리스도’ 읽기에서 내가 기대하는 것은 철학이론에 대해 더 친숙해지는 것일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바울, 나아가 기독교와 친해질 기회를 잡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이론물리학자 로베르토 트로타의 ‘우리는 별에서 시작되었다’에 의하면 인간의 수명은 서구 국가에서 4000주(週) 동안 지속된다. 20대부터 책을 읽는다고 계산하고 주 1권을 읽을 수 있다면 살아 생전 3000권의 책을 읽을 수 있다.
남독(濫讀) 대신 선별독(選別讀)을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란 생각을 하지만 그래도 그 무분별이 내 자산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감사한 일이다. 여전히 내 목표는 인문과 자연의 창조적 융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