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주(灘舟)란 두보의 시 ‘낙일(落日)‘에 나오는 여울에 정박한 배를 뜻한다. 여울에 기대어 둔 배에서는 저녁 밥을 짓는다란 의미의 초탄의탄주(樵爨倚灘舟)가 완성구다. ’곡강(曲江)‘에 나오는 한 조각 꽃잎이 떨어져도 봄빛은 줄어드는 것을(一片花飛減却春; 일편화비감각춘)이란 구절 만큼 멋진 구절이다.
일편화비감각춘은 조용미 시인이 ’탐매행(探梅行)‘의 서두에 인용한 구절이기도 하다. 초탄의탄주는 한잔 부어 마시니 온갖 시름이 흩어지네란 의미의 일작산천수(一酌散千愁)와 어울린다. 두보는 주당(酒黨)이었다. 그런데 지난 해 말 나온 ’취하여 텅 빈 산에 누우니‘의 두 저자는 술과 인생을 노래했던 이름난 시인들의 주량도 알고 보면 서너 잔이란 말을 한다. 이백(李白)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리라.
재작년인가 재인폭포 해설시 이백의 '망여산폭포'를 외웠더니 방문객이 우리나라가 이래서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하는 것이란 말을 했다. 이에 나는 서양 문학도 즐깁니다란 말을 했었다. 문학의 문외한(門外漢)인 한 해설사가 외운 시가 어떻게 문학에 영향을 미치겠는가? 더구나 망여산폭포는 재인폭포의 원 이름(자연폭; 紫煙瀑)과 관련이 있어서 외운 시였다.
지난 해 한강 시인의 노벨상 수상 소식을 접하며 그 방문객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