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창의문로(彰義門路) 11가길 4(부암동 302-5)에 유금(柳琴) 와당박물관이 있다. ‘와당(瓦當)으로 본 한국 고대사의 쟁점들’이란 책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다. 저자인 유창종 선생은 검사 출신 재야 사학자다. 저자는 많은 고고학 전공자가 알지 못하는 와당의 학문적 의의와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주류와 비주류 사학자들 간의 지나친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 주변국과의 역사 분쟁에 획기적이고 적극적으로 대처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썼다고 밝혔다. 저자는 고대사 연구는 형사사건의 수사와 매우 유사하다고 말한다. 몇 개의 자료만을 가지고 추리력을 동원하여 과거에 일어난 사건의 전모를 밝히기에 그렇다는 의미다.
저자는 30년의 검사 경력을 활용하여 수사하듯 와당의 수집과 연구를 하다가 한국 고대사의 여러 논쟁에 관하여도 나름대로 주관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내가 책을 만난 것은 알라딘의 한 중고 서점에서다. 말 그대로 우연히 만났다. 기후 변화 관점에서 본 고구려 전쟁사와 연천이란 강의를 위해서 자료를 찾다가 발견한 것이다. 때마침 와당은 연천 소재 고구려 3대성 가운데 하나인 호로고루에서 출토된 것이기도 해 더욱 반가웠다. 연천 호로고루 홍보관에는 고구려의 영토 상황판이 마련되어 있다. 중원 고구려비(현재는 충주 고구려비)도 표시되어 있다. 충주의 옛 이름인 예성(蘂城)이란 이름을 넣어 지은 예성문화연구회가 있다. 저자가 1978년 발견한 충주 탑평리 출토 연화문 와당을 보고 만든 모임이다. 와당은 기와 지붕을 마감하는 건축재다.
와당은 왕권 및 국력 과시를 위한 건축물에 쓰였다. 처음에는 왕궁이나 왕이 출입하는 사찰, 왕릉에만 와당을 만들어 치장하다가 시간이 지나며 왕권의 대행자나 지방 관서, 왕의 친인척이나 귀족의 기와집에도 사용했다. 와당은 제작 시기의 문화를 해독해야 하는 암호이자 문화적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다. 와당은 거의 전부 출토지가 제작지이고 사용지이다. 장소적 고정성(지붕 장식용) 때문이다. 와당은 중국 서주(西周; 기원전 1046년-기원전 771년)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서주 이후 건융족의 침입으로 동주 시대가 시작되었다. 중국은 중원의 화하족이 아닌 동서남북 주변의 다른 민족을 동이, 서융, 남만, 북적으로 불렀다.
동이족은 예맥(濊貊)계, 숙신(肅愼)계. 동호(東胡)계로 나뉜다. 예맥계는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를 건국하였다. 숙신계는 흑룡강과 백두산 사이에 살던 동이족으로서 말갈, 읍루, 여진, 만주족이라 불렸으며 금나라, 청나라를 세웠다. 동호계는 말을 잘 타는 기마민족으로 선비족과 거란족, 몽골족 등으로 불렸고 북위와 요, 원 등을 건국하였다. 이 네 오랑캐 외에 북방의 흉노족이 자주 화하족을 괴롭히고 심지어 조공을 받기도 했다. 와당이 사용되는 기와집은 이동이 많은 유목민족보다 정착생활을 하는 민족에게 더 적합할 수밖에 없다. 동이족은 방위에 따라 동서남북의 4이(四夷)로 분류되고 종족에 따라서 9이(九夷) 즉 구려(九麗)로 구분되며 구려가 모여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설명도 있다.
한국은 단일민족이기보다 요서, 요동, 만주, 한반도의 동이족 예맥계가 중심이 되어 다른 동이족, 그리고 흉노족의 여러 계파와의 이합집산으로 만들어진 민족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족(漢族) 역시 유구한 세월 동안 이민족과의 끊임없는 이합집산이 이루어지면서 혈연적 교류가 있었기에 순수한 하나의 민족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다. 역사상 중국은 여러 차례 그리고 장기간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다. 이로 인해 그들 문화 속에는 이민족의 문화 흔적이 속속히 박혀 있을 수밖에 없다. 황하문명은 한족들이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형성, 발전시켜온 문명으로 인도,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와 함께 4대 문명을 이룬다.
