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지질 글을 쓰고 며칠이 지났다. 재미 있는 글이라는 피드백을 많이 받았다. 이 말은 전공자는 물론 비전공자에게서도 받은 바다. 지구과학 전문가인 이 교수님은 매우 흥미로운 글이란 말씀을 해주시며 많은 사람에게 지구생태환경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해주셨다. 덧붙여 그 분은 불교나 가톨릭과 달리 기독교는 지구생태환경이란 과학에 접근할 여유가 없는 것 같다는 아쉬움도 표하셨다.(내게 부탁하신 것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좋은 글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글을 쓰는 데 지질자원연구원이 도움이 되고 있다. 물론 주()되게 도움이 되는 원천(原泉)은 책과 각 지질 사이트 게시 글, 그리고 논문 등이다. 내가 지난 해, 올해 읽고 도움을 받은 지구과학 책은 여럿이다.


1) 새로운 지구사

2) 빙하 곁에 머물기

3) 과학의 첫 문장

4) 블루 머신

5) 지구에 관한 작은 책

6) 지구 물리학

7) 지구의 삶과 죽음

8.) 극지과학자가 들려주는 판구조론 이야기

9) 외우지 않아도 괜찮아 지구과학

10) 탄소 해양 기후

11) 비커밍 어스

12) 지구와 인류의 미래

13) 지질학(얀 잘라시에비치)

14) 지구 이야기 등이다.


물론 아직 읽지 못한 책이 많다. 어떤 책이 나올지도 모르지만 읽을 책을 생각하면 마음이 설렌다.


지질자원연구원에는 지난 해 11월 처음 질문을 한 이래 올 417일까지 모두 일곱 차례의 질문을 했다. 오늘 마지막인 일곱 번째로 문의한 내용에 대한 답이 올랐다. 다른 질문들에 비해 답이 제시되는 데 두 배 정도의 시간이 걸린 셈이고 내 질문들에 비해서도 늦은 편이었다. 내 질문은 피터 워드와 도널드 브라운 리의 지구의 삶과 죽음을 읽고 드린 것이었다.


내 질문에 대해 지질자원연구원측에서는 독서를 하시면서 지구의 다양한 현상을 고민하시는 듯합니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주셨습니다.”란 말과 함께 질문자님의 질문 덕택에 물이 존재하는 지구의 신비로움을 한 번 더 느끼게 되었습니다.”란 소회를 덧붙였다. 특기할 것이라 해야 할지 모르지만 답의 말미에 이 외에도 궁금하신 부분 있으시면 언제든지 질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란 말이 붙었다.


질문자들과 연구원측 외에는 읽을 수 없는 비밀 글이 아닌 일반 글만을 보았기에 대표성이 있는지 장담할 수 없지만 그 글들만 보아도 언제든지 질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란 말은 찾기 어렵다. 이유가 무엇일까? 정리하면


1) “이 외에도 궁금하신 부분 있으시면 언제든지 질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 “앞으로도 더 많은 관심과 궁금증이 이어지시길 바랍니다.”

3) “새로운 시각을 일깨워주신 질문자님께 감사드리며 궁금하신 부분 있으시면 언제든 편하게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4) “궁금하신 부분 있으시면 언제든 또 말씀 주세요!” 등의 말을 나는 특별히 기억하고 싶다. 내 질문은 책 내용을 읽고 고민하며 캐낸 단편적이지 않은 질문이고 흥미로운 면도 포함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질해설사가 되기 위해 2019년 북한산 생태탐방원에서 교육을 받을 때부터 현무암, 화강암 등의 개별 암석보다 자연의 구성 원리나 감추어진 면을 알고자 애썼다. 연천 한탄강 지질공원 해설사이지만 연천의 지질 이상으로 지질시대에 관심을 많이 기울였다.(한탄강은 연천만의 강이 아니지만 철원, 포천, 연천이 함께 관계해 해설사들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자기 지역의 지질공원에 베이스를 두고 해설을 한다.)


나는 Story behind Scenery란 말을 좋아한다. 진기하거나 장대한 경관에 감탄하는 것 이상으로 그 경관이 왜 그런 형태가 되었는지(를 해명하는 것이)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이런 시각으로 대상을 대할 필요가 있다.


내가 쓴 지구 형성 이야기(3), 미생물과 암석의 공진화(4), 판구조론(5) 등은 지역 지질공원을 해설하는 데 특별히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알면 더욱 풍성하고 입체적으로 해설할 수 있다. 나의 직업의 이름은 지질공원해설사가 공식이다. 그러나 나는 지질해설사란 이름을 좋아한다. 지질공원해설사가 자기 영역에 국한한 해설사라면 지질해설사는 지질시대 및 지질 이론, 암석의 순환 등에 두루 바탕을 두고 해설을 하는 해설사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속한 지역이나 영역을 벗어나 특별한 무엇을 할 수 있지는 않다. 지질해설사란 이름은 비공식 이름이고 지향성에 초점을 둔 이름이다.


아카넷에서 나온 고전의 유혹 2‘(2015년 발간)에 참고가 될 만한 구절이 나온다. 앙리 베르크손의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관한 시론을 해설한 철학자 최화의 글의 일부분이다.


베르크손은 자료 없이 혼자서 사색하는 사변적인 철학자가 아니라 사실에 바탕을 두고 그것이 그리는 길, 즉 사실의 선(ligne de faits)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철학자였다. 그러기에 그가 어떤 문제를 다룰 때에는 자기 스스로 어디로 갈지 모르는 채 탐구를 진행해 나간다고 그 자신이 여러 번 밝힌 바 있고,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물질과 기억에서 몇 쪽에 지나지 않는 실어증에 관한 부분을 쓰기 위해 5년간 실어증에 관한 책을 읽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그가 유독 그의 가장 중심적인 직관인 지속(持續)을 발견할 때에는 분명히 그런 길을 걸은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물론 궁극적인 지속 개념에 도달하기까지 구체적으로 어떤 경로를 거쳤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분명히 방금 말한 그의 일반적 방법과는 다른 경로를 통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일종의 발견이었다. 거대한 동굴을 감추고 있는 작은 틈새처럼 처음에는 작은 의심에서 출발했으나 그것을 점점 파고들어가자 철학사 전체가 연결되어 있는 거대한 통로임이 드러난 것이다.”(197, 198페이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이다. 다소 길게 인용한 것은 베르크손이 걸은 두 가지 길(길고 집중적인 독서, 명확하지 않지만 그것과 다른 길)은 물론 전체가 연결되어 있는 거대한 통로 등의 내용이 인상적이어서 그런 것이다.


연과학(공부)에 얼마나 적용될지 모르나 텍스트를 공부하는 것과 화두(話頭)를 든 수행자가 하듯 하는 생각(을 키워가는 것)이 모두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철학자 전대호가 철학은 뿔이다에서 한 작업이 생각난다. 그는 내용 없는 사상은 공허하고,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라는 칸트의 말을 <데이터와 무관하게 하는 생각은 공허하고, 계산하지 않고 도출하는 데이터는 맹목적이>라는 말로 풀이했다.


풍석 서유구 선생은 임진강을 감싸는 고랑포의 양안(兩岸) 암벽을 새가 두 날개를 편 것 같다고 표현했다. 이를 보며 나는 이론과 실사(實査)라는 말을 생각한다. 당연하지만 그것이 기본이다. 물론 내가 세 차례 연이어 거대 이론 이야기를 했다고 실사를 잊은 것은 아니다. 실사는 아직 필요하지 않은 것뿐이다.


이론, 실사 두 과정에 모두 책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다시 한 번 읊조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