그런데 근래 들어 황하에서 동북쪽 방향으로 멀리 떨어진 요하(遼河)와 대능하(大凌河) 주변에 황하문명 못지 않게 일찍 개화한 문명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요하문명의 주체는 동이족이다. 황하문명과 요하문명의 교류와 융합현상이 확인된 것은 와당을 통해서다. 두 문화가 활발하게 교류한 것은 늦어도 서주(西周) 시대부터다. 요하문명의 문화주체인 동이족들은 고대부터 요하 지역에 많은 국가를 건립하고 독자적인 정치, 경제, 문화 생활을 영위해왔다. 고대에는 지금과 같은 명확한 국경 개념도 없었고 민족 개념도 확연하지 않았기 때문에 요하 문명의 각 문화 유적이 어느 하나의 민족에 의해 형성되고 발전되었다고 단정하기는 곤란하다.
고구려 최초의 연하문 와당인 국내성 왕릉 출토의 회흑색 연뢰형 연화문와당들도 당시 중국 대륙에 유행하던 구름문와당의 와당면을 구획하는 구도와 연화문 와당을 결합하여 수용하면서도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고구려의 특색이 있는 새로운 연화 문양을 창안해서 사용하였다. 427년 평양 천도(遷都)를 전후해 와당과 기와의 색상이 환원염(還元炎)으로 구운 흑회색에서 산화염(酸化炎)으로 구운 적갈색으로 바뀌면서 호쾌하고 생동감 있는 기상을 더 드러내게 되었다. 산화염으로 구웠다는 의미는 가마 안에 산소가 충분한 상태로 구웠다는 의미다.
고구려는 중국의 어느 한 왕조의 와당 문화를 그대로 모방하여 수용하지 않고 언제나 당시 중국에 존재하던 모든 와당문화를 종합적으로 융합하여 수용하면서 이 외래문화에 자신의 특성을 가미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자세를 보였다. 집안 지역에 수없이 산재하는 고구려의 적성총을 보면 우하량의 유적과 유물을 남긴 문화 주체의 후예는 고구려일 것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된다. 중원의 한족들은 기본적으로 토광묘제를 답습하여 왔다. 같은 동이족 중에서 기마 민족의 성격이 남달리 강했던 동호계의 종족들은 빈번한 이동 생활 때문에 생존의 주거 건축물이라도 비교적 열악하고 사후의 묘제도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요하문명은 동이족 예맥계가 주도적인 문화주체였고 고조선의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요하 주변의 유적, 출토 유물과 가장 깊은 연관성이 있는 것도, 요하 주변 문화의 수준에 걸맞은 문명과 문화를 계속 창조하고 향유해온 것도 동이족 예맥계이다. 그들 또는 그들의 일파가 한국인의 조상으로서 고조선이라는 국가를 건립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요하 문명은 고조선인의 문명이다. 중국에서 명명한 요하문명이라는 명칭보다는 고조선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도 있다.
저자는 고구려 각저총의 벽화 중 신단수 아래에 보이는 호랑이와 곰, 장천 1호분의 벽화 중 동굴에 혼자 남아 있는 곰 등이 단군신화를 표현한 것이라는 근거로 단군신화가 고구려 때 이미 존재했던 것이라고 한 한 사학자의 견해를 탁견이라 말한다. 중국 사서의 기록들을 종합하면 늦어도 기원전 10세기 경에 고조선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은 2000년 가까이 요하문명이 발생한 요서 지역을 중심 강역으로 요동과 한반도까지 통치하는 대국으로 성장하였고 연(燕)의 침공을 받아 강역이 축소된 뒤에도 200년 가까이 요동과 만주, 한반도를 통치하는 문화적 수준이 높은 대국의 위상을 오래도록 견지한 나라였다.
고조선이 역사적 실재가 아니거나 정통성이 계승되지 않았다면 우리의 역사는 중국의 점령지였던 한군현(한사군) 시대 또는 삼한과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존재하던 시대로부터 시작되며 우리 민족의 뿌리조차 불명확해진다. 평양 모란봉의 기자(箕子) 묘를 발굴하였으나 벽돌 조각, 사기 조각 밖에 나오지 않았고 한반도 서북 지방이나 요동 지방에서 은상(殷商)의 유물이 거의 출토된 적이 없다. 고조선의 존재를 인정하는 기록이 기원전 7세기 경의 ‘관자(管子)’에 등장하는데 기원전 11세기에 발생했다는 기자 동래(東來)에 관한 기록이 전혀 등장하지 않다가 기원전 1세기 경에 이르러 한서 지리지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시기적으로 보아서 한무제의 (고)조선정벌과 군현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정책적 고려에서 만들어낸, 사실과 다른 기록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설득력 있다.
기자조선은 고조선과는 별개로 난하 유역에 존재하였던 고조선의 제후국(거수국; 渠帥國)이며 이 기자 조선을 멸하고 위만조선이 건국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원래 동이족이 세운 은상(殷商)이 망한 뒤에 그 유민들이 모국인 조선으로 건너온 사실을 과장하여 기재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저자는 기자가 고조선의 제후로 책봉되었다는 중국 사서의 기재 내용은 허구라고 확신한다고 말한다.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을 조작하여 한일합방의 역사적 명분으로 삼으려 한 것처럼 한나라는 기자조선이라는 허구의 역사를 만들어 단군조선 침략과 한군현 설치의 명분으로 삼으려 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우리의 역사를 큰 눈으로 훑어보면 우리 역사가 이민족에 의하여 완전히 단절된 기간은 실제로는 몇십년에 지나지 않는다. 고조선이 멸망하여 한군현이 설치되었으나 낙랑군을 제외하고는 단기간에 소멸하였고 낙랑군이 실질적으로 관장한 지역은 고조선의 광활한 강역(疆域)에 비하면 그리 넓지 않았다. 고조선이 멸망한 후에 우리 민족은 바로 고조선의 북쪽 고토에서는 부여, 고구려 등이, 남쪽에서는 신라, 백제 등이 고조선의 역사를 계승하였다. 35년간의 일제 식민치하에서도 우리 만족은 상해임시정부를 설립하여 역사의 정통성을 계승하려고 노력했다. 고구려 말로 구토의 회복을 다물(多勿)이라 한다. 구토는 고조선 땅을 의미한다. 다물은 고구려의 건국 이념 중 하나다.
한군현을 멸하고 고조선의 고토를 회복해낸 임금이 미천왕이다. 저자는 고구려가 중원 진출이 여의치 않자 남진 정책을 실천하기 위하여 평양 천도를 했다는 견해는 고구려의 국가적 염원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고 말한다. 저자는 진시황(秦始皇)과 아들 진이세(秦二世)가 진황도까지 순행(巡行)한 것은 통일위업을 과시하고 불로장생의 선약(仙藥)을 얻기 위한 것이지만 하필 진황도를 마지막 목표 지점으로 삼은 것은 그곳이 바로 진이 통일한 영역의 동쪽 끝부분이자 고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의 고토이거나 그 인근이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말한다. 고조선이 별 볼 일 없는 소국이었다면 황제가 직접 순행까지 하며 공략을 구상, 지휘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의미다.
중원을 통일한 진(秦)이나 한(漢)이 문화적, 정치적으로 패권을 다투던 고조선의 옛 수도 왕검성 인근에 다녀가는 것은 야심이 넘치는 두 황제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거동이었을 것이다. 고조선의 수도였으며 영토의 동쪽 끝, 그리고 그들이 구경하지 못한 호쾌한 바다의 풍광을 감상하면서 조선의 불로장생의 묘약을 찾는 한편 더 넓은 천하통일을 구상하였을 것이다. 저자는 평양이 중국 지역이라는 주장을 전제로 고구려가 427년 천도하여 240년 또는 160년간 수도로 사용한 것이라면 요서나 요양에서 당연히 수도에 걸맞은 왕궁 유적과 그곳에 사용된 적지 않은 분량의 와당이 출토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다만 최근 요양 인근에서 벽화고분이 다수 발견되었는데 중국 학자들은 중국계 유적으로 보나 한국 학자들은 고구려의 고분일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하고 있으므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평양의 안학궁(安鶴宮) 유적지에서 나온 적지 않은 연화문 수막새와 암막새는 고구려 초기에 제작된 것이 아니라 고려 초기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한다. 와당문화는 중국에서 출현, 발전하여 한국에 전파되었으나 고구려에 이르러 와당문화는 고구려적 특성을 지니며 창의적으로 발전하여 몇 차례에 걸쳐 중국에 역수출된 것으로 본다. 고구려가 중원 진출이 여의치 않자 남진 정책을 실천하기 위하여 평양 천도를 했다는 견해는 고구려의 국가적 염원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평양 천도를 단행한 배경은 어디에 있을까?
주류 사학계는 고구려가 졸본에서 건국하여 유리왕 때인 서기 3년에 국내성으로 천도하였고 장수왕 때인 427년에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천도하였다는 것이 통설이다. 427년 천도하였다는 지역에 관하여 비주류 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갈린다. 중국 북경 북쪽의 조선하 유역에 있던 현재의 요서 평주 지역이라는 주장,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라는 주장, 현재의 요령성 요양현이라는 주장 등이다. 이런 요서나 요양에서 대동강 평양으로 재천도한 시기에 관하여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